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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9

 

 

 

200185일 보살계(菩薩戒) 수계식(1)

 

우리 중생(衆生)들이 상()으로 관찰하면은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구분이 있습니다. 나 따로 있고 너 따로 있고 그와 같이 구별이 됩니다만은 우리가 본래적(本來的)인 근본(根本)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근본에서 관조(觀照)할 때는 모두가 다 하나의 자리로 귀일(歸一)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聖人)들은 그와 같이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로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의 구분도 없는 것이고 또는 근원적인 의미에서는 내 것과 남의 것의 구별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차원에서 그렇게 보는데 있어서 가지가지의 갈등(葛藤)이 생기고 부조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불자님들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습니다. 보살계는 이것은 다른 계율(戒律)과 다릅니다. 가령 무슨 계율을 지킨다. 살생을 말라, 거짓말을 말라, 이와 같이 금계(禁戒)적으로 단순한 금욕적(禁慾的)으로만 하는 그런 계율은 일반 보통 계율입니다.

 

그러나 보살계라는 것은 마치 공자님이 내가 지금 70에서 종심소유(從心所有)하야,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法道)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듯이, 공자가 어째서 70에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고 하겠습니까. 그것은 공자님은 70이 되어서 우주의 본바탕을 훤히 깨달았단 말입니다. 우주(宇宙)의 진리(眞理)의 당체(當體)를 본바탕을 깨닫고 보니까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또는 우주는 하나의 몸이기 때문에 자기개인의 애고를 위해서 자기개인의 욕망(慾望)을 위해서 남을 피해를 주고 남한테 신세를 끼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인식론적(認識論的)으로 모두를 대상(對象)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분명히 구분이 있습니다. 구별이 있고, 허나 우리가 존재론적(存在論的)으로, 존재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우주가 지금 현재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 구별이 없단 말입니다. 요새 철학도 실존철학(實存哲學)이 있고 또는 분석철학(分析哲學)이 있고 철학의 주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실존철학 이라는 것은 우주의 실상(實相)을 밝힌 철학이란 말입니다. 우주의 실상은 어떠한 것인가?

 

겉에서 보면은 천차만별(千差萬別)로 이것저것 차이가 있지만은 그 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하나란 말입니다. 지금 지구상에서 큰 바다에 가서 보나 다도해(多島海)에 가서 보나 그 무수한 섬들이 있지 않습니까. 섬을 바다 위에서 보면 그건 섬이겠지요. 그러나 바다의 바탕에서 바닥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섬이 아니라 하나의 지구(地球) 덩어리 육지란 말입니다. 그와 똑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번에도 우리 불자님들께서 존경하신 여러분들께서 정말로 45일 동안 열심히 공부 하셨습니다. 50이 넘으신 노숙한 교수님들도 계시고 그런데 참 고생도 많이 하시고 보람 있는 정진(精進) 기회였습니다.

 

그동안에 자기 업장(業障) 따라서 얼마만치 공부가 되었는가 하는 것은 차이가 있겠습니다만은, 그것이 소중한 공부인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다만 고생만 했다 하더라도 고생그것이 절대로 헛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 할 때는 인생(人生)이라는 것이 고해(苦海)이니까, 사바세계가 바로 고생 바다인 고해이니까, 그 고해에서는 어느 누구나가 다 고생스럽습니다. 아무리 행복스러운 분도 생노병사(生老病死)라 하는 한계 상황을 넘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외에도 얼마나 모순(矛盾)이나 부조리가 많습니까. 이런 가운데서 고생뿐이란 말입니다. 고생뿐인데, 그 고생이 아무런 필요가 없는 것인가? 고생이 절대로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고생으로 해서 우리의 다생겁래(多生劫來)로 지은 업장을 녹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못살아서 지옥(地獄)에 떨어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성문(聲聞), 연각(緣覺), 보살(菩薩), 부처 이것이 이른바 우리 중생이 생사내왕(生死來往)하는 그러한 세계인데, 이런 세계가 모두가 다 우리의 업() 따라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던가?

 

우리 생명(生命)이라는 것은 금생(今生)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다생겁래라, 한도 끝도 없이 우리 생명은 연속이 됩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불생불멸이라, 우리 생명 자체는 절대로 죽엄이 없습니다. () 따라서 모양만 바꿀 뿐이란 말입니다. 금생에 죽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아쉬웁게 생각하고 서운하게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는 죽자마자, 죽자마자 1초의 시차도 없이 그냥 또 생()을 받는단 말입니다. 보통은 다 우리 생명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본래가 하나의 실상(實相)이란 말입니다. 본래가 실상이란 그 말은 무슨 뜻 인고 하면은 본래가 부처라는 뜻입니다. 부처만이 참다운 실존(實存)이고 참다운 실상입니다.

 

우리가 인식적으로 말하면 바로 그 자리가 우주(宇宙)의 본 성품(性品)자리란 말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는 우주 에너지의 우주의 생명자리이기 때문에 그냥 보통 무생명인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우주 생명자리는 그냥 보통 제한되고 또는 능력(能力)도 한계가 있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능력(能力), 한도 끝도 없는 자비(慈悲), 행복(幸福) 이런 것이 다 갖춰 있는 자리란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자리가 인격적으로 생명적으로 표현하면은 바로 부처님 아닙니까? 부처님이나 우주 에너지라는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것과 내생명이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다른 사람 생명도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남한테 베푸는 보시(布施) 행동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보통 겉으로만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하니까 내가 좀 도와 줘야 쓰겠구나. 이런 것은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애견대비(愛見大悲). 애견대비라, 중생적인 애착(愛着)을 미처 못 뗀 그런 자비심(慈悲心)이란 말입니다.

 

참다운 베풀음은 무었인것인가? 저 사람과 나의 생명이 본래로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으로 보아져야 실상자리입니다. 실존자리입니다. 원래가 하나의 생명인데 실상은 바로 하나의 생명인데 우리 중생이 그렇게 보지를 못하니까 너 따로 나 따로 란 말입니다. 그래서 보살계는 바로 불성계(佛性戒), 부처 불(), 성품 성()자 불성계라,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계()가 아니라 바로 우주의 본성(本性), 우리 인간의 본성자리에서 본성을 밝히는 계란말입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공자님이 70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 그런 자리가 바로 불성에 비추어서 우리 마음이 불성에 안주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 주체성(主體性)은 바로 불성(佛性)입니다. 우리 실존은 바로 불성입니다. 불성에다가 우리 마음을 두고서 행동한다고 생각할 때는 나와 남이 둘이 아닌 것이고 다른 동물과 나도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풀포기, 하나의 돌멩이도 사실은 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학적(哲學的)으로 물활론(物活論)이라, 물활론이란 것은 물질이란 만물 물(), 살 활()자 어느 것이나 유정무정(有情無情), 유상무상(有相無想) 모양이 있는 것이나 모양이 없는 것이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가 다 생명이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물활론입니다. 여러분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식정보화(知識情報化)시대 아닙니까? 지식정보화 시대라는 것은 정보의 홍수, 너무나 많은 정보들, 이런 정보들을 우리가 어떻게 소화를 시켜야 할 것인가? 소화를 못 시키면 항시 마음이 불안스럽습니다.

 

그래서 이 지식정보화 시대에 있어서는 우리만 중생이 모두가 다 철인(哲人)이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철학자(哲學者)가 되어야 됩니다. 이 철학 저 철학 교리적으로 많이 안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本質的)으로 진리(眞理)의 당체를 파악해야 된단 말입니다. 그래야 자기 주체(主體)가 섭니다. 주체가 서야 비로소 불안의식(不安意識)을 해소할 수가 있단 말입니다. 불안한 마음에서 우리가 행복할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이 보살계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불성계라, 부처 불(), 성품 성(), 바로 불성(佛性),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자리 우리 인간성의 근본(根本)실상자리 그 자리에서 우러난 하나의 법도가 보살계입니다.

 

따라서 다른 말로 해서는 무상청정계(無相淸淨戒), 그 상()이 없는 계율이란 말입니다. 현상(現想)에서 보고 있는 차별적인 구차한 계()가 아니라 우리 불성(佛性)의 법도(法道) 우주의 법도 그대로 우리인간이 준수해야 될 규범(規範)이 보살계란 말입니다. 조금 더 부연해서 말씀을 드립니다만은 아까도 말씀드린바와 같이 모든 지식정보가 아주 혼란스럽게 서로 얽히고설키고 착종하고 있어놔서 우리가 기본적인 인생(人生)의 이론적(理論的)인 체계(體系)는 갖추어야 됩니다.

 

그건 우선 어떤 것인고 하면은 여러분들이 아시는 바와 같이 이른바 유물론(唯物論), 모든 존재는 다 물질이라는 유물론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은 거기에 대립해서 관념론(觀念論)이라, 관념론은 유심론(唯心論)이란 말하고 의미는 똑같습니다. 우주를 하나의 생명으로 보는 그런 자리가 이른바 유심론, 오직 유(), 마음 심(), 유심론 또는 관념론이라 이렇게 말한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관념론에 설 것인가? 유물론에 설 것인가? 이것은 우리 불자님들 자유로운 의사(意思)에 맡기는 것이지만은 적어도 종교(宗敎)를 믿는다고 생각할 때 철학(哲學)상의 유심론 또는 관념론의 그쪽에다가 우리 이상을 두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유물론이라고 생각할 때 오직 물질적(物質的)인 기회균등(機會均等)이라든가 물질적인 평등(平等)이라든가 이런데다가 중점을 두기 때문에 우리 인간성은 다분히 건조해 지지 않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 소비에트 사회에서 그렇게 유물변증법(唯物辨證法)을 가지고서 공산주의(共産主義)사회를 건립했지만은 70여년 동안 이렇게 꿰메고 저렇게 얽히고 해서 했지만은 결국은 아, 한 번에 다 무너지는 것 보십시오. 그것은 그네들의 철학적 견지가 입각지가 유물론이란 말입니다. 모두를 물질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천지우주(天地宇宙)를 하나의 마음으로 보는 하나의 불성(佛性)으로 보는 그런 주의입니다. 이른바 다시 말씀 드리면은 범신론(汎神論)이라. 같은 유심론 같은 관념론 가운데도 범신론과 일신론(一神論)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개념도 여러분들께서 간단한 것이니까 기억해 두셔야 됩니다. 일신론은 모든 존재를 하나님이 창조(創造)했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응당 하나님이 섭리를 해야 되겠지요. 하나님이 창조(創造)했는데 창조도 그냥 공평무사(公平無私)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람하고 다른 동물하고 또 다른 식물하고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사람도 예수하고 다른 사람하고 차이가 있다고 하듯이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킨다 하더라도 우리 사람 사람끼리는 이른바 일신론적인 관점에서 본다고 생각 할 때는 사람 사람끼리는 서로 죽이지 않고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하라고 돼있지 만은 다른 동물과 사람 관계는 어떠는 것인가?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모든 것은 우리 사람을 위한 방법이 되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서 희생(犧牲)을 당해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 자연(自然)에 있는 모든 것도 역시 우리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는 무자비(無慈悲)하게 개발(開發)도 하고 훼손(毁損)을 시켜도 무방하다고 본단 말입니다. 이것이 일신론(一神論)적인 사상입니다. 그러나 범신론(汎神論)이라, 넓을 범(), 귀신 신(), 범신론 말입니다. 우리 불교는 부처님 가르침은 범신론이란 범주(範疇)에다가 다 집어넣을 필요는 없습니다. 없으나 구태여 철학적으로 말 하면은 우리 불교나 또는 힌두교나 말입니다. 또는 유교나 그런 종교는 모두가 범신론에 해당하다고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 범신론은 무엇인가. 범신론(汎神論)은 우주(宇宙)모두가 바로 신()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자연이나 다른 동물이나 인간이나 모두가 다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즉 자연(自然)즉 신()이요, ()이 곧 자연(自然)이라고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것도 다른 것을 위해서 그 다른 것을 희생시킬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보살계란 것은 그러한 범신론적 견지에서 우주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 덩어리인 것이니까 근본바탕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열과 더 높고 낮은 것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 차원에서 보면은 천차만별로 구분이 되겠습니다만은 그래서 우선 철학적(哲學的)으로 범신론(汎神論)적인 견지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보살계(菩薩戒)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불성계(佛性戒), 천지우주(天地宇宙)의 근본적인 성품(性品)을 기조로 해서 이루어지는 법도(法道)가 보살계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 보살계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우리 인간이 우주 내에서 지켜야 될 가장 근원적인 윤리도덕(倫理道德)입니다. 참다운 철학이 있으면은 반드시 거기에 따르는 윤리적인 실천이 따라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우주란 것이 그냥 만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법도(法道)에 따라서 이루어지는 생명(生命)의 당체(當體)이기 때문에 마땅히 거기에는 필연적(必然的)으로 윤리도덕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주의 법도, 그런 가운데서 우리 인간이 닦아야 될 법규(法規)가 보살계란 말입니다. 보살계(菩薩戒)는 열 가지 무거운 계()와 마흔여덟 가지 가벼운 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마흔여덟 가지 가벼운 계도 열 가지 가운데 다 포함된 진리기 때문에 상당히 장황한 시간 동안에 말씀을 드려야 48계를 다 말씀을 드릴 것인데 그래서 열 가지 무거운 계율만 말씀을 드립니다. 그 가운데 가서 다른 마흔여덟 가지는 다 포함된 계율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받을 때는 먼저 참회(懺悔)를 해야 됩니다. 잘못해서 과거(過去)에 지은 죄가 없어져버려야 이런 낡은 푸대에 든것을 다 비워버려야 새로운 것을 거기에 넣을 수가 있지 않습니까? 새로운 것을 담기 위해서는 마땅히 낡은 것은 없애야 하듯이 과거(過去)에 지은 죄를 모두가 참회를 해야 됩니다. 참회하는 그런 걸로 해서 연비를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