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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20)

 

 

2. 수증체계修證體系

 

다음에는 근본불교의 수증修證 체계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승불교로 나아가면 조금 덜 딱딱합니다만 근본불교 자리는 흔히 공부를 안 했고 또 별로 관심을 안 두기 때문에 딱딱하게 느껴집니다마는 그래도 우리가 범부심을 점검하고 뒤돌아 볼 때는 굉장히 자기 스스로에 대해서 깊이 느껴지고, 따라서 습기를 녹이는데 참고가 많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대승불교라고 해도 근본불교가 꼭 필요합니다. 마치 돈오에도 점수가 필요하듯이 말입니다.

 

 

1) 현위賢位[三賢位四善根]

 

현위賢位와 성위聖位로 나누는데 현위는 현자의 자리입니다. 말하자면 진리가 옳다고 생각하고 닦아나가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방편위方便位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닦아 나가서 참다운 근본 성품을 깨닫는 자리가 성위 곧 성자의 지위입니다.

 

삼현위三賢位

 

현위는 다시 삼현위三賢位와 사선근위四善根位로 구분을 합니다. 삼현위는 오정심관五停心觀으로 시작이 됩니다. 우리 공부하는데 근본불교는 참 착실하고 세밀합니다. 아주 빠짐없이 체계가 되어 있습니다. 오정심관五停心觀은 번뇌에 때 묻은 우리 마음을 쉬게 하여 고요한 마음에 머물게 하는 법입니다.

 

첫째, 부정관不淨觀입니다. 우리 번뇌란 것은 자기 몸을 아낌으로 해서 나옵니다. 따라서 자기 몸을 아낄 때는 망상이 나오고 집착이 생깁니다. 보다 좋은 옷을 늘 입혀야 하고 좋은 음식을 먹어야 하고 좋은 집에 살아야 하는 탐욕심이 나오겠지요. 따라서 욕심을 뗄 때는 몸뚱이가 본래 부정하다는 부정관이 좋습니다. 부정관하는 법도 구체적으로는 굉장히 세밀합니다.

 

또는 자비관慈悲觀입니다. 사람을 보면 인정 있는 사람들도 있고 인정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주 잔인한 사람은 과거 숙세에 그만치 나쁜 업을 많이 지었겠지요. 본래 나와 남이 없다는 무아가 되어야 참다운 자비인데 그렇게까지는 못 된다 하더라도 상대적으로라도 인정을 베풀고 사회봉사도 해야 하겠지요. 그러나 이기심 많은 사람들은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비관을 해서 차근차근 마음을 열어나가야 합니다. 자비심이 많을수록 마음이 열리게 되고 드디어는 천지 우주 무한대까지 확장이 되어야 하겠지요.

 

그다음에 인연관因緣觀입니다. 인연 따라서 모아지고 인연 따라서 흩어진다는 인연법을 관찰하는 법입니다.

 

그다음에는 계분별관界分別觀입니다. 이것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이런 것을 분석해서 우리가 집착해 있는 마음을 풀려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과 우주만유의 구성이 오온인 것이라고 분석한다면 그렇게 좋아하는 자기 몸뚱이도 내내야 5온의 결합에 지나지가 않는다고 성찰해서 무명심을 여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계분별관이나 인연관은 상통이 되기 때문에 어떤 문헌에서는 인연관만 내세우고 계분별관 대신에 관불관을 넣기도 합니다.

 

관불관觀彿觀은 부처를 관조하는 법입니다. 다장중생多障衆生 관불관이라 하여 장애가 많고 업장이 많은 중생은 관불관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징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지 않습니까? 좋은 그림을 볼 때하고 상화 그림을 볼 때와는 우리 마음이 다르지 않습니까? 여기 노덕 스님들과 같이 서울 어느 부잣집에 가서보니 그 넓은 벽에다 저희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마음이 산란스럽고 살벌한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 것이 벽마다 있을 때에 우리 마음이 평정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상호는 32三十二相 80종호八十種好라 그야말로 지혜와 자비와 복덕이 구족한 원만상호 아닙니까. 우리의 본 얼굴은 부처님 상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지혜롭고 자비심이 있을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부처님 상호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부처님 상호를 항시 보고 내가 닮아야겠구나, 내 본래면목 자리가 저 자리이구나이렇게 생각할 때는 그만치 우리가 스스로 업장을 녹인단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부처를 관찰하는 관법이 이른바 관불관입니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시방여래十方如來는 시법계신是法界身이라시방여래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이 법계가 바로 부처님 몸입니다. ‘로 심상불시心想佛時에 고로 우리 마음이 부처를 생각할 때는 우리 마음이 바로 3280종호를 갖추니라[是心卽是 三十二相 八十種好]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나와 남으로 구분을 하고 또는 자연과 나를 한계를 두고 있는 것이 우리 중생 아니겠습니까? 자연도 내내야 진여불성의 화신化身인데 좋은 사람 궂은 사람, 자연과 나의 벽을 무너트릴 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얼굴이 풀리는 것입니다. 이런 데에 관불관의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다음에는 수식관數息觀입니다. 이른바 호흡법입니다. 지금 사회에서는 단전호흡법이다 복식호흡법이다 해서 호흡법들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또 호흡법만 하면 되지 다른 법이 필요 없다는 정도로 집착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점은 인정을 하겠지만 그것만 다이고 다른 것은 아니다 하면 벌써 법집法執이 아니겠습니까? 법집은 말아야 합니다. 염불을 하나, 화두를 하나 어떻게 하든지 간에 법집하면 그마만치 거기에 흐림이 생깁니다.

 

수식관이란 호흡을 헤아리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안나바나경安那般那經 Ana-apana이라는 경의 대요인 육묘문六妙門에 수식관의 내용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면 육묘문은 여섯 단계로 구분해서 수이라고 했습니다.

 

첫째 수식數息은 호흡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호흡을 헤아리는 것도 여러 가지로 말합니다만 불교에는 많은 수를 헤아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부터 열까지 헤아리고 다시 또 열에서 하나를 헤아리는 식으로서 이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스러울 때에 하는 법입니다.

 

이와 같이 오정심관五停心觀은 모두가 다 우리 번뇌에 대응해서 한 법문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뚱이나 다른 대상에 대하여 탐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부정관을 하는 것이고, 인정이 부족하고 이기심이 많은 사람들은 자비관을,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 많아서 시비 분별을 못 가리는 사람들은 인연관을, 산란스러운 마음을 도저히 어떻게 잠재울 수가 없는 사람들은 호흡을 헤아리는 수식관으로 마음을 다스리게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수를 헤아리다가 조금 나아지면, 어느 정도 망상이 줄어지면, 그때는 호흡을 헤아리기가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 뒤에는 수식隨息입니다. 숨을 헤아리는 것은 그만두고, 들이 마시면 들이마시는 대로 또는 내쉬면 내쉬는 대로 호흡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서 숨 가는대로 맡겨 버리는 것입니다.

 

다음 지식止息은 번뇌 망상하는 마음을 그치도록 호흡을 오랫동안 머물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번뇌 망상은 응당 그쳐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범부지에서는 선정禪定에 들어가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 그쳐지지가 않습니다. 원숭이와 같이 경망한 것이 우리 마음 아닙니까, 한시도 마음이 머물지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잠재울 것인가? 경을 보아도 읽을 때는 모르거니와 경을 놓으면 다시 천차만별千差萬別로 분별 망상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분별 망상을 없애려면 꼭 삼매三昧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참선이 필요한 것입니다.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우리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하는 공부를 해야 분별 망상하는 산란스러운 산심散心을 잠재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산심이 다 끊어져 버리면 자동적으로 지식止息이 되겠지요. 선정에서 초선정, 이선정, 삼선정까지 가더라도 역시 산란심은 온전히 못 끊어집니다. 산란심이 끊어지지 않으면 호흡도 거기에 따릅니다. 우리 생명이 신비로운 것이 망상 분별하는 마음과 호흡과는 정비례합니다. 마음 거칠면 호흡도 거칠고 호흡이 고요하면 마음도 고요해집니다. 그런데서 호흡법이 중요한 점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호흡을 한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항시 반야 지혜가 앞서는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 공부는 항시 반야 지혜를 앞세우는 것이고 외도 공부는 반야 지혜를 별로 생각하지 않고서 그냥 테크닉technic이나 상에 걸려서 형상적인 것을 미처 멸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호흡이 점차로 고요해지고 또는 딱 그쳐 버리는 것이 초선, 2, 3, 4선까지 가야 비로소 우리 산란한 마음이 그치게 되는 것입니다. 4선정을 거쳐야 이른바 멸진정에 들 수가 있습니다. 아상我相을 몽땅 끊어버리는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튼 지식止息은 우리 호흡이 번뇌가 고요해짐에 따라서 그쳐질 수 있는 그런 정도를 말합니다. 망심이 줄어지면 점차로 호흡도 고요해지는 것인데 짐짓코 애써서 오랫동안 호흡을 머무는 법도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복식腹息호흡 같은 것이지요. 요가수트라Yoga-sutra로 말하면 쿰박kum-bhaka이라, 숨을 들이마셔서 오랫동안 지니는 것입니다. 쿰박 에서는 가사 1시간 정도 쿰박을 하게 되면 손가락 위에 올라 설 정도로 육신肉身이 가쁜 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호흡과 우리 마음과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망심이 줄어지면 그에 비례해서 호흡도 가지런해집니다. 반대로 호흡이 고요해지면 우리 망심도 줄어집니다.

 

다음에는 관입니다. 지금까지는 호흡을 위주 했지마는 호흡은 거의 고요한 단계가 되었으니까 관이라,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진여眞如를 관하는 것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천지 우주가 일미평등한 다 진여불성이구나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관입니다.

 

그다음에는 환입니다. 특히 그렇게 관하면서도 관조의 대상을 없애는 것입니다. 주관과 객관과의 차별을 없애고 모두를 다 주관으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이라고 깨달아 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정입니다. 주객을 떠나서 참다운 법자체인 중도실상과 하나가 되어 망상은 그치고 청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호흡법 육묘문六妙門[]의 요지입니다.

 

그다음에 별상념주別相念住입니다. 어느 것으로도 성불할 수 있는 법이지만 우선은 초심자가 오정심관으로 공부해 나가서 점차로 자기 마음을 다스려 인정이 없고 자비심이 없으면 자비심이 나게 하고, 자기 몸뚱이를 너무 집착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몸뚱이를 너무 애착하는 사람들은 또 부정관 등을 해서 우리 마음이 익어지게 되면 별상념주라, 그때는 법을 총체로 본다 말입니다. 이른바 사념주관四念住觀 또는 사념처관四念處觀 그럽니다.

 

근본불교는 주로 사념주관 곧 사념처관이 굉장히 중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아함경에는 수십 군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념처는 신수심법身受心法이라, 우리 몸에 대해서도 부정관이라든가 여러 가지 관법을 많이 했으나 이제 총체로 본다면 이란 부정해서 더러운 것이요. 아까울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임종시에 바른 마음먹으면 죽는 순간 바로 더 좋은 몸으로 바꿔 태어나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면 슬퍼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몸은 부정한 것이라 관하는 것이고, 는 우리가 받아들여 수용하는 것, 감수하는 것은 모두 다 고라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 개고人生皆苦, 인생이 다 고라고 말하면 우리 인생에는 안락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반문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 범부지에서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우리가 잘 못 봐서 안락같이 보이는 것이지 참다운 안락은 없습니다. 안락으로 보이는 것은 곧장 다시 고로 전변되고 맙니다. 그러기에 실다운 안락은 절대로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수용하는 것은 결국은 모두 고뿐이라고 관하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마음은 순간 찰나도 그대로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선정이란 정심定心이 되어야 마음이 머무는 것이지 선정이 못 될 때는 항시 동요부단動搖不斷합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은 무상한 것이다. 덧이 없다고 관하는 것입니다. 은 이른바 만법萬法을 말합니다. 법은 인연생因緣生이거니,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이 법이거니 법에 있어서 어느 고유固有한 것이 없다 곧 무아無我고 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수심법身受心法우리 몸이나 감수하는 것이나 분별하는 마음이나 또는 우리가 느끼고 분별하는 개념적인 법, 이런 것이 모두가 부정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고, 무상한것이고, 무아인 것이다이렇게 우리가 관찰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학수종鶴樹終談이라, 학림鶴林 수하樹下에서 부처님이 맨 나중에 설법하신 경전인 유교경遺敎經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임하실 때에 아난존자가 세존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에는 우리는 무슨 법에 의지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사념주 곧 사념처관에 의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념처관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잘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리 사바세계를 바로 볼 때는 부정不淨이고, ,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고무상무아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사바세계의 사정견四正見이라 합니다. 바른 견해입니다. 따라서 고무상무아를 정견으로 생각할 때에는 우리가 집착이 끊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심만 하면 될 것인데 관법이 무슨 필요한가?’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느 선지식은 관법이 외도라고 그럽니다. 이렇게 법집法執을 하면 참 곤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는 법집을 꼭 극복해야 합니다. 법집을 떠나지 못하면 자기 공부도 안 되고 가정도 바로 다스리지 못하고 또는 자기 문중이나 한 종단이나 국가나 절대로 바로 나갈 수가 없습니다. 범부란 그 업장이 십인십색十人十色이기 때문에 열 가지 백 가지로 여러 가지 법이 나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꼭 법집을 떠나야 합니다.

 

부처님 법은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 법문마다 성불하는 문입니다. 동으로 가나 서로 가나 또는 남으로 가나 북으로 가나 다 성불하는 문입니다. 화두를 드는 법이나 또는 관법하는 법이나 또는 염불하는 법이나 주문을 외는 법이나 다 성불하는 법입니다. 다만 긴요한 조건은 꼭 선오후수先悟後修가 되어야 합니다. 선오후수가 되어야 참다운 화두, 참다운 염불, 참다운 선, 참다운 주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오정심관, 별상념주 또는 총상념주 이것이 이른바 삼현三賢인 것이고, 삼현위에서 어느 정도 점차로 우리의 바른 견해가 확립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법으로 꼭 해야겠구나그래서 경안輕安이라, 마음이 안정되고 가벼워 확신이 서는 것입니다.

 

경안이 되어야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배고프다고 꼭 간식을 먹고 무엇을 먹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일단 경안이 되어 버리면 있으면 먹는 것이고 없으면 그만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옛날 고인들의 바른 자취를 더듬어 가는 것입니다. 삼세제불이 일종[日中一食]이기 때문에 없으면 덕분에 일종도 하고, 단식하면 덕분에 몸에 있는 더러운 노폐물들을 다 배설하는 것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좋은데, 있으면 있는 것 때문에 도리어 우리가 자기 몸도 마음도 상하고 부담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경안이 되면 자기 몸에 대해서 부담을 느끼지 않는 것입니다. 말은 쉬운데 실지로는 쉽지가 않겠지요. 배고픈 것을 이기기도 곤란스럽고 또는 많이 먹다가 갑자기 적게 먹으면 탈진되고 하니까 그것도 어려운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자꾸 행습을 들여서 이놈의 몸뚱이 괴로운 덩어리 아닌가? 내 전생의 업장이 뭉친 덩어리 아닌가? 어느 때 버린다 하더라도 아무 여한이 없다. 누가 비방하거나 좋다거나 궂다거나 그것이 내 본래면목에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점차로 그런 관념이 익어지면 자기 몸뚱이에 대해서 관심이 줄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고무상무아라, 신수심법 사념주관의 공덕으로 경안의 단계가 되면 설사 불경 가운데 어려운 대문이라 하더라도 경 풀이만 되면 , 그렇구나!’ 하고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십이인연법에서도 보아왔습니다만 윤회의 가장 근원적인 원인이 무명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당위當爲는 무엇인가 하면 어떻게 무명을 없앨 것인가? 하는 것이 불교 수행의 요체입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도 있는 바와 같이 본래에서 볼 때는 무무명無無明이라, 원래 무명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잘못 봐서 무명을 실체화시키고 대상화시킨 데서 이른바 윤회의 인생고가 있는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카르마Karma의 사이클cycle윤회의 수레바퀴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것도 역시 무명을 없애는 데서 비로소 참다운 수행적인 의의가 있습니다. 어떻게 무명을 끊을 것인가? 삼학도三學道라든가 또는 팔정도八正道가 다 무명을 소멸하는 중요한 덕목인 것입니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이나 모두가 다 무명을 없애는 작업입니다. 따라서 어떤 공부를 하든지 간에 무명과의 정 반대인 진지眞智 곧 참다운 반야 지혜가 앞서야 하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것은 유도 아니고 공도 아니고 이른바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지혜입니다. 중도실상의 지혜가 항시 마음에 자리하고 염불도 하고 화두도 참구하고 주문도 외워야 무명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교의 총체적인 정견正見은 방금 제가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도실상의 참다운 지혜가 정견입니다마는 소승적인 의미에서 사바세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정견은 고, , 무상, 무아입니다. 인생이 무상이고 시간적으로 볼 때 어느 것도 잠시도 머무는 것이 없기 때문에 무상입니다. 또한 무상한 존재는 어느 것이고 고유한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무아인 것입니다. 사람을 비롯해서 어떤 것이나, 아법我法이나 제법諸法이 모두가 다 무아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무상하고 무아인 것을 잘 모르고 아가 아닌 것을 라고 하고 또는 법이 아닌 것을 실법實法이라고 생각하는데서 필연적으로 인생고가 있게 됩니다. 제 아무리 영리하다하더라도 를 떠나지 못하고 또는 실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생각하는 한에서는 인생고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무아고 또는 무상이기 때문에 공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무상무아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습니다.

 

별상념주別相念住에서는 처음에 부정不淨이 있으나 총상념주總相念住에서는 고무상무아라고 합해서 관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보든지 간에, 자기 몸을 보나 또는 상대를 보나 어떠한 존재를 보나 이것은 무상하고 결국은 괴로운 것이고 공이고 또는 무아구나이렇게 관조하는 것이 총상념주 관법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수십 군데나 고무상무아를 관조하는 법이 있는 것이고 또는 초선정, 이선정에 들어가는 것도 역시 고무상무아의 사념주법으로 들어갑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경안이 발동하면 참다운 진리를 위해서는 내 몸도 아낌없이 바치겠구나! 하는 그런 생각이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하면 우리는 본래로 상주 부동한 진여불성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인데 우리가 어쩌다가 망각하고 살아왔지만 잠재의식에서는 항시 자기 고향으로, 진여불성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히 솟음 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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