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755
부처님 오신 날은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에 가장 축복스러운 봉축일(奉祝日)입니다. 부처님께서 탄생하시자 마자 바른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또는 왼손으로 땅을 가르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이와 같이 갈파(喝破)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단순히 훌륭한 금언(金言)이구나, 성인(聖人)들의 성언(聖言)이구나, 이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에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존재(存在), 나라는 생명(生命)은 대체로 어떠한 것인가 하는 이른바 참자기, 참자기에 대한 문제가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 드리면 우리 인생관(人生觀) 문제란 말입니다. 우리가 불행(不幸)스럽고 또는 행복(幸福)스러운 것도 우리 인생이 무엇인가 하는 자기의 참다운 실상(實相)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을 확립을 해야 비로소 세계관(世界觀)도 거기에 따라서 확립이 되는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것은 ‘하늘 위에나 하늘 아래나 이 천지간에 나 홀로 존엄(尊嚴)하다’ 이렇게 해석(解釋)이 됩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어째서 나 홀로 천지(天地)간에 존엄스러운 것인가? 나라고 하는 문제 우리 중생(衆生)들은 나라는 것을, 나라는 본바탕, 나라는 실상, 나라는 실존을 잘 모릅니다. 우리 중생이 나라는 것은 불교적인 의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에 모든 존재를 바로 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나라는 것은 사실은 가짜 나입니다 망령 될 망(妄)자 나 아(我)자 이른바 망령된 나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모든 존재는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한 가르침이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이런 가르침이 있지 않습니까. 제행무상이라, 모두 무상하단 말입니다. 무상하단 말은 그냥 덧이 없다, 슬프다, 그런 정도가 아니라 모든 존재는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그런 우리 몸을 구성한 세포를 위시해서 주관적(主觀的)으로 보나 또는 객관적(客觀的)으로 보나 모든 것은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그때그때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단 말입니다.
어째서 순간순간 변화해서 마지않는가 하면은 일체존재(一切存在)라는 것은 인연생(因緣生)이라, 인연 따라서 잠시간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에 불과 합니다. 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변화무쌍(變化無雙)한 것은 사실은 즉 다시 말씀드리면은 시간적(時間的)으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은 그때는 공간적(空間的)으로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행이 무상이라, 모든 것은 그때그때 변화해서 마지않기 때문에 이런 것은 또 동시에 제법무아(諸法無我)라, 제법무아라. 그 독립적인 존재가치(存在價値)를 부여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모든 것은 변화해서 마지않는 제법무아라, 모든 것은 나라고 할 수 없는, 나라는 것은 본래 없는 무아(無我)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지금 내 몸뚱이가 이렇게 있고 나는 지금 김아무개 박아무개인데 이런 것이 엄연히 내 존재가 아닌가. 이것은 우리 중생이 잘 보지를 못해서 그럽니다. 우리 중생은 왜 보지를 못하는가 하면은, 우리 중생들은 어느 누구나가 다 탐욕심(貪慾心)과 분노(憤怒)하는 마음과 또는 진리(眞理)를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무명심(無明心) 이러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성인(聖人)이고, 이른바 삼독심(三毒心)이라, 욕탐 하는 욕탐심(慾貪心)이라, 분노하는 마음이라, 일체 존재를 바로 못 보는 무지한 마음, 무명(無明)한 마음, 이런 마음 때문에 우리 중생들은 자기 존재도 바로 못보고 또는 대상적인 객관세계도 바로 보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이 가지고 있는 번뇌(煩惱)를 간단히 포괄해서 말씀을 드리면 아집이라. 나아(我)자, 집착할집(執)자, 아집(我執)이라. 우리 중생은 나라는 것에 집착합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는 나를 위시해서 제행이 무상이고 제법이 무아라, 나라는 존재는 사실은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이른바 유물주의자(唯物主義者)라. 특히 물질만능시대(物質萬能時代), 오늘같이 기계만능시대, 기술만능시대는 더구나 있는 것은 다 물질뿐이고 정신(精神)은 물질에 부수된, 사실 있지도 않는 이것은 거기에 따른 작용에 불과한 것이지 정신은 허무한 것이고 사실 있는 것은 물질 뿐이다. 이렇게 잘못된 가치관(價値觀) 때문에 세상은 자기도 불행하고, 가정도 불화스럽고, 사회도 항시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나라는 고집과, 또 법집(法執)이라. 법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이 존재하는 그러한 것은 법집인 것이고, 또는 나라는 고집은 이것은 나아(我)자 집착할집(執)자 아집(我執)이란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번뇌를 포괄해서 말씀드리면 나라는 집착, 나라는 것이 진리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부처님 말씀은 진리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부처님께서 희망적(希望的)으로 이상적(理想的)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가 다 사실 그대로 말씀입니다.
사실 그대로 말씀하신 그것이, 우리 중생이 나라고 집착한 것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대상적(對象的)으로 저 산이 있다. 또는 저 하나의 자연계(自然界) 두두물물(頭頭物物)의 자연현상이 있다. 또는 하늘에는 태양계가 있고 은하계가 있다. 이러한 객관적으로 대상화 시킬 수 있는 그런 것도 사실은 사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실존(實存)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참자기, 그 우주(宇宙)의 하늘이나 땅이나 우주에 통틀어서 모든 존재 가운데서 나라는 것이 제일 존엄스럽다. 이 말은 무엇인고 하면은 아까도 얼핏 말씀드린바와 같이 참다운 자기, 참다운 자기는 바로 우주의 실존이나 똑같습니다. 참다운 자기라는 그런 뜻이나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이런 뜻이나 똑같습니다.
참다운 자기는 이른바 전문적인 불교말로 하면은 큰대(大)자 나아(我)자 대아(大我)라. 또는 참 진(眞)자 나 아(我)자 진아(眞我)라. 이런 것이 이른바 참다운 자기란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참다운 자기를 아는 것은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참다운 자기를 모른다는 것은 이와 같이 비참하고, 이와 같이 불행한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단순히 논리적(論理的)으로 진리(眞理)에 이끌어 가는 가르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한테 행복을 보장하는 가장 위대한 그러한 행복과 기쁨이 무엇인가, 이런 것으로 우리 인생을 인도한단 말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진리가 아닌 것은 처음에는 행복같이 보일는지 모르지만은 그것은 순간적인 쾌락(快樂)에 불과한 것이고 참다운 인생의 행복으로 우리를 이끌어가지를 못합니다.
이 기술시대, 또는 물질만능시대, 이런 것만이 사실로 생각한 것이 이른바 흔히 사회에서 아무렇게나 문란스럽게 행동하는 젊은 세대 아니겠습니까. 젊은 세대를 비판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젊은 세대는 우리 기성세대한테 배우고 산단 말입니다. 우리 기성세대가 바로 살면 젊은 세대도 그때는 바로 설수 밖에 없겠지요.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어느 종교(宗敎)나 진리적인 의미에서는 다 똑같습니다. 다만 그런 가운데서도 부처님 가르침이 가장 철저하게 인생은 대체로 무엇인 것인가? 우리 사람은 어떻게 태어나서 또는 갈 때는 어디로 갈 것인가? 우리 인간은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지은바 업(業)으로 태어납니다.
업 가운데는 악업(惡業)도 있고 선업(善業)도 있지 않습니까. 악업은 자기나 남을 위해서 해로운 우리 행위가 업이란 말입니다. 업이란 행동(行動)이란 말이나 똑같습니다. 선업은 자기와 남을 위해서 좋은 쪽으로 안락(安樂)한 쪽으로 인도(引導)하는 그러한 것이 착할 선(善)자 업 업(業)자 이것이 선업(善業)입니다. 그러나 그 악업은 다시 말할 것도 없고, 선업이라 하더라도 업을 지어놓으면 우리 인간은 윤회(輪廻)를 합니다. 과거 전생에 지은대로 금생(今生)에 그대로 받는 것이고 또는 금생에 지은대로 앞으로 장차 또 받습니다.
우리 생명은, 생명 자체는 이것은 본래 죽음이 없습니다. 허망무상(虛妄無常)한 우리 몸뚱이는 그때그때 우리 업 따라서 여가 태어나고 저가 태어나고 한다 하더라도, 또는 모양이 있다가 없고 없다가 생기고 한다 하더라도 우리 생명자체는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통해서 절대로 죽음이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은 우리 생명자체는, 생명자체는 바로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구부정(不垢不淨)한 낳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이것은 우주의 참다운 성품인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입니다.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말이나 또는 스스로자(自)자 성품성(性)자 자성(自性)이란 말이나 또는 법법(法)자 성품성(性)자 법성(法性)이란 말이나 또는 참다운 열매실(實)자 성품성(性)자 실성(實性)이란 말이나 이런 것은 다 똑 같은 뜻입니다.
불경(佛經)에 여러 가지 법문이 하도 많아서 똑 같은 뜻을 이렇게 표현도 하고 저렇게 표현도 했지만은 그 궁극적인 본 의미는 똑같습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참나는 이른바 참진(眞)자 나아(我)자 진아(眞我)란 뜻이나, 또는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란 뜻이나, 또는 자성(自性)이란 뜻이나 법계(法界)란 뜻이나 법성(法性)이란 뜻이나 똑 같은 뜻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참자기를 아는 사람은 동시에 이 법계, 법계(法界)란 것은 천지우주(天地宇宙)의 모든 세계(世界) 객관 주관 모든 세계가 법계입니다. 법계의 뜻도 훤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성(人間性)은 꼭 금생에 나와서 배운 대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금생에 나와서 배운 것은 이것은 하나의 분별지혜(分別智慧), 분별지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는, 우리 잠재의식 이것은 바로 부처불(佛)자 성품성(性)자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이것은 만능(萬能)의 자리입니다. 우리는 자기 인생, 자기 가능성을 제한(制限)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이나 위대한 철학(哲學)이나 모두가 다 자기 인간성에 갖추어 있는 공덕(功德)을 제한하지 않습니다.
저 옛날 그리스의 한 500년 전에 태어난 파르메르데스나, 또는 헤라클레이토스나, 그 뒤에 나온 소크라테스나, 또는 플라톤이나 이런 분들도 모두가 다 위대한 분들입니다. 성인(聖人)이 긴가아닌가 우리는 확실히는 모른다 하더라도 성인이 아니면 그분들의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이 철학계나 여러 가지 그런 우리 인간세계에 있어서 지금도 존중하고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또는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 입니다 진리가 아니면 오랜 동안, 오랜 동안 비판(批判)을 겪고 여러 가지 수난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꼭 부처님 가르침만이 진리고 다른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렇게 우리가 좁은 마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진리라는 것은 바른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에 즉 부처님같이 모든 것을 깨달으신 성자의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이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부처님 세계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성도(成道) 하실 때에 성불(成佛)하실 때에 그때에 부처님만 성도하신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서 성불을 못하신 눈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산은 그대로 산같이 보이고 너는 너로 보이고 나는 나로 보이고 했지만은 부처님께서 참다운 진리를 깨달은 청정한 부처님 눈, 청정한 불안(佛眼)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모두가 천지가 다 부처님뿐이란 말입니다.
오늘 부처님오신 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비록 지금 내가 아는 것은, 자기가 아는 것은 금생에 나와서 배운 그 정도밖에는 아니다. 이렇게 생각을 절대로 말으시고 그 부처님 지혜, 모양은 다르고 시대는 다르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간직하고 계시는 불심(佛心) 부처님 마음, 부처님의 공덕과 우리 마음은 똑 같습니다. 마음이란 것은 본래 모양이 없지 않습니까. 여기 계시는 여러분들 마음이나 제 마음이나 마음자리에서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또는 과거 사람들 마음이나 지금 사람 마음이나 마음자리에서는 다를 수가 없습니다. 모양이 있고 그러면은 다를란가 모르겠지만 이 사람 마음, 저 사람마음, 마음은 원래 모양이 없단 말입니다.
부처님도 참다운 부처님은 이른바 법신(法身) 부처님입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이 나오시고 안 나오시고 상관이 없이 우주(宇宙)에 영원히 계시는 참다운 부처님은 이른바 법신 부처님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부처님 마음, 부처님 마음은 바로 법신 부처님을 말하는 것인데, 그 법신 부처님 마음과 우리 마음과도 똑같습니다. 아무리 세월이 오래 흘러간다 하더라도 시간적인 공간적인 그런 제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자리에서는 똑같단 말입니다. 모양이 없는 것은 시간(時間) 공간(空間)을 초월(超越)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 마음의 참모습 이것이 참다운 진리(眞理)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의 참모습을 모르는데서 우리 인간의 불행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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