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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김호성님의 정토행자의 편지

직관의 불교, 감성의 불교

편지 4(2017. 7. 11)

 

 

                           

 

저는 독서회를 좋아합니다. 아마도 대학원 다닐 때 독서회를 잘 못해봐서(더러 가입은 했으나, 맨날 결석하다가 탈락하고 말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릅니다만 ---. 그 중에 종교학결사 19”라는 것이 있습니다. 종교학세계명저 30(시마조노 스스무 지음, 최선임 옮김, 지식여행)이라는 책에서 추천되는 종교학의 고전 30권 중에서 우리나라에 번역서가 있는 19권을 함께 읽자는 것입니다.

 

결사結社가 아니라 決死입니다. 결사적으로 읽자, 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이 독서회에는 탈퇴의 자유가 없습니다. 끝까지 다 함께 하겠다는 사람만 회원으로 가입 받았습니다. 현재 저를 포함해서 5명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19권 중에서 이번에 읽은 것은 6번째인데, 종교론이라는 책입니다. 쉴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라는 분의 책인데, 1799년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최신한 교수의 번역본(대한기독교서회)이 유일한 번역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에게는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역자 후기를 2번 정도 읽어보고, 겨우 전체적으로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책인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종교론이라는 제목 옆에는, “종교를 멸시하는 교양인을 위한 강연이라고 붙어 있습니다. 지금부터 200년도 더 전의 일이었습니다만, 그 시대에는 명색이 교양인이라고 한다면 종교 같은 것은 멸시하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종교론이 나오기 꼭 10년 전, 1789년에 프랑스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시대는 이성과 합리성이 소리 높이 외쳐지던 그런 시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무래도 자연과학의 발달이 초래한 경향이라고 봅니다. 그런 시대적 흐름을 계몽주의라고 하는데, 당시의 교양인들은 계몽주의의 이념에 환호하면서 기성의 종교를 비판하는 흐름이 없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사 다 그렇지만, 파도에도 오르막 내리막이 있는 것처럼 계몽주의의 전성기라고 하는 그런 시대에도 그런 경향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바로 낭만주의입니다. 이 책의 저자 쉴라이에르마허라는 분도 베를린 병원에서 원목(병원목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런 낭만주의자들과 교류를 맺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독특한 종교론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계몽주의에서는 이성과 합리성이 중시되면서 종교를 멸시하거나 심지어는 부정하는 관점이 횡행했지만, 쉴라이에르마허는 오히려 합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 무한자라고 하였습니다 에 대해서, 직관과 감성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직관과 감성이 종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는 형이상학이나 도덕과 무관하다고 ---. 마침내는 후대의 저서 신앙론에서는 종교는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대충 제가 이해한 것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종교론이야기를 드리는 이유는, 비록 200년 이상의 시간적 간격과 독일(유럽)과 한국(동아시아)의 공간적 거리, 더 나아가서 기독교와 불교라는 종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책의 고뇌가 지금 우리가 맞이하는 고민과 뭔가 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에서입니다.

 

지금 우리 불교 안에서도, 혹시 쉴라이에르마허가 대면하였던 교양인이 있지는 않을까요? 어쩌면 그 문제를 기독교만의 문제이고 불교에서는 애당초 그런 문제가 없다. 불교는 이성과 합리성의 기준에 딱 맞는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불교인들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만해 한용운 스님 같은 분입니다. 그분의 조선불교유신론에 나타난 철학은 그런 것입니다. 일본의 이노우에 엔료(井上円了) 같은 분도 그렇습니다. 비판불교의 흐름 속에서도 비판만이 불교이다라고 할 때는, 그런 입장입니다.

 

물론 불교에는 이성과 합리성, 그리고 비판이 있습니다. 그런 계몽주의와 상통하는 부분 역시 있습니다. 초기불교, 반야불교, 그리고 선불교 같은 경우는 다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 전통을 공부해서 박사학위 논문 대승경전과 선을 썼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과 같은 경우에도 이성이나 합리성의 영역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깨달음이라고 하는 문제는 이성이나 합리성의 영역을 넘어서는 부분이지요. 쉴라이에르마허가 말한 직관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직관을 말하는 것은 불교가 아니라고 비판불교의 하카마야 노리아키(袴谷憲昭) 선생 같은 분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반대로 생각합니다. 정녕 불교는 그런 직관에서 확인할 수 있다고 봅니다. 비판만이 불교라는 주장은, 불교를 철학으로 돌리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지금 불교에 생명력이 떨어지는 것은, 그런 직관을 끊임없이 재생산해 내지 못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요?

 

근래 제가 정토불교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습니다만, 제가 볼 때는 지금 불교는 모두(?, 혹은 거의 모두?) 삶의 문제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것 아닐까요? 삶의 문제는 우리의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이해가능한 영역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쉴라에르마허가 말하는 것과 같은 직관과 감성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는 것이 죽음의 문제가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불교에도 오직 삶만을 생각하는 불교’(는 본래 없었다고 봅니다만, 현실적으로 불교인들 사이에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죽음과 삶을 함께, 죽음과 관련하여 삶을 생각하는 불교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전자를 유생문(唯生門)의 불교라 하고, 후자를 사생문(死生門)의 불교라 부르고자 합니다.

 

지금 정토신앙이 자리를 잡지 못하고, 정토신앙을 말하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도 결국은 그런 계몽주의적 사고에 입각해서 불교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점에서 직관과 감성의 불교도 부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특히 직관은 선불교에서도 볼 수 있지만, 감성의 불교는 정토신앙의 역사에서 진합니다. 예를 들면 신란(親鸞, 1173-1262)의 불교가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탄이초의 세계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쉴라이에르마허는 도덕과 직관 내지 감성은 서로 상반되는 것으로 많이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과연 반드시 그럴까?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같은 사람은 그 양자를 둘 다 통합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그에게는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를 생각하는 부분도 있지만, 또 그만큼 신에게 기울이는 믿음의 깊이가 깊었던 사람도 드물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는 정녕 도덕이나 행위와 감정과 믿음의 양자가 조화를 이루었던 것처럼 생각됩니다.

 

어떤 면에서 그 부분은 정토신앙에 대한 간디가 주는 문제제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성과 직관, 도덕/행위와 감성의 조화를 이루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볼 수 있으리라 봅니다. 죽음과 삶이, 내세와 현세가 조화를 이루는 것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

                                                                    김호성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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