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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독!경전,법문자료/4. 인광대사의 가언록

화두 놓고 염불하세(13)

 

 

印光大師 嘉言錄(인광대사 가언록)

                                                                                  옮긴이 김지수(寶積)

 

1. 정토(염불)위에 법문 없소.(7)

 

 

연지(蓮池)대사는 소암(笑巖)선사를 참방하여 크게 깨달은 뒤, 바야흐로 선종을 접어두고 정토 염불을 위주로 삼았소. 정토 법문의 수행이 완성되면, 선종은 저절로 함께 얻어지기 때문이라오. 비유하자면, 큰 바닷물에 목욕한 자는 반드시 모든 강물을 다 쓴 셈이오. 또 몸소 함원전(含元殿 : 당나라 때 長安 大明宮正殿) 안에 들어선 사람은 다시 장안을 물을 필요가 없는 거와 다름없는 이치라오.

 

그 뒤 우익(蕅益) · 절류(截流) · 성암(省庵) · 몽동(夢東) 등 여러 위대한 조사들도 모두 다 그러하셨소. 법도 시대에 따라 적응해야 하고, 교화도 근기에 맞추어 베풀어져야 함은 당연하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중생들이 제도될 수 없기 때문이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이후로는 불법이 점차 쇠미해지고, 나라 상황도 어수선한 일이 많이 생겨, 법륜(法輪 : 진리의 수레바퀴)이 거의 멈춰 버렸소. 비록 선지식들이 있긴 하였지만, 각자 자기 수행에만 몰두하느라 힘과 시간이 여유가 없어, 정토 법문을 거들떠 보지도 않게 되었소. 더러 이를 언급하는 이가 있다 할지라도, 듣는 사람들이 귀가 더러워질까 의심할 정도였소. 다행히 큰 마음을 품은 한두 스님이나 거사들이 법문 책을 간해하여 유포시킴으로써, 이들 조사들의 가르침이 끊이지 않고 명맥을 이어 왔소. 그래서 후대의 수행자와 철인(哲人)들이 계속 보고 들을 수 있으니, 실로 막대한 행운과 복덕이 아닐 수 없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뒤, 혜원(慧遠) 대사가 처음으로 정토 법문을 으뜸 가르침으로 삼았소. 본디 동문 형제인 혜영(慧永) 스님과 함께 라부산(羅浮山 : 광동(廣東) 소재)으로 가려 했으나, 스승인 도안(道安)법사가 붙잡아 혜영 스님만 혼자 가게 되었소. 심양(潯陽 : 江西 소재 옛 지명)에 이르렀을 때, 자사(刺史) 도범(陶範)이 혜영스님의 도덕 기풍(道風)을 흠모한 나머지, 서림사(西林寺)를 지어 드렸다오, 이 때가 동진(東晋) 효무제(孝武帝) 태원(太元) 2년 정축(丁丑 : 377)년 이었소.

 

태원 9년 갑신(甲申 : 384)년에 이르러, 혜원대사가 비로소 여산(廬山)에 왔소. 처음에는 서림사에 함께 거주했는데, 수행 도반들이 점차 많아져 서림사가 비좁아졌소. 이에 자사 환이(桓伊)가 산의 동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주었는데, 동림사(東林寺)라 불렀소. 태원 15년 경인(庚寅 : 380)728, 혜원대사는 마침내 스님 · 거사 123인과 함께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하여, 염불로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하기를 발원했소. 혜영법사도 그 결사에 참여했는데, 서림사에 거주하면서 산봉우리에 별도로 초가 한 채를 짓고, 때때로 홀로 가서 선정에 잠기곤 하였다오. 그 방에 다가가면 문득 기이한 향기가 그윽히 풍겨, 향곡(香谷)이라 이름 부를 정도였다니, 그 인물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지 않겠소?

 

혜원대사가 처음 결사를 시작할 때부터 참가했던 123인 모두 불법문중의 코끼리와 용같은 존재로, 유가에서 말하는 태산(泰山)과 북두(北斗)나 다름없소. 이들은 혜원대사의 도덕 기풍이 널리 전파되면서 스스로 몰려든 대중들이라오. 혜원대사가 입적할 때까지 30여년 동안, 백련사에 들어와 정토수행을 닦고 아미타불의 영접을 받아 극락왕생한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다오.

 

그 뒤로 담란(曇鸞), 지자(智者), 도작(道綽), 선도(善導), 영명(永明)대사들도 모두 이 정토 법문으로 스스로 수행하고 대중을 교화하였소. 담란대사가 지은 왕생론주(往生論註)는 고금에 둘도 없이 미묘한 저술이오. 지자대사는 십의론(十疑論)을 지어 이해득실을 지극히 잘 설명했으며, 관경소(觀經疏)를 지어 관법(觀法)의 요체를 깊고 분명히 해설했소. 도작대사는 정토삼부경을 이백 번 남짓 강론했으며, 선도화상은 정토삼부경에 주석을 달아 대중들에게 전념 수행할 것을 적극 권장했소. 청량대사는 보현행원품에 주석을 달아 궁극적인 성불의 도를 잘 밝혔고, 영명대사는 사료간(四料簡)을 지어 생사윤회를 해탈하는 법문을 곧장 가리켜 주었소.

 

예부터 모든 종파의 고승대덕들은 정토에 마음을 귀의하지 않은 분이 없었소. 오직 선종의 여러 조사들은 정토를 은밀히 수행하기에 힘쓰고, 밖으로 드러내어 펼치는 이가 별로 없는 편이오. 그러나 영명 선사가 사료간으로 정토와 참선 수행의 병행을 주창한 뒤로는, 선사들도 모두 분명한 말과 글자로 가르침을 펴며, 정토 수행을 절실하게 권하게 되었소. 그래서 사심(死心) ()선사는 정토 수행을 권하는 글(權修淨土文)에서 이렇게 말하였소.

 

아미타불은 염송하기 매우 쉽고, 정토는 왕생하기 매우 쉽다.”

참선하는 사람이야말로 바로 염불하기가 가장 좋으니, 근기가 더러 약하고 둔하여 금생에 확철대오할 수 없을까 의심스러운 이는, 아미타불의 원력을 빌어 정토 왕생하라.”

그대가 만약 염불하여 정토에 왕생하지 못한다며, 이 노승은(거짓말한 죄악으로) 마땅히 혀를 뽑는(拔舌)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진헐(眞歇) () 선사는 정토설(淨土說)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소.

조동종(曹洞宗) 문하에서는 모두 정토를 은밀히 닦고 있는데, 그 까닭은 무엇인가? 정말로 염불 법문이 가장 빠른 지름길 수행이며, 대장경의 가르침에 바로 따라 최상 근기를 맞이할 뿐만 아니라, 중하 근기의 대중도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선종의 대사들이 텅 비지도 않고 있지도 않은(不空不有)법을 이미 깨닫고도, 정토 법문에 뜻을 굳게 두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바로 정토 법문으로 부처를 친견하는 것이, 참선보다 훨씬 간단하고 쉽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부처나 조사나, 교종이나 선종이나 할 것 없이, 모두 정토 법문을 수행하여 한 근원으로 함께 되돌아 간다. 이 문에 들어가는 자는 무량 법문을 모두 증득하기 때문이다.”

 

장로(長蘆) () 선사는 연화승회(蓮華勝會)를 결성하여, 승가나 세속 거사 모두 염불로 극락왕생하도록 두루 권하였소. 그런데 보현(寶賢)과 보혜(普慧) 두 보살이 꿈에 나타나 이 연화승회에 가입하기를 청하는 감응을 얻어, 두 보살을 회주(會主)로 삼았다오. 이것만 보아도 정토 법문이 이치에도 들어맞고 중생의 근기에도 부합기 때문에, 모든 성현들도 그윽한 가운데 칭송 찬탄하심을 알 수 있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