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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75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75

 

그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대총상법문(大總相法門)이라, 대총상법문이란 말씀이 있어요. 대 자는 큰 대(), 모두 총()자 말입니다. 또는 서로 상(), 법 법(), 문 문()자 말입니다. 대총상법문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모든 법문(法門)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바탕, 기본적인 본질(本質) 법문이란 뜻입니다. 대총상법문이라. 잘 기억해 두십시오. 가장 기본적인 뿌리, 가장 근원적인 법문이기 때문에 대총상법문 가운데서 모든 다른 법이 다 포함돼 있단 말입니다.

 

그러면 대총상법문을 또 다른 말로는 어떻게 하는가? 대총상법문을 다른 말로는 아주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실 분은 아시겠지 만은 진여(眞如), 참 진(), 같을 여(), 진여 말입니다. 진여란 불교 술어(述語)를 모르면은 불교를 공부한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생소하니 처음 듣는 분도 참 진(), 같을 여()자 진여라는 불교 술어는 꼭 외 두셔야 됩니다. 그 모두를 다 합한 현상적(現象的)인 여러 가지 교리(敎理), 복잡하고 하늘에 있는 별이요 태양이요 또는 우리 인간이요 산이요 물이요 그런 이 현상계란 것이 아주 갈래가 많아서 말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많단 말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안 되겠습니까. 우리 한국인만 보더라도 너무 많다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서 갈등도 심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헌데 하물며 세계 인구(人口)를 다 털어놓고 본다고 생각할 때는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 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 존재만이 이 지구(地球)상에는 존재하는 동물(動物)이 아니라 다른 동물도 많이 있고 또는 인간보다도 훨썩 더 정도가 높은 천상(天上)도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존재를 총 망라한다고 생각할 때는 굉장히 복잡합니다.

 

따라서 그 눈에 보이는 세계, 즉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모든 존재끼리 서로 개성이 다르기 때문에 개성이 같지 않다는 것은 업장(業障)이 다르단 말입니다. 김 가란 사람이나, 박 가란 사람이나 지은 바 교육도 똑 같고 업장도 같다 하면 모르거니와 백 사람, 천사람, 만사람 모두가 다 업장이 같지 않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각각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생활 선상에서 같이 부딪치고 분열(分列)되고 싸우고 모다 그런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다 하더라도 그 근본적인 뿌리는 똑같이 모두가 다 대총상법문인 이른바 진여란 말입니다. 진여라, 참 진(), 같을 여(), 진여란 것이 모든 존재의 근본 된 대총상법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총상법문이란 말이나 또는 참 진(), 같을 여()자 진여라는 말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그리고 또 주의할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진여 그것은 모든 존재, 모든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될 뿐만 아니라 그 자리는 바로 우리 사람의 생명(生命)같이 생명입니다. 목숨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진여를 말할 때는 부처 불(), 마음 심()자를 넣어서 또는 마음 심()자 대신에 성품 성()자를 넣어서 진여불성(眞如佛性)이다. 이렇게 이름을 합니다. 불자님들 진여불성, 진여불성을 꼭 외 두셔야 우리 근본(根本)뿌리를 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진여불성, 김 가나 박 가나 또는 다른 동물이나 다른 식물이나 일체존재(一切存在)의 근본 뿌리가 바로 진여불성입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를 가리켜서 대총상법문이라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 자리를 모르면은 그때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이렇게 헤어진 것을 우리가 통일을 시킬 수가 없습니다. 또는 항시 마음이 산란스럽단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存在)가 있으면 또 너라는 존재가 있고 나와 너는 완전히 분리된 존재가 아닌가. 또는 흑인이 있으면 백인도 있지 않습니까. 그럼 백인과 흑인은 뿌리가 다르지 않겠는가. 뿌리가 같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그만치 마음으로 거리가 생기지 않습니까. 우리가 뿌리가 같다고 생각하는 그것과 근본적인 본질적인 뿌리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것과는 천양의 차이가 있습니다. 굉장히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앞에 가서 혹시 자기 기분에 안 맞는 미운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미운 사람이 아, 저 놈은 나하고는 뿌리가 다른 완전 별종(別種)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는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고 그 자리를 얻기가 왜 쉬운고 하면은 금생에 잘못 살면은 그때는 버릇이 많이 붙지 않습니까? 버릇이, 나쁜 버릇 때문에 그 자리를 다 인증(認證)을 안할라 합니다. 인증을 나 같은 사람이 어떡해서 불심을 그냥 얻을 것인가? 오랜 동안 난행고행(難行苦行)하고 달마(達磨)스님같이 9년 동안이나 토굴에서 그렇게 벽만 바라보고 참선(參禪)도 하고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도저히 우리 더구나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아, 불심이 있다는 것만 거의가 아는 것이지 불심을 깨닫는 것은 도저히 가망도 없다. 이렇게 보통 생각되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단 말입니다. 불심 이것은 시간(時間)을 초월(超越)해 있습니다. 시간을 초월해 있고 공간(空間)을 초월해 있단 말입니다. 불심은 저 미국 가 어디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또 여기만 따로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불심은 모양이 없는, 모양이 없으면서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우주에 가득 차 있습니다. 불심은, 불자님들 불심은 어느 처소에 가 부분적으로 국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어느 때 언제나 우주(宇宙)에 끝도 갓도 없이 충만(充滿)해 있는 무량무변(無量無邊)한 우주의 생명(生命)이란 말입니다.

 

또는 그것도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언제나 낳지 않고 죽지 않고 어느 때나 존재하는 영생(永生)의 생명입니다. 조금도 오염(汚染)이 안 된, 물질(物質)이 아니니까 오염을 시킬래야 시킬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령 잘못 살아가지고서 자기 부모를 살해한다. ,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 않습니까? 자기 부모를 살해하는 오역죄(五逆罪), 이 죄는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이 죄를 금생에 범하면은 금생에 죽자마자 무간지옥(無間地獄) 들어갑니다. 그러나 금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죽자마자 틀림없이 무간지옥에 들어갈 사람도 그 사람 마음, 그 사람 불심은 조금도 오염이 안 됩니다. 물질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무엇이 형체가 있어야 검정물 들이면은 검게 되고 붉은 물 들이면은 붉게 되고 그렇게 되겠지요. 그러나 모양도 없고 그림자도 없고 이름도 없고 그런 것인지라 도저히 우리가 설혹 나쁜 짓을 많이 했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자리는 오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그런 마음입니다. 지금 김 씨 마음이나 또는 박 씨 마음이나 다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오염(汚染)도 안 된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마음, 그 마음이 우리 마음의 본심(本心)입니다. 본 불심(佛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불교를 어렵게 생각을 말으십시오. 어디서 사와서 내 것 만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절을 무릎이 닳도록 까지 3천 배, 만 배 그렇게 꼭 많이 해야만 되는 것도 아닌 것이고 부처님은 고행(苦行)을 금했습니다. 고행을, , 마음도 편하고 몸도 편하게 공부하면 된단 말입니다. 그러나 중생(衆生)의 욕심(慾心)으로 너무 많이 먹으면 또 안 되겠지요. 부처님께서 하지 말라는 고기를 먹으면 안 되겠지요. 그건 또 안 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고기 먹기보다 안 먹기가 더 쉽지 않습니까? 돈도 적게 들고 소화도 잘되고 말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다 하기가 쉽습니다. 모두가 다,

 

지금 사람들은 불교를 믿어도 어렵게 하면은 훨썩 차원(次元)이 높은 것 같고 말입니다. 또 쉬운 쪽으로 말하면 차원이 낮은 것 같이 생각한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그야말로 간이평명(簡易平明)이라, 간단하고 아주 평이(平易)합니다. 왜 그러고 하면은 우주 생긴대로 말 해 있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가짜만 봅니다. 중생은 진짜를 못 봅니다. 중생은, 가령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이것도 나라는 관념(觀念)도 우리가 인과법(因果法)을 안다고 생각할 때는 나는 꼭 나다. 너는 꼭 너다. 이와 같이 구분해서 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과법을 모르는 것이니까 이렇게 생긴 것은 꼭 나고 저렇게 생긴 것은 꼭 너다. 이렇게 자타(自他)를 구분하지 만은 인과의 법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인연(因緣)따라서 잠시간 나와 같은, 지금 그림자 같은 모양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 것이고 그것은 또 찰나찰나 순간순간에 변화가 됩니다. 변화가, 어느 한 동안도 나 같은 이 모습이 그대로 머물러 있지가 않습니다. 나를 구성한 세포(細胞)란 것은 어느 찰나, 찰나란 것은 얼마나 짧은고 하면은 1초의 70분지 1입니다.

 

세포가 1초의 70분지 1 동안도 우리 세포는 머물러 있지가 않아요. 신진대사(新陳代謝)해서 그때그때 묵은 세포가 사라지고 다시 새로운 세포가 생겨나고 이것이 연속이 되니까 나 같은 모습이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우리가 현미경(顯微鏡)놓고서 정밀(精密)하게 본다고 생각할 때는 세포가 순간순간 그때그때 변화무쌍(變化無雙)하단 말입니다. 어느 한동안도 어느 순간도 같은 자리에 같은 공간(空間)에 머물러 있지 않은 것이 우리 몸뚱이를 위시해서 모든 눈앞에 보이는 대상(對象) 경계(境界)가 다 그렇습니다. 산도 찰나찰나 변화하는 것이고 물도 마찬가지고 흘러가는 물은 더욱 그러겠지요. 어느 것도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 법은 이 자리를 바로 여실하게 말씀했습니다. 부처님 법은 사실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다만 우리 중생들이 사실 그대로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 망상(妄想)으로 보기 때문에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산도 꼭 저렇게 생긴대로 산이고 물도 꼭 저렇게 생긴대로 물이다. 이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같은 물도 제가 가끔 말씀 드린바 같은 물도 사람이 보면 물로 보나 또 귀신(鬼神)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물로 안보는 것입니다. 천상(天上)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사람이 물로 보는 것을 천상 사람들은 영롱한 유리로 본단 말입니다.

 

그럼 부처님이 보시면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이 보시면은 그때는 같은 물도 부처 불(), 성품 성()자 불성(佛性)으로 본단 말입니다. 부처님이 보실 때는 모두가 다 우주만유(宇宙萬有)의 근본실상(根本實相), 근본실상인 다 불성(佛性)으로 봅니다. 불성으로 보기 때문에 부처님이 보실 때는 잘나나 못나나 다 부처님으로 보신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