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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5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805

 

(2)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허나 현대란 사회가 하도 복잡하고 갈래가 많고 불교도 여러 가지 복잡해놔서 어느 정도 체계가 안서면 확신(確信)이 안 선단 말입니다. 체계가 딱 서야만이 딴 삿된 것하고 구분해서 아는 것이고 확신이 섭니다. 같은 불교(佛敎)도 아시는 바와 같이 18종파, 종파들마다 각기 자기 종파가 옳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있어놔서 우리가 어느 체계가 안 서놓으면 무엇이 무엇인가 한계를 몰라버립니다.

 

과연 어느 것이 좋은가? 어느 것이 그른가? 한계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지만은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은 나왔으니까 충분히 인생철학(人生哲學)을 공부할 수 있는 시기(時期)인 것이니까 그리 알고서 아까 내가 말한 부처님 당시에 말씀하신 사제법문(四諦法問),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 말입니다.

 

인생고(人生苦), 인생고의 원인인 집(),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인 멸(), 또는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인 도(), ()는 저번에 말한 팔정도(八正道) 말입니다. 그런 사제법문과 십이인연법과 앞으로 배울 보살의 육바라밀법, 이런 정도는 우리가 명확히 명념(銘念)을 해야 쓴단 말입니다.

 

이는 벽지불의벽지불이란 즉 말하자면 자기만 주로 공부하는 그러한 근기의 관법(觀法)으로서’ - 관조(觀照)하는 법으로서 - 불교의 수행법(修行法)은 따지고 보면 전부가 모두가 다 관법(觀法)입니다. 관조(觀照)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내내야 네가 있다 내가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못 보는 것인지라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법(正法), 바른 식견(識見)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랜동안 관조(觀照)함으로 해서 관찰(觀察)함으로 해서 그때는 우리 번뇌(煩惱)를 맑히고서 진리(眞理)를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행법(修行法)은 모두가 사실은 한 말로 말하면 관법(觀法)이지요. 모두가 다, 어떻게 관()하라, 어떻게 관조(觀照)하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 업()으로 진리(眞理)가 안보이지만은 결국은 진리를 관조함으로 해서 차근차근 그때는 진리하고 하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관법으로서 신역(新譯)으로는그러니까 불교가 복잡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같은 번역도 중국(中國)에서 주로 인도(印度)말로 하는 그런 번역도 신역, 구역이 있습니다. 구역(舊譯)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란 그분이 한 번역이 구역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연대(年代)가 위지요.

 

신역(新譯)은 현장법사(玄獎法師), 현장법사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요. 손오공(孫悟空) 데리고 인도(印度)에 가서 법()을 구한 현장법사, 현장법사 이후에 번역(飜譯)한 번역이 신역입니다. 즉 말하자면 연대가 좀 새로운 번역이란 말입니다. 허나 그와 같이 새롭고 구역이고 하는 것도 역시 그 당시에 말한 것이고 사실은 그야말로 현장법사도 벌써 지나간지가 천년세월 넘습니다.

 

신역(新譯)으로는 십이연기(十二緣起), 구역(舊譯)으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이며그러니까 열두 가지 속성으로 해서 인생(人生)의 낳고 죽고 하는 그런 문제를 풀이했단 말입니다. 인생의 낳고 죽고 하는 문제가 십이인연법에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말마따나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를 이와 같은 사색(思索)으로 해서 공부했단 말입니다. 즉 이와 같은 관법(觀法)으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관(因緣觀)이라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因緣法)이라, 인엽법이라는 것도 역시 이런데 가서 근원(根源)을 둡니다. 인연법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인연이라, 좋으나 궂으나 인연이다. 그와 같이 쉽게 말 하지만은 인연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불교(佛敎) 전부를 다 포섭한 심심미묘(深深微妙)한 법문(法門)인 것입니다. 인연이란 말입니다.

 

원인(原因)이 있으면 연()이 있고, ()이 있으면 과()가 있고 말입니다. 인과(因果), 인과라 할 때는 인(()() 가운데서 연()을 빼버리고 간단히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허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 하면은 인연과(因緣果)라 해야 쓰는 것입니다. ()과 연()과 과()말입니다.

 

원래 종자(種子), 가사 우리가 종자를 둔다고 하면 종자는 인()에 해당하고, 종자를 움트게 하는 땅이나 일광(日光)이나 수분(水分)이나 비료나 이런 것은 연()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는 그것은 과()에 해당하는 셈 안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과(因緣果)로 해서 생성(生成) 소멸(消滅)해 갑니다.

 

인연관(因緣觀)이나 지불관이라고도 한다.’ ‘벽지불자를 빼버리고서 그냥 지불이라고도 간단히 말합니다. 지불관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는 중생(衆生)이 삼세(三世)삼세 이것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과거, 현재, 미래(未來)를 통해서 육도(六道)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이 죽고살고 갔다 왔다 하는 경계(境界)가 육도(六道)안 되겠습니까. 가장 나쁜 갈래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이고 말입니다.

 

이것 보고는 나쁘니까. 삼악도(三惡道)그러지요. 세 가지 악도(惡道)라 그래서 삼악도, 그 외에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아수라(阿修羅)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아수라도 역시 아주 힘이 굳센 귀신(鬼神)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 방식도 모르고 산에 가서 공부하면 더러는 아수라(阿修羅)가 시켜(씌워) 가지고서 굉장히 힘도 내고 아는 척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지만은 깊은 산중에나 바다 가운데나 그러한 데서 존재하는 대력신(大力神), 큰 힘을 가진 신()이 아수라 신인데 아수라하고 인간하고 천상 이것은 좋은데라고 해서, 물론 극락(極樂) 같은 그런 곳은 못 되겠지만 하여튼 악도에 비해서는 좋다고 그래서 삼선도(三善道), 착할 선(), 삼선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三惡道) 하고, 아수라 인간 천상 삼선도(三善道) 합해서 육도(六道)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육도에 우리 중생은 갔다 왔다, 갔다 왔다 합니다. 앞에처럼 모두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업()을 지으면 그때는 인간보다 못하게 태어나고 말입니다. 가사 금생(今生)에 요새 사람들 모양으로 잘 싸우면 죽어지면 아수라(阿修羅)로 태어나가지고서 싸움을 좋아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남을 많이 죽이면 지옥(地獄)으로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십선업(十善業)이라, 십선업을 닦아서 말조심하고 행동주의하고 마음으로 항시 맑은 마음 가지시면 천상(天上)가서 태어나고 말입니다. 또는 그런 죄악의 씨앗을 다 없애고서 완전무결하면 그때는 극락(極樂) 가서 태어나는 것이고, 그와 같이 우리가 태어나는 것인데, 우선 우리 중생(衆生)할 때는, 극락(極樂)은 성자(聖者)만 가는 곳인지라, 일반 중생한테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악도(三惡道), 삼선도(三善道)란 말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와 싸움을 좋아하는 아수라와 또 인간과 천상이란 말입니다. 이런 육도(六道)에 윤회(輪廻)하는뱅뱅 돈단 말입니다. 뱅뱅 도는 차제(次第)연기(緣起)인과가 차례로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을 말씀한 이것이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생명(生命)에 가장 접근된 가장 밀접한 법문인 것입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말입니다. 왕자고 누구고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내내야 결국은 십이인연법의 범주(範疇)내에서 윤회(輪廻)하는 가운데서 인간으로 잠깐 나왔을 뿐입니다.

 

죽어지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업()따라서 자기가 지은 행위(行爲) 따라서 내세(來世)에 가서 과보(果報)를 받을 뿐이라 놔서 우리 중생은 내세가 안보이니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그야말로 참 캄캄한 것입니다. 내가 과거(過去)에 어디서 왔는가, 또한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재모실 때에 항시 듣는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하고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우리 생()이란 대체 어디서 왔는가?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천박(淺薄)한 사람들은 그냥 보아 넘깁니다만 역시 깊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생명(生命)의 본질(本質)문제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적(自然的)으로 그런 문제를 생각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음이 임박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