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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2. 염불 수행으로 극락정토에 왕생합시다

 


       우주 전체를 포섭하는 가르침


우리가 믿고 있는 불교는 바로 우주의 종교입니다. 따라서 단지 우리 인간의 행복만을 위하는 그런 종교는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힌두교나 다 마찬가지입니다만, 불교는 특히 어느 종파의 진리도 부처님 가르침 속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보통 몸이 아픈 데가 없으면 무병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해서 병자가 아닌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중생의 번뇌 망상을 벗어나지 못하면, 모두가 다 번뇌 병자입니다. 우리는 지금 번뇌의 병을 앓고 있습니다. 우선 나와 너를 구분하는, 자기라는 이기적인 관념 자체가 무명병입니다. 무지의 병입니다. 무명 때문에 탐욕심과 분노하는 진동이 많이 생기고, 어리석은 마음은 더욱 더 치성해져 우리를 괴롭힙니다.

우리는 무슨 법회에서나 삼보에 귀의하는데, 삼보라는 뜻만 확실히 알아도, 우리는 범부심인 무명을 상당히 벗어나게 됩니다. 같은 불법도 초기에는 ‘부처님’ 하면 모양으로 나투신(化身) 석가모니 부처님만을 부처님으로 숭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참 뜻은, 이른바 대승불교의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법신 부처님이라는 사상을 모르면, 우리 부처님 가르침이 우주적 종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화신 부처님은 모양으로 나투신 석가모니 부처님에 국한되기 때문에, 우주 전체를 포섭하지 못합니다.

법신 부처님은 화신 부처님뿐만 아니라, 다른 성자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다 법신 부처님의 개념 속에 포함됩니다. 단지 모양이나 이름이 있는 것뿐만 아니라, 이른바 명부득名不得 상부득相不得이라,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는 그런 존재까지도 법신 부처님의 개념 가운데 다 포섭됩니다. 이렇게 되어야 불교가 진솔히 세계적인 우주의 종교가 되지요. 우리는 지금 국가적인 안녕을 위해서도, 국제간의 단결을 도모하지 않으면 참다운 한 국가의 안녕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세계 모두가 다 국제적이고 우주적인 쪽으로 지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 문화가 발전될수록, 모든 현상은 갈수록 부처님 가르침에 가까워집니다.

부처님은 그냥 우주의 본질, 우주의 생명 위에서 가만히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니라, 그 우주의 생명 자리인 법신 부처님은 본래 다 원력이 있습니다. 우리도 나름대로 자기 수양에 따라 여러 가지 서원이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모든 생명의 본질인 법신 부처님도 원력이 있습니다. 목적 의식이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주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우리 신앙도 더 깊어지고, 또 그런 것을 알아야 아까 말한 근본적인 번뇌의 병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법신 부처님, 우주의 참다운 생명인 그 부처님 자리는, 이름이야 어떻게 불러도 좋습니다. 하느님이라고 불러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그 개념이 무엇이든, 그 가운데 우주의 유정有情과 무정無情, 유상有相과 무상無相 모두가 포함되면 좋습니다. 그런 것이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의 참 뜻입니다.


바윗 틈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이

우리는 나와 더불어 남도 온전히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 뿌리나 그대 뿌리나, 동양 사람 뿌리나 서양 사람 뿌리나, 모두 다 하나의 생명에서 보아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이른바 유출설流出說(emanation)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대 모든 철학에서 말씀한 것이고, 힌두교나 다른 세계적인 종교도 대체로 그와 유사한 말씀을 했습니다. 흐를 류流자 날 출出자 유출인데, 그 뜻은 우주의 모든 존재와 생명이 우주의 본질로부터 흘러나온다는 말입니다. 마치 바위 틈새에서 물이 솟아 흘러나오듯이, 우주의 본래 생명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서부터 모든 종교가 이루어진다 이 말입니다. 어느 위대한 철인도 유출설을 부인하는 분을 별로 없습니다. 

불교의 우주관은 맨 처음도 끝도 없이 항시 영겁으로 순환합니다. 모두가 다 파괴되고 텅텅 비어서 물질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세계, 즉 공겁空劫이 된다고 하더라도, 정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라는 형상만 없는 것이지, 생명은 그 가운데 충만해 있습니다.

따라서 그 가운데 생명의 작용으로 해서, 다시 우주가 차근차근 형성되어 나옵니다. 이게 아까 말한 유출流出입니다. 샘물 솟듯이, 태양계가 나오고 금성 토성 지구가 나옵니다. 어떠한 존재나 근본 진리에서 나왔기 때문에, 그 종말에는 다시 모두 진리로 돌아갑니다.

종교는 우주의 근본 진리와 항시 연관이 되어있기 때문에, 지금은 자기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하나의 기본 철학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그 모든 정보․종교․학문 체계가 얽히고 설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정말로 진리를 소중히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자기 마음의 번뇌를 녹여서 마음의 병자가 안 되기 위해서라도, 꼭 진리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갈등이 무명 무지에서 오는데, 무지에 대한 상식이 없으면 다른 것이 해결이 안 됩니다. 그냥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은 항시 불안합니다.

우주의 목적 의식은 근본 서원 그럽니다. 원래 우주는 생명 자체입니다. 우리는 자칫 산이나 냇물이나 산 위에 있는 절이나, 이런 것은 생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인간 정도의 업장을 가진 중생들이 가진 견해이지, 진리의 견해가 못됩니다.

 

모양에도 이름에도 걸리지 않는 무위 진인

진리는 우리 인간적인 견해, 탐욕심과 분노하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 이런 독스러운 마음이 가셔 버린 성자의 경지에서만 참다운 진리가 보입니다. 이것을 견성오도見性悟道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견성’은 우주의 본래 성품을 본다는 뜻이고, ‘오도’는 진리를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불교 말로 참된 사람, 진인입니다. 중국 당나라 때 유명한 임제 선사가 무위 진인無位眞人이라고 했는데, 무위 진인은 모양이나 이름에 걸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배에 걸리고 무슨 감투에 걸리고 재산에 걸리면, 참다운 진인이 못됩니다.

불교의 목적은 무위 진인이 되는 것입니다. 기껏해야 금생에 재산 많이 모으고 감투가 올라가는 것으로 인간의 목적을 생각하면, 정말로 안타까운 속물입니다. 소중한 자기 생명을 갖고서 속물에 바쳐서 일생을 마치면 되겠습니까? 불자님들, 목전에 가족들 문제라든가 여러 가지 문제가 얽히고 설켜서 먹고 살기도 어렵고, 정말로 고난에 처해 있는 분들이 한두 분이 아니겠습니다. 그렇더라도 그런 문제까지도 근본적인 해결은 꼭 진리와 더불어서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해결이 빨라지고, 또 어느 고민에도 우리 마음이 불안하지 않습니다.

유출설은 철학자로 플라톤이 맨 처음에 제창했습니다. 물론 더 앞선 분들이 다 알고는 있었지만, 한 체계를 세운 것은 플라톤입니다. 우주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에서 왔기 때문에, 종국에는 모두가 그 역으로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나그네 길입니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간다는 테오리아(theoria)라는 말은,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가 또 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우주는 인간이 좋다고 생각하고 궂다고 생각하고, 남을 좋아도 하고 미워도 하고 욕심도 내고 하지만, 그런 것도 인간이 잘 몰라서 그렇지, 알고 보면 그런 모든 시행 착오를 거쳐서 드디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생명에서 왔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생명으로 귀로歸路합니다. 즉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내 아내나 내 남편이나 내 자식이나, 모두가 다 실은 빠르고 더디고 차이만 있을 뿐이지, 모두가 다 근본 고향 자리, 진리로 돌아갑니다. 진리에서 왔으니 다른 데로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빨리 근본으로 돌아갈 것인가? 그런 문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본래로 부처이지만, 우리 마음은 지금 여러 가지 못된 생각도 하고, 또 금생에 태어나서 진리에 맞는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진리가 뭣인지 모르고 생활해 왔습니다. 그렇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성은 진리 그대로인 부처님과 똑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시간성이나 공간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 해서 더렵혀지지 않고 오염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나쁜 생각을 하더라도, 나쁜 생각이 형체 없이 그림자같이 좀 머물다가 나중에 없어져 버리는 것이지, 우리의 그 청정한 마음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극악 무도한 사람도 마음 본성은 청정 무구한 불심과 똑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본래로 부처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는 내 마음

부처님 당시로부터 삼백 년 후에 음광부飮光部라는 근본 불교 종파가 있습니다. 어째서 음광부라고 했냐면, 음광부를 개설한 위대한 성자가 하도 빛나기 때문에, 그 성자가 나타나면 다른 빛은 다 들이마신 것처럼 감추어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음광부를 개설한 분은 선세善世라는 분인데, 인도 말로 하면 가섭유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고, 한문투로 풀이하면 성자라는 분인데, 그분은 십세도 채 못된 일곱살 때 성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믿기지가 않으시지요? 아직도 재롱부릴 나이인 일곱 살때 성자가 되었다니!

우리 인간은 충분히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라표라는 비구는 14세 때 승려가 되어, 2년 만인 16세에 팔만장경을 통달하고 아라한과를 성취했습니다. 이것도 믿기 어려운 문제 아닙니까?

우리 마음이 순수하면 교학적으로 아무 것도 안 배우더라도, 우리 마음이 본래로 법신불이기 때문에, 그 자리는 만민이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 자리를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소중한 것입니다. 믿으면 우리 공부는 순풍에 돛단 배가 됩니다.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源功德母라, 믿음이라는 것은 도의 근원이요, 공덕의 어머니입니다. 바른 믿음이 있어야, 우리 공부도 빠르고 성불도 할 수가 있습니다. 그 믿음은 뭘 믿는 것인가? 밖에 있는 부처님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마음이 부처인 것을 믿어야 참다운 바른 믿음이 됩니다.

“모든 공덕을 갖추고 있는 것이 본래로 내 마음이다.”라고 믿을 때는, 우리가 설사 무슨 좌절을 당해서 비관에 처해 있고, 나같은 하찮은 목숨 차라리 끊어 버려야겠다고 생각이 들 때라도, 자기 목숨을 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수로 끊습니까? 가장 소중한 능력이 무한히 자기 마음에 원래 갖추어져 있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그 마음은 무한한 가능성인지라, 우리 믿음과 생각에 따라서는 아까 선세 동자와 같이 일곱 살 먹어서도 성자가 될 수 있습니다. 어느 때도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방법도 부처님 법문에 의지하면, 어려운 문과 쉬운 문이 있습니다. 난행문難行門과 이행문易行門, 제2의 석가라는 용수보살이 그런 문의 체계를 세웠습니다. 어려운 문은 우리가 경을 배우고 선방에 들어가서 참선을 하고, 모든 힘을 다해서 받들어 가지고 한 단계씩 올라갑니다. 그러나 쉬운 문은, 경을 외우지 말라 또는 참선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도 소중하나 그러한 어려운 작업을 안하더라도 가는 문입니다. 팔만장경을 누가 다 볼 수가 있습니까? 또 좌선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오십년 이상 참선을 했지만, 아직도 공부를 끝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쉬운 문(易行門)은 별로 어렵지가 않으니, “자기 마음이나 모든 우주의 존재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요, 하나의 부처다.” 그렇게 믿고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공부하기 쉬운 염불입니다. 이것이 쉬운 문인데, 제2의 석가 용수보살이 그 체계를 세웠습니다. 그것이 제일 쉽습니다.

내가 부처고, 또는 우주 본래의 자리, 우주의 생명이 바로 부처이거늘, 부처의 이름을 외우는 것같이 더 쉽고 절실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마음에다 우주의 훤히 열린 그런 불을 밝히시길 바랍니다. 우리 마음은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한도 끝도 없이 우주를 다 비추고 있습니다. 자기가 미처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김씨라는 마음도 우주를 비추고 있고, 박씨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이고, 어느 분의 마음도 모두가 다 끝도 갓(邊)도 없이 조금도 거리낌이나 장애를 받지 않고(無障無碍) 우주를 비춥니다.


가장 절실한 이름, 아미타불

우주는 본래로 일원론이라, 하나의 진리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진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부처입니다. 그런 부처님을 우리가 뭐라 이름을 불러야 되겠는데, 가장 절실한 이름이 이른바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지장보살․약사여래, 모두가 다 그런 부처님입니다. 그러나 총 대명사는 바로 아미타불입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도 나무 본사 아미타불이라고 읽습니다.

신라 때 원효스님도 마을에 다닐 때, 표주박을 때리면서 ‘나무 아미타불 나무 아미타불’ 그렇게 많이 불렀습니다. 고려 초기에 대각국사 의천대사도 그렇게 했고, 또 보조국사도 염불 주문을 보면 그렇게 했고, 나옹대사․태고대사 다 그렇지요. 그런 분들은 될수록 복잡한 것을 다 합해서, 하나의 진리로 마음을 향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도 아미타불로 하시고, 거기다가 나무(南無)는 아미타불에 ‘귀의한다’, 우리 모든 생명이라든가 역량 모두를 아미타불로 ‘귀의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본래 아미타불인 것이고, 또    아미타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니까, 그쪽에다 자기의 온 정력과 정성을 다 바쳐야 되겠지요.

중요한 문제는 아미타불에 대한 관념입니다. 어떻게 무엇을 생각하면서 아미타불을 부를 것인가? 그냥 이름만 부르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여태까지 익히고 배우고 습관성을 붙여 놔서, 자꾸만 잡스러운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렇기에 우리 마음의 소재를 어디다가 둘 것인가? 그것이 중요한데, 아미타불은 사람 같은 모양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소박한 단계에서는 부처님 상호를 관찰해도 무방합니다. 왜냐하면, 부처님 모양 상호는 만덕을 갖춘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 부처님 얼굴은 조금도 흠절이 없습니다. 지혜로 보나 덕으로 보나 또는 능력으로 보나, 만능의 상징으로 부처님의 상호가 나왔습니다.

불경에 보면, 부처님께서 삼아승지겁이라는 무수한 세월 동안 몇 천번도 넘게 자기 몸을 일반 중생한테 희생하고 순교했습니다. 한 겁도 무량 세월인데, 백 겁 동안 삼십이상 팔십수형호라는 그런 근본 상호를 이루기 위해 모든 복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원만한 상호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부처님 상호를 보면서 나도 그렇게 닮아야 하겠구나 하고 염불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직 상을 덜 떠난 염불인 것이고, 부처님의 참다운 법신은 우주 어디에나 언제나 무엇이나 충만해 있는 하나의 생명의 광명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무량 광명 아닙니까? 아미타불 별명 가운데 무량광불도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바로 낳지 않고 죽지 않는 우주의 생명 자체, 영생의 생명이기 때문에, 무량수불無量壽佛이라고도 합니다. 그런 부처님의 이름은 한도 끝도 없는 부처님의 공덕을 다 표현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르는 이름 가운데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름과 더불어서 부처님 공덕을 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선 한도 끝도 없이 잘 생긴 얼굴을 관상하면서 나도 닮아야 되겠구나,하고 염불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나도 만덕을 다 갖추기 위해서는 모든 중생을 위해서 시시때때로 자기라는 관념을 줄이고 정말로 공평무사한 행동을 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의 원만 덕상을 상상하면서

언제 어디에나 한도 끝도 없이 빛나는 아미타불을 외우시면 좋습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 말하면, 우주의 참다운 모습을 담아서 하는 염불이기 때문에, 실다운 실實자 모습 상相자, 실상 염불입니다. 또는 법신염불法身念佛이나 진여염불眞如念佛이라고 하는데, 실상 염불과 다 같은 뜻입니다. 그렇게 하면 철학적으로 염불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주의 도리 그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상호를 관찰하는 것은, 아직 상을 두어서 철학적인 염불은 못되고, 하나의 방편염불입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모아져서 하나로 통일되면, 그때는 깊은 염불삼매라, 오직 부처님만 생각하고 다른 것은 거기에 낄 수가 없게 됩니다. 우리가 소박하니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고, 부처님 이름만 외다가 우리 마음이 오직 하나로 통일되는 게 염불삼매입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으로 부처님의 원만 덕상을 상상하면서 염불삼매에 들어도 좋습니다.

여러 가지 교학도 많이 배우시고, “조금 철학적으로 정말로 우주의 실상에 맞게끔 염불해야 되겠구나.” 그런 분들은, 실상염불․법신염불․진여염불을 하면서, “우주의 끝도 갓(邊)도 없이 만덕을 갖춘 진리가 어디에나 충만해 있구나, 다만 우리 중생이 어두워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이구나” 생각하면서 하면, 이것이 이른바 가장 고도의 철학적인 염불이 됩니다.

삼매에 들어야 우리 범부심을 녹이고서 성자가 됩니다. 삼매에 들기 전에도 염불을 오래 하면 그냥 보통 재미가 아닙니다. 돈 주고서 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애쓰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참 간단합니다. 우리가 안하려고 해도 우러나오는 염불이 얼마나 행복스러운지 모릅니다. 머리도 맑아지고 가슴도 시원하고 말입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동시에 피도 맑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건강으로 보나 무엇으로 보나 최적의 법입니다.

마침내 그 부처님의 광명, 빛나는 부처님이 앞에 훤히 보이게 됩니다. 미신도 아니고 맹신도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의 진리이고 그 자리는 만물의 자리이기 때문에, 우리 중생이 부처님 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모습을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는, 우리 마음이 청정해짐에 따라서 꼭 앞에 나옵니다. 그것 보고 불교 말로는 부처 불佛자 설 립立자, 부처가 앞에 서 보이는 불립삼매佛立三昧라고 합니다. 그러면 모든 의심이 다 풀리고 마음에 막힘이 없게 됩니다.

중생염불불환억衆生念佛佛還憶이라, 원래 우리가 부처거니, 우리가 부처를 부르면 부처도 역시 우리를 굽어 본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피가 분명히 있습니다. 거기다가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생각에 끊임없이 염불을 한다고 생각할 때는 염불삼매에 들고, 염불삼매까지는 미처 못 간다고 하더라도, 우리 마음은 부처님이라 염불을 안해도 저절로 염불이 나오게 됩니다.

그렇게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느끼시면, 정말로 매일매일 신묘한 멜로디를 들으면서 공부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꼭 금생에 염불삼매에 들어서, 우리 본래의 고향 땅에, 본래 들어가야 할 그 자리에 금생에 꼭 가셔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