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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76

 

우리 중생은 업을 지으면 지은 대로, 이른바 업의, 카르마(Karma)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공부를 좀 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은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는 것 그것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실험적(實驗的) 증명(證明)을 해야 업을 벗어납니다.

 

이와 같이 우리 중생이 생사 내왕하는 욕계색계무색계를 나누어 보면, 이십팔천(二十八天)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십팔천을 다 뛰어넘어야 할 것인데, 하나씩 하나씩 사왕천에 있다가 가까스로 한 자리씩 도리천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그러다가는 한도 끝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부처님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이 한없이 고마운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나 성인들의 가르침은 우리를 초월케 하고 도약을 시킨단 말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좋은 가을날에 여기까지 오신 것은 도약을 위해서입니다. 꼭 도약을 하셔야 됩니다. 부처님이나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을 했습니다. 아까 보니까 보적거사(寶積居士)가 보입니다. 보적거사가 번역한 화두놓고 염불하세라는 책이 있는데 굉장히 좋은 책입니다.

 

중국의 인광대사(印光大師)란 분이 1940년쯤에 열반하셨는데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참 진실한 분입니다. 그래서 인광대사 가언록(嘉言錄)’이라는 책을 화두놓고 염불하세로 제목을 붙여서 풀이한 것인데 좋은 책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근래, 그렇게 진지하고 체계 있게 염불을 풀이한 책이 별로 없습니다. 고구정녕(苦口叮寧)하게 풀이를 했습니다. 그리고 본인이 증명을 다해서 다양하게 다른 공부와 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번역을 잘해서 읽기도 참 좋고 하니, 꼭 보시도록 제가 권해 드립니다.

 

염불이란 것이 생각할 염()자 부처 불()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중생들이 생사 내왕하는 부처까지 다 합해서 십법계(十法界)라고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도 또 다른 경()에도 말씀을 다 했습니다마는 열 가지 경계(境界)가 있습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 제일 밑인 지옥아귀, 아귀는 죽어서 가는 나쁜 귀신들이란 뜻입니다. 아귀 다음에 축생수라, 수라는 업장이 무거워서 싸움만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만도 못하지요. 다섯 번째가 우리 인간 세계입니다. 열 가지 경계 가운데서 우리 중생이 다섯 번째입니다. 지옥아귀축생수라인간이니까, 우리도 무던히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인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5계를 지키고 하품십선(下品十善)을 지키면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중품(中品)10선을 지키고 선정(禪定)을 닦아서 마음을 가지런하게,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공부를 하면, 욕계 천상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중품상품까지 올라가서 우리가 착한 일을 많이 하면, 깊은 선정에 듭니다. 여러분들, 삼매(三昧)란 말씀 들으셨지요. 삼매는 선정이라고도 하는데 인도 말이며 우리 마음이 바른 정심(正心)에 입각(立脚)해서 흐트러지지 않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참선을 하고 염불을 해도 금방 산란스럽게 되지마는, 참답게 삼매를 성취할 때는 마음에 동요가 없습니다. 삼매에 들어 마음에 동요가 없어야 마음을 비로소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삼매에 못 들면 절대로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경로(經路)를 밟던지 간에 삼매에 들어가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고요해서 심일경성(心一境性)이 명경지수(明鏡止水)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밝은 거울이나 고요한 바닷물 같이 되어야 삼매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매에 들어야 우리 마음의 바탕이 보입니다. 항시 말씀드리지마는, 우리 마음은 본래로 자성(自性)이고 불성(佛性)이고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그러나 지금 현재의 우리 마음은 완전한 마음이 못 됩니다. 참마음이 못 되어 있고, 지금 이 마음은 겉에 뜬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의 그 근본 자리, 본래 근원적인 마음은 바로 부처입니다. 부처 불(), 성품 성(), 불성입니다. 스스로 자(), 성품 성()자 자성(自性)이란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면목은 바로 자성이요, 불성이요, 생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성이나 자성 자리에 못 가면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러기에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수라나 인간이나 이런 존재가 되는 것은, 모두가 다 우리 마음이 본래 마음 그 바닥까지 사무치지 못하고, 다 못 들어간 것을 의미합니다. 불성이란 것은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광대무변(廣大無邊)하여 끝도 갓도 없는 것이 마음입니다.

 

여기 계시는 여러분의 마음도 다 그렇습니다. 겉에 뜬마음은 자기 모습이 다르고 이름이 다르듯이 조금씩 다르겠지요. 그러나 마음의 바탕은 똑같이 다 불성이고 자성입니다. 성인들은 자성불성을 바르게 깨달은 분들이며, 중생은 참 마음인 불성 자리에 가다 가다 못간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제 일로 덮이고 가리워져 있어서, 지혜(智慧)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지옥에 있는 마음입니다. 그 지옥은 사고(思考)할 틈이 없습니다. 너무 고통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 합니다. 그런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가 어쩌다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눈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떠돌다가 나무토막 만난 격입니다. 물론 엄격히 말하면 우연도 아닙니다마는 어쩌다가 우리가 다행히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부모님한테 감사하고 모든 존재에 감사해야 됩니다.  같은 사람은 나이가 많아지니까, 모든 분들의 은혜에 뼈저리도록 감사를 느낍니다. 힘이 부치니까, 자기가 쓰는 이불 하나도 치우기 힘듭니다. 하기야 손주가 있고 며느리가 있고 하면 되겠지만, 그런 신세는 못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은 그야말로 불성이고 자성이고 참다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염불하는 것은 내 마음의 근본 자리, 내 마음의 근본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근본은 물질이라든가 어떤 무생물이 아닙니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살아 있는 생명입니다. 우리에게 마음이 있으니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금생에 살다가 인연이 다 해서 마음이 떠나 버리면, 몸뚱이 밖에 무엇이 남습니까? 물질만 남습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사실은 실존인(實存的)인 존재가 아닙니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은 잠시간 우리 마음에 덮인 업()이 각 원소를 긁어모아서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하지 않습니까? 몸뚱이나 다른 물질이나 모두가 다 순간순간 변화하여 무상하단 말입니다. 일반 중생들은 없는 것을 그대로 보지를 못하니까, 있다고 생각합니다. 거기에 중생의 병()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이나 권세나 모두가 다 잠시 지금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 실존적으로는 있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이 실지로 있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 가족을 위해서, 자기 몸뚱이를 위해서, 허망한 자기 명예를 위해서, 소중한 자기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간단명료합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어렵지가 않습니다. 우리 중생이 무명심 때문에 잘못 살고, 무지 무명을 못 떠나서 말로 생각으로 몸으로 스스로 업을 짓고, 자기가 한 대로 당한단 말입니다.

 

부처님 상()을 보면, 부처님께서 오른손을 이렇게 하고 계십니다마는, 이것은 무외시인(無畏施印)입니다. 중생의 공포를 덜어주시는 서원(誓願)을 상징하는 모습입니다. 왼손을 아래로 하신 것은 여원인(與願印)입니다. 중생이 바라는 대로 다 주겠다는 부처님의 서원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부처님 서원은 참 철저합니다.

 

부처님한테서는 어떻게 그런 자비가 나오는가? 천지 우주가 오직 하나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의 뿌리가 같습니다. 김씨도 광대무변한 마음이고, 박씨도 광대무변한 마음이고 모두가 다 광대무변한 마음입니다. 광대무변한 마음인 것을 모르고 욕심을 내면, 그마만큼 우리 마음이 좁아집니다. 옹졸해집니다. 좁아지면 얼굴도 찌푸러지고 동시에 우리 몸에도 해가 옵니다.

 

불자님들, 부처님 가르침은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나, 가장 도움이 되는 그런 가르침입니다. 자기 건강이나 가족이나 사회를 위해서나, 정치를 위해서도 최상의 가르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