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1(2017. 6. 26)
칭명사(稱名寺)
일본을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 출장이었습니다. 요코하마에는 가나자와문고(金澤文庫)라는 도서관 겸 박물관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도서관입니다. 그런데 이 도서관에 수장되어 있는, 많은 고서들은 실은 그 옆에 있는 절 쇼묘지(稱名寺)의 스님들이 수집한 것입니다. 800년 전부터의 일입니다.
그 전에도 이 칭명사는 찾아온 일이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그 이름에 ‘필’이 꽂혔습니다. 칭명사, 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서는 못 보았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한국불교사 전공의 고영섭 교수에게도 여쭈어 보았습니다. 역시 우리나라에서는 칭명사라는 절을 알지 못한다고 하시더군요.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염불사, 염불암이 많지요. 염불과 칭명, 그것이 그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관무량수경』에는, 하품하생(下品下生)을 설하는 곳에서 “그대 만약 능히 염불할 수 없다면, 마땅히 ‘귀명무량수불’이라 칭하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염과 칭을 다른 개념으로 본 것입니다. 이때 ‘염’은 그저 소리를 내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집중하는 것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염’이 ‘관(觀)’과 같은 의미로 쓰인 것입니다. 이 관은 선(禪)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염불, 즉 관불을 하지 못하는 것이 하품하생의 근기입니다. 이런 하품하생은 그저 다만 소리를 내면서, 입술 위에 “귀명무량수불”, 즉 “나무아미타불”이라 일컫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칭명입니다. 호넨 스님은 스승 에쿠(叡空)스님께 목침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합니다. 에쿠 스님은 관불이 더 긴요한 수단이라 말하고, 제자 호넨은 그저 칭명하는 것이 더욱 긴용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말 안 듣는 제자에게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목침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야기는 야나기 무네요시 선생의 『나무아미타불』에도 나오지요.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실제로 일본에서는 ‘칭’자가 들어가는 절이 많습니다. 시종의 경우만 하더라도, 칭원사(稱願寺), 상칭사(常稱寺), 영칭사(迎稱寺), 칭념사(稱念寺), 전칭사(專稱寺) 등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는 선의 전통이 강하므로, 염불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염불이라 할 때, 이렇게 칭명의 의미로 쓸 수도 있습니다. 호넨스님 이후에는 다 그렇게 칭명의 의미로 염불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 뜻을 단적으로 『선택본원염불집』에서는, “염하는 것과 소리를 내는 것은 하나다”(念聲是一)이라 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시 「칭명사」를 지어보았습니다.
염불사念佛寺라 해도 좋았을 텐데
그럴 法도 했는데
칭명사稱名寺라 했네
그렇지. 나 염불조차 하지 못할
위인이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부처가 내가 되고
내가 부처가 되는 일,
아, 난행도難行道여라
나 같은 하품下品이
나 같은 악인惡人이
나 같은 범부凡夫가 어찌
감당이나 할 수 있으랴
그래, 그렇다
그저
다만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입술 위에 올려놓을 뿐이지
우리 님의 이름
부를 수 있을 뿐이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2017년 6월 23일, Yokosuka Mercure Hot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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