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러면 요새 돈오점수頓悟漸修파라고 비판하는 보조 스님은 어떻게 말씀했는가? 보조어록普照語録에 있는 보조 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입니다.
頓悟돈오
凡夫迷時범부미시 四大爲身사대위신 妄想爲心망상위심 不知自己불지자기靈知是眞佛也영지시진불야.............一念廻光일념회광 見自本性견자본성 而此性地이차성지 元無煩惱원무번뇌 無漏智性무루지성 本自具足본자구족 即與諸佛즉여제불 分亳不殊분호불수 故云頓悟也고운돈오야
『修心訣수심결』
‘범부가 미혹迷惑할 때는 지ㆍ수ㆍ화ㆍ풍 사대四大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한다.’ 우리 중생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대四大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 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나 삼세제불의 성품공덕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아서 얻은 그런 자리란 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보조 국사도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돈오의 도리를 분명히 밝힌 분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보조 국사는 6조 대사 훨씬 뒤에 나신 분이기 때문에 단경도 숙독해서 많이 보셨고 또 『단경』을 『대혜어록大慧語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돈오의 뜻 정도를 모를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렇다면 보조가 주장하는 점수漸修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던가? 보조가 점수를 말한 대목입니다.
漸修점수
頓悟本性돈오본성 與佛無殊여불무수 無始習氣무시습기 難卒頓除난졸돈제 故依悟而修고의오이수 漸薰功成점훈공성 長養聖胎장양성태 久久成聖구구성성 故云漸修也고운점수야
『修心訣수심결』
돈오본성頓悟本性이면 여불무수與佛無殊나,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마는,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런 때 묻지 않은 진리를 분명히 느끼고 깨달았지마는 가사,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버리면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이, 이것이 구생기倶生起 번뇌 아닙니까,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우고 이런 것은 분별기分別起 번뇌로서, 분별기번뇌는 물론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는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큰스님들도 역시 법은 분명히 아는데 행위로 볼 때에는 문제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기를 미처 못 녹인 때문입니다. 깊은 선정禪定을 미처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해탈에 있어서 꼭 지혜해탈智慧解脫,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분명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데 방황하지를 않습니다.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암증선이라, 암중모색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여러 군데서 봤습니다. 일본 선서禪書에서 보면,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도 역시 암중모색하는 대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백은(白隠1685~1786)선사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아주 굉장히 위대한 책이라고 찬양하였지만 이분도 자기가 증오證悟한 것에 관해서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하니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큰 깨달음은 열여덟 번이나 있고 작은 깨달음은 수없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짜 깨달음인가? 우리가 회의를 갖겠지요.
따라서 공부하는 우리 출가사문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어떻게 닦고 증證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이래로, 무시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나이가 벌써 황혼입니다마는 그 무시無始 번뇌가 얼마나 깊은가를 그야말로 참 뼈저리게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뿌리는 얼마나 깊고 진심嗔心 뿌리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말입니다. 남들이 저 같은 사람을 칭찬을 할 때는 속으로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과연 저한테 욕심 뿌리가 다 가셨는가? 또는 진심嗔心의 뿌리는 다 뽑혔는가? 이렇게 반성할 때는 분명히 다 못 여읜 줄을 통감하게 됩니다. 욕심 뿌리가 다 나가고 진심嗔心뿌리가 다하고 치심痴心뿌리가 다했을 때는 그냥 즉시에 바로 무량공덕을 갖추어서 분명히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을 보면 다 그렇습니다.
무시습기가 난졸돈제難卒頓除라,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어록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삭 깨지듯이 견도할 때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훤히 깨달아 버리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분지르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분질러집니다. 끈끈하니 실이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수도修道할 때는 쉽지가 않습니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선방에서 오래 공부 정진한 구참 스님들은 제가 느끼고 있는 그 사무친 것을 분명히 느낄 것입니다. 이놈의 욕심이 뿌리가 얼마나 긴가 말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그냥 또 진심嗔心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삐죽이 나오게 됩니다.
습기, 이것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 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입니다. 본래는 석가와 나와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달마와 나와 다른 것도 아닌 것이고,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분상에서는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 합니다. 무념수와 무염오수행은 같은 뜻입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훈공성漸薫功成이라, 점차로 훈수薰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훈습薫習은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薰修는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로 해서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수하면,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 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聖句입니다. 사량思量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성태장양이라 합니다.
이렇게 닦아나갈 때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究竟地인 성인聖人의 지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서 성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이라, 바로 현전에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벌써 성자입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습기 때문에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究竟覚을 성취하기 때문에 고운점수故云漸修라, 고로 점차로 닦는다고 한다는 보조국사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도리는『화엄경』에서 말씀한 도리하고도 똑같고 또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말씀하고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 만한 차별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뒤에 또 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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