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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7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74

 

부처님 가르침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 범부가 성인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그냥 아무렇게나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반드시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명을 띠고 태어났습니다. 어째서 그런가 하면, 달마 스님 말씀과 같이 일체중생이 동일진성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꿔서 말하면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란 말입니다. “금생에 그렁저렁 편히 살고 부처가 안되면 그만 아닌가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부처가 못되면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 삼계(三界)를 뱅뱅 윤회합니다. 윤회전생합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본래 부처니까 부처가 안되고 그렁저렁 살면 업()만 짓는단 말입니다. 우리가 금생에 사람 몸 받은 것도 과거 전생에 사람 몸 받을 정도로 다섯 가지 계율 정도는 닦았기에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십선계(十善戒)를 닦았으면 천상에 태어났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만 긍정하는 사람들은 천상이라 하면 천상이 어디 있을 것인가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방편(方便)으로 말씀하셨겠지, 방편법문(方便法門)이겠지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방편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이 허망무상(虛妄無常)하지만, 이와 같이 이렇게 있듯이 천상(天上)도 역시 허망무상한 것입니다. 실상세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천상도 분명히 존재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저승에서 헤매는 영가생활이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너무나 까다로운 말씀을 해서 여러분들이 긴장을 하시니까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마음을 푸셔서 부처님 공부는 한편으로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고 옹색한 것 같지만 사실은 제일 쉬운 공부입니다. 우리는 부처를 어디 다른 데서 구할 것이 없습니다. 본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 본 성품이 바로 부처입니다. 마음을 떠나서 참다운 법신 부처가 없고 부처를 떠나서 우리 마음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귀가 닳도록 자주 듣지만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를 완전히 깨달으신 부처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달마 스님한테 있는 불성이나, 우리 불성이나 또는 개()한테 있는 불성이나 다 똑같습니다.

 

천지우주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다 불성뿐입니다. 그러기에 화엄경에서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부처와 중생이 모두 차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중생은 자꾸 갈라서 분할을 시킵니다. 분할시켜서 둘이나 셋으로 보는 것이 중생일반입니다. 그리고 본래적인, 근원적인 생명 자체를 깨달은 것은 역시 성인(聖人)이고 부처입니다.

 

그러면 이와같은 성인이나 부처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닌가 하시겠지마는,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제일 쉽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부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저도 공부하는 중입니다. 어째서 쉬운 것인가 하면, 천지우주의 본래자리가, 본래면목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본래로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부처 자리, 본래면목 자리를 따르는 것이 우리 건강으로 보나, 우리 마음으로 보나, 제일 편하고 제일 쉽습니다.

 

가령 우리가 한 가정을 생각해 보면, 모두가 부처기 때문에 남편도 아내를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내도 남편을 부처같이 생각하고, 아들딸들을 부처같이 생각해야 됩니다. 애써서 부처같이 보려고 해야 합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부처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화두공안(話頭公案)을 참구(參究)하고 염불(念佛)하고 하는 것은 모두가 다, 일체중생이 부처인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며칠동안 불행한 분들을 많이 봤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나같은 사람이 조금 더 법력(法力)이 있으면, 저런 분들을 다 구제해 줬으면 참 좋겠는데, 그런 법력이 없어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하다 못해 예수 같은 법력만 있어도 만져서 낫기도 하고 또 가만히 보고 있어도 낫기도 하고 그러겠지요. 그러나 그런 법력이 없으니까 여태까지 팔십 다 먹어 가면서 중생들한테 빚만 지고 참 게으름만 많이 피었구나하고 참회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처님 공부를 하는 것은 우리가 본래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이 공부가 어렵다고 해서 기피하면 큰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재가불자님들이 이십명 정도 결제(結制)를 하신다고 하니까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공부하실 때 꼭 주의해야 할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것은 암증선(暗證禪)이라는 것입니다. 어두울 암()자 증명할 증(), 암증선입니다. 우리가 우리 공부를 스스로 점검을 못하고 어두운 가운데 암중모색(暗中摸索)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처님 공부를 치우치게 해서 공부에 여러 가지 차서(次序)가 있는 것을 모릅니다. 가령, 수능엄경(首楞嚴經)을 두고 말한다면, 수능엄경에서는 선()의 골수(骨髓)라 해서 선수(禪髓)라고 합니다. 왜 선수인가 하면 수능엄경에 보면, 우리가 참선할 때는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의 차서가 갖추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을 먼저 해야 되는지의 참선법이 다 들어 있습니다. 이런 차서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또 우리가 과거 전생에, 숙생(宿生)에 많이 닦아서 일언지하(一言之下), 한마디로 깨달아 버리면 좋을 텐데 보통 차원(普通次元)에서는 그렇게 안됩니다.

 

역시 분분단단(分分段段)으로 닦아서 올라가야 합니다. 모두가 부처님이 아님이 없다는 그러한 돈오(頓悟) 다음에는 암중모색할 것이 아니라 공부해서 올라가는 차서를 알아야 합니다. 예컨대, 음식을 어떻게 먹어야 되고, 생활은 어떻게 해야 우리 공부가 빠를 것인가 하는 문제들을 부처님 법대로 잘 따르면 몸도 편하고 마음도 편합니다. 암중모색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늘 같이 아침부터 안개가 끼어 있으면 앞뒤가 잘 안보입니다. 우리 공부도 똑같습니다.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앞뒤를 훤히 알고 지금 내 공부가 얼마만큼 되어 있는가, 앞으로 어떤 지표에 따라서 공부할 것인가를 안다면 암중모색하지 않습니다. 암중모색하면 공연히 교만심만 일어납니다. 가령 어느 경계에도 이르지 못해 가지고 무엇인가 한계를 모르니까, 자기 공부가 웬만히 되었다고 교만심을 내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문자선(文字禪)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불경을 많이 봐 가지고 예를 들면, 능엄경(楞嚴經)도 법화경(法華經)도 보고 구사론(俱舍論)도 보고해서 공부하는 차서에 따라서 올라가는 한계는 안다고 하더라도 그 아는 것으로 해서 공부가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증명(證明)을 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를 증명해야 참 다웁게 아는 것인데, 그냥 이치, 이론으로만 알아 가지고 닦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이런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문자선, 또 구두선(口頭禪)이라 합니다. 입으로만 안단 말입니다. 문자선과 구두선을 안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야호선(野狐禪)입니다.

야호는 들 여우입니다. 우리가 부처님 진리를 증명하지 못하고도 증명했다고 하고, 어떤 경계를 성취했다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단 말입니다. 여우가 꾀가 많아서 거짓이 많지 않습니까. 사람도 짐승도 속이는 간교한 꾀가 많습니다. 여우처럼 교활하게 속이고 공부를 했다고 하는 것은 야호선이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할 때는 암중모색하는 암증선을 경계해야 하고, 문자만 알고 입으로만 알고서 실지로 닦지 않는 문자선·구두선을 안해야 하고 깨닫지 못하고서 깨달았다 하거나 또는 수승(殊勝)한 경계를 체험도 못하고도 체험했다 하는 야호선을 안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주의해서 공부하실 것이고, 또 한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모든 존재가 본래로 오직 하나인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이렇게 확실히 알고 또 지계청정(持戒淸淨)이라,” 꼭 계율이 청정해야 됩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만 닦으면, 그만인 것이지 계율이사 다 마음 따라가는 것인데, 아무렇게나 살든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렇게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마음 닦는 공부는 여러 가지로 복합적으로 계행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고 지혜도 거기에 곁들어 있어야 되며, 선공덕(善功德)도 복합적으로 합해져야 이른바 공부가 이루어집니다.

 

음식만 함부로 먹어도 절대로 공부가 안됩니다. 근래에 우리 스님들이 음식을 함부로 먹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부처님 뜻이 아닙니다. 또 공부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남녀 이성간의 성적(性的)인 문제도 절대로 금해야 됩니다. 수능엄경에 보면, “부단음심(不斷淫心)이라”, 사람이 음심을 끊지 않으면, 남녀 이성간의 음탕한 마음을 끊지 않고서 선정에 들려고 한다면 여증사작반(如蒸沙作飯)이라”, 모래를 삶아서 밥을 만드려고 하는 것이나 같다고 하였습니다. 모래를 삶으면 밥이 되겠습니까? 우리 재가불자님들, 명심하셔야 됩니다.

 

제가 가끔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육재일(六齋日) 계행 지키는 것을 잊지 말으셔야 됩니다. 재가불자라 하더라도 하다못해 육재일(8, 14, 15, 23, 29, 30)만이라도 출가(出家)한 셈치고서 부처님 계율을 지켜야 됩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을 절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욕계에 살고 있습니다. 욕계라는 것은 색계만도 못하고 무색계 만도 못합니다. 욕계·색계·무색계 삼계를 초월해서 참다운 해탈을 하는 것입니다. 욕계의 특징이 무엇인가, 욕계의 두드러진 특징은 우리 식욕과 남녀 이성간의 욕심이란 말입니다. 가정에서 지금 화목하게 가족생활을 하시는데 이런 말씀드리면 , 자기가 성자니까 우리네 가정을 전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닌가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가정에 부부관계가 형성되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냥 문란스럽게 서로 사는 데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같은 법의 도반, 똑같은 법의 도반이 되어서 같이 성불(成佛)의 길로 나아가는 데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렇게나 그냥 문란하게 사는 것이 부부의 본질(本質)이 아닙니다. 금생에 부부가 된다는 것도 굉장히 소중한 인연 아니겠습니까. 과거 전생에도 부부간도 되고, 형제간도 되고, 그렇게 해서 금생에 부부간이 되었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 존재의 본래 사명자체(使命自體)가 성불입니다. 그러므로 성불하기 위해서는 모두를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따라서 내외간도 가급적이면 식욕 문제라든가, 남녀 이성 문제는 절제하고 도반으로서 공부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내외간의 참다운 도리인 동시에 우리 불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의무인 보살행(菩薩行)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