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부처님 가르침 따라서 심천(深淺) 관계, 깊고 옅은 관계가 있습니다. 맨 처음 초기에서 말씀하신 법문은 일반 중생 근기(根機)에 맞추어서 있다 없다하는 우리 중생의 범부(凡夫) 소관에 맞추어서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고 또는 천상(天上)도 있고 이와 같이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하는 유교(有敎), 유교 입장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개한 것도 있는 것이고, 허나 나중에는 근기가 익은 다음에는 이러한 것은 모두 몽환포영(夢幻泡影)이다.
여환즉공(如幻卽空)이란 말입니다. 같을 여(如)자, 허깨비 환(幻)자, 곧 즉(卽)자, 빌 공(空)자, 일반 중생이 보는 것은 마치 허깨비같이 텅 비어있다 하는 그런 말씀으로 해서 참다운 부처님의 실상세계(實相世界)로 인도(引導)했고 말입니다. 허나 부처님의 진의(眞義) 이것은 그냥 다 비어있다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참다운 진리(眞理) 이것은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본래 빈자리는 허무(虛無)가 아니란 말입니다.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무량지혜(無量智慧) 무량공덕(無量功德)이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생이 보는 것은 다 비어있고 허망하다 하더라도 실상 이것은 무량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이런 가르침이 중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교시(敎示)는 맨 처음 초기에 있다 없다하는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하는 그런 유교(有敎), 그 다음에 중생이 보는 여러 가지 현상계(現象界)는 허망(虛妄) 무상(無常)하다는 이런 공교(空敎), 허나 다만 공이 아니고서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 하는 중도교(中道敎) 이와 같이 전개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무슨 법문을 생각할 때는 이것이 유교인가? 공교인가? 이것이 중도교인가? 이와 같이 판단할 수 있는 그런 생각이 있어야 오류(誤謬)를 안 범합니다.
어째 그런고 하면 같은 경전 내에도 부처님께서 그때그때 한꺼번에 체계(體系)있게 말씀하신 법문이 아니라, 지금 현대와 같이 과학적인 지식을 일반 대중에게 짐짓코 가르치기 위해서 애써 교안을 짜가지고 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그때 그때 갑(甲)한테는 갑대로, 을(乙)한테는 을대로, 박가한테는 박가대로, 그와 같이 말씀하신 법문을 나중에 주어 모아서 물론 그런 기억들이 잘되고 못되고 했겠지요, 잘못된 기억도 있는 것이고 한데 그렇게 주어 모아서 한 책을 만들어서, 원래 경전에서 하신 말씀이 처음과 끝이 똑같지가 않습니다.
어떤 경우는 공사상을 말했다가 어떤 대목에서는 유교를 말했다가 어떤 때는 중도를 말했다가 그와 같이 했기 때문에 중생이 아까 말한 것과 같이 3가지 견해, 공이라는 개념, 또는 중생 근기에 맞추어서 있다는 개념, 또는 다만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다만 빈 것도 아닌 것이고 실상에는 여러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다는 그런 중도의 개념, 이런 3개념을 놓고서 봐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류를 범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불법은 아무리 쉬운 법문이라 하더라도 쉬운 법문 싶어도 역시 항시 부처님의 진리가 거기에 담겨 있어 놔서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은 초심문(初心文;初發心自警文) 같은 것도 역시 원래는 깨달은 사람이 해야만 바른 강의를 한단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제법문(四諦法門)이나 삼보(三寶)나 그런 법문은 언제 들어도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기 전에는 다 미혹한 것이니까. 불법승(佛法僧) 삼보라, 안다고 하지만 결국은 알둥말둥하는 것이지 참답게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수십 번 들은 것도 역시 부처님 법문은 누가 말하나 어린애가 말하나 항시 새로운 것입니다. 이런 점이 있기 때문에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서 불경(佛經)을 들을 때는 해태심(懈怠心)이 없이 잘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는 삼보(三寶)를 말씀 했는데 삼보는 아는 봐 같이 불보(佛寶), 법보(法寶), 승보(僧寶) 아닙니까. 하여튼 이 세상에서 가장 보배가 삼보인데 그 가운데서 법보, 법보를 들어내서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법보는 어제도 말씀을 했습니다만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12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蜜), 그러한 법문을 주로 해가지고 일체 경전의 법문을 망라해 있단 말입니다. 줄여서 얘기하면 사제, 팔정도, 12인연법, 육바라밀, 이와 같은 법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인 들은 비록 어려운 것은 좀 모른다 하더라도 물론 쉬운 것 가운데도 어려운 것이 들어 있지만 우선 사제, 팔정도, 12인연법 이러한 것은 정확히 해야 합니다.
지금 불교책 나온 것을 좀 보면 가사 팔정도 풀이만 본다 하더라도 무책임한 풀이가 많이 있단 말입니다. 사제법문에서 훌륭한 강사들이 번역한 것도 보고 여러 가지 보았는데, 첫째 사제법문의 고집멸도 가운데 멸이라는 풀이에서 굉장히 큰 오류를 범했단 말입니다. 나중에 해 나가면서 지적을 하겠습니다만 아무튼 사제 이것은 넉 사(四)자, 진실할 체(諦)자인데 음 따라서 ‘체’자 그대로 해서 ‘사체’ 그렇게 발음하기도 합니다만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할 필요는 없고, 일반적으로 ‘사제’라 하는 것입니다.
사성제(四聖諦)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이것은 ‘사제(四諦)를 사성제(四聖諦) 사진제(四眞諦)라고도 운(云)하며’ 말이 어색한 부분도 있지만 여러분들한테 학인(學人)들한테 한문자를 습득을 시키기 위해서 짐짓코 한문자를 될수록 많이 넣습니다. 이를 운(云)자, ‘무엇 무엇이라 말한다’ ‘사성제 또는 사진제라고도 말하며’, ‘성자(聖者) 소견(所見)의 진리(眞理)이다.’ 성자나 성인(聖人)이나 같은 뜻입니다. ‘성자가 보는 바의’ 바 소(所)자, 성자가 보는 바의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이것이 사제란 말입니다.
일반 범부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도(外道)와 정도(正道)를 어떻게 구분하는 것인가? 여러 가지 구분이 많이 있으나 외도는 사진제 풀이를 못하고, 정도만이, 우리 부처님 가르침만이 사성제를 그대로 진리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를 모르면 불교인이라고 할 수가 없지요. 인생고(人生苦)가 무엇인가? 사회고(社會苦)가 무엇인가? 어느 경제인이 잘못해서 굉장히 사회 혼란를 야기 시키고 그러한 여러 가지 사회적 모순을 말할 때, 그 원인을 해부할 때에 함부로 말하나, 자기 개인적인 인생고나 사회 고나 또는 세계적인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그런 모순되는 문제 같은 것이 원인이 어디가 있는 것인가?
원인은 역시 무어라 해도 불교에서 말하는 이 사성제 가운데 고(苦)의 원인인 집(集)에가 있단 말입니다. 사성제는 여기 있는 봐 같이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란 말입니다. 괴로울 고(苦)자, 진실할 제(諦)자, 고제(苦諦), 모을 집(集)자, 진실할 제(諦)자, 집제(集諦), 멸할 멸(滅)자, 진실할 제(諦)자, 멸제(滅諦), 그다음에 길 도(道)자, 진실할 제(諦)자, 도제(道諦)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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