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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2

 

 

사성제(2)

 

3. 멸제(集諦)

 

멸제(集諦), 멸할 멸(), 진실할 제(), 열반(涅槃)을 말합니다. 멸제나 열반이나 같은 뜻으로 쓰입니다. 열반 이것은 바로 풀이하면 영생(永生)이라, 영생한다. ()을 단순히 번뇌를 멸한다. 이정도로만 생각해서는 너무나 소극적입니다. 따라서 사제(四諦)를 풀이할 때 앞서 얼핏 지적했지만 멸제를 그냥 번뇌만 멸한다. 이런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은 그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춘 영생, 영생의 지혜(智慧), 영생의 생명, 이것이 열반인 것입니다. 이것이 멸제이고 말입니다.,

 

일반 외도(外道)는 결국 멸을 모릅니다. 멸 이것은 정도(正道) 밖에는 모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사 산중(山中)에 가서 공부한다 하더라도 멸()을 구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해야지 멸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어정쩡한 것을 목적으로 하면 그때는 그냥 상()에 걸리고 만단 말입니다. 구경(究竟) 목적, 일체 번뇌를 멸하고서 영생하는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하고 그러한 구경적인 끄트머리 목적인 멸을 구해야만 참다운 공부인 것입니다.

 

가사 나중에 공부를 하겠지만 사선정(四禪定) ()을 닦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멸을 안 구하면 그때는 외도에 그친 것이고 말입니다. 멸을 목적으로 해서 멸을 구하면 그것이 정도인 것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보시(布施)를 한다 하더라도 멸()을 구하면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도업(道業)인 것이고, 멸을 아니 구하고 서는 나중에 칭찬의 말이나 듣고 보답이나 받고 하는 것은 선업(善業)에만 그쳐서는 멸과는 관계가 없단 말입니다. 즉 말하면 해탈(解脫)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같은 행()도 멸을 구해서 해탈을 구하는 - 해탈을 구하면 정도인 것이고 해탈을 안 구하면 즉 유위적(有爲的)인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어떠한 공리(功利)를 구하면 그때는 그것이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순교(殉敎)한다 하더라도, 기독교에서는 순교를 많이 안합니까만 순교를 해도 역시 아까 말마따나 해탈을 구하고 하면 그것이 정도란 말입니다. 해탈을 못 구하고 다만 인류(人類)를 위해서 한다.’ 이것은 하나의 속인들이 하는 범부의 하나의 제한된 것밖에는 못되는 것입니다.

 

 

멸제(集諦)란 곧 열반(涅槃)으로서 열반(涅槃)이란 혹업(惑業)을 멸()하고 생사(生死)의 고()를 출리(出離)한 진공적멸(眞空寂滅)의 경계(境界)니 오()의 과(). 이는 - 이것은 - ()은 미혹할 혹(), 혹 이것은 번뇌(煩惱)하고 똑같은 뜻입니다. 혹업(惑業) 그러면, 미혹할 혹(), 업 업(), 이는 혹업(惑業)을 멸()하고 - 이것은 혹업(惑業)을 없애고서 - 다시 말하면 아까말한 탐진치(貪嗔痴) 이것이 혹()입니다.

 

본래 혹이 없는 것을, 번뇌(煩惱)에 따라서 행동(行動)하는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이 업()인 것이고, 따라서 탐진치(貪嗔痴)와 선악(善惡)의 제업(諸業)을 한꺼번에 말할 때 혹업(惑業) 그래요. 번뇌와 여러 가지 업을 멸하고서 생사고(生死苦)를 낳았다 죽었다 하는 삼계윤회(三界輪廻)하는 생사고를 출리(出離)하여 날 출(), 떠날 리(), 여의고서 떠나서 진공적멸(眞空寂滅), 우리는 진공(眞空)과 단공(但空)과 구분해서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불교라는 것은 굉장히 심오(深奧)하기 때문에 자칫 개념이나 술어를 잘못하면 오류를 범합니다.

 

일반 공() - 다 비었다 하는 허무(虛無)의 공 - 이것은 단공(但空) 그러는 것이고, 다만 단(), 빌 공(), 단공(但空)인 것이고, 다만 비지 않고서 공 가운데는 그야말로 신비(神秘) 불가사의(不可思議) 하고 무량무변(無量無邊)의 공덕(功德)이 충만(充滿)해 있다. 이것이 진공(眞空)이란 말입니다. 소승(小乘)은 단공을 말하고 진공은 모릅니다. 진공은 반드시 묘유(妙有)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일반 소승은 단공만 생각하기 때문에 너무나 허무에 빠져가지고 중생 제도(濟度)는 못하고 자기만 편안하고 만다 말입니다.

 

진공적멸의, 고요할 적(), 멸할 멸(), 적멸(寂滅)도 그냥 가만히 있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번뇌가 발동(發動)하지 않고서 영원히 안락(安樂)스러운 경계(境界), 이것이 적멸인 것입니다. 멸 이것은 아까말한 바와 같이 모두를 멸하는 즉 말하자면 번뇌를 멸해 버려서 영원히 안락스럽고 영원히 안온(安穩)한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바로 영생(永生)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열반(涅槃)이나 적멸(寂滅)이나 그냥 멸()이라고 하나 이것은 똑같은 뜻인 것입니다. 영생(永生), 열반(涅槃), 적멸(寂滅), (), 다 똑같은 뜻입니다. 다만 표현만 달리했을 뿐입니다. ()이라, ()의 과()이다. 깨달음의 결과란 말입니다. 여기서 보아 온 바와 같이 부처님 가르침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조금도 합리적인 뜻에 어긋남이 없습니다.

 

먼저 중생경계(衆生境界), 우리가 받는 것은 결국 우선 우리 중생은 고() 아닙니까. () 아님이 없단 말입니다.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다른 고()는 그만 두고라도 인간의 한계상황(限界狀況)인 생로병사(生老病死), 업이 있으면 결국은 태어나야 하는 것이고, 태어나면 늙어야 하는 것이고, 아파야 하는 것이고, 결국은 죽어야 하는 한계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인간에는 고가 있는 것인데, 그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 이외도 고가 많이 있지만은 하여튼 고의 일체 원인은 아까도 말한바와 같이 번뇌와 번뇌에 따라서 행동하는 행()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면 집()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고가 있고, 인생고의 원인인 집()이 있고 말입니다. 허나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인생고만 있고 또 고의 원인이 번뇌만 있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뭐 살 필요가 없지요. 우리 인생이 이런 고와 집밖에 없다면 그때는 자살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어디 갈 곳도 없고 우리가 나아갈 필요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지금 노이로제라든가 사회적인 여러 가지 번뇌 때문에 이상스러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만 그런 것은 무엇인고 하면, 제법 그래도 판단은 하기 때문에 인생고는 본단 말입니다. 인생고는 보고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도 대강은 봅니다. 대강은 보지만은 인생고의 원인인 집을 우리가 어떻게 떠날 길이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못 떠나는 것입니다. 불교 아니면 결국은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교가 되어야 인생고(人生苦)를 떠나서 영생(永生)의 안락세계(安樂世界)로 갈 수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멸()이 있어야 만이 결국은 비로소 우리 숨통이 트인단 말입니다. 멸이 없으면 숨통이 못 트이는 것입니다. 어디가 트일 수가 있습니까? 내내야 고를 짓고, 고의 원인을 짓고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이와 같이 즉 말하자면 윤회(輪廻) 가운데서 고를 짓고 받고 또 고를 짓고, 또 윤회하고 그런 가운데서 뱅뱅 개미 쳇바퀴 돌듯이 돌고만 있단 말입니다.

 

다행히 그야말로 참 석가모니 가르침 또는 성인들의 가르침으로 해서 고를 떠나서 집()을 우리가 벗어버리고서 해탈의 멸이 있단 말입니다. 멸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모른다 하더라도 그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해탈의 길, 해방되어서 갈 길을 안다는 것만 두고 보더라도 이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우리한테는 큰 도움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의 원인을 지어서 우리가 고를 받는 것이고, 허나 그 반대의 해탈 즉 말하자면 영생의 멸이 있고, 또 멸에 이르려면 그냥 무조건(無條件) 하고 가는 것이 아니라 또 역시 이런 고집(苦集)을 고와 집을 없애는 도()가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내내야 우리가 집()을 지어서 고()를 받으니까 우리가 멸()에 갈라면 마땅히 그때는 순리(順理)로 본다고 할 때 고와 집을 멸해야 쓰겠지요. 고와 집을 멸하는 이것이 여기 있는 도()란 말입니다. 도제라, 팔정도란 말입니다. 물론 여러 가지 우리 수행법이 많이 있지만 간추리면 여덟가지 바른길이란 말입니다.

 

4. 도제(道諦)

 

도제(道諦)란 곧 팔정도(八正道)로서 능()히 열반(涅槃)에 통()하는 도()이니 오()의 인()니라. 이는 능히 열반에 통하므로 도라 이름하며 바로 오()의 깨달음의 원인이다.

 

우리 현대인들은 어느 정도 고의 원인은 약간씩은 좀 안다 하더라도 -확실히는 모르지만 - 고의 원인을 제거하는 팔정도를 제대로 지키지를 못한단 말입니다. 그러하니까 팔정도에서 오는 멸()의 그런 해탈(解脫)의 행복(幸福)은 우리가 얻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門)은 그야말로 참 불교의 대(() 또는 현(() - 대승(大乘), 소승(小乘), 현교(顯敎), 밀교(密敎) 말입니다. 모든 불교를 결국은 관통(貫通)해 있는 하나의 대 진리(眞理)인 것입니다. 어떤 가르침이든 불교 가운데 가서 이와같이 사제법문이 안 들어 있는 데는 없습니다. 조금 더 어디다 역점을 두는가 그런 차이는 좀 있다 하더라도 사성제의 진리로 해서 일괄(一括) 되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따라서 사성제가 들어 있으면 그때는 불법(佛法)의 참다운 正道(정도)인 것이고, 안 들어 있으면 참다운 불법이 못 된다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