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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5. LA 수도사법문



5. LA 수도사법문


에 오늘 법회는 이 조촐하고 아늑한 법회입니다.

저는 이 로스앤젤레스가 가을이 없는 줄 알았더니만 이번에 와서 보니까 완연한 가을을 체감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이 봄에는 아무래도 마음이 좀 들뜨고 여름에는 또 우리 의식주를 위해서 활동하다 보면은 그래저래 자기를 잊어버리고 지내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가을 이 낙엽이 지고 하는 이 ?조락의 가을 이런때 만큼은 우리가 인제 자기를 성찰하는 그런 계기를 꼭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수도사 이 법회에 들어와서 느끼는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이사장님으로 부터서 아주 그 자비스럽고 그 화기애애한 그런 것을 제가 감득하고 있습니다.


또 주지스님도 정통적으로 동국대학을 졸업하신분이고 또 그 법사님들도 다 대학교 교수를 충분히 하실수 있는 또 지내신 그런 아주 석학들이십니다.

그래서 이렇게 조촐한 가운데도 이렇게 분위기가 수준도 높고 이러한 감격적인 그런 신앙심이 넘쳐 흐르는 그런 것을 저는 느껴보지를 못했습니다.

한국서도 여기저기 다니면서 서투른 법문도 하고 미국도 동부 서부 다니기도 했습니다마는 제가 느끼기에 처음으로 느끼는 그런 아늑한 고향같은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감사하고 또 오늘 이 불자님들에 대해서 찬탄의 합장을 드립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간에 길을 가고 있습니다.

과거로부터서 또 미래에 영겁동안까지 우리는 길을 갑니다.

우리 길이 우리 나그네 길이 어디서 시작이 됐든가 이런것도 모르면서 또는 우리 나그네 길이 어디가 종착점인가 이것도 모르면서 길을 지금 바삐바삐 서둘러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길이 과연 어느 길인가 옳은 길인가 말입니다.

공자의 길인가 또는 예수의 길인가 또는 과학도의 길인가 이런것을 우리는 헤아릴만한 그런 여유가 없이 불안스럽게 지내고 있습니다.

길을 가는데 길을 모를 때는 불안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은 간단히 말씀드리면은 우리 불안의식을 해소해서 안락스러한 안락스러운 그런 정토 행복의 피안으로 이끄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과거 소박한때 소박한 시대가 되면은 간단한 가르침으로도 우리가 그때 그때 만족을 채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라 하는 이러한 역사적인 위기상황 과학도 최고도로 발달돼있고 종교도 각종 종교가 서로 각축하고 다투고 있는 이런 다종교사회.

이런때는 과거와 같은 소박한 가르침으로 해서는 우리 마음이 불안의식을 해소를 시킬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는 같은 부처님 가르침도 꼭 대승적인 가르침이 돼야 그래야 개인적인 불안도 해소가 되고 또는 가족적인 그런 화해라든가 또는 민족적인 문제라든가 또는 국제간이나 그런 어려운 굵직한 문제를 대승적인 가르침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데 더러는 대승적인 가르침을 잘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말로는 대승하면서도 사실 행동이라든가 이해하는 수준은 대승이 못되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혹 간에는 대승이라 하면은 조금도 구애없이 자기 멋대로 방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대승이다. 이런분도 있습니다. 무슨 계율적인 면을 두고 본다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고 계율에 구속되고 하는 것은 소승인것이지 대승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무애행이라. 거리낌이 없는 그런 행동을 취한다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부처님 계율을 보면은 소승적 경전보다도 대승경전이 훨썩 더 조목도 많고 또는 준엄하게 우리한테 그 당위적인 행위를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사 법망경 같은 계율은 이것은 대승경전 아닙니까.


그런데 보면은 우리 행동 규범이 굉장히 엄격합니다. 따라서 대승이라 하는것은 그러한 우리가 방만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법에 여법히 법대로 따르는 그런 행동을 가르켜서 말씀을 합니다. 부처님 법은 어떠한 법인가 다 아시는 바와같이 이것은 우주의 도리입니다. 우주의 질서입니다. 또한 동시에 부처님 법은 어려운 말로 하면은 입불이법문이라. 둘이 아닌 법문입니다. 나와 남도 원래 둘이 아니고 자연과 인간도 둘도 아니고 하늘과 땅도 둘도 아니고 모두 다 천지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삼보를 믿고 불자가 됐습니다 마는 우리 신앙 대상의 불타관에 대해서 명확한 우리가 그런 정의가 잘 내려지지 못하면은 우리 행동도 거기에 따라서 흐트러지기가 쉽습니다. 부처님이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말입니다. 소승적으로 말 할 때는 아 석가모니 부처님은 부처님이 아닌가. 또는 조금 더 나아가서는 제법공이라 만법이 공한 도리가 부처님이 아닌가 이렇게도 말씀도 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가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꼭 대승적으로 대승적인 가르침이 돼야 부처님께서 불출세일대사인연이라. 부처님께서 중생 제도를 하시기 위해서 태어나신 그 본위가 바로 대승적이기 때문에 대승적으로 불타관을 확립을 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인지라. 우리를 위시해서 일체 생명의 그 본고향 일체생명의 본질적인 대 생명 바로 ~ 생명 이것이 바로 참다운 법신 부처님입니다. 바꾸어서 말씀드리면 비로자나불이라. 대일여래라 말입니다. 이런것이 모두가 다 참다운 부처님 우주를 하나로 보는 무량무변한 우주를 하나로 보는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그러한 부처님이 법신 부처님 이른바 대승부처님입니다. 따라서 거기다가 기준을 두고 그 법칙에 입각해서 생각해야 그래야 우리가 대승이 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자기의 그런 복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남을 해꽂이 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인간자체가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가사 무슨 단체를 우리가 조직한다 하더라도 내 단체를 위해서 자기가 소속된 단체를 위해서 다른 단체를 함부로 취급할 수가 없습니다. 인간자체가 둘이 아니거니 민족도 내 민족 또는 저 민족 말입니다. 이와같이 우리가 구분을 두어서 자기 민족의 이익만 위해서 다른 민족을 함부로 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자연과 인간도 마찬가집니다. 천지 우주를 하나의 유기적인 구분이 안 되는 그러한 유기적인 생명으로 본다고 하면은 물도 부처요 사실은 땅도 부처요. 이 공기도 부처요 다 부처입니다. 따라서 물도 함부로 하면은 생명이 유기적으로 하나로 연결됐기 때문에 물을 함부로 하면은 우리가 물에 대해서도 보복을 받습니다. 땅도 마찬가집니다.


땅을 오염시키면은 농작물을 심어도 잘 안될 뿐만 아니라 농작물도 오염이 됩니다. 그러면 그걸 먹는 우리가 또 그마만치 해를 받습니다. 공기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다 아시는 바와같이 오존층 파괴라 말입니다. 우리가 화석연료를 많이 태워서 그 그럼으로 해서 오존층이 파괴된다고 생각할때는 자외선이 너무나 강렬하게 쬐서 우리 인체에 해롭지 않습니까 이래저래 이 천지우주가 하나의 연결된 생명인데 유기체인데 어느것이나 우리 대상적인 것을 함부로 한다고 생각할 때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모두가 다 우리가 함부로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함부로 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생명을 함부로 하는 까닭이 됩니다. 즉 그러기 때문에 앞서 말씀드린 입불이법문이라.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다.


 하나의 원융무이한 생명체다. 이러한 불타관을 갖는다고 생각할때는 우리 행동이 자연적으로 제약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뭐 해라 뭐 하지말라 이것은 우리 인간들이 바른 철학 바른 가치관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세세한 계율을 말씀하신것이지 우리가 굳건히 바른 불타관 바른 신앙관을 갖는다고 생각할때는 그때는 그 철학적인 그 가치관 밑에서 우리 행동이 연혁이 되기 때문에 우리 행동 모두모두가 몸으로도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그러한 바른 행동 자기말로도 다른 사람을 속상하게 하지 않는 그런 부드러운 말 우리 생각은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천지우주가 하나의 생명인지라. 부처님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따라서 우리 한 말로 말씀드리면은 우주란 것은 부처님뿐입니다.


부처님 뿐인것을 왜 우리 중생은 그것을 알지를 못하는 것인가. 이것도 우리 불자님들이 다 알으시는 문제 아닙니까. 번뇌에 가리어서 알지를 못합니다. 번뇌는 왜 가리운 것인가. 근본번뇌라. 욕심을 좀 내고 또는 진심을 내고 하는 그러한 번뇌도 근본번뇌에 속에 들어갑니다 마는 보다 기본적인 ~근본무명 근본무지가 무엇인가 부처님 가르침은 그렁저렁 ~ 믿는 가르침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알고 닦는 가르침입니다. 길을 가되 길목을 분명히 알고 닦는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알고 닦는다는 것은 방금까지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선 우리 신앙 대상인 부처님이 어떠한 분인가 부처가 무엇인가 이 부처에 대해서 소승적인 부처 대승적인 부처 이러한 구분을 확실히 모른다고 생각할때는 우리 행동도 따라서 자연적으로 거기에 제약을 받습니다. 우리 불자님들 부처님은 어디에 있고 어디에 없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스님네가 중국 당나라때 조주스님한테 여아시불입고 부처가 무엇인가 그렇게 물으니까 조주스님 대답이 여러 가지로 대답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개도 불성이 있읍니까 이렇게 물은 때 있어서는 조주스님이 무라 없다 말입니다. 부처님 경전에 보면은 분명히 일체중생개유불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왜 조주스님은 없다고 했는가 불성이 어디가 있겠습니까 불성이 우리 뇌에가 있습니까 가슴에가 있습니까 몸에가 있습니까 성자의 바른지혜 대승적인 가르침에 본다고 생각할때는 불성은 어디가 있고 없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천지우주가 바로 불성입니다. 그러기에 ~ 스님 이 분도 당나라분입니다. 이분도 굉장히 총명하고 자기 신명을 걸고서 수도 한 분입니다.


이 분 한테 여아시불입고 부처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일과명주라. 한 덩이의 맑은 구슬이라 말입니다. 한 덩이의 밝은 구슬이라 말입니다.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일과명주라. 부처를 물으니까 한 덩이의 밝은 구슬이라 말입니다. 부처와 우주라는 그 말은 그 말만 다르지 뜻은 똑같은 것입니다. 우주가 바로 부처요 부처가 바로 우주입니다. 그 부처란것은 무슨 물질인가 우리 사람도 이 육식이 있으니까 물질이거니 부처도 우리 보다도 훨썩 더 시초의 존재기 때문에 물질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 될 수도 있습니다 마는 사실은 물질이라는 것은 본래로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까 대승 말씀을 드렸읍니다마는 물질이 본래 없다는 제법 공 도리를 모르면은 사실은 대승은 될 수가 없습니다. 어려우시더라도 이런 것은 분명히 잘 느끼시기 바랍니다. 제법이 공이라. 내 몸도 공이요 일체존재가 바로 공이다. 삼천대천세계가 모두가 다 텅텅 비어 있다 이런 소식을 모르면은 대승이 못됩니다. 아무리 대승 대승하지마는 아 공이 아니니까 공이 아니지 않는가 몸뚱이도 분명히 집어 꼬집으면 아프기도 하고 또 뭘 안 먹으면 배고프기도 하고 다이아몬드도 금도 분명히 있는데 왜 물질이 아니라고 할 것인가. 연기법이니까 물질이 아닌 것입니다.


 좀 어려우시더라도 이 대승적인 우리가 문에 들기 위해서는 꼭 공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공 도리를 그렇지 못하면은 대승이 못 됩니다. 공 도리를 잘 모르면은 그때는 필연적으로 자기 몸뚱이 노예가 됩니다. 인연법이기 때문에 연기법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법이기 때문에 공입니다. 고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건부로 잠시간 상을 낸 것입니다. 가상을 낸 것입니다. 우리 몸뚱이는 그렇다 하더라도 저 원소라든가 산소나 수소나 그런 원소라든가 또는 양자 또는 중성자 하는 그런 원자라든가 이런것은 물질이 아닌가 물리학자가 그렇게 정밀하게 증명했으니 이것은 물질이 아닌가 물리학자가 증명한것도 역시 물리학자가 성자가 아니지 않습니까. 범부 중생이 실험끝에 어떤 상황 따라서 마이너스 에너지를 낼 때 전자 또는 플러스 에너지를 낼 때 양자 그러는 것이지. 본래로 그것이 양자나 전자나 고유한 것이 있지가 않다 말입니다. 전자도 아 측정할라고 생각할때는 어느 순간도 같은 전자일 수가 없습니다. 변동해서 마지 않습니다. 내 몸뚱이든 다이다몬드는 아시는 바와같이 탄소의 결합체 아닙니까. 탄소의 결합도에 따라서 결정되는 강도에 따라서 결정이 긴밀하면 다이아몬드가 되는 것이고 탄소의 긴밀이 긴밀이 탄소가 결합이 못 되어 가지고서 엉성하면 그때는 그것이 아 숯이나 그런거라 말입니다.


근본 탄소는 하나인데 그 탄소는 무엇인가 이런 것은 양자 전자가 적당히 또 결합됐다 말입니다. 양자 전자는 또 무엇인가 현대 정밀 물리학도 양자나 전자나 가장 미세한 소립자는 측정을 못합니다. 운동을 측정할라고 하면은 위치를 측정 못하고 말입니다.

위치를 측정할라고 하면 그때는 운동을 측정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와같이 상대적으로만 알 수 있는 것이지. 일체 물질이 모든 존재의 근본 알갱이인 양성자 중성자 전자 이런것을 현대 물리학도 측정을 못합니다. 그러기에 불확정성 원리라 말입니다. 뭐 알수가 없다 말입니다. 물질이 저 끝에 가서는 결국은 알 수가 없는 자리에 들어가 버립니다. 물질이 아닌 에너지가 진동여하에 따라서 음파도 되고 광파도 되는 것입니다. 특히 미국에 계시는 우리 불자님들은 학문적으로 수준이 높으신 어른들 아닙니까. 제가 말씀 안 드려도 이런 도리를 충분히 알으시는 어른들입니다. 현대 물리학적으로 보더라도 물질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하나의 조건부인 것입니다.


 조건부의 상대성 원리에서 우리가 물질을 긍정 하는 것이지. 상대를 떠나버리면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2천 5백년 이상전에 부처님께서 그렇게도 현대 물리학에서도 모르는 그런 말씀을 다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과학적입니다. 물질이 ~ 모든 조직을 구조적으로 가장 정밀하게 받은 가르침이 부처님 가르침이기 때문에 부처님 가르침은 무엇보다도 더 철저한 과학적입니다. 또는 인생과 우주의 본질은 무엇인가. 이런 문제도 부처님 가르침 떠나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현대 실존 철학도 헤겔 철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또는 우리 인생의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행복으로 가는 행복의 가장 확실한 길이 무엇인가 이것도 부처님 가르침 떠나서는 없습니다. 우리는 불교를 믿는다는 그것만으로 이미 과학도인 동시에 철학도요 또는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같이 공 소식을 공 소식은 바로 반야의 소식입니다.


 반야를 떠나서 인생고를 못 떠납니다. 반야심경에도 분명히 허두에 있는 가르침 아니겠습니까. 조견오온개공이라. 조견오온개공하니 도일체고액이라. 우리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오온이라. 오온법이라 하는 것은 배워서 아시는 바와같이 우리 몸과 맘 물질과 정신이 오온입니다. 물질과 정신이 본래로 비어있다는것을 비추어 투철하게 비추어 보지 못하면은 인생고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꾸어서 말씀드리면은 내 몸뚱이가 내 것이다. 내 몸뚱이 이것이 나다. 이렇게 생각할때는 인생고는 영원히 못 떠납니다. 사람들은 내 몸뚱이 이대로 아끼고 남이야 죽든 말든 내 몸뚱이 이대로 존재한다고 긍정하고서 몸뚱이의 노예가 되고서 행복을 구할라고 생각하고 인생고를 떠날라고 생각합니다마는 그래서는 ~니다. 도저히 못 떠납니다.


 왜 못 떠나는 것인가. 내 몸뚱이가 본래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말입니다. 늙기 싫다고 해서 우리가 안 ?느낄수 있습니까. 아프기 싫다고 그래서 아프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고 죽기 싫어도 때가 되면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조건은 그렁저렁 잠정적으로 우리한테 얻어진다 하더라도 생로병사라 하는 근본적인 인생고는 우리가 절대로 못 떠납니다. 인생의 한계상황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근원적인 인생고 죽음과 병과 늙음과 이러한 무상의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반야심경에 있는 바와같이 또는 불교 경전에 어디에도 있는 바와같이 대승사상 반야 사상 제법이 공이다 하는 이러한 도리를 모르면은 이것은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인생고를 못 떠나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더러 제법공도리 반야의 도리를 몰라도 그렁저렁 세간적으로 도덕을 좀 지키고 하면은 불교가 되겠지. 절에 와서 복을 빌면은 복이 오겠지. 이렇게 생각합니다마는 사실은 그 정도의 가르침은 불교 아니더라도 있습니다.


 일반 윤리나 도덕이나 또는 세간적인 복 같은것은 이것은 복지사회도 할 수가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기독교나 또는 유교도 역시 윤리는 있습니다. 따라서 그런 윤리적인 계율면에서는 다른 종교하고 다 비슷비슷합니다. 무엇이 다른가 하면은 부처님 가르침은 반야사상 반야 바라밀 우주의 도리에 입각해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가르침을 안다고 생각할때는 상이 있는 행동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남한테 베푼다 하더라도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 물질은 물질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우리가 보시를 할 수가 없다 말입니다. 그러나 반야의 도리를 모른다고 생각할때는 꼭 상을 냅니다. ~ 있으니까 말입니다. 우리 몸뚱이 또 역시 이 연기법의 도리에 따라서 제가 오다가 잠을 조금도 못 붙이고 어제 밤에도 그렇지만 ~ 죄송합니다. 부처님 법은 바로 연기법입니다. 부처님 법은 연기법 속에 다 들어갑니다. 연기법이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본다고 생각할때는 그때는 항상이 없습니다. 고유한 것이 없습니다. 무상입니다.


 어느 순간도 같은 것이 없다고 생각할때는 그것은 공입니다. 그것은 무상이고 공인것을 나라고 고집할 수가 없지 않습니가. 무상이고 공이기 때문에 그때는 무아라 말입니다. 내 몸뚱이 어제 몸뚱이 오늘 몸뚱이 같은 몸뚱이가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잘못봐서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세포가 순간순간 찰라찰라 신진대사해서 같은 몸뚱이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연속되는 것이니까 연속되는 상을 가리켜서 나라고 하고 너라고 하고 우리가 그러는 것입니다. 그러는 것이지 우리가 전자 현미경 놓고 본다고 생각할때는 어느 순간도 내 몸뚱이 세포가 같지가 않다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무상은 그렇게 정밀한 것입니다. 항상이 절대로 없는 덧이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기의 도리 우리가 불상도 조성하고 탑을 조성해서 사리가 없는 경우는 요새 뭐 성철스님 사리를 가지고서 시야비야 말씀을 많이 합니다 마는 사리가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하는고 하면은 법신사리라. 부처님 법을 사리로 해서 법신사리계 그 게송을 써 가지고서 탑에도 넣고 불상에도 넣습니다. 그 내용은 무엇이고 하면은 제법종연생이요 ~라.


 모든 법이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또한 인연 따라서 멸한다 말입니다. 아사대승주 우리 스승인 부처님께서 위아여시설이라. 이와같이 항시 말씀을 했도다 이 인연법 이것이 바로 부처님 법을 대변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전신사리를 대변한 것입니다. 천지우주가 이 법대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연법으로 본다고 생각할때 아까 말씀드린 바와같이 우리 몸이 이것이 내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선 이렇게 간단히 볼 수 있습니다. 과거 전생에 이 몸이 있지가 않았습니다. 과거 전생에 업장 따라서 금생에 잠시간 업장대로 이 몸뚱이 받았습니다. 업의 바람이 자고 이 몸이 쓰러질 때  이 몸뚱이가 어디가 남는 것인가. 따라서 이 몸뚱이는 과거에도 없었고 미래에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금생에 몇 십년 동안 있지 않는가 몇 십년 동안 순간 찰라도 머물지 않다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없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을 것이고 현재에도 순간 찰라도 머물지 않다 말입니다. 금강경 보신 분들은 알으시겠지요. 과거심 불가득이요 또는 미래심 불가득이요 따라서 현재심 불가득이요 말입니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고 미래는 오지 않고 현재는 순간 순간도 머물러 있지 않고서 움직이기 때문에 삼세가 공이라 말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것도 역시 시간 우리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때 물질이 있다고 생각할 때 과거가 있고 미래가 있는 것이지. 물질이 본래적으로 공이다. 제법이 공이다. 색즉공이다. 색은 바로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바로 공이다. 이렇게 생각할때는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해야 반야의 지혜입니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억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의 고난을 없애기 위해서 어거지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이것은 우주의 도리가 이것은 사실대로 그러는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는 지금 차근차근 그런 도리를 지금 증명하고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 이것이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말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도 역시 그러한 모두가 조건부다 이것도 역시 그런 부처님법의 하나의 증명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현대 그 정밀 물리학이 모르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그러면은 우주가 텅텅 비어 버리는 물질이 아니 그 공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릅니다. 정말로 다 현대 물리학자가 말한바와같이 모두가 에너지로 가버린다. 그 에너지 그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할때는 너무나 우리가 허무해집니다. 우리가 에너지 뿐인가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마는 부처님 가르침으로 해서 그 에너지의 실체를 안다고 생각할때는 거기에서 참다운 신심이 나옵니다. 대승적인 불굴의 신심이 나옵니다.


현대물리학자는 모든 것은 다 비어서 이 물질은 본래로 시간 공간성이 없어서 다 비어 버리는데 그것이 다 에너지뿐이다. 이렇게만 가까스로 압니다. 그 에너지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것은 모릅니다. ~ 사실은 여러 가지로 말은 합니다마는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은 텅텅 비어버리고 비지않은 그 자리가 바로 진여불성자리입니다. 진여불성 그 자리는 무한공덕을 갖춘 자리입니다. 자비도 또는 행복도 지혜도 능력도 한도끝도 없이 갖춘 자리입니다. 제 아무리 웅변가라도 몇천년을 통해도 그 진여불성자리 우리 마음의 본체자리에 갖추고 있는 공덕은 다 말할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라한도를 성취한 무수한 그런 도인들이 부처님을 찬탄하는 공덕 진여불성자리에 갖추고 있는 만공덕을 몇억년 헤아려도 어떻게 그 공덕이 한도끝도없이 많던가 능히 셀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본마음 우리의 본심 또는 우주의 근본생명자리 이 자리 공덕은 이렇게 한도끝도 없는 무량무변의 공덕자리입니다. 공덕심입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물질이 아니지 않습니까. 비록 우리 마음이 금생에 이 몸뚱이의 노예가 되어서 조금 더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아무리 애써 본다 하더라도 금생에 자기 인연이 끝나면은 몸뚱이는 흔적도 없는 것 아닙니까. 저는 항시 말씀을 드립니다마는 이 배신자가운데 가장 무서운 지독한 배신자가 우리 몸뚱이입니다. 금생 내내 애쓰고 먹여보고 살찌어보고 해도 갈때는 말없이 갑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 염사라. 생각염자 죽을사자 말입니다. 죽음을 한번 생각해봐라. 죽음을 말입니다.


 죽은뒤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말입니다. 속가 말로해도 공수래 공수거 아닙니까. 부처님 가르침은 모두가 다 우주의 도리 우주의 진여법성도리에 그대로 입각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도리에 따라야지. 그런도리에 따르지 않고서 자기 멋대로 산다고 생각할때는 틀림없이 그때는 우주의 법칙에 따른 심판을 받습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닌데 자기만 생각한다고 할때는 그때는 얼마못가서 그때는 그 사람은 파멸되고 맙니다. 국가와 국가도 우리는 저 로마시대라든가 그리스라든가 경험을 다 했습니다. 역사책을 다 보면 알듯이 제 아무리 나라가 번성되고 스파르타나 또는 그리스나 모두가 다 싸우고 이기고 모두다 했지마는 그러고 지금 어디가면 흔적이 있습니까. 자기 민족만 생각하고 다른 민족을 함부로 했다 말입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데 어떻게 자기 민족만 생각하고 다른민족은 ~ 함부로 침범할 수가 있습니까. 일본을 보고 또 이북도 보십시요. 또 소비에트를 보십시요. 소비에트가 부처님 사상같은 중도실상이라. 진여불성의 도리에 입각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애를 많이 쓰고 숙청도 많이 하고서 단 74년만에 붕괴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도리가 우주의 도리에 입각하지 않았다 말입니다.


 그 유물주의라 말입니다. 인간의 정신도 이것은 육체의 하나의 반영에 불과하다 이렇게 본다 말입니다. 이와같이 우주의 도리에 따르지 못할때는 그때는 필연적으로 붕괴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그 대안인 대안의로 하고 있는 지금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자본주의도 절제를 안 하면은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한 사람 되어서 이것도 역시 필연적으로 노사분규가 안 될 수가 없습니다. 계급투쟁이 안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결국은 ~ 파괴입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거니 어떻게 나만 부자가 되고 다른 사람은 굶든가 말든가 모를 수가 있겠습니까. 어떤 도리나 마찬가집니다. 하나의 가정을 두고 본다하더라도 부모님들이 자식을 무시하고 자식을 자기 소유물 같이 알고 말입니다. 자기들만 권위의식으로 해서 함부로 다루고 자식들 앞에서 정도 지나치게 사치하고 말입니다. 이렇게 한다고 생각할때에 가정이 온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반야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때는 자기란 것이  분명히 이것은 하나의 공 허상에 불과합니다. 우리 중생들은 그 가상 허상만 보고 본래성품자리는 지금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본래성품은 바로 부처님인데 말입니다. 무한 공덕을 갖춘 생명이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불자님들은 더러 불교를 하나의 논리적인 이치로만 생각한다 말입니다.


 내가 생명인데 천지우주가 바로 생명체인데 말입니다. 천지우주의 근본성품자리인 부처님이 생명이 아닐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생명을 생명으로 우리가 간절 ~ 을 품어야 됩니다. 어린애가 어머니를 찾듯이 말입니다. 아픈 사람이 의사를 찾듯이 그와같이 간절히 ~ 심을 품어야 하는 것입니다. 또는 품도록 되있는 것을 부처님은 원래 우리의 생명의 근본이니까 일체 생명은 사실은 부처님을 ~ 하도록 되있는 것입니다. 돼있는 것을 우리가 너무나 번뇌에 찌들어 있습니다. 국민학교때부터 대학까지 있다 없다 가상만 배웠다 말입니다. 가상만 따라서 우리 잠재의식에는 내 몸도 있고 그대 몸도 있고 예쁘고 밉고 이런것이 꽉 차있다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을 듣는다 하더라도 실감이 잘 안 납니다.


 무문관에서 보면은 ~ 자연내외 타성일편이라. 우리가 염불이나 주문이나 화두나 하나의 방법을 선택해서 오랫동안 쉬지않고 닦아 나간다고 생각할때는 ~ 오랫동안 정밀하게 청정계행 닦아 나간다고 생각할때는 자연내외 자연히 내외라 우리 몸 밖에나 몸 안에나 모두가 다 자연내외 타성일편이라. 모두가 하나의 진리가 되버린다 말입니다. 제 말씀이 너무나 길어져서 줄이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는 누구나가 행복을 구하고 또는 행복될 수 밖에는 없는 것인데 행복되기 위해서는 우주의 질서 우주의 도리에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우주의 괘도를 밟지 않고서 괘도를 벗어날려고 하면서 서쪽으로 가야 할것인데 동쪽으로 가면서 서쪽으로 갈것인데 동쪽으로 간다하는 그런 말씀은 참다운 우주의 도리에 따르는 것을 가리켜서 서쪽으로 간다고 합니다. 동쪽으로 간다는것은 이것은 우리가 참다운 우주의 도리 우리 마음 도리에 따르지 않고서 물질의 도리말입니다.

색 도리에 따른다 말입니다. 그런다고 생각할때는 우리한테는 우리가 추구하는 바 행복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무명심에서 무지심에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모두가 다 고의 씨앗이 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법문에 인생개고라. 인생은 다 고라 말입니다. 만나면 헤어지고 나면 죽고 말입니다. 자연계는 생주이멸이라. 이루어졌다가 또 머물다가 또 변화가 되었다가 인제 소멸되고 말입니다. 우리도 역시 우주 또한 ~라.  ~ 한동안 머물다가 파괴가 되고 텅텅 빈다 말입니다. 마치 인간의 생로병사가 있듯이 그러는 것입니다. 그와같이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모두가 다 허무합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허무한 것을 먼저 느끼셔야 합니다. 내 몸뚱이 그렇게 아끼는 내 몸뚱이 이것도 역시 허물어져 가지 않는가 나만은  80이나 90이나 꼭 살 것인데 이렇게 우리가 보장받을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일 갈지 오늘 갈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 몸뚱이 때문에 제 아무리 아껴봐도 음식을 많이 먹어봐도 몸뚱이 살로도 피로도 안 갑니다. 우리는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의 대승법을 지금 공부해야 만이 현대병을 치유할 수가 있습니다. 현대병은 너무가 병이 깊이 들어서 그냥 그렁저렁 가르침으로 해서는 현대병을 치유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과학병 또는 그 다종교사회에서 그 가지가지의 갈래로 찢기고 찢긴 그런 여러 가지 종파성 말입니다. 우리 불교내에도 종파성이 얼마나 강렬합니까. 그러기에 한국불교도 지금 마찬가집니다. 저 같은 사람도 역시 거기 한 분자기 때문에 저도 역시 한 책임을 느끼고 여러분 앞에서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공부를 보다 더 투철하게 잘 해 가지고서 우뚝했더라고 그러면은 조금 더 한국불교의 참다운 그러한 진로라든가 발전을 위해서 공헌할 것인데 그렇지 못한 것에 대해서 참회하고 아 부끄러움을 금할수 없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떠나서 자기 행복도 가정의 행복도 말입니다. 국가의 행복도 국제간의 그런 화해도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제가 허두에서 말씀드린 입불이법문이라.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원융무이한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러고 그 자리는 만공덕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나그네 길에서 우리가 할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본래 고향자리인 부처님이 되기 위해서 나와남이 더불어서 같이 성불하는 길입니다. 다른것은 하나의 그것은 사소한 조건입니다. 부처님한테 우리 생명의 본 고향인 부처님한테 한 걸음 가면 한 걸음 간만치 우리 마음은 충족됩니다. 부처님은 우주에 충만한 하나의 무량한 광명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바로 빛인 것입니다. ~ 광선 보십시요. 양자나 전자나 모두가 다 하나의 광선인 것입니다. 물질이 가장 적은 알갱이 이것은 광자입니다.


 광자라 말입니다. 광명이 지금 우주에는 꽉 차 있습니다. 광명 ~ 인연 따라서 달되고 해되고 내 몸뚱이되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닦아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은 그때는 저절로 광명이 차근차근 발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광촉이라. 빛광자 접촉할 촉자 말입니다. 광촉이라. 광촉이 돼 버려야 그래야 우리 공부에는 후퇴가 없는 것입니다. 금생에 무상한 나그네길에서 꼭 금생에 지금 입장은 어떤 입장 계시든지간에 우리 헐일 가운데 지상명령인 부처가 되는 길 이 일 가운데서 열심히 정진하셔서 아까 말씀드린 광촉을 꼭 스스로 발등 하셔서 정말 후퇴없는 그런 인생 금생에 영생의 행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