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9
제가 『육조단경』을 번역하려고 이래저래 여러 차례 읽어보고 조사해 보니까 자성(自性)이란 말이나 불성이란 말이 백 군데가 넘습니다. 자성·불성은 바로 우리의 주체성입니다. 참다운 자기입니다. 우리가 보통 참 자기를 잊어버리고 사니까 우리가 함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자성·불성을 모르면 모든 문제에 있어서 바르게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자성에서, 불성에서 연유되어 만유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자성에 안주해 버려야 비로소 마음의 산란심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내 자성이 불성이기 때문에 만공덕을 다 갖추고 있다는 희망적인 생각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성에 안주해야 참다운 신앙심도 나오는 것입니다.
불교의 소승 신앙과 대승신앙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하면 소승 신앙은 마음 밖에서 진리를 구하는 점입니다. 부처님을 마음 밖에서만 구한다는 점입니다.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참다운 부처다”라고만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법당에 모신 부처님이 아무것도 아니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곧 부처님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부처는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내 마음의 본성인 동시에 우주만유의 본성입니다. 우리 마음을 자꾸 분별하여, 이분법 삼분법으로 분할하면 절대로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안정이 안되면 공부도 안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천지 우주는 오직 하나의 진리, 하나의 부처입니다. 육조 스님께서 얼마나 우리에게 역설하고 싶으셨으면 백 번 이상이나 똑같은 말씀을 하셨겠습니까? 자성·불성·불심이란 말씀은 다 똑같은 뜻입니다. 꼭 외어두셔서 모든 것이 모양은 달라도 근본 성품은 모두가 부처님이요, 불성이요, 자성이란 생각을 가지셔야 합니다.
남한테 보시할 때나 남에게 가르칠 때나 자녀를 가르칠 때나 그 대상, 상대방은 자기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두 부처라고 보고 베풀고 가르치셔야 합니다. “내가 낳았으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해서는 안됩니다. 모두가 다 부처님의 기운을 받고 다만 인연 따라서 잠시간 부모의 인연을 빌렸을 뿐입니다. 모두 다 인연이야 어찌 되었든지 다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공부를 다하려면 아직도 멀었습니다마는 그래도 저는 성불(成佛)하기가 제일 쉽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된다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편하고 몸도 편합니다. 본래 부처가 헤매다가 본래 부처 자리, 자기 고향 자리로 가는 것이 우리 공부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향광장엄(香光莊嚴)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향광장엄은 자기 마음이나 자기 몸을 향기나 빛으로 장엄을 시킨단 말입니다. 부처님을 생각할 때와 자기 기분이 나쁠 때와 그 표정이 어떻게 다르겠습니까? 부처님은 삼십이 대인상(大人相)과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를 지니셨기 때문에 어디에도 조금의 흠절欠節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지혜와 자비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것은 우연히 된 것이 아니라 백겁장엄(百劫莊嚴)이라, 무수생 동안에 나고 죽고 하시면서 때로는 남한테 물질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새끼를 낳고 굶주린 호랑이를 위해서 자기 몸을 조금도 회한없이 몽땅 바쳐버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부처님의 삼십이대인상 팔십종호라는 원만덕상(圓滿德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얼굴을 이렇게 쳐다보기만 해도 우리 마음이 흐뭇해지고 감사해지고 하지 않습니까? 자비나 지혜가 원만한 부처님의 덕상이기 때문입니다. 향광장엄, 향기와 광명으로 우리 마음과 몸을 장엄시키는 법은 무엇인가? 그런 법이 바로 부처님 법입니다. 향광장엄이 되려면 무슨 어려운 법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든 시비분별을 떠나서야 합니다. 사실로 시비 분별도 허망한 것입니다.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닌데 괜스레 잘못 봐서 허튼 시비분별을 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존재를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또는 부처님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생각생각에 부처님 생각을 이어 가는 것이 바로 향광장엄입니다. 우리 몸에다 향을 간직하면 우리 몸에서 향기가 풍기는 것입니다. 그와 똑같이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하고 또한 끊임이 없는 향기란 말입니다. 진리의 향이고 자비의 향기란 말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또는 화두공안(話頭公案)으로 해서 화두공안에 드는 것도 모두가 다 우리 본래 면목 자리, 우리 불성 자리를 떠나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우주가 본래로 둘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면서 부처님 생각을 이어가면 바로 그것이 향(香)과 광명(光明)이 되어 향과 광명으로 우리를 장엄시키는 것이 됩니다.
오늘 해제(解制)날에 다시 스스로 공부를 재점검하셔서 향광장엄으로 가장 행복스럽고 우리 주변을 정화(淨化)시키는 일상생활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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