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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청화 큰스님 법문집/5. 일반법문

6. 영생해탈의 길

6.영생해탈의 길


부처님 오신 날은 천상 천하의 모든 어두운 무명을 밝히는 진리의 날이요, 우리 중생들이 인생고를 벗어나서 진정한 해탈과 자유를 누리는 영원한 생명의 축제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 사회가 겪고 있는 불행한 모든 병폐는, 우리 인간 존재가 허망하고 무상한 형상에 집착한 무명 번뇌와 그에 따른 그릇된 행위로 말미암은 업보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인간의 번뇌 망상을 밝히는 바른 지혜와 그에 입각한 도덕적 행위를 떠나서는 달리 찾을 길이 없음은, 인과 필연의 자명한 도리입니다.

여기에 생명의 실상을 밝히고 만중생의 해탈과 복락을 성취하는 불타의 가르침이, 현대 사회의 질곡을 벗어나는 최상 유일의 묘방이 되는 역사적 당위성이 있습니다.


인생과 우주 만유의 근본 성품은 무한 공덕을 원만히 갖춘 동일 평등한 진여불성입니다. 그리고 일체 만유는 진여불성의 인연으로 이루어진 연기적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모든 존재는 시간적으로 제행이 무상하고, 공간적으로는 제법이 무아이기 때문에, 일체 만유는 바로 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공의 당체가 그대로 중도실상의 진여불성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도 불교의 천지 동근天地同根과 만물 일체의 원리와 아울러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도리를 극명하게 밝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들이 우주의 자연법칙인 연기법으로 통찰할 때, 본래로 나(我)가 없는 무아요, 내 소유가 있을 수 없는 무소유인 것이며, 그에 입각한 명名 상相을 떠난 무주상無住相 행위가 바로 가장 완벽한 도덕적 행위인 보살행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고도 산업 사회는 지식과 정보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처절한 무한 경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는 숙명적인 수라장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류의 파멸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일체 생명의 동일률同一律과 동체대자비同體大慈悲를 밝힌 불타를 비롯한,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공명정대한 길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절박한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우리는 초연한 반야바라밀의 조명 아래, 종파적 이익이나 독선적인 근본주의를 번연飜然히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리고 자력 위주의 선정과 타력적인 정토 염불과 계율 등을 원융하게 회통하는 데 노력 정진하여, 본래로 원통 무애한 불타의 가르침을 천명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과 모든 존재가 본래로 진여불성과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생명의 실상인 자성불 곧 아미타불을 순간 찰나도 여의지 않고 찰나찰나에 부처를 성취하는 수행이, 바로 참다운 선정이요 염불임을 재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화두공안선이나 묵조선도, 이와같이 중도실상인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 참구해야, 비로소 진정한 선정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해탈 성불의 길은 지혜 해탈과 선정 해탈을 갖추어야 하는데, 오늘날 불교계나 세계 종교 일반에 있어서 가장 결핍된 분야가 선정 해탈입니다. 불교의 원통 무애한 반야 지혜와 아울러 선정 해탈에 대하여 각별히 유념하시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의 무량 광명의 은혜 가운데 성불제중成佛濟衆의 서원을 한껏 다짐하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불교 가르침에서 구분해야 할 것은, 해석한다는 ‘풀 해解’자와 ‘깨달을 오悟’라 하는 해오解悟 단계의 법문과, 또는 우리 몸으로 마음으로 이 가르침을 증명한다 하는 증오證悟의 법문입니다. 우리 마음도 바꿔지고 우리 생리도 바꿔져서, 오염된 자기가 전환되어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참다운 자기로 정화되어 버리는 단계가 아니면,  “부처님의 법을 증명한다” 또는 “우리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증명한다” 하는 증오를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승열반 자리는, 몸이 사라지고 또는 우리가 사고하는 의식 활동도 사라진다 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영생 불멸의 자리입니다. 생사가 없는 도리입니다. 우리 중생의 안목에서는 분명히 내가 있고 너도 있고 또는 죽음도 있지마는, ‘대승열반의 경계’에서는 그러한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할 때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자굴심自屈心’을경계해야 합니다. 자굴심은 ‘자기 비하심’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든가, 석가모니는 성불하셨지만 나는 그렇게 못된다든가 하는 자굴심을 여의지 못하면, 이것은 참다운 불교 신앙이 못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달마 대사, 그리고 내가 갖추고 있는 생명 자체는 조금의 흠도 차이도 없습니다. 아난 존자도 이러한 가르침 정도는 아셨을 것이며, 여기 계시는 사부 대중, 우리 불자님도 충분히 아실 것입니다. 화엄경․법화경․능엄경․열반경 등을 읽으셔서,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구나”하는 법문은 다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경계에 부딪치며는, “아!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알 것인가?” 이렇게 자굴심을 품는단 말입니다. 이는 우리의 업장이 아직 정화되지 않아서 그러한 것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분명히 공입니다. 다만 한 순간도, 고유한 존재가 못되는 것입니다.

순간 순간 변화해 마지않는 것은 공간성도 없는 것이고, 공간성이 없기 때문에 시간성도 없습니다. 우주의 실상이 이러한데도, 우리의 욕탐慾貪과 중생의 무명으로 인해서 잘못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대승법문으로 볼 때는, 천지 우주가 조금도 흠축이 없는 원만한 진여불성 자리인데도, 우리 중생들이 잘못 보기 때문에, 물질이 있고 현상계가 벌어져 있는 듯이 보이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은 이러한 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모든 은하계의 각 성수星宿나, 또는 태양계에 있는  화성이나 목성이나 우리 지구나, 모두가 다 산소나 또는 수소나 더 미세한 전자나 양성자나 중성자나 이런 것이 합해서 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일체 존재의 근원인 미세한 알맹이, 이런 것을 전자나 양자나 중성자라 하는데, 이런 것은 어떠한 것인가? 이것들은 알 수 없는 ‘우주의 장 에너지’ 이른바 ‘전자기장電磁氣場’입니다.

알 수 없는 우주의 장 에너지에서, 그때 그때 적당히 물리적 원칙이라든가 또는 화학적 법칙에 따라서 진동하고 있는 조그마한 상태를, 전자요 또는 중성자요, 양자요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고유한 전자, 고유한 양성자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의 과정적으로 존재하는 에너지의 진동이나 운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모여서 태양이 되고, 또는 달이 되고 지구가 되고, 우리 몸이 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 도리’를 모르면,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자리, 즉 영생 불멸하고 또는 행복만이 존재하고 모든 공덕을 갖춘 대아大我, 진아眞我라든가, 또는 청정무애淸淨無碍하여 조금도 번뇌가 없는 맑은 자리는 얻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열반 공덕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습니다.

현상에 있는 것은 모두 다 종당에는 죽고 마는 생사의 법을 떠나지 못하고, 인과의 범주에 꽁꽁 매여 있습니다.


천지 우주에는 근원적으로 광명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무슨 광명인가? 부처님의 지혜 광명, 부처님의 자비 광명이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이 부처님 법을 진지하게 공부를 하실 때는, 공부의 정도에 따라서 거기에 비례한 영원한 생명의 본체에 있는 광명을, 우리도 체험을 하고, 보기도 하고, 음미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부가 깊어지면, 깊어진 만큼 광명은 더욱 더 빛나는 것입니다. 정말 온전히 깨달아 확철 대오廓徹大悟하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다 광명 세계로 화化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가 완전한 경계까지는 미처 못간다 하더라도, “천우만다화天雨曼陀華요,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라! 하늘에서는 광명의 꽃비가 내리고, 하늘의 북소리는 자연히 울리도다.” 하는 그런 법문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런 영원한 묘음妙音들이, 우주에는 항시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맑으면 맑을수록, 그런 소리도 더욱더 기묘하게 맑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인간의 재미는, 서로 좋은 사람끼리 만나고, 또는 음식이나 잘 먹고 옷이나 잘 입고, 또는 지위가 높고, 이런 것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사실은 키에르케고르의 말처럼, ‘죽음에 이르는 병’에 불과합니다.

이런 것은 우리 행복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분명히 알으셔야 합니다. 이런 것은 죽음의 길인 것이지, 참다운 영생의 길은 절대로 못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우리는 영생의 행복,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생고를 떠나는 그 자리, 그 자리를 가려고 생각할 때는 “제법諸法이 공空이요.”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요” 하는 자리를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반야 사상, 반야 지혜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영생 해탈’의 자리에는 못 갑니다.


내가 분명히 빈 것인데, 너라는 것도 분명히 빈 것인데, 나라는 상相, 너라는 상, 중생이라는 상, 또는 시간이 짧다, 길다 하는 상, 이른바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 이런 상이 있는 한에는, 절대로 영생 행복의 극락이나 영생 행복의 해탈은 맛을 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입니다. 우리가 해탈의 길, 곧 죽음을 면하는 길은, 어떠한 길도 현상적인 내 몸에 집착하고, 또는 자기가 느끼는 그런 상대 유한적인 사고에 집착하고, 모양에 집착하고 권리에 집착하고 재물에 집착하는 한, 갈 수가 없습니다.

모양에 집착하는, 이른바 상에 집착하는 한에는, 절대로 우리 인생의 참다운 행복은 없습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예수의 가르침도 또는 마호멧의 가르침도 이런 가르침입니다. 성자의 가르침은 모두 영생 해탈의 길, 진리의 길, 영원히 죽지 않는 길로 인도하는 가르침입니다. 상을 떠나야 영생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열반은 영생 불멸한 상락아정을 올바르게 느껴야 부처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가셨다 하더라도, 부처님은 절대로 가시지 않았습니다.

본래면목 자리, 본래 참다운 진여불성 자리에서 볼 때는, 석가모니가 오신 흔적도 없고, 석가모니가 가신 흔적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똑같이 본 바탕에서 볼 때는, 가지 않고 오지 않고, 낳지 않고 죽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부활했다 하는 것이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교리의 하나 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에서 볼 때는, 예수님만 부활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다 부활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활이라는 뜻보다 훨씬 더 높은 뜻으로, 우리 생명은 불생불멸不生不滅, 즉 본래 죽지 않고 낳지 않았습니다. 죽을 까닭이 없으니, 어디 새삼스럽게 부활을 말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우리는 죽지 않고 낳지 않는 도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분명히 죽고, 나하고 친한 분들도 다 죽는데, 왜 죽지 않는 것인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헛 것이며 그림자인 우리 몸만 그때 그때 사라지는 것입니다.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에 어느 분이 인연이 다해서 금생의 목숨이 끊어진다고 합시다. 그런다 하더라도, 그 분의 목숨은, 생명 자체는 조금도 흠축이 없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얼마만큼 업을 지었는가의 업장 따라서, 지금 그의 몸이 죽어 있는 상태가 안락스러울 것인가, 또는 고통스러울 것인가 하는 차이 뿐인 것입니다.


죽음 자체는 절대로 없습니다. 천안통을 통한 분들이나, 천안통天眼通을 미처 못 통했다 하더라도, 귀안鬼眼이나, 귀신의 안목만 두고 본다 하더라도, 죽어서 가는 영혼들이 분명히 다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 불교인들이, 부활뿐만 아니라 영생 불멸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참다운 자기 주인공이고 참다운 마음이라고 믿는다면,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한테 갖추고 있는 근본적인 진여불성 자리, 일체 공덕을 갖춘 그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그냥 쉽게 얻을 수가 없습니다.

진여불성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마치 ‘이집트’의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같이 -자기 몸을 태워서 재로 하고, 재 가운데서 다시 생명을 소생시키는 -되어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참다운 영생의 자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렇게 쉽게 얻을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불자님! 우리 불교가 가는 것도, 자기 개인적으로 참다운 해탈을 얻는 것도, 또는 우리나라가 참다운 동방의 빛이 되기 위해서도, 또는 지금 혼란스러운 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풀기 위해서도, 영생 해탈의 길을 우리 스스로 분명히 믿고 체험하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앞에도 뒤에도 또는 좌우도, 모두가 다 죽음의 길, 우리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밖에는 사실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몸도 결국은 죽고 있습니다. 나날이 말라 가는 조그마한 웅덩이에 있는 고기나 똑같습니다.


세상에 우리 인간이 보는 상이 있는 모든 것은, 또는 가짜 이름의 모든 것은, 우리의 영생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학문을 안 배웠다 해도, 우리는 슬퍼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 자기가 지금 장애인이라 하더라도, 조금도 비굴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1990년에 왔다 간 영국의 호킹 박사는 자기 몸을 자기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 아닙니까? 말도 잘 못합니다. 그래도 그 사람 표정을 보십시오. 조금도 흐림이 없습니다.

행복이 모양에 있지 않습니다. 영생 불멸한, 죽지 않고 늙지 않고, 또는 병들지 않는, 영원히 변치 않는 무량한 공덕을 갖춘 그 마음 자리에 있습니다. 그 마음 자리를 우선 우리가 느껴야 되는 것입니다. 느끼는 정도도, 업장이 무거우면 잘 못 느낍니다.


“나한테 무슨 달마와 같은, 또는 석가모니와 같은 또는 서산 대사와 같은 마음이 있을 것인가?” 합니다마는, 조금도 흠이 없는 것이 분명 들어있습니다. “천만 번 되뇌어도 영생불멸하는 내 생명인 자기가 무량한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 합니다. 

염불은 무엇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한테 부처님같이, 무량한 공덕이 갖춰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불이불不二佛이라,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다는 뜻을 되새기기 위해서 염불을 하시는 것입니다.


불리불不離佛이라, 우리가 업장이 무겁기 때문에, “아,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겠지”하고 느끼더라도, 금방 딴 생각이 나옵니다. 그래서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떠나지 않기 위해서, 불리불을 위해 염불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와 내가 둘이 아닌 것을 재확인하고 확신하기 위해서 염불을 하고, 그 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염불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참선을 해야 할 시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참선을 해야만이 참다운 자기 본래면목 자리를 증명하고, 이렇게 해야만이 생사해탈을 할 수가 있고, 참다운 스승, 참다운 어버이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참선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세상에서 참선하기가 제일 쉬운 것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참선은 우주의 도리에 그대로 따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역시 진리대로 움직이는 것인데, 우리 지구를 제아무리 파괴할래야 파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제아무리 오랫동안 버틴다 하더라도, 한번 지구가 소멸할 때가 오면 소멸 안될 수가 없습니다. 삼천대천 세계의 달이나 또는 태양이나, 모두가 다 천지 우주의 진리에 따르는 것입니다.

진리에 따르면 손풍에 돛단배 같은 것이고, 진리에 못 따르면 그렇게 어려운 것인데, 참선 이것은 우리 인생이 사는 길 가운데서 가장 올바르게, 가장 합리적으로 진리에 따르는 길입니다. 순풍에 돛단배와 똑같습니다.

우리가 원래 원만 무결한 부처인 까닭에 결국은 부처가 됩니다.  본래부터 갖추고 있고 종당에는 부처가 될 존재가 우리 중생입니다. 다만 빨리 될 것인가? 또 더디 될 것인가? 하는 그 차이 뿐입니다.


세상에서 부처님 말씀 따라서 부처가 되는 것이 제일 편한 것입니다. 남을 때리기보다는 안 때리고, 남을 도와주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욕을 하기보다도, 욕설을 않고 좋은 말로 해서 부드러운 말 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인상을 찌푸리는 것보다도, 자비스럽게 미소를 띄우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보다도, 안 먹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망상하는 것보다도 자기 본래면목 자리, 자기 본래 주인공 자리를 생각하고, 우주가 본래 훤히 빛나는 진여불성이고 부처님이기 때문에, 그 부처님 자리를 생각하는 것이 제일 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