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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청화 큰스님 서적/5. 원통불법의 요체

원통불법의 요체(8)

 

 

8.

 

앞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깨달음도 그냥 한 깨달음으로 일률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심천深淺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二地에 깨닫는 분, 3지에 깨닫는 분 등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법문을 한다 하더라도, 물론 원리 문제는 차이가 있을 수가 없겠습니다만, 약간의 그 뉘앙스nuance의 차이는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오문제, 깨닫는 문제를 다시 살펴보겠습니다.

 

저는 근본불교根本佛教와 대승불교大乘佛教를 다른 것으로 안 봅니다. 가사, 아함경阿含經도 그 당시 구사종倶舎宗이나 경량종經量宗이라 하는 종파로 굳어 버릴 때는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아함경자체에서는 설사 말씀을 다 안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대승적인 근본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더러는 소승법小乘法의 범주에 속하는 구사론도 말씀하고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는 심천으로 보아 해오解悟와 증오證悟로 말합니다.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깨닫는 깨달음인데 사선근은 주로 근본불교에 나와 있으나 대승불교에서도 언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일반 선종禪宗 계통에서는 별로 언급을 않습니다.

 

그러나 제 입장은 선과 교가 원래 둘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선시불심禪是佛心이요 교시불어教是佛語, 선은 바로 부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의 말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말과 마음이 둘일 수가 없듯이, 선과 교도 둘이 아니라고 보는 견지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그때그때 수기응량随器應量이라, 깊고 옅은 차이는 있지 않겠습니까. 해오解悟는 사선근위四善根位에서 여실지해如實知解증오證悟함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지해知解는 반야 지혜智慧가 아니고 그냥 범부지견凡夫知見이라는 말인 셈입니다. 범부의 지견으로 해서 돈오함이라, 돈오라는 말을 여기에서도 씁니다. 돈오의 말도 깊고 옅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사오似悟입니다. 즉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는 상사각相似覺이라, 각에 닮은 각인 것이지 본래 본각本覺자리를 여실히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직은 범부위凡夫位입니다. 성자 지위가 못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못되겠지만 물리를 알아서 불변수연不變隨緣이라 원래 변치 않는 본체의 자리, 인연 따라서 변하는 수연자리 또는 성상性相이라, 성품자리 현상자리 또는 체용體用이라, 본체자리 활용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막힘이 없다는 말입니다. 현대말로 하면 상대相對나 절대絶對나 그런 것에 관해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이사무애理事無碍도 알고 사사무애事事無碍도 알고 법의 해석은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해오도 역시, 그냥 경만 봐서는 되기가 어렵습니다. 그 사람 선근에 달려 있겠습니다만 같은 경을 본다 하더라도 참선을 한 사람이면 해오를 빨리 얻습니다. 경을 많이 봤다 하더라도 마음이 어느 정도 선정禪定에 들어 있지 못 한 분들은 해오를 못합니다. 해오를 했을 때는 어느 경전을 보든지 문자만 좀 알면 아 그렇구나!’하고 짐작이 되어 교상教相면에서는 걸림이 없는 자리입니다. 이런 단계가 이른바 해오입니다.

 

그리고 증오證悟는 체험적으로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해서 깨닫는 자리입니다. 이것은 견도할 때, 선종禪宗식으로 말하면 갓 견성할 때에, 초견성이라고도 합니다. 초견성이란 말도 선가禪家에서도 내려왔습니다. 그 자리가 견도의 자리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저는 견성과 견도가 절대로 둘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견성은 조사 것이니까 더 높고 견도는 불경 말씀이니까 낮다는 그런 견해를 갖지 않습니다. 그러나 견도 했다고 구경지究竟地까지 다 이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땅히 수도修道를 거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도는 바로 견성이고, 보살 십지十地로 말하면 보살 초환희지初歡喜地입니다. 보살 초환희지에 대해서도 나중에 보다 자세히 설명을 하겠습니다만, 환희심도 여러 가지가 있게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오욕락五欲樂에 대해서 너무나 큰 가치를 부여합니다만, 출가사문은 이 환희심에 대해서 깊게 음미를 해야 합니다. 오욕락은 참다운 환희심은 못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바세계 중생을 바로 보면 일체개고一切皆苦, 삼계개고三界皆苦라는 말입니다. 인생이 바로 고해 아닙니까, 바로 못 보는데서, 중생 경계에서 안락을 느끼는 것이지 바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자기 몸뚱이를 훑어보거나 환경을 보나 또는 사람을 사귀어 보나 그런 자리에서 정말로 환희로움, 불멸不滅한 멸치 않는 기쁨을 못 느낍니다. 아무리 친한 분도 배신도 있고, 그렇게 좋아해서 만난 분도 서로 원수가 되어서 헤어지기도 하고 말입니다. 자기 몸뚱이도 몸 밖에나 안에나 좋은 것이 어디가 있습니까? 삼십육물三十六物이라, , 오줌, 눈곱 등 더러운 것이 뭉쳐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느 것을 보더라도 욕계의 범주 내에서는 좋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초환희지도 다른 말로 하면 이생희락지離生喜樂地, 범부 이생異生을 떠나서, 결국은 욕계를 떠남으로 해서 참답게 느끼는 행복이라는 말입니다. 초환희지까지 갈 때에도, 초환희지가 미처 못되어도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 법을 알아들음으로 해서 기쁨을 느끼고 또는 참선을 함으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뿐하니 경안輕安을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르게 닦으면 응당 필연적으로 경안이라, 꼭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계행도 바르고 자기 몸도 깨끗하고 법도 여법如法한 법을 가지고 공부할 때는 틀림없이 몸도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선열락禪悅樂을 느낀다는 말입니다.

 

이런 것이 더 증장되어서 정작, 욕계 번뇌를 떠나고 자기의 본 성품을 깨달아 오직 일미 평등한 진여의 자리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초환희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떠한 도인들이나 환희지를 얻을 때는 환희심이 사무쳐 가누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두타제일頭陀第一 마하가섭(摩訶迦葉 Mahakasyapa)도 환희지를 성취할 때는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초지에서 2지에 올라가고 3, 4, 5, 6, 7, 8, 910지를 거쳐서 결국은 불지佛地로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기 따라서, 우리 세존같이 환희지를 성취하시자마자 그냥 불지로 마구 구경성취를 하신 분도 계신 것이고 또는 23지를 뛰어넘는 분도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단번에 비약적으로 뛰어넘는 것은 돈초頓超라고 하고 또는 23지를 뛰어넘는 것은 간초間超라고 합니다. 보통 근기는 23, 그와 같이 순서 있게 올라가겠지요. 그러나 게으름 부리면은 초지에 올라갔다 하더라도 더 못 가고 말아 버립니다.

 

이런 데서 자비심이 많은 도인과 지혜가 더 수승한 도인의 차별이 있다고 합니다. 이른바 지증智增보살이라, 지혜가 더 수승한 보살들은 본래 중생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기공부, 선정을 닦는 데만 주력을 다하고 또 자비심이 많은 분들은 선인후기先人後己, 남을 먼저 앞세우고 자기가 뒤에 갑니다. ‘본래가 둘이 아닌 것인데 중생들이 법을 몰라서 고생하는 것이니까 꼭 중생들을 안락세계安樂世界, 안양세계安養世界로 인도해야겠구나.’ 하고 초환희지만 성취해도 더 안 가버립니다. 이분들은 비증悲增보살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출가사문들은 마땅히 금생에 꼭 환희지를 성취하여야겠지요. 그리고는 자기 자비심을 점검하여서 환희지에 머물러도 도인이고 2,3지에 올라가도 도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견성하고 구경 성취한 묘각 자리는 다시 더 배울 것이 없으니까 무학도無學道라 합니다. 이렇게 같은 깨달음도 해오와 증오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해오는 참다운 깨달음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겠지요.

 

제가 그 암증선暗證禪, 암중모색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견성오도見性悟道라든가 견성에 대해서 확실한 것을 잘 모르는 분들은 잘못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선정에 들어서 초환희지까지, 견성까지 미처 못 간다 하더라도 굉장히 기쁜 것을 많이 느낍니다. 자기 몸도 그냥 텅 비어 버려서 자기 몸이 어디에 있는지 느낄 수도 없고, 몸이 공중에 들떠 아무런 부담도 무게도 안 느끼고, 더러는 훤히 밝은 광명이 빛나고, 부처님이 훤히 나타나 보이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계가 다 견성이 된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해오만 되어도 아 그렇구나, 모든 것은 본래가 둘이 아니구나.’ 하여 몸도 마음도 가뿐하고 기분이 참 쾌적해서 비할 수 없는 느낌을 갖는 분들은 내가 지금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깨달았다는 만심慢心 때문에 더 이상 공부를 안 해버리는 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점검할 때는 과연 저 사람한테 욕심이 다 떠났는가, 저 사람한테 진심이 조금도 안 보이는가, 칼을 가지고 저 사람의 목을 애매하니 찌른다 하더라도 조금도 동요가 없을 것인가이렇게 점검해 볼 때는 그냥 알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해오로 다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해오를 하고 다 됐다고 할 때는 대망어大妄語죄에 해당합니다. 승려 자격을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비증非證을 증으로 하고 못 깨달음[未悟]을 깨달았다[] 할 때는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 바로 승려 자격을 빼앗기는 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자기나 남이나 암중모색하는 것을 깊이깊이 경계해야 합니다.

 

따라서 해오한 다음에는 증오를 위한 점수漸修가 분명히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또한 보살 초지初地에서 견도하고, 견성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구경각이 아니기 때문에 성불을 위해서 또 점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해오한 뒤에는 필연적으로 증오를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하고, 또한 증오한 뒤에도, 증오 자체가 세존같이 정각正覺 자리를 다 원만하게 성취했다고 생각할 때는 모르거니와, 마땅히 성불成佛을 위해서 점수를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증오한 다음에 점수가 없다고 하는 것은 특수한 사람에 한하는 문제가 되겠지요.

 

그러나 증오한 다음에 닦는 법은 앞서도 누누이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점차, 고하 또는 계급, 차별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무념수無念修,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어야 합니다.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 오염하면 참다운 선이 못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참선하는 분들은 꼭 무염오수행을 해야 합니다.

 

今頓見者금돈견자 已是多生漸熏이시다생점훈而發現也이발현야 壇經云단경운 法無頓漸법무돈점 頓漸在機者돈점재기자 誠哉此理성재차리

都序도서

 

다음은 도서都序에 있는 말씀인데, ‘이제 문득 깨달은 자는 이미 다생겁래에 점차로 닦아옴이 있어서 금생에 발현發現하는 것이라,’ 지금 돈오를 했다 하더라도 금방 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점차 닦아온 공덕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선근이 깊으면 영운(靈雲 800년대 潙山弟子) 대사같이 복숭아꽃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깨닫기도 하고 또는 동산(洞山 807~869)스님같이 흘러가는 시냇물을 보고 깨닫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다 과거에 닦아 나온 과보인 것입니다.

 

단경에서 말하기를 법은 본래 돈과 점이 없으나 돈점은 그 근기에 있다는 이 이치가 진실로 귀중하고 소중하다고 했습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돈오점수에 대해서 바로 해석을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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