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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31)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3. 마음 닦고 염불하는 수행의 요령

 

2) 업습의 기운(習氣)을 다스리는 방법

 

염불에서 일심불란의 경지를 얻고 싶으면, 반드시 생사 해탈을 위하는 진실한 마음을 내야 하오. 행여라도 세상 사람들이 나를 진실한 수행자라고 칭찬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 되오. 염불할 때에는, 반드시 한 글자 한 구절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나고, 입으로 나와 귀로 들어가야 하오. 한 구절을 이와 같이 염송하듯, 백천만 구절도 또한 이와 같이 염송해야 하오. 정말 이렇게 염불할 수 있다면, 잡념 망상은 고개를 쳐들 수도 없고, 마음과 부처가 저절로 서로 들어 맞게 될 것이오.

 

그리고 모름지기 마음을 잘 써야 하오. 지나치게 집착하여, 몸과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갖가지 마장(魔障)을 초래하는 일은 없어야 하오. 육근을 모두 추슬러 깨끗한 생각이 서로 이어지도록 하는 거요. 이렇게만 수행한다면, 샛길로 빠지거나 잘못될 염려가 없을 것이오.

 

염불할 때 간절해질 수 없는 까닭은, 사바세계가 고통투성이고 극락세계가 즐거움 천지인 줄 모르기 때문이오. 한번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사람 몸 받기 어렵고, 문명의 중심 국가에 태어나기 어려우며, 부처님 법 만나기 어려운데, 특히 정토 법문은 얻어듣기가 더욱 어렵도다. 만약 일심으로, 염불하지 않다가, 한숨 다시 들어오지 않는 때에는, 숙세와 금생의 가장 중대한 악업에 따라 삼악도에 떨어져, 오랜 겁토록 결코 벗어날 기약 없이 막심한 고통을 받을 게 틀림없으리라.’

 

이렇듯이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여 보리심을 내었으면 좋겠소. 보리심이란 바로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自利利他) 마음이오. 이 마음을 한 번 내게 되면, 마치 기계에 전기를 통하고 약에 유황을 첨가하듯, 그 힘이 몸시 커지면서 그 효험 또한 아주 빨라진다오. 그로 말미암아 업장이 소멸되고 복덕과 지혜가 증대됨은, 보통의 복덕이나 선근으로 비유할 수가 없다오. 염불할 때는 수시로 늘 금방 죽어 지옥에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시오. 그러면 간절하지 못한 염불이 저절로 간절해지고, 감응도 저절로 따르게 될 것이오. 괴롭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염불하는 것이, 인연에 따라 업장을 해소하고 생사 고해를 벗어나는, 최고 제일의 미묘한 방법이라오.

 

업습을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은 아주 간절하고 부지런한데도, 업습이 사라지는 효험은 잘 나타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이겠소? 대부분은 생사 해탈의 마음이 간절하지 못한 때문이오. 즉 미혹과 업장을 해소하여 깨끗한 생각을 성취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인의 경지에 들겠다는 발원을, 단지 입에만 살아 있는 명분으로 여기기 때문이오. 그래서 실제 효험이 없는 것이오.

 

가령 우리가 사람 몸 받기가 얼마나 어렵고, 부처님 법 만나기는 또 얼마나 어려우며, 특히 정토법문 얻어듣기란 더더욱 얼마나 어려운 줄 안다면, 사정은 좀 달라질 것이오. 지금 다행히 대장부의 몸을 받고 태어나 가장 듣기 어려운 정토 법문을 만나 듣게 되었는데, 감히 유한한 세월을 여색이나 명성 · 재물을 얻는 데다가 모두 소모해 버리고서, 생사고해를 표류하면서 육도 윤회하려 들겠소?

 

모름지기 곧장 죽을 (이 글자는 너무도 좋소) 하나를 이마 위에 붙여야 할 것이오. 탐내거나 미련을 두어서는 안 될 경계가 나타나거든, 이것이 바로 미래의 끓는 가마솥이나 용광로 불길 같은 과보임을 알아차려야 하오. 그러면 아마도 나방이가 불꽃에 날아들어 스스로 타 죽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까지는, 결코 범하지 않을 것이오.

 

반면 자기의 분수와 처지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은, 모두 나를 사바 고해에서 건져 줄 자비로운 배(出苦慈船)인 줄로 인식해야 하오. 그러면 인()을 부닥쳐 굳이 사양하거나, ()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오. 이와 같이만 행한다면, 세속 홍진의 모든 경계가 곧장 도덕 수행의 문에 들어가는 인연이 될 것이오. 어찌하여 꼭 세속의 인연을 싹둑 끊어버린 다음에야, 비로소 도를 닦을 수 있다고 하겠소?

 

무릇 마음에 주인(줏대)이 똑바로 있어서, 외부의 사물의 경계에 따라 돌지(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면, 세속의 티끌과 수고로움으로도 해탈을 이루리다. 그래서 금강경은 사람들에게 마음이 형상(모습)에 머물지(집착하지) 않도록 거듭 일깨우고 있소.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다는 마음을 내면서도, 제도하는 주체라는 나()나 제도 받을 대상이라는 사람()이나 중생,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얻을, 남김 없는 열반이라는 수자()의 모습 등을 전혀 보지 않아야 하오. 그래야 비로소 진짜 보살도를 행한다는 거요.

 

만약 내가 제도하며, 중생이 제도 받고, 남김 없는 열반이 제도의 법이 된다는 모습(의식)이 있게 되면, 비록 중생을 제도할지라도 일승실상(一乘實相)의 도에는 딱 부합할 수 없다오. 중생이 본체가 부처이므로 부처의 성품은 모두 절대 평등한데, 그런 줄 잘 모르고, 범부의 감정으로 성인의 견해(생각)를 망령되이 내기 때문이오. 그래서 최고의 무위(無爲) 이익을 가지고도, 그저 보통의 유위(有爲) 공덕밖에 못 이루는 것이오. 하물며 명성이나 여색 · 재물에 미련을 두고 탐착하는 자들이야 말할 게 있겠소?

 

염불이 순수하게 일심으로 집중되지 않을 때는, 반드시 마음을 밖으로 치닫지 못하도록 통제해야 하오. 그렇게 오래 지속되면, 저절로 순수하게 일념이 될 것이오. 한 덩어리가 된다(成片)는 말도, 잡념 망상이 끼어들지 않고 순수하게 일념이 되는 것을 일컫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