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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 다시 읽는 큰스님 법문

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53

 

 

결제라는 것은 우리가 부처님 지혜를 정말로 몸소 증명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 결제 아닙니까.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행사입니다. 이른바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이라, 우리 중생이 한 일 가운데서 가장 큰일이 무 엇 인가? 그것은 우리가 윤회고(輪廻苦), 윤회하는 우리의 업장(業障)을 녹여서 윤회를 뛰어넘어서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증명(證明)한단 말입니다. 우리 본래면목은 분명히 명명백백(明明白白)히 부처인 것인데 우리가 자기 본래면목이 부처인 것을 안다 하더라도 아는 그걸로 해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아는 그걸로 해서는 우리가 실험적으로 체험(體驗)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본래가 부처 아닌가. 저 사람도 밉게 보이지만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가 아닐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 마음이, 우리 업장(業障)이 바꾸어져서 우리 마음이 개혁(改革)이 되어서 우리가 정작 부처가 되어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 참선(參禪)도 하고 염불(念佛)도 하고 우리 습관성(習慣性), 과거 무수생(無數生)동안에 우리가 붙여 내려오고 그때그때 잘못 살고 잘못 생각하고 하는 것이 우리 의식에 딱 젖어 있습니다. 금생(今生)에 있는 그런 번뇌(煩惱)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불교(佛敎)의 전문술어로 하면은 금생에 지은 번뇌는 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배우고 느끼고 이것저것 모다 쌓고 한 번뇌가 분별도 하고 해서 더 우리한테 축적이 된 번뇌가 이것이 분별기 번뇌인 것이고, 전생부터 무수생 동안에 우리 의식에 담겨 있는, 숨어 있는 번뇌를 가리켜서 불교 전문술어로 하면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함께구()자 날생()자 우리 생과 더불어서 묻어온 번뇌란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생에 지은 번뇌도 떼기가 어려운데 금생에 지은 번뇌만 떼어서는 성불(成佛)을 못합니다. 이치로 해서는 그런가 보다 하지만은 실지로는 우리가 부처의 자리, 영생불멸(永生不滅)한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를 증명(證明)을 못합니다. 증명을 하려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분별기번뇌와 아울러서 과거 전생부터서 무수생 동안에 우리가 축적 해온 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 우리 생과 더불어서 저지른 번뇌를 녹여야 한단 말입니다. 녹이는 그것이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에 녹여 버렸으면 얼마나 좋으리요만 그렇게 되지를 않는단 말입니다. 마음으로는, 자기 마음으로는 내가 이렇게 해야 되겠다, 그러나 경계에 부딪치면 미운 사람은 분명히 미워지고, 자기한테 좋은 사람은 또 좋아지고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 마음이란 것은 요물입니다. 참 잘 쓰면 부처고 잘못 쓰면 굉장히 지겹고 참 옹색(壅塞)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혈맥론(血脈論)에도 우리 마음이란 것이 관시변법계(寬時遍法界). 우리 마음을 확장을 시키고 우리 마음을 넓히고 하면은 온 세계(世界)를 다 감싼단 말입니다. 그나 그 반대로 착야불용침(窄也不容針)이로다. 우리 마음이 남을 미워한다던가, 부정적(否定的)인 것을 생각한다든가 그렇게 해서 마음이 옹졸할 때는 바늘구멍도 안 들어간단 말입니다. 우리는 자기 마음 충분히 다 짐작하시겠지요. 그 마음 좁을 때는 얼마나 옹졸합니까.

 

불교란 것이 마음을 넓히는 작업입니다. 한도 끝도 없이 우주 같이 끝도 갓도 없이 넓히면 그때는 성인(聖人)이란 말입니다. 성인과 범부(凡夫)가 별 신통한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같은 마음을 보다 더 우주대로, 우주의 생명으로 해서 확장을 시키는 것인가. 현실적(現實的)인 눈앞에 보이는 여러 가지 것에 경계(境界)에 부딪혀서 거기에 얽매일 것인가. 집착하고 얽매이면 그때는 범부요 마음 풀어서 본래 마음자리로 돌아가면 그때는 성인이란 말입니다.

 

어떻게 해야만 우리가 그런 번뇌를 없애 버리고서 본래적인 자기 생명을 얻을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니까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면은 우리한테는 지금 별 공덕이 없지만은 우리한테는 본래(本來)로 무량무변(無量無邊)한 만공덕(萬功德)을 다 갖추고 있다. 이렇게 확신하는 것이 굉장히 필요합니다. 우리가 뭘, 어떤 것을 얻고자 노력한 다 하더라도 자기한테 본래로 다 갖추고 있어 가지고서 노력하는 것과 갖추고 있지 않은 것을 새삼스럽게 밖에서 끌어와서 자기 것을 만드는 것과는 굉장히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불교(佛敎)의 인생관(人生觀)에서 본다고 생각을 할 때는 우리가 구하는 것이 본래로 나한테 지금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께서는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상당히 공부를 많이 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를 하시다가 정말로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희선열이란 것은 진리(眞理)에 따라서 진리란 것은 만능(萬能)의 자리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치 우리의 행복(幸福)도 전율(戰慄)을 느낄 정도의 우리 행복감도 더욱 더 증장(增長)이 되는 것입니다. 한데 그와 같이 공부를 하셔서 상당히 높은 경계를 그리 음미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한테 가는 길을 닦아가지고서 느끼는 환희용약(歡喜勇躍)하는 그런 것은 한계(限界)가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마하가섭 같은 분은 그야말로 참 부처님의 정법(正法)을 전수(傳受)받으신 대성자(大聖者)아닙니까. 마하가섭 같은 그런 어른도 초환희지(初歡喜地). 우리가 공부해 가지고서 참선(參禪)을 하나 염불을 하나 공부야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선택해서 하면 되는 것인데 공부해 가지고서 보살초지(菩薩初地), 보살초지가 초환희지입니다. 환희지라, 환희란 것은 마음이나 몸이나 몸만 좋은 것이 아니라 마음도 몸도 조금도 흠결이 없이 기쁨을 느끼는 것이 환희 아닙니까. 환희용약한단 말입니다.

 

환희지에 들어가는 것이 이른바 보살초지인데 환희지를 성취해야 이른바 참다운 보살이라 할 수가 있어요. 환희를 성취 못 하면은 사실은 원칙적으로 보살은 못됩니다. 우리가 보살이 될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환희지를 성취해야 그래야 이른바 나나, 너나, 모든 상을 떠난단 말입니다. 일체존재(一切存在)가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진여불성(眞如佛性)아님이 없다. 이런 자리는 보살 초지의 환희지를 성취해야 그래야 비로소 얻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 할 때는 행복이란 것은 내가 내 스스로 나라는 존재를 귀엽게 생각하고 그래야 행복감이 있을 것인데 자기를 떠나버리는 자리에서 무슨 행복이 있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시겠지요.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자기 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아()를 미처 못 떠난 것은 불교에선 환희라고 말을 못 붙입니다. 중생(衆生)의 속적인, 상대적인 하나의 쾌락(快樂)인 것이지 환희라고 부칠 때는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번뇌(煩惱)를 녹여서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生命)자리 거기에서 오는 우주(宇宙)에 본래(本來) 갖추어진 참다운 안락(安樂) 그런 것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음미를 해야 환희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헌데 마하가섭 같은 분은, 굉장히 참 그 어른께서는 아주 근엄한 분입니다. 평생 동안 그이도 부처님같이 탁발(托鉢)을 하셨단 말입니다 그래서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검소하고 참 그야말로 자기 생활이 어떻게 검소했던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검소한 분인데 그런 것을 일일이 다 예를 들어서 말씀할 시간이 없습니다만 그런 근엄한 분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어떻게 재미있던가 그냥 그대로 베길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이 우주(宇宙)란 것은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것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하늘에는 긴나라, 건달바 모다 그런 존재들이 항시 신묘(神妙)한 멜로디로 해서 음악(音樂)을 연주하고 있고 말입니다. 또는 꽃비가 항시 내리는 것입니다, 꽃비가. 꽃비도 보통 꽃비가 아니라 만다라화(曼茶羅華) 마하만다라화(摩訶曼茶羅華), 만주사화(曼珠沙華) 마하만주사화(摩訶曼珠沙華), 영생(永生)의 꽃, 영생불멸(永生不滅)한 꽃들이 쉴 새도 없이 꽃비를 내리고 있단 말입니다. 그러한 꽃들은 모두가 다 빛으로 되어 있습니다. 광명(光明)으로 되어 있단 말입니다.

 

하늘에서는 그와 같이 광명으로 된 꽃비가 내리고 있고 또는 모든 존재가 다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자기 몸을 돌아보면 자기 몸도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진정으로 깨달은 자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天地宇宙)가 빛이 아님이 없습니다. 다 빛이란 말입니다. 꼭 무슨 천상에 올라가고 어디로 가야만이 빛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 이 자리에서 그대로!

 

우리 중생은 번뇌(煩惱)로 보니까 빛으로 안 보이는 것이지 정말로 투철한 안목(眼目)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다 영롱 무비한 빛으로 보인단 말입니다. 빛으로 보이거니 누가 밉다 좋다 또 뭣이 어떻다 그렇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빛으로 보이는 단계 같으면 자기란 관념(觀念)을 벌써 초월(超越)해 있단 말입니다. 자기 몸이 어디가 찌뿌드드하고, 소화도 안 되고, 또 조금 거북하고 그래야 찌푸린단 말이지 자기 몸도 그냥 개운하고 아무런 무게도 없고 말입니다.

 

우리 불자님들 인간존재라는 것이 이 욕계(欲界)에 사는 우리 정도가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한도 끝도 없는 가능성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와 나와, 예수와 나와 아무런 차이가 없단 말입니다. 다만 개발하고 못 개발하고 그 차이뿐입니다.

 

우리 인간이 욕계번뇌(欲界煩惱), 욕계번뇌는 내내야 음식욕, 잠욕, 이성욕, 모다 그런 것이 욕계 번뇌 아닙니까. 욕계번뇌를 떼면은 욕계번뇌를 완전히 다 뽑아버렸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몸이 하늘로 뜨는 것입니다. 그나 기왕이면 하늘 로 뜨기 위해서는 음식을 좀 깨끗이 잘 먹어야 되겠지요. 그 많이 먹어서 비대하면 하늘에 뜨더라도 더디 뜨지 않겠습니까. 우리 불자님들 음식 좀 줄이셔야 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모두가 다 우리 공부와 관계있는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일종 (一種)위주라. 삼세제불이 하루 한 끼 자신 것도 무슨 식량이 부족하고 물질(物質)을 아끼기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많이 자실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무슨 방법을 써야 부처가 빨리 될 것인가? 그런 것을 또 말씀을 드려야 되지 않겠습니까.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해서, 화두를 의단(疑端)을 품고서 공부를 하는 것도 우리가 부처가 되는 하나의 좋은 방법입니다. 또는 주문(呪文)을 외어서 티벳트인들 모양으로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하는 것도 그도 참 좋은 방법입니다. 또는 우리가 불경(佛經)을 외어서, 법화경(法 華經)을 외운다든가 또는 보문품(普門品)을 외운 다든가 금강경(金剛經)을 외운다든가 경을 외우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육조단경(六祖檀經)에 보면 육조스님께서도 여러분들이 금강경을 열심히 독송을 하면은 틀림없이 마음이 맑아져서 마음을 해탈(解脫)한다는 그런 법문(法門)도 있습니다. 비단 금강경뿐만이 아니라 다른 경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 법문은 그때그때 중생의 경우에 따라서 달리 말씀 하셨지만은 핵심내용은 다 똑 같습니다. 모두가 다 인간의 욕계번뇌(欲界煩惱), 색계번뇌(色界煩惱), 무색계번뇌(無色界煩惱) 즉 삼계번뇌(三界煩惱)를 떠나서 참다운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참다운 영생해탈(永生解脫)의 자리로 인도하시는 법문입니다.

 

헌데 우리같이 참선(參禪)을 주로 한 사람들은 선방(禪房)에서 오로지 공부하니까 쉬운데 재가(在家)불자님들은 참 공부하시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어떤 공부가 가장 쉬울 것인가? 가장 쉬워도 그것이 다른 것 보다 못해 버리면 쉬워도 택할 수 없겠지요. 이왕이수(易往易修), 이왕이수라. 쉬울이()자 갈왕()자 이왕(易往)이라, 또는 이수(易修), 쉬울이()자 닦을수(), 닦기 좋고 또는 도달도 할 수가 있고 닦기 좋고 빨리 갈수가 있고 그런 방법이 되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이 염불(念佛)입니다. 그러니까 오로지 공부하신 분들은 아까 말씀마따나 그대로 해서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이 자기가 공부 방법을 선택했으면 거기다가 자기 전념(專念)을 해서 나가면 되시겠지만 일반 재가 불자님들이라든가 공부하기에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런 분들은 제일로 쉽고 쉬우면서도 또 닦기도 쉽고 말입니다. 또는 도달도 빨리 할 수가 있고 그런 법이 염불이란 말입니다. 염불이란 것이 여러분들 깊게 생각을 하십시오. 왜 그런고 하면 사실은 어느 도인들치고서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이 한분도 없습니다.

 

한국도 신라(新羅)때 원효대사(元曉大師), 의상대사(義湘大師)는 다시 말할 것도 없고 또 고려(高麗)때 와서 대각국사(大覺國師), 보조국사(普照國師), 나옹대사(懶翁大師), 조선시대 때 와서 서산대사(西山大師), 사명당(四溟堂), 평양대사, 그런저런 위대한 선지식들이 염불법문을 빠뜨린 분은 없습니다. 참선 공부하는 화두(話頭)를 창도(唱導)하고 역설하는 분도 역시 꼭 곁들어서 염불법문(念佛法門)을 했습니다.

 

보조국사 같은 어른들도 참선공부를 해서 경절문(徑截門)이라, 경절문을 말씀했지만은 또 염불요문(念佛要門)으로 해서 고구정녕하게 염불을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또는 송()나라때 위대한 선지식인 영명연수선사(永明延壽禪師), 영명연수선사는 종경록(宗鏡錄) 100백권이라, 종경록 100권이니까 상당히 구질이 많지 않습니까. 종경록 100권 가운데는 조사스님들 훌륭한 분들 가르침이 거기에 다 수록이 돼 있어요. 그리고 그분은 법안종(法眼宗)이라 하는 선종(禪宗)의 삼대조사(三代祖師)입니다. 선종의, 법안종의 삼대조사이면서도 그와 같이 염불(念佛)에 대해서도 굉장히 고구정녕으로 말씀하셨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렇게 염불을 중요시하고 말씀을 했던가? 그것은 부처님이란 것이, 지성적으로 이치가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이란 것은 바로 우리 생명, 우리 생명(生命)의 근원적(根源的)인 뿌리 자체입니다. 또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주(宇宙)란 것은,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논리라든가 이치로 해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분도 있을 란지 모르겠지만은 사실은 우주 자체가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자연계(自然界)가 있어 가지고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소가 있고, 또는 돌멩이가 있고 하는 것이니까 저런 것은 우리가 보는 그대로 객관적인 걸로 해서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은 이런 것은 현상적인 겉의 모습뿐일 것이고 그런 것도 내내야 파고 들어가면 하나의 생명이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