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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69)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6.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3)

 

다만 유교에서는 오직 현세와 자손의 관점에서만 언급하였는데, 불교에서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에 걸친 인과응보를 빠짐없이 두루 논하는 게 다를 뿐이오. 범부의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황당하거나 허망한 말이라고 여기며,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자가 참으로 많소. 이는 마친 눈먼 봉사가 길잡이를 등지고, 제 스스로 험한 길을 더듬어 가려는 것과 같으니, 어찌 구덩이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 않고 배기겠소?

 

인과응보의 법칙을 제창함은, 천지와 성인의 마음을 받들어 행함으로써, 전 세계 인류의 도덕과 인의(仁義)를 완성시키는 일이오. 만약 인과응보를 황당하거나 허망하여 돌아볼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면, 이는 단지 천지와 성인의 마음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자기의 정신 의식도 영원히 악도에 떨어뜨리는 것이 되오.

 

그러면 상근기의 지혜로운 자도, 뜻을 분발하고 제때 민첩하게 덕성을 닦을 수 없게 되오. 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는, 거리낌 없이 죄악을 자행할 것이오. 그 결과 천지가 만물을 기르고 성인이 중생을 교화시키는 권능조차 억눌려 드러나지 못하고, 우리 인간의 마음에 본디부터 갖추어진 이성도 파묻혀 나타나지 못할 것이오. 그 폐단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소?

 

그러나 세간(유가나 도가)의 성인 말씀은 너무 간략하고, 또 현세와 자손밖에 언급하지 않고 있소. 태어나기 이전(전생)이나 죽은 이후(내생), 시작도 없이(無始) 죄와 복의 인연에 따라 육도 윤회를 반복하고 있는 인과응보는, 전혀 밝히지 않은 것이오. 그래서 식견이 천박한 자는, 비록 매일같이 성인의 인과응보 말씀을 읽을지라도, 여전히 인과응보의 원리를 믿지 못하고 있소.

 

여래의 큰 가르침은, 우리 인간 심성의 오묘함과 삼세인과 응보의 미묘함을 뚜렷이 내보이셨소. 뿐만 아니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도에서부터, 미혹을 끊고 진리를 증득하여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법문에 이르기까지, 갖추지 않은 바가 없다오. 그래서 부모에게는 자애를 말하고, 자녀에게는 효성을 일깨우며, 형제에게는 우애를 일러 주고, 부부에게는 화목과 순종을 말해 주며, 주인은 어질고 하인은 충성하며 각자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다하도록 가르치시니, 이는 세간의 성인 말씀과 전혀 다를 바가 없소.

 

그러면서도 사실 하나하나에 대해서, 다시 앞의 원인과 뒤의 결과를 밝혀 주시는 점은, 세간의 성인이 따라 올 수 없는 부분이라오. 의리를 다하고 직분을 다하라는 식의 말은, 단지 최상 근기의 지혜로운 자에게나 통할 뿐, 하근기의 어리석은 자에게는 먹히지 않소. 그러나 인과응보를 알면 선악과 화복이 불을 보듯 뻔하게 되니, 어느 누가 흉함을 피하고 길함으로 나아가며, 화를 면하고 복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겠소?

 

인과(因果)’ 두 글자는, 세간과 출세간의 일체법을 두루 총망라하여 빠뜨림이 없소. 세간(유교)의 성인도 인과를 분명히 보여 주지 않음이 없으나, 다만 세상을 경륜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기 때문에, 후세에 계속 전해질 수 있는 가르침을 펼친 것뿐이라오. 그래서 오직 현세(금생)와 선후대(先後代), 부자(父子), 조손(祖孫)간의 인과응보에 국한하였소. 태어나기 이전(전생)과 죽은 이후(내생)는 물론, 시작도 없는 아득한 과거와 끝도 없는 영원한 미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것이오.

 

그런데 후대의 학자들은 성인의 본래 뜻을 제대로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사람이나 만물이 생겨나는 것은, 단지 천지간의 기운이 우연히 결합하고 변화하여 그 형상을 드러내는 것일 따름이라고 터무니없이 쉽게 말하는구려. 또 죽음에 이르면, 만물의 형체가 썩어 문드러지면서, 영혼도 또한 바람에 나부끼듯 흩어져 없어지기 때문에, 원인도 없고 결과도 없다고 하는구려. 이러한 단멸상(斷滅相)에 빠진 사견(邪見), 성인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자신의 영혼까지 어리석게 타락시키는 해악은, 매우 심하다오.

 

공자가 주역(周易)의 위대하고 오묘함을 찬탄하여, 그 의리(義理)를 부연 해석하면서 맨 처음 꺼낸 말이, “선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경사가 남아넘치고, 악을 쌓는 집안에는 반드시 재앙이 흘러넘친다.” 는 것이었소. 또 기자(箕子)는 무왕(武王)의 간청에 따라 아홉 가지 홍범(洪範 : 書經의 한 편명으로, ‘큰 법도라는 뜻)을 진술하면서, 맨 끝에 바야흐로 오복(五福 : 장수부귀안녕好德善終)과 육극(六極 : 비명횡사(요절)질병우환빈곤포악허약)을 함께 분명히 밝혀, 선악과 화복의 위엄으로 매듭지었다오.

 

이 두 성인이 밝힌 경전의 내용이, 만약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를 통틀어서 함께 논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하늘이 내려준 법도나 성인이 펼친 언론(철학)이나 현명한 군왕이 시행한 정치 명령은, 모두 모순투성이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오.(예컨대 간사한 악당들이 부귀영화를 누리고, 정의로운 충신들이 처형되면, 안회가 요절하고, 도척이 장수한 사실들이 모두 그렇소.)

 

그러나 전후 인과응보의 원리를 알게 되면, 곤궁하고 통달하거나 잃고 얻음이 모두, 한결같이 자기 스스로 구하고 받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소. 그래서 설령 몹시 어려운 시련과 역경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늘을 원망하거나 사람을 탓하지 않을 수 있소. 단지 자기의 덕이 아직 충분히 쌓이지 못해, 과보가 무르익지 않는 것을 부끄러워할 뿐, 하늘이나 사람들의 각박한 대접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오. 이렇듯이 하늘의 섭리(造化)를 즐거이 따르며 자신의 운명(분수)을 알고 만족한다면, 언제 어디에 가든지 자유자재로이 소요유(逍遙遊)할 수 있다오.

 

불법을 유통시키는 이익과 공덕은 한량이 없소. 선천의 근기가 두터운 자는, 심오한 이치를 체득하여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며(明心見性), 나아가 미혹을 완전히 끊고 진리()를 증득할 수 있겠소. 또 선천의 근기가 다소 얕은 자라도, 평이한 내용만 이해하면, 죄악을 고치고 선행을 닦아 성현이 되길 희망하는 발원으로 정진할 수 있지 않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