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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8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78

 

육조단경(六祖壇經)에 보면은 자성(自性), 불성(佛性)이란 말씀이 100군데가 넘어요. 스스로 자(), 성품 성(), 자성이나 부처 불(), 성품 성(), 불성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래서 위대한 분들은 모두가 다 근원적인 그 자리, 근본적(根本的)인 본체(本體)자리, 그 자리에다가 마음을 둔단 말입니다.

 

()을 떠나면 그때는 본체가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衆生)들은 이 현상(現象)만 가지고서 현상은 다르니까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그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육조단경에서도 이상즉선(離相卽禪)이라. 상을 떠나면은 떠날 리(), 모양 형상 상()자 상을 떠나면 선()인 것이고 상을 못 떠나면 선이 아니란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대덕스님들 또 우리 불자님들 상을 떠나서, 상이란 것은 사실로 존재한다고 하면은 우리가 떠날 수가 없지요. 그러나 상은 존재않는 것입니다. 인연(因緣)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같이 보이는 것을 우리가 전도몽상(傳導夢想) 해서, 우리가 뒤바꿔 보고 착각으로 있다고 보는 것이지 사실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천 번, 만 번 있지가 않다고 우리가 되뇌이면서 있지도 않은 그 자리, 제법공(諸法空) 자리, 오온개공(五蘊皆空) 자리, 그런 자리를 우리가 참말로 증명(證明)을 해야 그래야 인생고(人生苦)도 떠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 발버둥쳐도 모두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시비분별(是非分別)하는 차원에서는 못 떠납니다. 사실대로 봐야 사실대로 본다는 것은 방금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하나의 생명이 바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이고 문수보살(文殊菩薩)이고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고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고 다 그렇습니다.

 

그 부처님 명호(名號)도 그렇게 많지만은 이른바 총대명사(總代名詞)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닙니까? 사실 그래서 일반분들은 가만히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명상하기가 쉽지 않겠지요. 따라서 염불삼매(念佛三昧),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이다 보면 그때는 마음이 차근차근 다른 망상(妄想)이 줄어지고 우리가 본래(本來) 부처인지라 부처와 가까워진단 말입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사람들은 그냥 단순히 의심(疑心)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본래 면목(本來面目)자리, 그 본분 자리 말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바로 보면은 본체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인데, 진여불성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이른바 참다운 화두란 말입니다. 진여불성을 여의지 않고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이다. 하나의 진여불성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자리를 참구(參究)해야 그래야 참다운 화두 공부가 됩니다.

 

이렇게 하셔서 이번에 하안거(夏安居) 때는 꼭 정말 본래 부처인 만능(萬能)을 갖춘 본래 부처인 그 자리를 온전히 깨닫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온전히 깨닫지 못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우리 마음이란 것이 잘나고 못나고 많이 배우고 덜 배우고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 공덕(功德)은 절대로 이우러지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훼손이 안됐단 말입니다.

 

천재(天才) 같은 아인슈타인 마음 그대로, 석가모니(釋迦牟尼) 마음 그대로, 예수님 마음 그대로, 우리한테 지금 다 갖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100% 바로 믿고 우리 본래 면목(本來面目)자리, 우리 본래 고향(本來故鄕)자리에 대한 간절한 절실한 우리의 구도심(求道心)만 있다고 생각할 때 순식간에 우리 마음은 비약(飛躍)해서 극락(極樂)도 갈 수가 있고 또 성자(聖者)도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