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修行法) 가운데서 수행법이 많이 있으나 세 차원(次元)으로 나누어서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제법문(四諦法問), 사제법문 이것은 성문승(聲聞乘) 그래서 성문승은 소리 성(聲)자, 들은 문(聞)자, 부처님의 법문(法問)을 듣고서 겨우 알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성문승입니다. 성문승에 대해서 하는 법문이 사제법문인 것이고,
그다음에는 근기로 봐서는 조금 더 나아져서 부처님 말씀도 안 듣고 또는 딴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을 안 듣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색(思索)도 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이치(理致)를 안단 말입니다. 그러한 사색적인 그런 분들이 하는 수행법이 여기 있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나은 수승한 분들 그분들은 명색이 보살(菩薩)들인데 보살 근기는 그때는 스스로 사색도 하지만은 또한 동시에 주로 모든 중생(衆生)을 만중생(萬衆生)을 제도 하겠다 하는 그런 서원(誓願)이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 성문승(聲聞乘)이나 또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연구하는 연각승(緣覺乘)이나, 연각승들은 그때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그런 넓은 서원은 별로 없습니다. 헌데 그런 서원을 세운 분들 즉 보살근기는 그때는 육바라밀(六波羅密)로 공부한단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부처님 경론(經論)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한말로 말하면 아까도 말씀마따나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이나 그런 분들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성문승, 소리 성(聲)자, 들을 문(聞)자, 탈 승(乘)자, 승차한다는, 남의 말을 듣고서 공부한단 말입니다.
그런 성문승과, 성문승은 우리가 배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좀 더 나은 근기가 십이인연법인데 이것은 연각승 그래서 인연 연(緣)자, 깨달을 각(覺)자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별로 말도 안 듣지만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자기 선근(善根)으로 해서 생각을 많이 해서 사색하고 스스로 참구(參究)해서 깨닫는 그러한 근기가 닦는 그런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 한대로 육바라밀, 이것이 부처님 일대시교의 세 가지 공부하는 법의 대요(大要)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問),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密)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기초법문을 몇 가지만 외워 버리면은 무슨 경(經)을 본다 하더라도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초를 우리가 안 들어놓으면 그때그때 무슨 말이 나오면 무슨 말인지 즉 말하자면 불교(佛敎) 술어 때문에 자꾸만 막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佛敎) 공부라는 것은 먼저 기본적인 기초의 불교 술어를 해석을 해야 합니다.
헌데 특히 십이인연법이 중요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에 부처님이 몸소 하신 수행법(修行法)입니다. 과연 내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부처님이 자기 생명의 근원(根源)을 탐구(探究)한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내가 지금 존재(存在)하지만은 과거(過去)에 나는 무엇일 것인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탐구했단 말입니다. 또한 나는 죽어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기 미래(未來)를 사색을 하고 그와 같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사색을 하면서 자기 생명의 소재를, 내 생명은 대체로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생명의 소재를 탐구한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불(成佛)하실 때도 다른 공부도 물론 탐구를 하셨지만은 특히 십이인엽법을 탐구해서 깨달으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학인(學人)들이 한문(漢文) 실력이 없으니까 한문자를 그때그때 말이 좀 어색하지만은 한문자를 많이 넣었습니다. 넣고 또 한문자를 읽을 테니까 그리 알고서,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인(因), 이것은 원인이란 인입니다. 인연 연(緣)자, 법 법(法) 이것은 치우칠 벽(辟), 또는 물리칠 벽(辟)자,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법 법(法), 새로울 신(新), 풀 역(譯), 번역한다고 풀 역(譯)자, 풀이한다고 말입니다.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예 구(舊)자, 이것은 약자입니다. 신구(新舊) 할 때에 말입니다. 새로운 것은 신(新)자 쓰고 낡은 것은 구(舊)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예 구(舊)자, 풀 역(譯)자,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이것도 인연관(因緣觀),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지불관(支佛觀), 이 차(此), 무리 중(衆), 날 생(生), 석 삼(三), 인간 세(世), 이것은 건널 섭(涉)자, 간섭(干涉)한다고 할 때에 이자를 씁니다. 또는 섭렵(涉獵)이라, 섭렵이라는 것은 책이나 모다 이것저것 모든 학문(學文)도 많이 공부도 하고 또는 경험(經驗)도 하고 그런 것 보고 섭렵 그러지요.
길 도(途), 이 자는 길 도(道)자와 같이 쓰입니다. 같이 쓰이나 진리(眞理)라고 말할 때는 길 도(道)자를 쓰는 것이고, 또는 진리 외에 무슨 방도나 무슨 방법이나 그런 때는 이자를 쓰는 것입니다. 같은 '길 도'라고 말하지만은 아까 말마따나 진리를 말할 때는 즉 보리(菩提)나 또는 진리(眞理)나 그렇게 말할 때는 길 도(道)를 쓰는 것이고, 그 외에 가사 육도윤회(六途輪廻)한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이와 같이 육도윤회 한다. 그런 때 육도는 이런 도(途)자를 쓰는 것입니다.
바퀴 륜(輪), 돌 회(廻), 윤회(輪廻)라 한단 말입니다. 윤회, 빙빙 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끝도 갓도 없이 개미 쳇바퀴 모양으로 빙빙 돈단 말입니다. 윤회, 버금 차(次), 차례 제(第),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말씀 설(說), 십이인연법 이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벽지불의 관법(觀法)으로서, 벽지불은 어떤것인고 하면은, 성자(聖者)를 성인(聖人)을 불교(佛敎)에서 세 차원(次元)으로 구분합니다. 부처(佛)가 있고, 또는 그다음에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인데 부처를 제외한 성자는 세 등급으로 구분합니다.
즉 말하자면은 가장 높은 성자가 보살 아닙니까. 그다음에 벽지불입니다. 벽지불이고, 그다음에가 아까 말한 성문승, 성문입니다. 또는 나한(羅漢) 그러는 것이고 다시 말합니다만 부처와 합치면 성자를 네 속성으로 구분하지만은 부처님을 때어 놓으면 성인들을 세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부처 다음에는 보살, 벽지불, 벽지불보고 연각 그래요. 연각이라고 말합니다만은, 그러고 아라한(阿羅漢) 말입니다.
보살, 벽지불, 아라한, 아라한은 나한(羅漢)이지요. 즉 말하자면 이것은 도(道)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구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성취(成就)해서 일반중생과 더불어서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그런 정도는 보살인 것이고 말입니다. 자기만 닦아서 겨우 자기 생명의 근원을 아는 정도 그것이 여기 있는 벽지불이란 말입니다. 또한 성문은 이것은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남의 말을 듣고서 깨달은 즉 말하자면 아라한, 아라한 이것이 성문법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벽지불, 아라한과 그 위에 있는 보살 합해서 3성인입니다. 부처와 합치면 그때는 4성인이 되겠지요.
한데 이것은 벽지불, 그러니까 불교 법문에는 이것이 다 통용(通用)이 됩니다. 통용이 되나 특별히 어떤 성품(性品)은 어떤 공부를 한다. 그런 특별한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 앞서 말씀마따나 근기가 낮은 사람들은 사제법문(四諦法問)으로 해서 공부하고 말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그래서 꼭 그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불교에 다 통해있단 말입니다. 여기 있는 십이인연법, 이것도 역시 주로 벽지불, 즉 말하자면 자기만 탐구하는 그런 분들이 주로 공부하지만은 또 역시 불교를 전부다 통관하는 법문인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이 아무리 쉬운 법문도 역시 근원을 꿰뚫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 자체가 이것이 원래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탐구(探究)하는 가장 고도한 철학(哲學)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리 쉽게 해도 역시 하다 보면 결국 어렵게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를 통관해서 관찰하니까 말입니다.
이것도 내내야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살고서 먹고살고 경제(經濟)문제 생각하고 정치(政治)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면 쉽습니다만 인간(人間) 생명의 근본(根本)을 생각할 때는 그때는 역시 문제가 어렵단 말입니다. 인류역사(人類歷史) 오랜 동안 개벽(開闢)이래 몇 만년 동안 이렇게 되는 것이고 또는 역사시대(歷史時代)만 두고 보더라도 벌써 몇 천년 동안인데 말입니다.
그런 동안에 사람이 무엇인가? 인간성이 무엇인가? 그 문제를 탐구해 봤지만은 사실은 딴 것으로는 확연히 해답을 못 내린단 말입니다. 그런 오랜 동안에 우리 인류(人類)가 탐구하고 탐구해서 해답을 못 내린 그런 문제기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학인들도 역시 그런 것을 생각해서 공부를 해야지 까다롭다 그래 버리면 불교(佛敎)는 할 수가 없지요. 이와 같이 교리(敎理)로 해서는 어려운 것이니까,
허나 불교라는 것이 내내야 어려운 그것이 우리 마음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참선(參禪)은 교리만 따지고 있어놓으면 자기 평생을 다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문자를 떠나서 오직, 내내야 불교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 깨닫는 하나의 방편(方便)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자(文字)를 떠나서 마음만 닦으면 된다. 그래서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이 있는 셈 아닙니까. 사실은 교리는 아무것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부처인지를 믿고서 닦으면 그때는 되는 것입니다.
![](https://blog.kakaocdn.net/dn/NqYeR/btsaw6ieH5D/UrAvAtXA8j5jk5eJujt8L0/img.jpg)
'4. 청화 큰스님 법문집 > 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미타불이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6 (1) | 2023.05.01 |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5 (0) | 2023.04.24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3 (0) | 2023.04.10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2 (0) | 2023.04.03 |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1. (1) | 2023.03.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