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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21)

 

 

2) 성위聖位[有學道, 無學道]

 

그다음에는 성위聖位로서 성자의 지위입니다.

세제일법에서는 마음의 동요가 없이 망상에 간격間隔되지 않고 나간다 하더라도 아직은 성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정도만 되어도 성자의 한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 이것이 도통道通이구나하는데, 우리는 이런 것을 엄정하게 경계를 해야 합니다. 석존 이후에 이런 과오를 범한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수도 과정의 법상을 해설한 것은 증상만增上慢의 죄를 범하지 않고 자기 한계와 자기 공부를 점검하기 위해서입니다. 증상만의 죄를 범하면 자기를 속이고 성자를 속이고 성품을 속이기 때문에 공부가 진척이 안 됩니다. 또한 자기가 못 통하고 통했다 하고 성인이 아니고서 성법聖法을 얻었다하는 대 망언을 범하면 결국은 승려의 자격을 상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는 법의 차서를 꼭 알아서 점검을 바르게 해야 하고 자기가 잘 모를 때는 믿는 선지식한테 가서 점검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성위聖位에는 유학도有學道와 무학도無學道가 있습니다. 유학도는 번뇌의 습기를 아직은 다 못 끊어서 수도를 할 단계입니다. 그러나 무학도는 번뇌의 습기마저도 다 끊어버려서 다시 배울 것이 없는 단계입니다. 이른바 멸진정滅盡定을 성취해서, 번뇌를 멸진하고 아를 멸진하고 실아실법實我實法을 다 멸진해서 다시 할 것이 없는 경계입니다.

 

 

유학도有學道

 

유학도에는 견도見道와 수도修道 단계가 있는데 견도는 소승 사과四果인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가운데 처음인 수다원과 즉 예류과입니다.

사과는 습기가 얼마만치 제거가 되고 안 되었는가 하는 깊고 옅은 차이 뿐인 것이지 모두가 다 성자의 지위입니다. 처음에 수다원과須陀洹果는 예류과預流果라 하는데, 범부의 경계를 떠나서 성자의 경계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죽고 살고 분별 시비하는 생사망의 그물을 벗어나는 단계입니다. 마치 새가 채롱을 벗어나듯이, 사실 우리 중생들은 아직 성자가 못되는 지금 새장에 갇혀 있는 새나 똑같습니다. 아무리 푸득거리고 잘난 척해도 내내야 새장에 갇혀 있는 새나 다름없습니다.

 

예류과에서는 생사망을 출리出離해서 금강불성을 견증見證합니다. 진여불성자리, 우리 자성을 현관現觀으로 직접적으로 직관해버려야 비로소 예류과인 성자의 지위에 참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도見道요 견성見性입니다.

 

어록들을 보면 견도 견성 가지고 굉장히 많이 싸웁니다. 견성은 훨씬 높고 견도는 밑이라고 하지만, 불경을 보면 어디를 보아도 다 똑같은 개념입니다. 다만 종파성 때문에 자기 종파가 제일 옳고 다른 것을 폄하하는 데서 자시비타自是非他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또는 정말로 견도를 하고 견성을 했을 때는 경계가 같아버리니까 하등 시야비야是也非也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견성을 못하고 참다운 견도를 못한 사람들은 섣불리 문자文字 가지고 분별하고 따집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수도修道는 보살십지菩薩十地로 말하면 초지初地부터 십지十地로 점차 닦아 나가는 것이 순서 아니겠습니까마는 소승사과小乘四果에서는 그런 것을 다 합해서 말합니다. 사다함과斯陀含果는 인천人天에 한번 생을 받은 후에 열반에 든다고 일래과一來果라 합니다. 인간에나 천상에나 욕계欲界에 한번 오는 과입니다. 예류과를 성취했다 하더라도 욕계번뇌가 다 소멸한 것이 아닙니다. 불경에 보면 욕계9품 번뇌 가운데서 6품이 떼어졌지마는 3품이 남아 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욕심의 찌꺼기 때문에 다시 욕계를 한번 와서 열반에 든다는 과입니다. 열반에 든다는 것은 진여불성과 하나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일래과一來果에서는 욕계에 한번 올 수 있는 정도 밖에는 번뇌가 안 남았으니까 함부로 파계무참한 짓은 못하겠지요. 우리 범부지에서는 그야말로 진날 개 사귄격으로 떼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지겨운 번뇌가 욕계 번뇌입니다.

 

그다음 아나함과阿那含果는 불환과不還果라 합니다. 다시 욕계에는 안 온다는 경계입니다. 색계나 무색계에는 옵니다마는 욕계에는 다시 올 필요가 없습니다. 욕계의 사혹思惑번뇌인 9품을 다 떼었기 때문에 불환과라, 다시 욕계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수혹修惑[思惑]을 모조리 끊어버렸으니 다시 욕계에 돌아올 필요가 없습니다.

번뇌를 견혹과 수혹으로 구별하여 말합니다. 견해에 따르는 번뇌는 견혹見惑이라 하는데 견도할 때에 몽땅 떼어버리는 것이고 사혹思惑 즉 수혹修惑은 일체 사물의 성품을 모르거나 정의情意에 따른 번뇌로서 점차로 십지十地까지 올라가면서 다 끊습니다.

 

견도할 때에는 나와 네가 없고 모든 것이 본래로 일미평등 한 진여불성이다이런 도리에 장애가 되는 견혹을 끊고 바른 도리를 확실히 증명하는 경계입니다. 확실히 증명하는 것은 금강불성金剛佛性을 견증見證해야 되는 것입니다. 금강불성을 견증하지 못할 때는 항시 의심이 남습니다. 일상생활에도 눈으로 보고 실제로 체험하면 의심하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자꾸만 시야비야 합니다.

 

 

무학도無學道

 

그다음 아라한과 즉 무학도無學道입니다. 아라한과는 이른바 멸진정을 성취해서 번뇌를 다 멸해버려서 다시 번뇌가 없습니다. 그때 비로소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온전히 깨닫습니다. 불생불멸한 도리를 확실히 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근본불교가 우리한테 필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점차로 닦아나가는 순서가 바르고 스스로 공부를 점검할 때나 남의 공부를 점검해 줄 때에도 굉장히 필요한 것입니다.

 

이상으로 근본불교의 수증修證 체계를 대체로 마친 셈입니다. 너무나 번쇄한 교리를 대강만 간추려 말씀하게 되니 피상적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튼, 이번 법회는 전문적인 연구가 아닐 뿐 아니라 우리가 과거에 다 섭렵했던 것을 재확인하고 넘어가는 의미에서 살펴본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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