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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6)

 

 

5. 돈점頓漸

 

頓漸돈점

師謂衆曰사위중왈 法本一宗법본일종 人有南北인유남북 法即一種법즉일종 見有遅疾견유지질

何名頓漸하명돈점 法無頓漸법무돈점 人有利鈍인유리 故名頓漸고명돈점

 

壇經단경

 

그러면 단경壇經에는 점수漸修라는 말이 없는 것인가? 단경에도 있습니다. 다만 돈오점수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의미로 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단경에서 6조 대사가 대중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은 본래 하나의 종지宗旨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남북이 있을 뿐이다고 하였습니다. 법은 본래 종지가 하나고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자리 하나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와 선근 따라서 잘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총명하고의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 돈이고 무엇이 점인가?’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고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볼 때에 6조 혜능 스님도 분명히 돈점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말씀이나 6조 혜능 스님 말씀이나 말 표현에 지나치게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대의大義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돈점에 대해서능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돈점頓漸

理即頓悟이즉돈오 事非頓除사비돈제 乘悟併消승오병소 因次第而盡인차제이진

 

楞嚴經능엄경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髄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선법禪法의 골수란 뜻이지요. 공부하는 분들이 점차로 닦는다든가 장애를 없앤다든가 하는 것은 능엄경을 참고로 하면 별로 헤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엄경같은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점차 수증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무시해 버리면 공부할 때에 방황도 많이 하고 또는 그릇 해석도 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에 있기를 이즉돈오理即頓悟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는 문득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교를 교리적으로 공부할 때는 이와 사를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겠지요. 이사가 무애無碍, 원래 둘이 아니겠지만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이와 또는 현상적인 문제는 사인데 사비돈제事非頓除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그런 문제는 문득 제거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승오병소乘悟併消깨달음에 편승해서, 마치 바다를 건널 때 배를 타고 가야 건널 수가 있듯이 깨달음에 편승해서 닦아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차제에 따라서 다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또는 선지식들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찌 그런가 하면, 조사 스님들 말씀들은 으레 노파심절에서 우리 중생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에 따라서 간절히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점수漸修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하는 분들한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느끼고서 법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6. 견성見性

 

다음에는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壇經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性견성

若悟自性약오자성 亦不立菩提涅槃역불립보리열반 亦不立解脫知見역불립해탈지견 無一法可得무일법가득 方能建立방능건립만법 若解此意약해차의 亦名佛身역명불신 亦名菩提涅槃역명보리열반 亦名解脫知見역명해탈지견 見性之立亦得견성지립역득 不立亦得불립역득 去來自由거래자유無滞無碍무체무득 應用随答응용수답 普見化身보견화신 不離自性불리자성 即得自在즉득자재 神通遊戯三昧신통유희삼매 是名見性시명견성

壇經단경

 

만일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고모두가 하나의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법도 세울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리,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고 또는 무슨 법이고 만법이고 이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거니 어느 것도 세울 것이 없는 이것을 우리가 이대로 해석할 때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 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即得自在 신통유희神通遊戯 삼매三昧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造作이 없는 이른바 임운등등任運騰騰 등등임운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조작造作이란 말과 임운任運이라는 상대적인 말을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 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그야말로 참,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만 조금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증오證悟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 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습기까지는 다 못 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 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존世尊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견성하실 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구경각究竟覺을 그대로 성취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부처님 깨달음까지도 시비를 거는 분이 있습니다. ‘수하성도樹下成道하신 부처님 깨달음도 아직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 있는 총림방중叢林房中에 다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진귀조사眞歸祖師한테 법을 물어서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또 이런 학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승가韓國僧伽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거典據로는 사굴산闍堀山 개조開祖인 범일(梵日 810~889) 대사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録[1293 高麗天頙著]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또는 인도에는 없는 그런 학설이 한국 승가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조 말엽에 백파(白坡 1767~1852) 스님 같은 분은 이 학설을 굉장히 권위 있는 학설로 인용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중국에나 인도에서도 전거가 없는 것을 한국에서 비로소 발설했다는 것이 나쁜 쪽으로 비판이 안 되고 상징적으로 좋게 해석이 되겠지요.

 

아무튼, 깨달음도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갑이란 사람 깨달음 또는 을이란 사람 깨달음이 물론, 평등무차별의 불성 자리는 똑같으나 얼마만치 습기를 많이 녹이고 깨달았던 가의 차이입니다.

 

깨닫는 문제의 심천深淺은 역시,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는 화엄경의 십지十地론으로, 보살 초지부터서 23,410지에 올라가서 구경각 불지佛地에서 성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근기 따라서 보살 초지만 깨닫는 분도 있고 또는 2지를 깨닫는 분도 있고 또한 3,4지까지 깨닫는 분도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견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말았습니다만 이제는 견도見道, 이것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견성, 견도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조사어록에는 조금 달리 나와 있다 하더라도, 뜻을 깊이깊이 본질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문자란 것이 착해버리면 큰 병이 되지만 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술술 다 풀려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운자득任運自得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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