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이 여러분의 참 이름입니다. 754
여러분들께서는 삼매(三昧)란 말씀은 들어서 알고 계시겠지요. 그러나 삼매가 얼마만치 중요한가는 잘 느끼시지 못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우리 불자가 꼭 어느 때 들어가더라도 거쳐야 됩니다. 삼매를 거치지 않고서 성불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心一境性)이라, 심일경성이라. 우리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으는 경계가 이른바 삼매란 말입니다.
어떤 경로로 들어가던지 간에 꼭 삼매를 거쳐야 우리 본래면목(本來面目)자리 부처를 성취할 수가 있습니다. 헌데 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지금 여러 가지 법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이런 저런 명상법(瞑想法)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일반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명상법이 보다 더 부처님 사상으로 이행해 와야지 그냥 세속적인 명상법으로 해서는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가는가 하면은 일반 세속적인 명상법은 아(我)를 못 떠납니다. 아(我)를, 나라는 아를 못 떠납니다. 제법공(諸法空) 도리를 그네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제법공 도리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아를 떠나야 제법공을 알겠지요. 자기라는 것을 초월할 수 있어야 삼매에 들어갑니다. 삼매에 들어가야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달는단 말입니다.
그래야 할 것인데, 우리 재가(在家)불자님들이 집안에 계시면서 삼매에 들어가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재가불자님들 처지에서 삼매에 들어갈려고 하면은 집안에서 소리 안 내고 공부도 하고 소리 내고 공부도 하고 자면서 공부도 하고 또 막 일어나자마자 공부하고 그렇게 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할려고 할 때는 염불공부 보다 더 하기 좋은 공부가 없습니다. 그러고 부처님은 사실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의 이론(理論)이 아니라 지성적(知性的)인 어떠한 지식(知識)이 아니라 바로 생명(生命)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생명을, 부처님을 생명으로 우리가 그대로 믿고 간단 말입니다.
우리도 생명이고 또는 만 중생들이 내용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명 아님이 없습니다. 따라서 모든 중생들은 알고 모르고 상관이 없이 사실은 우주 생명 자리를 항시 그리워하는 추구하는 흠모심이 있단 말입니다. 마음이 맑은 사람들은 갈앙(渴仰)하는 간절히 그리워하는 우리 생명의 중심을 흠모하는 마음이 더욱 더 강렬할 것이고 마음이 어두운 사람들은 그때는 별로 마음이 강하지가 않단 말입니다. 가령 우리가 세속에서도 시(詩)를 쓴다거나 또는 그야말로 감성(感性)이 더 풍부한 분들은 예술적인 재량이라든가 여러 가지 그런 걸로 해서 종교심(宗敎心)도 보통은 강합니다. 위대한 시인치고서 종교심이 강하지 않은 분이 없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은 영원(永遠)의 세계(世界) 우리 생명(生命)의 본 고향(故鄕)자리, 그런 자리에 대한 동경(憧憬)이 항시 강렬하게 움직이고 있단 말입니다.
일반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物質世界)만 관심을 가지고 있으니까 간절한 동경이나 흠모나 갈앙심(渴仰心)이 별로 많지가 않겠지만은 보다 깊이 생각하고 또는 마음이 예술적(藝術的)으로 그만치 수련(修練)이 돼서 마음이 그야말로 온유(溫柔)하고 이런 분들은 갈앙심도 더 강하단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중생들은 누구나가 다 강강한 마음을 녹여야 됩니다. 우리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비춰보더라도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아주 버티고 있고 또 자기가 무슨 교만심(驕慢心)이나 있고 우쭐 하면은 그 얼굴이 얼마나 참 굳어버립니까. 그러나 부처님 앞에서 다 풀어버리고 모든 사람을 다 수용하고 용납하는 관용(寬容)스러운 마음을 품은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 얼굴도 그냥 그야말로 참 봄바람같이 훈훈하게 보인단 말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부처님을 우리가 생명으로 받아들여서 부처님 명호(名號)를 외우는 것이 우리가 바쁜 중에 공부할 때 있어서는 가장 하기 쉽고 통하기 쉽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왕이수라, 닦기 쉽고 또는 깨닫기가 쉽단 말입니다. 이것도 제가 지어서 한 말이 아닙니다. 용수보살이란 제2석가, 제2석가라고 할 수 있는 그 어른께서 했단 말입니다. 용수보살은 14대 조사입니다. 조사고, 팔종(八宗)의 조사(祖師)라 모든 종파(宗派)가 다 그 어른을 이른바 아주 윗 조사로 모셨단 말입니다. 선(禪)이고, 정토(淨土)고, 염불(念佛)이고, 어떠한 것이나 용수보살을 다 조사로 받드는 그런 분입니다.
그러고 또 용수보살 보다 더 앞서서 마명대사(馬鳴大師)라, 마명스님은 이분은 12번째 분이여요. 용수보살은 14번째 조사고 마명스님은 12번째 분인데 한문자로 마명을 표현하면은 말 마(馬)자 울 명(鳴)자 마명입니다, 어째서 마명이라 했던가? 그 당시에 인도에는 북인도에서 카니시카 왕이라는 왕자가 있었어요. 인도 북부에 가서, 한데 그 사람이 중 인도를 중화 인도를 점령을 했습니다. 점령을 했는데 중화인도가 하도 가난해서 뭣인가 참 배상금이라든가, 어떤 이득을 받아야 할 것인데 가져갈 것이 별로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 마치 마명대사가 하도 위대하다 하니까 카니시카왕이 불심은 좀 있었든가 그러면 그대들이 전쟁에 진 배상금 대신에 마명대사 그분을 달라고 그러니까 마명대사가 그만 포로로 해서 말입니다. 배상금 대신으로 결국은 북인도로 끌려갔단 말입니다.
끌려가 놓으니까 북인도 대신들이라든가 모다 일반사람들이 지지리 전쟁해가지고서 그와 같이 많이 희생을 해서 우리가 이겼는데 하필이면 저, 뭐 중 한사람 데리고 왔냐고 말입니다. 이미 데리고 와서 말은 못하지만 불평이 많단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일반 대중한테 보여줘야 할 것인데, 그래서 그 마명대사를 카니시카 왕은 굉장히 숭상(崇尙)을 하기 때문에 틀림없이 무엇인가 기적적인 일이 있을 것이다고 생각을 해서 말을, 망아지를 갔다가 한 여남은 말을 마당에다 끌어다 놓고서 말입니다. 말이 제일 좋아하는 말 먹이를 주었단 말입니다. 먹이를 주고 또 그와 동시에 마명스님 보고 당신이 위대한 도사(道師)라고 하니까 저 말에 대해서 부처님 설법(說法)을 한번 해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명대사가 부처님 법문을 아주 간곡하니 말씀을 하셨단 말입니다. 사람도 결국은 참 감동시키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한데 동물을 감동시키기가 그것이 얼마나 어려울 것입니까. 신통(神通)아니면 안 되는 것이지요, 마명대사가 설법하니까 그 말들이 자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말 먹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서 먹지 않고 눈물을 주룩 주룩 흘렸어요, 눈물을. 그래서 말 마(馬)자 울 명(鳴)자 말이 울었다고 그래서 마명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위대한 스승이 마명대사입니다.
그래서 이 마명대사가 지은 책에는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이라, 기신론. 일어날 기(起)자 믿을 신(信)자 대승의 믿음을 일으키는 책이란 말입니다. 여러분들 대승기신론은 꼭 보셔야 합니다. 마명스님은 대승불교(大乘佛敎)의 할아버지라고 할 정도로 우리가 숭앙(崇仰)합니다. 한데 마명대사가 대승의 할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정돈데 그런 분들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염불(念佛)을 역설 강조했단 말입니다. 제2 석가라고 할 수 있는 제14대 조사인 용수 보살도 염불을 창도하고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마명스님, 그 마명스님도 역시 염불을 그렇게 지성으로 우리한테 권유하고 말입니다.
그러고 여러분들이 거의 다 보셔서 알으시겠습니다만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 염불 문으로 해서는 정토삼부경이 가장 중요한 핵심(核心) 가르침입니다. 정토삼부경의 대무량수경(大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꼭 여러분들 보시기 바랍니다. 그 가운데 가면은 극락세계(極樂世界)가 얼마나 행복스러운가 말입니다. 그래서 극락세계 가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그것이 거기에 다 나와 있습니다. 극락세계란 것은 없는 세계가 아닙니다. 극락세계는 비단 저 십만억 국토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업장(業障)이 가벼워서 모든 존재(存在)의 실상(實相)을 볼 수 있는 투철한 안목(眼目)이 있다고 생각할 때는 이대로 이 자리가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천지우주(天地宇宙)는 모두가 다 바로 극락세계입니다. 다만 중생이 자기 업장 따라서 보고 못 보고 또 많이 보고 적게 보고 그 런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염불을 하는데 있어서는 꼭 염념상속(念念相續)이라 생각 생각에 상속해야 됩니다.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했다 말았다, 했다 말았다 해서는 우리 마음이 아까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삼매에 못 들어갑니다. 삼매(三 昧)에 들어가야 우리 범부(凡夫)가 바꾸어져서 성자(聖者)가 될 것인데, 우리 목적은 내내야 범부가 성자가 되는 것 아닙니까. 자기 혁신을 해 야 됩니다. 자기 초월(超越)을 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 생각에 끊임없이 지속을 시켜야 됩니다. 그래야 심일경성이라, 삼매에 들어간단 말입니다.
삼매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이 생각할 수 없는 기기묘묘한 행복이 다 거기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마음도 가벼워지고 평소에 모르는 것도 알아지고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래 자리가 바로 부처인데, 또는 부처는 만 공덕의 자리기 때문에 부처의 자리 우리가 걸음걸음 접근되어 간다고 생각할 때는 우리한테도 그와 같이 부처의 공덕(功德)이 하나 둘씩 차근차근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 행복 되기가 참 쉬운 것입니다. 우리 인간 존재가 원래로 행복(幸福) 되기 위해서 금생(今生)에 나와서 고행(苦行)을 좀 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가 정말로 참다웁게 부처를 증명하기 위해서 금생에 우리가 이와 같이 인생고(人生苦)를 느끼면서 다행히도 부처님 법 만나서 걸음걸음 지금 부처님한테 다가서고 있단 말입니다.
금생에 닦아 나가는 그것이 그야말로 참 희유(稀有)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참 희귀한 일입니다. 이런 기회를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우리 인생이 너무나 허무하지 않습니까. 자기라고 그래서 꼭 명년까지 건강하게 내가 꼭 버틴다. 이럴 수 없는 문제 아닙니다. 언제 갈는지 모릅니다. 꼭 바람 앞에 등불이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건강하다 하더라도 자기 남편이 또는 자기 아내나 자식이 금방 어떻게 될런지 또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한테는 무슨 불행이 당장에 오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또는 그런 것이 나쁜 것만도 아닙니다. 자기 눈앞에서 자기 부모가 돌아가시건 형제간이나 자식이 어떻게 해서 불행을 당하건 이런 것도 사실은 불행이 아닙니다. 불행이 절대로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런고 하면 우리 중생은 본래로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잠시간 몸만 바꾸는 것이고 당장에 자기 형제간이나 누가 돌아가셨다 하더라도 즉 그 양반 돌아가시는 것이 꼭 그 양반 위해서 손해가 아니란 말입니다.
보통은 생(生)을 한 번 옮길 때는 더 높은 차원(次元)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통사고를 만나서 가시던 어떻게 가시던 간에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중생은 절대로 어떻게 죽어진다 하더라도 그 사람 자체를 위해서나 이 사회를 위해서나 절대로 그것이 불행이 아니란 말입니다. 인간 존재가 개벽(開闢)이후에 얼마나 많은 진화(進化)를 해 왔습니까. 무수한 사람들이 나고 죽고, 나고 죽고 이렇게 하다가 지금 얼만치 우리가 발전됐습니까. 앞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불교(佛敎) 인생론으로 해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우주가 앞으로 수백억 년 뒤에는 다 괴겁(壞劫)이라, 파괴됩니다. 파괴될 때는 그냥 사람이 산채로 해서 파괴 돼 가지고서 무참히 죽고 그런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공부해서 저 높은 무색계(無色界)나 올라가서 편안히 지내고 그 뒤에 우주(宇宙)가 파괴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지금 세월이 가면은 갈수록 차근차근 이렇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아주 그 정보 과다시대, 혼란스럽지 만은 그래도 우리 사람의 본래 성격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차근차근 또 부처님 가르침 같은 가르침으로 해서 정보를 정리를 할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서 좋은 정보만 남아진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고민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나나 너나 누구한테 대해서나 가장 좋은 것이 우리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한테든지 자기 남편한테나 자기 아내한테나 가장 좋은 것은 무엇인고 하면은 서로 피차 격려해서 부처 쪽으로, 부처가 되어가는 쪽으로 한 걸음씩 우리가 진일보(進一步)한단 말입니다. 이보다도 더 큰 선물이 없습니다.
염불(念佛)이란 것은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가 삼매(三昧)에 들기 위해서 일반 세속적인 생활에서는 삼매란 것은 심일경성이라, 마음이 오로지 하나로 모아지는 것인데 일반 세속적인 명상(瞑想)같은 것은 그때그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어느정도 머리 좋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또는 몸이 더 날씬하니 예쁘기 위해서 하기도 하고 모다 하겠지요. 하나 그런 것은 하나의 유위법(有爲法)이라, 세간적(世間的)인 중생(衆生)들이 생각하는 차원(次元)에서 머무는 것이고 이것은 해탈(解脫)의 공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에 들어와야 비로소 해탈의 공부입니다.
그래서 비록 선방(禪房)에서 재가불자님들 이 공부는 못하신다 하더라도 인역(자기) 집에서라도 아까 제가 말씀드린바 같이 염불공부, 염불공부는 지속을 시켜야 불념이념(不念而念)이라, 그래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나온단 말입니다. 꼭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무실 때도 역시 주무실 때 염불하다가 주무시고 말입니다. 주무시면 그때는 여러분들은 스스로 잠들어서 모른다 하더라도 옆에 사람들이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면서도 염불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저는 저 도반(道伴)들하고 같이 지낼 때도 봤습니다만 공부를 열심히 하고서 그냥 잠들어 놓으면 그 도반이 자는 가운데도 공부하고 있단 말입니다. 잔다는 것이 굉장히 손해 아닙니까. 인생이 그야말로 짧은 것인데 자는 동안 빼버리면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하기 때문에 자는 동안에 우리가 손해 안 보고 공부하기 위해서는 잘 때까지, 자리에 누워서까지, 여러분들이 장좌불와(長坐不臥)는 못 하시겠지요. 그러나 자리에 누워서까지 공부를 하시다가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잠들어 버리면은 잠든 가운데도 공부가 됩니다. 또는 잠든 가운데 또 엉뚱한 망상(妄想)을 했다가도 일어나자마자 그냥 마음을 추스러셔 또 염불을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이어 가도록까지 하면은 나중에는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불념이념이라, 불념이념이라. 생각지 않아도 저절로 염불이 된단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바람 불면은 바람 소리도 염불하고 또는 시냇물이 흘러가면 시냇물 소리도 염불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부처님의 광명(光明)이 눈앞에 훤히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한없는 행복을 누리시고 또 금년 여름 공부에 어디서 공부를 하시든지 간에 꼭 우리 공부가 부처님한테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가셔서 꼭 여름 동안에 본래 부처인 것을 우리가 깨닫는 것이 그렇게 사실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인 자리를 꼭 한사코 우리가 금생(今生)에 올 여름에 증명(證明)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이만 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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