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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36)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9)

 

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옛날에 아기달왕(阿耆達王)은 한평생 부처님을 모시면서, 오계를 철저히 지켰소. 그런데 임종에 시중드는 신하가 부채를 가지고 파리를 쫓다가 피곤하여 깜박 조는 순간 부채를 왕의 얼굴에 떨어뜨려, 왕이 마음에 분노와 원한을 일으키며 숨을 거두었다오. 바로 이러한 일념 때문에 왕은 구렁이 몸을 받았는데, 다행히 숙세의 복력(福力) 덕분에 그 원인을 알아차리고, 사문(沙門 : 출가수행자)에게 삼귀의와 수계를 설법해 달라고 청해, 곧장 구렁이 몸을 벗어버리고 천상에 생겨났다오. 이 사례만 보아도, 성냄의 업습이 가장 큰 해독이 됨을 알 수 있소.

 

그래서 화엄경은, “한 생각 성내는 마음 일어나면, 백만 가지 업장의 문이 활짝 열린다.(一念瞋心起, 百萬障門開).”고 설하고 있소. 또 고승 대덕은 이런 게송도 남겼소.

 

성냄은 마음 속의 불길로

공덕의 수풀을 불살라 버리네.

보살의 도를 배우고 싶거든

인욕으로 성내는 마음을 지켜라.

 

여래께서 곧잘 성내는 중생들에게 자비관을 닦으라고 가르치신 것은,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자 미래의 부처님들이기 때문이오. 과거의 부모님이라면, 전생에 낳아 길러주신 은덕을 생각하고, 이를 다 갚을 수 없음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어찌 조금 자기 뜻대로 안 된다고 하여, 버럭 성을 낸단 말이오? 설사 목숨을 잃는다고 해도, 기쁜 마음만 내고, 분노나 원한은 품지도 말아야 하오.

 

그래서 보살은 머리 · · 골수 · 뇌 따위를 내어 줄 때에, 그걸 요구하하는 사람이 자기의 더할 나위 없는 보리도(菩提道)를 성취시켜 주는 선지식이나 은인이라고 생각한다오. 화엄경의 십회향품을 보면 저절로 할 것이오. 또 우리의 일념 심성은 본디 부처와 다르지 않소. 단지 본래 심성을 등지고 잃어버린 채, ‘라는 선입견(我見)을 견고히 집착하고 있소. 때문에 일체 인연이 모두 자기와 대립하게 되오. 마치 활 과녁이 우뚝 서면, 모든 화살이 일제히 그를 향해 나아와 박히는 것과 비슷하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자기 마음이 원래 부처님 마음이고, 부처님 마음은 텅 비어서 아무 것도 없음을 알 수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마치 허공이 우주 삼라만상을 모두 감싸고, 큰 바다가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소. 또 하늘이 만물을 두루 덮고, 땅이 만물을 고르게 떠받치면서도, 덮고 떠받치는 것을 자기 공덕이라 여기지 않음을 보시오.

 

내가 만약 조금 뜻에 거슬리는 일이 있다고 곧 성을 낸다면, 스스로 자기 도량(度量)을 협소하게 좁히고 덕을 상실하는 짓이 아니겠소? 비록 부처님 마음과 진리의 본체는 갖추었을지라도, 생각을 움직이고 마음을 쓰는 것은, 완전히 범부 중생의 감정 투성이가 되오. 이는 망상을 진짜로 오인하고, 노예를 주인으로 삼는 격이 되오.

 

이와 같이 생각한다면, 정말 몹시 부끄럽고 창피할 것이오. 평상시 늘 이런 생각을 한다면, 마음의 도량이 크고 넓어져, 포용하지 못할 게 없소. 사물과 나를 똑같이 보고, 피차간을 서로 구분하지 않는 거요. 비위에 몹시 거슬리는 일이 닥쳐오더라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거늘, 하물며 조금 뜻대로 안 된다고 금방 화를 버럭 내겠소?

 

어리석음은(愚癡)은 지식이 전혀 없음을 뜻하지는 않소. 불교에서 말하는 어리석음이란, 세상 사람들이 선악의 경계와 인연에 대하여, 그것들이 모두 과거 숙세의 업장과 현생의 행위로 초래되는 감응인 줄 모르고, 세상에 인과응보나 전생과 내생 따위는 전혀 없다고 함부로 망발하는 것을 가리키오.

 

일체의 중생은 지혜의 눈이 없어서, 단멸(斷滅)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항상(恒常)에 집착하기 십상이오. 단멸에 집착하는 자들은, 사람이 부모의 피와 기운을 받아 생겨나며, 생겨나기 이전에 본래 어떤 물건도 있지 않았고, 죽고 난 뒤에는 육신이 썩어 문드러지고 영혼은 바람에 나부껴 흩어지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말하오. 그러니 무슨 전생이나 내생 따위가 있겠소. 동방의 고지식하고 편협한 유생들이 대부분 이런 주장을 해 왔소.

 

항상에 집착하는 이들은, 사람이 항상 사람이 되고, 축생은 항상 축생이 된다고 생각하오. 업장이 마음으로 지어지고, 그렇게 지어진 마음의 업장에 따라, 육신의 형체가 바뀌게 되는 줄은 모르는 게오. 옛날에 지극히 독살스런 사람은 현생의 몸이 뱀으로 변하고, 지극히 포악스런 사람은 현세의 몸이 호랑이로 변한 사례도 있소. 업력이 너무도 맹렬하게 크면, 당장 그 형체까지 뒤바뀌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사후에 혼식(魂識)이 업장에 끌려 형체를 바꾸지 못하겠소?

 

그래서 부처님께서 12인연을 설하신 것은, 전생 · 현생 · 내생의 삼세(三世)를 관통하는 지론이라오. 전생의 원인은 반드시 후생의 결과를 불러오고, 후생의 결과는 반드시 전생의 인연에 바탕하는 것이오. 선악의 보답으로 화복(禍福)이 닥쳐오는 것은 모두 자업자득(自業自得)일 따름이며, 결코 하늘에서 불쑥 떨어지는 것이 아니오. 하늘은 단지 중생들의 행위에 따라서 인과응보를 주재(主宰)할 따름이오.

 

생사의 순환은 끝이 없소. 본래 심성을 회복하여 생사를 끝마치려면, 믿음과 발원으로 염불하여 서방정토 왕생을 구하지 않으면, 달리 길이 없소.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세 가지는 생사의 근본 원인이고, 믿음 · 발원 · 염불 수행의 세 가지는 생사를 끝마치는 미묘한 법문이오. 앞의 세 독소를 내버리려면, 뒤의 세 요소를 닦아야 하오. 믿음 · 발원 · 염불 수행(信願行) 삼요소가 힘을 얻으면, 탐욕 · 성냄 · 어리석음(貪瞋癡)의 삼독이 저절로 소멸되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