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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34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34

 

우리가 종교를 공부할 때는 실천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철학적인 것이 따릅니다. 화엄경이나 능엄경이나 법화경이나 모두가 최고의 철학이란 말입니다. 지금 실존철학, 과학철학, 별별철학이 다 있지만 부처님 가르침 같이 확실하게 밝힌 철학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불자님들! 우리는 그러한 부처님 가르침을 꼭 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생명의 본의는, 사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몇 만생 다시 태어나고 태어나서 윤회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의 본래모습으로 다 돌아가는 것입니다. 내 본래 모습이 바로 부처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나 한결같이 부처가 됩니다. 그러기에 열반경에서도 일체중생(一切衆生) 개유불성(皆有佛性)이라,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체중생(一切衆生) 개당작불(皆當作佛)이라, 모든 중생이 필연적으로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노력여하에 따라서 빠르고 느리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게으름을 부리면 금생에 그렁저렁 할 일 없이 생명을 낭비할 것이고 게으름 안 피우고 부처님 법대로만 살면 금생에도 본래 부처라서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본래 부처란 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부처 아닌 것이 어디서 억지로 가져와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개개원성이란 말은 본래 우리가 원만히 갖추고 있는 부처란 뜻입니다. 소승은 그냥 애쓰고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되고 대승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입니다. 이 마음 이대로 부처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이 느끼고 못 느끼고 그런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가령 원효 스님이나 달마대사나 육조 혜능이나 그런 분들이 우리를 본다고 할 때는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분들은 우리를 모두 부처로 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만 부처님이 아니라, 또 삼세제불만 부처님이 아니라 모두가 다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부처로 본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목이 흐리멍덩한가, 번뇌에 가려 있는가에 차이가 있는 것이지 본래 모습은 우주가 한결같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하는 때도 우리의 마음자리 그곳이 부처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른바 진여불성(眞如佛性)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 같이 업장 많은 사람이 어떻게 진여불성이, 우주 불성이 가득 충만해 있다고 어떻게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하고 겁을 내지 마십시오. 우리 생각 가운데서 무슨 생각이 가장 고귀한가 하면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께서 우리한테 방편이 없는 진실한 말씀을 하신 그 자리를 그대로 수용한단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생각입니다.

 

그 무슨 명상법, 무슨 명상법 해서 별별 명상법이 다 나와 있습니다. 우리 스님네들도 거기에 빠져가지고 승복 입고서 거기에 다닌다고 하는 분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 비참한 일입니다. 부처님 공부를 어떻게 했길래, 그렇게도 소중한 보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하찮은 자갈쪽 같은 것과 바꿀 것인가 말입니다. 대승명상법은, 내 존재뿐만 아니라 우주의 일체 존재가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상입니다. 무상이란 말은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가 굉장히 소중합니다. 무상이란 말속에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시간성과 공간성이 없다는 뜻이 포함돼 있습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현대적으로 공부를 많이 해서 현명하게 잘 느끼실 것입니다.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한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순간순간 변화해 마지않습니다. 그런 것은 존재성이 없습니다. 존재성이 없는 것은 일정한 시간 내에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따라서 일정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어느 위치도 점유하지 않으니 그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은 다 그렇습니다. 내 몸이고 내 관념이고 다 그렇습니다. 인연생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 잠시간 이루어졌기 때문에 어느 순간도 어디에서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어느 위치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이 있다는 것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인식이 되어야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는 것은 결국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그러한 혜안, 곧 부처님의 투철한 안목은 25백여 년의 사이에도 만유(萬有)의 진상을, 참다운 모습을 그대로 보신 것입니다.

 

불성이라고 말하나 부처님이라고 말하나 똑같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상을 생각해 볼 때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 명상법같이 수승하고 위대한 명상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유위법적인 상대적인 명상법에다가 우리 마음을 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생명의 낭비에 불과합니다. 무슨 필요로 부처님 법 같은 법을 놓고서 다른 그런 명상법들을 찾겠습니까? 무슨무슨 명상법이라 하지만 오래 가지는 못합니다. 부처님 법은 25백 년 동안에 무수한 성자가 나와서 다 증명하고, 달마를 거쳐 육조혜능 스님까지 그대로 고스란히 전수한 법 아닙니까? 삽삼조사(卅三祖師: 33조사)가 계계승승(繼繼承承) 가감이 없이 이어온 대승명상법입니다. 이런 법은 기간이 없습니다. 영원히 갑니다. 이제는 다 포괄해서 최상승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상승법은 이미 거의 다 말씀드렸지만 그래도 통합적으로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최상승 명상법은 모든 것이 우주가 다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의 생명이 사실인데, 우리 중생이 중생심으로 보니까 나는 나 다르고 너는 너 다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가정을 구성할 때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 어떠한 마음 자세가 가장 소중한가, 이것은 가정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를 다 부처님으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소중한 가정화합의 묘결(妙訣)은 없습니다.

 

친구지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친구를 부처님 같이 대접하는 것, 그보다 더 깊은 우정은 없습니다. 또 모든 사람을 다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서로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상대방을 부처님으로 생각하는 단계는 아직 이론적인 깨달음이지요. 그러나 참말로 어느 때 어느 순간에서나 부처님 같이 여실하게 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합니다. 이른바 명상이 필요합니다.

 

명상을 체험할 때 우리 마음이 맑게 닦아지고 생리가 바꿔집니다. 명상이라는 것은 분명히 우리 생리가 바꿔지는 것입니다. 욕심이나 진심(瞋心)으로 찌든 우리 지수화풍 사대가 청정한 사대 광명으로 이루어진 진정한 사대로 바꾸어지니 말입니다. 바꾸어지거니 우리 마음이 얼마나 통쾌하겠습니까?

하루 하면 하루 한 만큼, 한 시간 하면 한 시간 한 만큼 우리 마음도 통쾌합니다. 몸은 마음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몸뚱이도 거기에 따르게 됩니다. 따라서 가장 건강한 법입니다. 그래서 최고의 명상법, 불교적으로 말하면 최상승선이지요.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각 원자(原子)는 무엇으로 되었다 하는 것은 현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그런 것의 본바탕은 무엇인가, 이것을 현대과학은 모릅니다. 미세한 데까지는 이르렀지만 결국에는 마이너스, 플러스가 되어서 무엇인지 모르게 텅 비어버리면 과학이 어떻게 알겠습니까? 텅 비어버린 자리, 텅 비어버린 그 자체, 그 자리가 바로 불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을 불성에다 두어야 본체(本體)를 안 여읜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뜻을 굳세게 해서 육조단경이나 달마스님 어록을 보십시오. 우리 마음을 근원적인 데다 두란 말씀입니다. 화두를 왜 듭니까? 가령 이뭐꼬화두를 든다고 합시다. 끝끝내 이뭐꼬화두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화두를 빨리 타파해서 진여불성 자리, 생명의 근원 자리를 우리 보고 증명하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