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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872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872

 

우리 불교의 가르침 중에서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잘못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가르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불성·불심이 내 마음의 어디에 있을 것인가를 잘못 알고 잘못 가늠할 수 있습니다. 부처 불()자 성품 성()자 불성(佛性)이나 불심은 어느 고유(固有)한 데나 특정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일체 존재가 모두 불성뿐입니다. 일체 존재가 지금 이대로 불성이란 뜻입니다. 부처님 아닌 것은 하나도 없이 모두가 부처님만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 이대로 부처님 덩어리라는 말씀입니다.

 

현대물리학에서도 "모든 물질의 궁극적인 끄트머리가 원자(原子), 소립자(素粒子)"라고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불성이라고 하면 산소는 무엇이고 수소는 무엇이고 전자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나옵니다. 그러나 사실은 각 원소라든가 원자라든가 하는 모든 존재의 끄트머리는 현대과학이 알지 못합니다. 모르면서도 알고 있는 것은 전자나 양성자 가운데는 아주 엄청난 에너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현대과학은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자폭탄, 수소폭탄 등이 곧 원자력이니까 눈꼽만한 원자력, 모든 물질의 근원적인 원자력 가운데는 엄청난 힘이 있다는 것은 압니다. 원자나 소립자 안에는 한도 끝도 없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우주의 끄트머리에 있는 에너지는 한도 끝도 없구나"하고 과학자도 감탄한다고 합니다. 이 불가사의한 힘이 바로 불성의 힘입니다. 어느 것도 불성을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온 천지 우주가 불성이며 부처님 아닌 것이 없이 나와 더불어서 한 몸 하나의 부처님인 것입니다.

 

불성 곧 부처님 성품이라는 우주의 정기가 어떻게 진동하고 운동하고 결합해서 전자가 되고, 중성자가 되고 양성자가 되었는지는 앞으로 과학자가 밝힐 문제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일체중생개유불성이 사람의 마음만 일체중생 아닌가 하여 국한시켜서는 안됩니다. 일체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느 것이나 분석해서 들어간 미세한 알갱이는 전자나 양성자나 모두가 중생입니다. 중생이기 때문에 그러한 중생 모두가 다 불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두두물물(頭頭物物) 화화초초(花花草草)가 비로자나진법신(毘盧遮那眞法身)"이라 했습니다. 꽃 하나 풀 한 포기 하나 부처님 아닌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가르침은 만유가 다 불성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불성, 그것은 그저 존재의 근원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닙니다. 눈에 안보이는 원자의 힘이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듯이, 그보다 더 미세하고 보다 더 근원적인 불성의 힘은 한도 끝도 없는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불성은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일체의 공덕과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불성 차원에서는 영원히 죽지 않고 영원히 소멸되지 않습니다. 또한 불성은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생명 자체입니다. 불성은 곧 생명이기 때문에 불성 속에는 우리 인간이 알 수 없는 모든 행복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또한 불성은 불교 말로 '대아(大我)' 또는 '진아(眞我)'여서 쉽게는 대아, 진아가 들어 있어서 중생이 말하는 ''라고 하는 것은 소아(小我)나 망아(妄我)입니다. 대신에 참답게 깨달아서 아는 바른 나, 이른바 참 진(), 나 아()자 진아와 대아, 그 안에 들어 있는 힘은 또 역시 한도 끝도 없습니다. 즉 불성과 똑같은 힘이 내 안에 들어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아, 대아가 바로 불성이요 불성은 내 본성, 자성, 본래면목이나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가 소중한 불성이고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처를 깨달아서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삼명육통(三明六通)입니다. 삼명육통이란 말씀이 불경에 수백 군데 다 있습니다. 삼명은 먼저 숙명통(宿命通)이라, 과거를 훤히 아는 지혜를 들 수 있습니다. 텔레파시나 현대적인 시설이 없이도 밝은 마음만으로 과거 전생뿐만 아니라 무수생까지 소급해 올라가서 다 아는 능력입니다. 다음은 천안통(天眼通)입니다. 천안통은 우주를 다 내다볼 수 있고 미래를 다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또 누진통(漏盡通)이 있습니다. 누진통은 번뇌의 근원을 알고서 번뇌를 다 없애고 마음을 깨닫게 하는 지혜입니다. 이와 같은 숙명통·천안통·누진통인데 성자가 온전히 되면 그 삼통(三通)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출가해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저나 어느 누구나 삼명통을 못하면 공부가 아직 덜된 셈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공부는 평생 동안 참선해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다된 증거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또 육통(六通)은 삼명통도 들어갑니다마는 천이통(天耳通)은 모든 음성을 다 알아 듣는다는 말입니다. 가령 영어를 안 배워도 다 알아듣는 것입니다. 불성 가운데 들어 있는 힘은 이렇게 엄청난 것입니다. 누구나 우리에게 이런 힘이 들어 있는데 생각을 잘못해서 "나는 나 일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뿐이다."이렇게 자기 능력을 국한 시켜버리는 나쁜 생각 때문에 내 가진 능력을 확대를 못합니다.

 

불교는 마음을 한도 끝도 없이 키우는 공부입니다. 제한된 우리 마음을 키워서 영원불멸하고 광대무변한 본래 마음자리, 본래 마음으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따라서 삼명육통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지혜이기 때문에 우리도 온전히 공부한다면 그런 신통(神通)이 꼭 나오는 것입니다.

신통이 안되면 죽어서 금생에 중생 생활을 하다가 내생 가서도 또 중생으로 태어납니다. 여러분도 윤회전생을 아시듯이 뱅뱅 돌아서 이리저리 윤회를 해서 개나 소나 축생도 됩니다. 지금 애완용 동물도 그 개가 전생에는 형제간이나 친구이거나 부모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느 것도 생명의 뿌리에서 보면, 불성차원에서 본다면 다 똑같습니다. 똑같은데 어리석은 무명심 때문에 내 마음을 제한시켜 버리고 구속시켜버려서 능력을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훤히 열린 광대무변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부처님 공부입니다. 참선·염불·묵조선 등 이런 여러 방법 중에서 어떤 방법이 제일 쉬울 것인가, 용수(龍樹)보살같은 조사는 부처님 정통 조사 가운데서 열네 번째 분입니다. 또 마명馬鳴스님은 12대 조사입니다. 또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하는 분입니다.

 

이 두 분은 높은 조사들인데 용수보살은 우리 불교를 쉬운 문과 어려운 문으로 즉 이행문(易行門)과 난행문(難行門)으로 구분해서 말씀하셨는데 재가 불자님같이 바쁘고 공부할 여건이 어려운 분들은 당연히 쉬운 문으로 공부를 하셔야 되겠지요. 불교적 표현으로는 이행문을 택하셔야 될 것입니다. 이행문에 대해서 제가 말씀을 좀 드리겠습니다. 자상한 말씀은 못드려도 어느 정도는 말씀드려야 여기까지 오신 보람이 있으시겠습니다. 이행문은 부처님을 흠모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내 생명이면서 우주의 생명입니다.

 

내 생명의 고향이며 내 본래면목입니다. 바로 우주 자체이시고 영원한 내 행복의 자리입니다. 그리워하고 그리워하면 찬탄하고 찬탄해도 부족한 우리의''입니다. 이 자리를 바로 파고들어서 놓치지 않는 것이 염불이고 갈앙심과 그리움으로 부르고 사모하는 것이 또한 염불선이기도 합니다.

 

서기 400년 전 나오신 분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제자인 플라톤이 있습니다. 그분의 중요한 말씀 중에 '동굴의 비유'가 있습니다. 그 요지를 말씀드리면 중생들은 동굴안에 갇혀 있어서 어두워 판단을 잘못하고 동굴 안에서 흐리멍텅하게 감각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철인이나 성인은 동굴 밖에서 태양을 중심으로 광명세계에서 바르게 판단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즉 철인이나 성자는 태양의 밝은 빛으로 보니까 사실을 바르게 본다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플라톤이 위대한 것은 80세가 되도록 결혼도 않고 독신으로 살면서 오직 진리만을 위해 봉사하다가 청정하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의 말씀처럼 우리 중생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하는 중생 차원의 감각적 견해를 가지고 옳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바른 판단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바른 견해가 아니라 전도몽상입니다. 성자의 청정한 눈으로 봐야지, 번뇌가 없는 눈으로 봐야지 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전도몽상을 떠나버린 성자의 마음과 중생의 잘못 보는 견해를 대비해서 말씀했습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바로 보지 못하는 핵심적인 이유는 눈에 보이는 물질을 사실로, 그대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것은 바로 알지를 못합니다. 불교의 본래적인 말씀으로 하면 사실은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거부반응을 느끼시겠지요. ", 내 몸도 있고 타고 온 차도 있고, 물질인데 물질이 왜 없다고 하는가" 하시겠지요. 없다는 말씀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면 자동차, 몸뚱이면 몸뚱이, 세포면 세포, 금패물이면 금패물이 우리가 생각한 대로 있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과학적으로 보면 금패물이나 몸뚱이나 세포가 모두 원소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또 원소차원으로 본다면 우리가 보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성자가 본다면 원소 차원을 훨씬 넘어서 원소의 근본바탕이며 모든 존재의 근본 바탕이 바로 불성이기 때문에 불성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즉 물질은 물질이 아니고 불성입니다.

 

따라서 일체 존재가 불성으로 되어 있다고 느껴야 모든 성인들이 우리한테 말씀하신 실상을 우리가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뭘 부르고 참구하든지 간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는 '물질 뿐'이라는 생각을 떠나서 찾아야 모든 존재의 실상을 파악하는 바른 수행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수행의 길들 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이행문입니다.

 

그래서 그 쉬운 이행문은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인간의 마음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우리의 근본생명에 대한 그리움이 있어야 합니다.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더라도 깨달음의 본고향에 대한, 부처님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해야 합니다. 부처님을 향한 하염없는 흠모심(欽慕心)이 없으면 우리 마음이 비약이 안됩니다. 마음이 빨리 정화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 다가갈 수가 없습니다.

 

그렁저렁 공부해서는 전생에 잘못 살고 잘못 배운 습이 빨리 녹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사무치게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원 자리인 실상 즉 불성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없으면 가고 싶은 고향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플라톤도 역시 에로스, 즉 간절한 그리움이 있어야 현상적인 것을 떠나서 참다운 실상으로 우리 마음을 돌이킬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기독교에서의 ", 주여"하고 하느님을 흠모추구하는 것도 그런 태도에서는 우리와 같은 것입니다. 다만 기독교도 하느님이라는 개념 자체가 부처님 가르침 같이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포섭하고 "모든 것이 본래로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고 생각하면 그때는 불교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창조한 하느님은 따로 있고 자연계나 인간은 별도로 있고, 그렇게 보는 것이 기독교에서 보는 하느님의 개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지금 모든 것을 포섭하고 화해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같이 화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으로 봐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일신교(一神敎)를 믿는 그 사람들 같이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불교나 힌두교는 범신론(汎神論)입니다. 범신교는 넓을 범(), 귀신 신()자 인데 모두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자연이 곧 신이고 신이 곧 자연입니다. 어느 것이든 다 이른바 생명 자체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또 이론적으로 따져보면 기독교나 이슬람이나 유태교도 범신론이 안 될 수가 없습니다. 이론적으로 정당하게 추구하면 모두가 다 범신론이 됩니다. 일체 존재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 일체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서로 다툴 것이 없습니다.

 

아무튼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서 제일 쉬운 문은 부처님을 생명으로, 부처님을 하나의 우주 생명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우주 생명으로 받아들일 때는 내 마음이 어떤 형태가 되든 우리 마음의 본체도 똑같이 바로 우주 생명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진여불성이거니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도 부처님은 균등하게 들어 있습니다. 불교의 표현으로 일미평등一味平等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마음이나, 어떤 누구 마음이나, 우리한테 잠재해 있는 본래성품은 다 일미 평등한 불성입니다.

 

따라서 그 자리를 믿는 것이 또한 대승적大乘的인 신앙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본을 믿는 것이 대승적인 신앙이고 대승적인 신앙을 가져야 비로소 참선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냥 선방에 들어가서 화두 의심하고 명상하고 염불해야 참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자리가 근본자리, 본래면목자리에 놓여 있어야 비로소 참선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공부하시든지 간에, 화두를 하시든 묵조를 하시든,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을 외우시든지 간에 여러분 마음이 본래 생명의 본체자리인 진여불성에 입각하면 모두 다 참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조금도 어떤 제한이나 위축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리 선방에 앉아 애쓰고 가부좌를 틀고 공부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견해인 "일체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내 마음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하고 똑같은 마음이다"라고 확신을 못하면 참선이 아닙니다. 또 같은 염불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하면 부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고 호법선신도 보호하겠지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본래면목자리에 입각하지 않고 명호만 부르는 것은 염불 참선이 못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고 천지 우주가 다 부처님 덩어리다" 이렇게 확신하고 명호를 불러야 염불선이 되고 참된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