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비판할 때는 상대편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르면서 비판하는 것은 대망언이 되거나 자찬훼타(自讚毁他계戒)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상대편도 집착이 심해서 자기들만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정말로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들 아까 말씀드린 중세기의 에크하르트(Eekhart)나 니콜라우스(Nicolaus)나 그런 분들은 진지하게 신학(神學)을 공부하고 자기 생명을 다 바쳐서 순교(殉敎)도 할려고 한 그런 분들을 볼 때 불교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만 위대한 것이 아니라 인간은 모두가 다 진여불성을, 이른바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을 갖추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꼭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존재가 오직 하나의 진리라는 일원론적 진리관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천지우주가 모두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래서 진리도 하나요 내 마음도 하나로 향해 가야 합니다. 하나의 진리관은 상식적인 말이 아닙니다. 모든 현재의 과학, 철학, 종교도 하나의 진리로 귀일(歸一)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체 존재는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하나 쪽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추구심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인간 존재는 종당에는 다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부처가 되고 마느냐 하면 본래가 당체(當體)가 부처기 때문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본성이 부처기 때문입니다.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 버려야 하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다만 빠르고 늦는 차이 뿐 일체중생이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응당 당연히 부처가 된단 말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상(相)에서 성품으로 간단 말입니다. 곧 체(體)로 간단 말입니다. 염불하는 것이나 화두드는 것이나 모두가 다 상(相)을 떠나서 근본성품으로 가는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이 금생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요새 명상도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한마디로 줄여 말하면 명상 가운데 부처님 명상이 가장 올바른 명상입니다. 가장 궁극적이고 본래로 정당한 명상이 부처님 명상입니다. 불자 가운데도 지금 유행하고 있는 명상에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럽니다. 모든 명상 가운데 부처님께 귀환하는 명상 같이 차원 깊고 궁극적인 명상은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원이 부처님인데 부처님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명상이 어디 있습니까. 염불같이 좋은 명상 쉬운 명상이 없습니다. 염불, 그러면 염불이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너무 쉬운 것인데 공부가 좀 어려워야 할텐데 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나 공부가 그렇게 어려울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고 천지우주도 부처입니다. 우주에 부처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부처고 천지 우주가 부처님 덩어리입니다. 자기한테 해코지하는 사람, 독사고 모두가 바로 볼 때는, 성품으로 볼 때는 다 부처란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함부로 대하고 미워하고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부처를 빨리 증명할 것인가. 내 마음 가운데 내 마음이 바로 핵심자리고 중심이니까 내 마음을 바로 그대로 느끼고 구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어려운 말로 하면 삼신사지(三身四智)가 다 들어 있습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 이렇게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대들 자성 가운데에 청정법신이 있고 원만보신이 있고, 다 있습니다. 또 천백억화신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하셨어요.
우리 자성, 우리 인간성, 우리 마음 가운데에 일체 존재의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진리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다 간추려서 말씀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상, 락, 아, 정이 무엇인가.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하는 우리 생명은 영원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리 생명을 절대 죽고 남이 없습니다.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지 생명을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그것이 상, 락, 아, 정입니다. 그래서 상, 락, 아, 정의 상인 것이고 마음으론 즐거울 락자 일체 행복이 본래적으로 나한테 갖춰져 있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행복을 꾸어 올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에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은 자기 마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잘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행복한 정도가 아닙니다. 어떤 말로 자기를 미화시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를 칭찬한다 하더라도 본래 지닌 자기 마음을 다 칭찬할 수가 없습니다. 절대로 우리가 생각할 정도의 우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바로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우리는 부처님 그대로란 말입니다. 부처님한테 있는 부처와 우리한테 있는 부처가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가장 확실히 말씀드리면 천지우주가 사실은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중생이 어리석어서 중생의 자꾸 쓸데없는 분별시비 때문에 그렇게 보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오직 분별시비만 있는 것이지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진리뿐이고 모두가 다 행복뿐이고 영생의 생명뿐입니다. 천지우주나 내 몸에나 행복만 충만해 있습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자체가 모두 다 총상법문으로 해서 진여불성뿐이고 진여불성 아닌 것은 없습니다.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바로 보면 불성뿐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화두를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체성에다 마음을 두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하늘에 있고 어디에 계시는 부처님한테 갈앙(渴仰)으로 해서 부처님한테 가호를 입어야 되겠다는 것은 참다운 불법이 못되는 것입니다. 참다운 불교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 생명과 나와의 간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틈이 없는 것입니다. 천지가 부처뿐인데 무슨 틈이 있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가신 지가 2500년 이상이 되시지만 부처님은 생생히 우주에 바로 살아 계시는 것입니다. 바로 우주생명이란 말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절대로 구분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학교 문전에 안 다녔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부처님 가르침에는 “절대로 나는 아주 손해봤다, 나는 무지하다” 이렇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러고 하면 우리 마음 가운데에 본래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 같은 분은 참선의 할아버지 같은 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일자무식이란 말입니다. 그분은 학문을 많이 연구한 분이 아닙니다. 참선의 중요 핵심을 연구할 때는 육조단경을 이야기 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정도로 위대한 분입니다.
그분 가신 지가 1,200년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지금 뭘 많이 배웠다, 안 배웠다, 그런 것은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얼마만치 우리 마음이 부처님 사상을 오롯이 다 믿고 있는 것인가, 그와 동시에 자기 마음이, 자기 존재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아느냐가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내가 훨씬 위대한 존재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용기가 나오고 삶에 보람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항시 자기를 비하卑下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는 10세기경 중국분입니다.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그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참수분사(斬首焚死)라, 인연이 잘못되어서 내 목을 당장 베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정말로 불로장생하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훌륭한 불로장생의 약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이익이 될 것이 없다.”고 연수선사는 말씀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어떻게 죽든지 간에 자기 스스로는 잘 몰라서 나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거슬러 올라가서 몇 백세 몇 만생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받는 것이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우연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 지어서 받는단 말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가정생활이나 사회생활에서 보나 다 남한테 책임을 전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는단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행동, 우리가 생각하는 사고(思考), 우리가 하는 말 한마디가, 남이 듣기 싫은 말을 하면 그것이 업(業)이 되어서 내생에 또 받습니다. 지금 하는 행동 모두가 다 우리 미래를 규정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설사 내 목을 베어간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금생에 받아 버린다 하더라도 죽음을 본래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죽은 뒤에 저승에 가서 어디로 갈 것인가 몰라 하는데 사실은 죽자마자 일 초의 시차도 없이 또 그냥 몸을 받습니다.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71 (0) | 2024.07.29 |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9 (5) | 2024.07.15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7(5) (1) | 2024.07.01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6(4) (0) | 2024.06.24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65(3) (0) | 2024.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