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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33)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6)

 

 

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번뇌를 일으키는 경계와 인연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특히 심한 것으로 재물과 여색과 갑작스런 봉변(橫逆)을 들 수 있겠소. 의롭지 못한 재물은 그 해악이 독사보다 심한 줄만 안다면, 재물을 보고 구차하게 얻으려는 번뇌는 일지 않을 것이오. 또 남의 편리를 봐 주면, 궁극에 모두 자기 앞으로 되돌아 온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염두에 두시오. 그러면 곤궁하고 급박한 환난을 당하여 구원을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재물이 아까워 차마 돕지 못하는 번뇌도 별로 없을 것이오.

 

여색은 설령 꽃 같고 옥같이 미묘한 이를 대하더라도, 항상 자기 친자매나 딸처럼 여기는 마음을 간직하면 되오. 설령 기생이나 창녀라도, 역시 그렇게 똑같이 여기며, 나아가 연민하는 마음과 제도하려는 마음을 품어야 하리다. 그러면 미색을 보고 욕정이 꿈틀거리는 번뇌가 없을 것이오.

 

또 부부 사이에는 서로가 귀한 손님처럼 공경하며, 아내는 서로 도와 조상의 핏줄을 이어주는 은인으로 여기고, 혹시라도 피차간에 쾌락을 즐기는 욕정의 도구로 생각하는 일은 없어야 하오. 그러면 욕정 때문에 몸을 망치거나, 아내가 애를 못 낳거나, 자식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번뇌(근심걱정)는 없겠소. 자녀는 어려서부터 잘 가르쳐야, 부모 마음을 거역하거나 집안 분위기를 파괴하는 우환이 생기지 않소.

 

갑작스런 봉변에 대해서는, 모름지기 연민하는 마음을 내어야 하오. 상대방의 무지몽매함을 불쌍히 여기고, 그와 따지거나 다투지 않는 것이오. 또 자기가 전생에 일찍이 그를 해치거나 괴롭힌 적이 있어, 지금 이 봉변을 당하는 것이며, 이 때문에 묵은 빚을 갚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기뻐하는 마음(歡喜心)을 내어야 할 것이오. 그러면 뜻밖의 봉변을 당하여 보복하려는 번뇌가 저절로 스러질 것이오.

 

지금까지 말한 것은, 초보 근기를 염두에 둔 방책이오. 오래도록 수행해온 상근기의 선비(大士) 같으면, 나도 텅 비었음(我空)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끝없는 번뇌조차도 모두 대광명의 보물창고(大光明藏)로 변화시킬 것이오. 마치 칼날은 숫돌에 갈아 예리해지고, 금은 용광로에 제련하여 순수해지는 것과 똑같은 이치요. 연꽃이 진흙 수렁에서 자라 피어나기 때문에, 바야흐로 청정하고 조촐하게 빛나는 것 아니겠소?

 

군자의 배움은 자기를 위한다오. 매 순간 매 생각마다 자기를 두르려가며, 스스로 살필 따름이오. 꿈속과 깨어 있을 때가 한결같은 경지는, 공부가 원만히 무르익은 사람이라야 가능하오. 그러나 깨어 있을 때 늘 자신을 붙잡고 닦아가길 오래 지속하다 보면, 꿈속에서도 크게 허튼짓 하는 현상은 저절로 사라질 것이오.

 

도를 배우는 사람이 도에 대한 생각을 한충 가중시키면, 그만큼 속세에 대한 범부 감정이 한층 가벼워지기 마련이오. 이는 필연적인 이치라오. 그래서 미혹을 아직 끊지 못한 사람은 모름지기 항상 노력해야 하오. 만약 한바탕 제멋대로 방종하면, 옛 병폐가 틀림없이 재발하게 되오. 보고 생각하는 미혹(見思惑) 두 가지를 모두 완전히 끊어버린 사람이라야, 비로소 자기 마음대로 날뛰어도 통제나 속박할 필요가 없게 된다오.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의 마음은, 사람마다 모두 가지고 있소. 우리가 이것들이 병인 줄만 안다면, 그 세력이 치성해지기 어렵소. 비유하자면, 집안에 도적이 들었을 때, 집 주인이 그를 자기 식구로 잘못 알면, 온 집안의 보물과 귀중품을 깡그리 도둑맞게 되는 것과 비슷하오. 만약 그가 도적인 줄만 안다면, 잠시도 집안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밖으로 멀리 내쫓아, 재산도 잃지 않고 집안도 평안을 지킬 것이오.

 

그래서 고승대덕들도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는 것 자체는 두렵지 않으나, 다만 늦게 알아차리는 게 두렵다.” 고 말씀하셨소.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이 한번 일어나는 순간 즉시로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다시 금세 사라지기 때문이오. 그러나 만약 탐욕 · 성냄 · 어리석음을 자기 집 주인으로 여긴다면, 마치 도적을 자기 자식으로 오인하여, 집안 재산과 보물을 모두 털리는 것과 같은 꼴이 된다오.

 

바깥 경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자신을 붙잡아 지키는 힘(操持力 : 줏대)이 약하기 때문이오. 기쁘고 슬픈 감정이 마음 속에서 움직이는 즉시, 좋아하고 싫어하는 기색이 얼굴에 바로 나타나는 것이오. 붙잡아 지킨다함은 곧 함양(涵養 : 修養)을 일컫소. 올바른 생각(正念)이 무게가 있으면, 나머지 다른 것들은 모두 가볍게 되오. 그래서 진실한 수행인들은 티끌 속(세속)의 수고로움 가운데서 갈고 닦으며, 번뇌와 업습의 기운을 점점 소멸시켜 간다오. 이것이 바로 실재 공부(實在工夫)라오.

 

만약 자기 마음의 번뇌와 못된 버릇(習氣)을 마주해 다스리지 않고 내버려 두면, 외부의 수행이 좀 있다고 내면의 공부가 완전히 황폐해지기 쉽소. 그래서 도리어 아만심(我慢心)이 생겨나고, 조그만 공리(功利)를 대단한 덕으로 여겨, 손해가 막심해지오.

 

비유하자면, 밥을 먹을 때는 모름지기 채소로 반찬을 삼아 함께 들고, 또 우리 신체는 반드시 옷을 단정히 입어 장엄하게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소. 어찌 생사를 해탈하려고 수행하는 기나긴 여정에서, 단지 한 문 안에만 깊숙이 들어가려고 나머지 문을 모두 닫아버린단 말이오.

 

한 문 안에 깊숙이 들어가 나머지 문을 모두 닫아버리는 것은, 오직 일주일이나 수주일 시한부 출가 수행(기도결제 등)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오. 평상시에 계속 그렇게 하는 수행은, 보살이 다시 온 경우가 아니면, 금방 해이해지거나 게을러지지 않을 수가 없소. 범부중생의 마음은, 항상 계속되면 곧 싫증을 내기 때문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