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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 4편 (2)편집여적(編輯餘滴)


 

 

“오늘은 내가 제일 기쁜 날입니다.”

큰스님이 미국에서의 삼년 결사(結社)를 마치시고 조선당(祖禪堂)에 계시던 어느 날, 몇 사람의 신도들과 함께 큰스님을 뵈었다.

그때 우리는 어느 노장스님 한 분이 큰스님과 담소하시다가 헤어지는 광경을 멀리서 뵙고 ‘누구실까? 뵌 듯한데’ 했다. 아, 그 노장스님은 한국의 선계(禪界)에서 유명하신 팔십 세도 넘으신 노스님이었다. 어쩐 일인가 생각하면서 우리는 노장 스님께 반배하고 큰스님을 마당에서 뵈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계시던 큰스님은 우리의 인사를 받으시고는 “내 생애에 오늘이 제일 기쁜 날입니다.”하셨다. “아까 만난 그 노장님은 화두로 유명한 선사이십니다.

 

나더러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한다고 ‘심(心)은 허공(虛空)과 등(等)할새……가 무슨 선이오’ 하면서 비아냥대던 노장님인데 오늘 나더러 ‘청화스님 당신이 옳았소. 나도 최선을 다했으나 성불을 못했소. 화두만 갖고는 안 됩니다. 나도 염불하겠소. 염불로 극락을 갔다가 다시 오겠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토삼부경을 비롯해서 몇 권의 책을 드렸습니다. 그렇게도 염불은 선이 아니라고 고집 부리시던 분이 찾아오시니 오늘은 내 생에서 참 기쁜 날입니다. 화두도 좋은 선법입니다. 송나라 때부터 여러 도인이 배출된 간화선 아닙니까? 그러나 염불도 천지우주가 부처님이고, 내 자성이 부처라 믿고, 부처님 명호(名號)를 부르면 그대로 참 염불이 되지 않습니까? 염불인 동시에 참선이 됩니다.”

 

법이자연(法爾自然)한 당신의 행법을 늦게나마 인정한 새로운 도반을 맞았고 그나마 젊은 시절에 서로 다른 행법으로 맞선 적이 있는 노 선배스님이 당신의 행법이 옳았다고, 나도 이제부터 염불을 하겠다고 하시니 얼마나 기쁘셨겠는가? 큰스님은 법지상주의(法至上主義)요 부처님 제일주의였다. 누가 물어도 노소가 없고 문턱이 없었다. 평소에도 “이 같은 몸뚱이 몇 백 개를 바친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것입니다. 몇 번이고 내 몸을 버릴 각오로 어려움을 넘어서야 참선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라는 큰스님의 사자후에 우리는 숙연히 자기를 돌아보며 신심을 다졌다.

 

 

* 이남덕(전 이화여대교수·국문학)선생께서는 오래 전에 「청화스님과 태안사」(1995,4) 「스승과제자」(1995,5) 「노보살과 염불선」(1996,9) 「내가 만난 청화스님」 (1997,11)이라는 주옥같은 글을 잇달아 발표하셨다. 그 내용을 옮기면 이렇다.

 

청화스님과 태안사

오늘 [삼월오일] 태안사 정기법회에서 청화(淸華)큰스님의 법문이 있으셨다. 예수재 기간 중이라 그 말씀도 계셨지만 연래로 조성 중이던 천불전(千佛殿) 부처님의 점안식(點眼式)이 거행되었다. 그런데 그 보다도 더 우리들 청중의 가슴을 울린 것은 큰스님의 이번 예수재 불사가 끝난 날 [삼월이십육일] 태안사를 아주 떠나신다는 말씀이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칠순이 넘으신 노경에 이제 다시 삼년 결제(結制)를 결심하시고 홀로 손수 끓여 드시는 토굴 생활을 하실 것을 생각하니 청중은 형언키 어려운 감동으로 눈물을 머금지 않을 수 없었다.

 

큰스님의 일일일식(一日一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는 사십여 년래 계속 하시는 생활방식이다. 인간의 능력으로 그럴 수 있을까. 나는 처음 태안사에 왔을 때 그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충분히 믿을 수가 있다. 인간의 가능성은 헤아릴 수 없이 큰 것인데, 다만 그것을 발휘하지 못하는 까닭은 인간 자신이 스스로의 생각에서 자기 자신을 제한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큰스님의 생활을 직접 보면서 알게 된 것이다.

의·식·주 전체를 손수 감당해 나가는 수도자의 생활이 몸에 배어 계시니 염려할 바는 없으나 한 번 삼매에 들어가시면 일일 일식도 아닌 일주일 이상 식사를 안 하실 터이니 가슴이 찡하는 아픔마저 느끼게 한다.

 

큰스님과 태안사!

삼십년 전에 청화스님은 잠시 태안사에 주지로 오신 일이 있었다한다. 육이오 전란으로 법당이 다 타버리고 폐허가 된 절터에서 매일 중노동을 하시면서 법당을 지으셨다는데, 새 나무로 신축하신 것이 아니라 계곡 맞은편에 있는 봉서암(鳳瑞庵)이 불에 안탔기 때문에 그 건물을 헐어서 옮겨 지으셨다고 한다. 마치 태안사 법당을 지으려고 토굴에서 나오신 것처럼 짧은 동안 머무르셨다가 도로 토굴로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큰스님께서 다시 태안사 주지로 오신 것은 그 보다 이십년 후, 꼭 십년 전 춘삼월이었으니 스님의 긴 토굴생활이 끝난 것은 그 때부터라고 하겠다.[태안사 오시기 전에 잠깐 안성의 칠장사와 지리산 백장암을 거쳐 오셨다한다.] 태안사에 오시자마자 그 해 하안거부터 삼년 결사(結社)에 들어가셨으니 일천구백팔십칠 년 동안거 해제로써 마치신 것이다.

 

스님께서는 참선수행 스님들을 위한 선방만 연 것이 아니라 재가불자들의 참선수행을 위하여 정중당(淨衆堂)을 개설하셨다. 내가 이 정중당에서 여름, 겨울 두 철 안거를 한 것은 삼 년 결사 마지막 해인 일천구백팔십칠 년의 일이다. 이후 오늘까지 스님들의 윗선방[上禪]과 재가자들의 정중당이 매 철 이십 명 내지 이십 오명의 참가자로 계속되고 있다.

 

일천구백팔십칠 년에는 앞 계곡과 절 사이 논이었던 곳에 연못을 만들었고 연못 한 가운데에는 부처님의 진신 사리탑이 모셔져 있어서 사람들이 연못 탑돌이 포행을 하면서 대자연의 풍경과 더불어 부처님을 예경하는 것이다. 사울 초파일이나 만등불사 때 불 밝힌 등을 달아 밤하늘을 장엄하고 탑돌이를 하면 그 황홀감은 극락세계가 이럴까 싶다.

 

그 후 몇 해 동안 태안사에는 많은 당우(堂宇)가 세워졌다. 윗선방 건물 금강선원(金剛禪院)이 옛날 혜철암(惠徹庵)자리에 세워졌고 그보다 위편에는 명적암(明寂庵)이 복구되었다. 가장 큰 역사는 정부의 악간 보조도 있었지만 큰 법당이 옛 자리에 그대로 복원된 것이다. 자연히 봉서암에서 옮겨왔던 작은 큰 법당 건물은 다시 봉서암 옛 자리로 돌아가게 되었다. 지금 봉서암 법당 옆에 선방을 겸한 요사채를 짓고 있는 중이다.

 

상선 건물을 위시한 명적암·큰법당·봉서암 등 일련의 당우 건설에는 한 건축 사업가[이중근거사]의 수년래의 헌신적인 헌공공사로 이루어졌다. 치근 그의 공덕비가 연못 아래편 태안사 입구에 세워졌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비석에는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가 불자가 아닌 기독교 신도[長老]라는 것이다. 이런 일만 보아도 이제는 종교나 국가나 개인이나 그 생각의 차원을 높여서 회통적으로 감싸 안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재건한 태안사를 이번에 종단에 바치고 훌훌 떠나시는 것이다. 스님들의 거취가 본래 이렇다는 것은 들어서 알지만 집착이 많은 세상에 깨끗이 마음을 씻어 주는 결정이시다. 그는 태안사를 그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태안사는 신라 때 구산선문 중의 하나이며 개산조(開山祖)인 혜철 국사가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도일(馬祖道一)선사의 직계인 서당지장(西堂智藏)선사에게서 심인법(心印法)을 받아 귀국하여 열었던 절이다.

그 유명한 마조도일은 신라인 정중무상(淨衆無相)선사의 제자였음이 돈황문서(燉惶文書)의 발굴로 알려졌고, 신라 구산선문의 거의 전부가 마조 대사의 후계이니 간접적으로 무상선사의 후예인 것이다.

 

정중무상 선사의 선지는 당시의 남종(南宗)·북종(北宗)과는 다른 촉(蜀)나라 땅[泗川者]에 정중사를 중심으로 널리 퍼졌던 염불선(念佛禪)이었다고 한다. [‘정중무상 선사와 염불선’ 청화스님, 「불교춘추」창간호 참조] 그 가르침은 무억(無億)·무념(無念)·막망(莫忘)의 삼구어(三句語)인데 이는 계·정·혜(戒定慧)삼학에 대응하는 것이고, 법문전에 인성염불(引聲念佛)하는 방법이 특징이라 하겠다.

 

청화스님이 태안사의 재가불자를 위한 참선방 이름을 정중당이라 하신 연유도 이런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특히 우리나라 선풍이 화두선 일색인 현황에서 거기서 탈피한 순선(純禪)안심법문(安心法門)을 가르치시는 청화스님이 염불선자로 지목되어 왔으니 정중무상 선사, 마조, 지장, 혜철선사로 이어지는 법맥에서 태안사에 주석하신 큰스님이 염불선자로 불리는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이렇게 인연 깊으신 태안사를 떠나시는 데는 우리가 감히 촌탁할 수 없는 깊으신 뜻이 있을 것이다. 큰스님 떠나신 후에 유서 깊은 태안사여! 그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바라건대 이 나라 새로운 선풍을 드날리는 선사(禪寺)가 되기를 심축하며, 우리 재가자들의 선방 정중당도 길이 남아 있기를 기원한다. 큰스님께서 삼 년 후 크신 원력대로 대성취 이루시고, 온 세계가 평화의 이십일세기를 맞이하도록 만 중생을 제도하여 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스승과 제자

삼월 이십육일 태안사에서 예수재가 끝나던 날 청화스님의 고별법어는 지극히 간결하였고 그러기에 더욱 힘차고 간절하게 느껴졌다. 우리들의 삶이 우주생명의 실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바로 십년 전 이날 태안사에 들어오셨다가 많은 가르침을 주시고 떠나시는 날이 바로 그날이니 이 진퇴(進退)는 큰스님의 결단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토굴에서 나왔다가 다시 토굴로 들어가시는 그 십년 동안의 중생제도의 무대, 십년 무대의막이 내려진 것이다. 이십칠일 아침에 사무 인계할 스님만 남겨두고 다른 스님들은 모두 바랑을 메고 산문을 내려가시고 신도들도 각각 절을 떠났다. 아직 새로 절을 맡으실 스님들은 도착하지 않았고, 절 살림은 있는 그대로인데, 이렇게 깨끗하게 신구 교체가 이루어지는 절 풍속도 내게는 생전 처음 겪는 풍경이었다.

 

다시 드넓은 제주 하늘 아래 서서 먼 지평선을 본다. 한라산은 아스라이 서편에 머무는데 원근의 ‘오름’들이 독특한 공중선을 그리며 둘러서 있다. 모든 것이 변한 것이 없는데 나 혼자만이 뭔가 달라진 것 같은 아득하고 허탈한 마음이다.

 

우리가 일생을 뒤돌아 볼 때 몇 개의 연속된 무대가 있었던 것을 꼽아 볼 수 있다. 큰스님의 십년 동안의 태안사 무대, 큰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우리들은 그 무대에 동참한 제자들이다. 큰스님께서는 십년 전의 토굴 정진생활로 복귀하시지만 우리들은 각각 어떤 생활로 되돌아 갈 것인가.

 

아니, 어떤 생활이 앞으로 전개 될 것인가 과연 나의 경우는 앞으로의 여생을 가꾸어 나갈 만한 정진력이 준비되어 있는가. 지금나의 신앙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문제인가. 이제 까지 모르는 것 투성이면서 왜 진작 큰스님께 의문을 여쭙지 않았던가. 스승은 항상 옆에 계실 것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방일한 채로 안한(安閑)히 지내왔던 것이 아닌가.

 

지난 한 달 동안 큰스님께서 삼년 묵언으로 우리 앞에 안 나타나심을 발표하시고 난 다음에야 허둥대는 그런 마음이었다. 바로 한 달 전 내 나이 칠십 육세지만 나는 영원한 선재동자처럼 육십 년 한 갑자는 공중에 날려 보낸 십 육세 소년이라고 자못 싱그러운 소리를 한 바로 그 뒤 끝에, 이제 과연 삼년 후를 기약할 수 있을지 조차 알 수 없는 이 나이에 갈 길을 물을 말조차 확실히 모르는 딱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예로부터 군사부(君師父)일체라고 일컫지만 요즘 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군[임금]도 부[어버이]도 안중에 없는 막된 판에 스승에 대한 공경심인들 온전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귀중한 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라 절감된다. 왜냐하면 세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존재가 바로 스승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삼계가 화택(火宅)인 것을 가르쳐주셨고, 그 가운데 허덕이는 중생이 다 부처님의 아들[佛子]임을 인정하시고 이 환란 많은 화택에서 부처님 한 삶만이 능히 구호하여 주실 수 있음을 선언하시었다.[『법화경』비유품] 우리들 불자에게 있어서 부처님은 스승의 원조이시다. 그 부처님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펴시는 법사에게 중생 인도를 위촉하시니 중생들은 법사에게 공양하고 법을 듣게 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악한 마음으로 도장(刀杖)과 와석(瓦石)으로 이 법사를 해치려 할 때에는 부처님은 화인(化人)을 보내시어 위호(衛護)하신다고 하셨다.[『법화경』법사품]

 

이렇게 부처님 법등을 전해주신 스승이 ‘역대전등(歷代傳燈)제대조사(祖師)천하종사(宗師)일체 미진수 제대 선지식(善知識)’이시다.

 

태안사를 떠나던 날 아침에 연못 가운데 모셔진 부처님의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을 돌면서 나는 무한한 감사를 올렸다. 이십이 년 전 부다가야의 성지에서 나에게 불자로서의 자각을 주신 부처님, 그리고 그날 이후 나를 ‘마하반야바라밀’의 가르침으로 인도해 주셨고, 이제 온 우주생명의 실상(實相)이신 부처님을 실감케 해 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느꼈던 것이다. 그 부처님은 삼천 년 전 가비라국에 태어나서 출가하시고 보리수나무 아래서 성도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이신가.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천·인·아수라들은 다 지금의 석가모니불인 석씨(釋氏)의 궁전을 나와, 가야성을 떠나서 멀지 않은 도량에 앉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나는 실로 성불해 옴이 한량없고 가이없는 백천만억 나유타겁이라”고 하셨다.

 

이처럼 구원실성(久遠實成)의 부처님이건만 다만 방편으로써 중생을 교화해서 불도에 들게 하려고 모든 중생의 가지가지의 성품과 가지가지의 욕망과 가지가지의 행과 가지가지의 생각 분별이 있으므로 중생의 선근을 일으키게 하려고 약간의 인연과 비유와 말로써 설법하며 교화하여 일찍이 잠시도 쉬지 아니한다고 하셨다.

 

그러한 교화방편을 쓰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만일 여래가 세상에 오래 머무른다고 하면 박덕한 사람은 선근을 심지 않고 빈궁하고 하천(下賤)해서 오욕을 탐착하여 생각이 망견의 그물에 들어갈 것이라, 여래가 항상 있어 멸하지 않음을 보게 되면, 곧 교만한 생각을 일으켜 싫어지며 게으름을 품어서 여래를 만나기가 어렵다고 한 것이라”

 

여래를 만나보기가 그야말로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로 어렵다고 생각하면 “마땅히 마음에 연모하는 생각을 품고 부처님을 갈앙(渴仰)해서 곧 선근을 심을 것이니, 이런 고로 여래는 멸도하지 않건마는 멸도한다고 말한다.”고 하셨다.

 

우리 중생이 중중무진의 업장으로 전도된 몽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특히 현대 인류는 독약을 먹고 실심(失心)한 상태에 있는 아이와 같아서 아무리 양의(良醫)인 아버지가 양약을 지어주며 먹으라고 해도 독기가 너무 깊이 침투된지라 아무리 좋은 약도 받아먹으려 하지 않는 형국이다. 이럴 때는 비상수단을 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아들들 곁을 떠난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나는 지금 늙고 쇠해서 죽을 때가 이미 이르러 이 좋은 약을 지금 남겨두니 너희는 반드시 먹되 차도가 없을까 근심하지 말라.”[『법화경』 여래수량품]

 

큰스님이 우리 곁을 떠나시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에게는 이미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양약이 주어져 있건만 오탁악세(汚濁惡世)의 공업중생(共業衆生)으로 중독된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구언실성의 부처님의 뜻도 모르고 그가 주신 가르침이 우리를 구언해 주실 양약임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이나 그 가르침을 일깨워 주시는 스승님의 고마우심도 망각하고 있으니 부처님 생각에 우리 중생이 얼마나 가엾겠는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불·법·승(佛法僧)삼보(三寶)에 대한 찬탄심과 환희심이다. 우리가 불자로서 처음 자각을 했을 때부터 이 마음은 변함이 없고 부처님께 가까이 갈수록 더욱 강화되어 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그러려면 삼보 중에서도 스승에 대한 갈앙심은 직접적인 동기가 되는 것이다. 스승은 범부 중생인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 앞에 있으시다. 그러나 그분들은 우리에게 인간의 가능성을 최대한으로 보여주시는 분들이며, 부처님과 중생 사이를 연결시켜 주시는 존재다.

 

나는 요즘 『밀라레빠의 십만송(十萬頌)』이라는 책을 보며 스승에 대한 공경과 찬탄심은 스승을 기쁘게 하기보다 먼저, 찬탄하는 제자의 마음에 환희심을 일으켜 그를 행복케하고 그를 개조케 하는 ‘신통력’이 있음을 절감한다. 밀라레빠는 누구에게 설법할 때, 먼저 스승에 대한 찬탄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인간의 몸 지니신 은밀한 붓다,

비길 데 없는 역경사 마르빠 아버지시여!

자애로운 마르빠의 발 앞에 엎드려 절 하나이다.

.........

아버지 마르빠시여, 임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임이 더욱 그리워지네.

........

아, 나의 스승은 거기에 계신다.

지금이라도 그리 가서 스승님을 한 번만 뵐 수 있다면!”

 

 

 

노보살과 염불선

하안거(夏安居)도 반 살림이 지났다. 늙은이 병 앓고 나면 회복이 더디고 대중생활을 따라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집에서 미적미적하다가 이번 철에는 남보다 보름이나 늦게 참가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집에 있을 때보다 밥맛도 있고 생기가 나니 나는 천생 절 생활 체질인가 싶다. 새벽 세시에서 저녁 아홉시 반까지 빈틈없이 짜여진 일과표에 따라 움직이는데, 마음의 여유가 생겼는지, 또는 몸이 느른해져서 그런지, 기를 쓰고 꼭 해야겠다는 생각보다도 할 수 있는 대로만 따라하지 하니까 오히려 편안하다.

 

안거 때는 특별히 정진을 부지런히 하는 철인데, 나는 지금 생활 그 자체가 무리 없이 규칙적으로 되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마음이다.

이번 대중은 사십 명도 넘는다. 대부분이 노보살들이다. 태안사 선방에서 만났던 구면 보살들도 여러 명이 있어서 반가이 만났다. 노보살들은 거개가 다 여러 선방을 거친 사람들이라 말이 없어도 생활 법도가 일사불란하다. 대자암 선방생활에서 즐거운 시간이 있다. 그것은 오전 참선 끝나고 나서 하는 요가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사시예불에 참가하는 사람, 독성각·칠성각·산신각에서 기도하는 사람 등 자유롭게 선택하는데, 요가 하는 사람들은 선방 청소를 마치고 다 자리에서 운동을 한다. 노살들이 처음에는 설음설음 하다가 몸이 한결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끼고 나면 적극적으로 열심히 동참한다.

 

인천에서 오신 성도회 보살은 팔십 삼세 된 최고령인데도 아주 열심이다. 녹음된 테이프의 구령에 맞춰서 한 시간 십오 분 동안 하는데 얼마나 개운한지 다 마치고 나서는 모두 이구동성으로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하는 말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다. 성도회 보살은 아침공양[여섯시] 후 내 방에 들러서 차도 마시고 금강경과 아미타경의 독경을 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다. 점심공양 뒤에는 또 혼자서 천수경의 ‘신묘장구 대다라니’를 스물 한번 외운다고 한다. 이 주력(呪力)독송을 며칠 전에 백일기도로 마쳤다고 그 노령에 수박 일곱 덩이를 공주 가서 사가지고 와서 대중공양을 했다. 그러면서 이제 할 일은 아미타 부처님께 매달릴 뿐이니 아미타 염불을 시작하겠다고 한다. 지금도 그 분은 화두선 아닌 ‘아미타불’ 염불선을 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나는 이년 전에 ‘불일회보’에 실렸던[6월1일자 제 162호] 월인 스님의 기사를 생각한다. 그는 법랍이 오십여 세, 세속 나이 팔십오 세[현재는 팔십칠 세]의 ‘수행승 중의 수행승’이라고 일컬어지는 분이라 한다. 평생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사신 분인데 갈 날이 앞에 딱 닥쳤는데 아직 생사해결을 못했으니 지금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여비 벌고 있는 거라면서 일평생을 참선수행 하신 분이 지금은 정토발원(淨土發願)을 하고 계시며 불자들에게도 이를 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견성(見性)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끝은 아니며 과거의 업장까지 소멸되는 것은 아니라며 이 날까지 백팔예불대참회를 새벽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으신다고 한다. 화두를 타파하면 다 될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더라고. 그래 이 세계에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아시고 극락에 가서 기강을 보강해 다시 내려오시겠다는 새로운 발원으로 스님은 지금 “극락 갈 여비 마련하느라 몹시 바쁘다”는 것이다.

 

수행자의 생명은 그 정직성에 있다고 본다. 사람마다 자기 특성과 경계를 분명히 깨닫기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인간 존재의 허약성을 알고 나서 오랫동안 길들여 온 수행방법에 수정을 가할 수 있는 분의 용기에 대해서 찬탄심을 금할 수 없다. 월인 스님이 정토발원을 하는 것은 극락세계가 살기 좋고 훌륭한 곳이기 때문에 거기서 호강하러 가려는 것이 아니고, 여기 지금 사바세계는 자기기능을 양성할 수 없으니까, 세세생생에 보살도를 행하겠다는 서원을 이루려면 거기 가서 능력을 양성해서 다시 이 세계에 나와야겠다는 원이신 것이다.

 

나는 태안사에서 청화스님의 염불선(念佛禪)의 가르침을 받아 온 터이지만 나와 보니 대부분의 노보살들이 화두선(話頭禪)자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존경하는 어떤 젊은 스님은 이런 사정을 다 아시고 몇 해 동안을 나를 지켜보시다가 이년 전에 나에게 간곡히 화두선 으로 참선 방법을 바꿀 것을 충고해 주신 일이 있다. 그러나 참으로 말씀은 고맙지만 나 자신의 근기나 경계는 스스로 판단하는 바가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가르침을 받은 인연이라고 생각된다.

 

청화스님께서는 단 한 번도 화두선이나 염불선이나 묵조선(黙照禪)이나 어떤 선(禪)의 방법에 대해서도 우열(優劣)을 매김하신 일은 없다 다만 인간 심성의 비중의 차이 즉 지혜[知]·정서[情]·의지[意]특성 중에서 자기의 근기 따라 보다 적합한 참선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말씀이며, 지적(知的)경향이 강한 사람은 화두를 의단(疑團)으로 참구하는 것도 무방하고, 확신을 위주하고 의단을 싫어하는 사람은 화두 없이 묵조(黙照)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또는 정서가 수승한 사람들은 다만 부처님, 즉 생명의 실상을 인격적으로 그리워하는 흠모심을 내어 염불하는 방법을 취하는 것이 좋으리라는 것이다.

 

“극락세계가 저 십만 억 국토를 넘어서 있다. 아미타불은 그 곳에만 있다”고 생각한다면 참다운 염불도 안 되고 염불선도 못 된다는 말씀이다. 위에서 언급한 월인 스님의 정토발원도 십만 억 국토를 넘어선 서방극락세계를, 마음 밖에다 두고 하신 말씀은 아닐 것이다.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여래이신 아미타 부처님도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이며 만법이 본래 부처인지라, 그 마음의 뿌리, 즉 불성자리에 돌아가고 싶다는 표현으로 생각된다. 평생을 참선 수행으로 몸 바치신 분이 마음 밖에다. 부처님을 상정하실 리가 없기 때문이다.

 

지난 동안거에 이어 이후 참선 뒤에는 『수능엄경』 강의를 녹음테이프로 듣고 있다. 육권 관세음보살의 이근원통(耳根圓通)강의 들어가기 전에 이십오원통[六塵·六根·六識·七大圓通] 맨 마지막 부분에 대세지보살의 근대 원통 얘기가 나온다. 염불에 의해 견성성불[圓通]하는 이치가 하도 시원스러워 인용코자 한다.

 

 

대세지 법왕자가 같은 무리 오십이 보살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서 부처님 발에 절하고 사뢰었다.

“저는 생각하니 과거 항하사 겁 전에 부처님께서 출현하셨는데 그 명호는 무량광이셨나이다. 그 뒤를 이어서 십이 여래가 출현하셨는데 그 마지막 부처님이 초일월광(超日月光)이셨나이다.

 

이 부처님께서 제게 염불삼매(念佛三昧)를 가르치셨는데, ‘마치 한사람은 전일하게 생각하나, 한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 두 사람은 만나도 만나는 것이 아니고 보아도 보는 것이 아닌 것이 되지만, 두 사람이 서로 생각하여 그 생각이 서로 깊어지면 설사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바뀐다 하더라도 형체와 그림자가 같아서 서로 어긋나고 헤어짐이 없는 것과 같다. 시방(十方)의 여래가 중생을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지만 만약 자식이 구태여 도망친다면 아무리 생각한 들 어찌하겠느냐.

 

자식이 만약 어머니를 생각하되 어머니가 자식을 생각하는 것과 같을 때 그 모자는 생이 바뀌어도 서로 어긋나고 멀어지지 않는 것처럼, 만약 중생이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염하면 현생이나 내생에 틀림없이 부처님을 볼 것이며, 언제나 부처님과 멀지 않아서 방편을 빌리지 않아도 스스로 마음이 열리니 마치 향수 바른 사람의 몸에 향기가 있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이리하여 본인지(本因地)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서 무생인에 들어갔고, 지금 이 세계에서는 염불하는 사람을 거두어서 정토로 돌아가게 하나이다. 부처님께서 원통에 대한 것을 물으시니 저는 선택함이 없이 육근을 모두 껴잡아서 청정한 생각이 계속하도록 하고, 이렇게 해서 삼마지를 얻는 것이 제일인가 하나이다.”

 

얼마나 간단명료한 가르침이신가!

부처님은 항상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우리를 눈도 떼지 않고 지켜보시는데, 우리가 무명에 가리어 못 보고 못 깨닫고 하다가 사무친 갈앙심(渴仰心)으로 부처님을 염하고 흠모한다면 부처님을 볼 것[見性]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여성 심성의 특성은 정서적인데 있다. 특히 노보살들은 이제까지의 염불기도의 습관이 있기에 염불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부처님을 진여불성의 인격화한 명호로 알고 눈을 안으로 돌려 마음의 뿌리를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청화스님

큰스님을 처음 뵌 것은 동리산 태안사에서였다. 그때가 일천구백팔십칠 년 유월 육일 토요일로 태안사 신도들로 구성된 금륜회(金輪會)정기법회 날이었다. 당시의 태안사행은 순전히 권수형(權秀炯)부부 때문에 이뤄졌다. 수형은 한때 내 제자였다.

 

밤 여덟시쯤 절에 도착했을 때는 때마침 이기영(李箕永)씨가 대표로 있는 「불교연구원(佛敎硏究院)」사람들이 정중당(淨衆堂)에서 큰스님 설법을 듣고 있었다. 가볍게 일 배를 하고, 정좌한 뒤 나는 눈을 감은 채 그분의 음성을 음미했다. 직선적이면서도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가득했으며 완벽한 인격에서 나오는 간곡한 표현법을 가진 분 같았다.

 

스님의 음성을 듣고 있자니 최상의 감동이 조용히 등줄기에서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고 눈가로는 진진한 눈물이 번져 불은(佛恩)의 지극함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용은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黙照禪), 염불선(念佛禪)등의 참선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스님은 간화선으로 견성하였음이 분명한데도 그 어느 선(禪)도 편들지 않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각자의 근기에 따라 참선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하였다. 우리 중생을 교화함에 있어서는 묵조선도 좋다 하였고, 특히 염불선을 권장하기도 하였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근기(下根機)라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시대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묵조선이 초조 달마에서 오조까지의 가장 소박하고 순수하던 시대의 선법이라면, 이후 육조 혜능에서 체계화 되어 당의 임제에서 확립된 간화선은 우리나라와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의 한국의 조계종, 일본의 임제선이 되었는데 이는 확철대오의 매우 이성적인 성격이 농후한 참선법이라 한다.

 

일본은 조동종을 개산하여 묵조선을 펼쳤으나 우리나라는 완전히 간화선 위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비해 염불선은 이성적 경향보다는 감성적·정서적 경향이 강하며 심성적 경향이 의심이 없고 불조의 가르침을 마음으로부터 믿는 이들에게 적합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느 하나만 고집하지 말고 때에 따라서는 그 어느 참선법을 취해도 좋다고 말하였다.

 

같이 설법을 듣던 한 보살[우바이]이 염불을 할 때는 소리 내어 함이 옳은지, 마음속으로 함이 옳은지를 묻자 스님은 우리 생활이 복잡하여 소리 내어 염불할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그럴 때는 마음속으로 염불 참선하라고 이르고 그러나 할 수 있다면 소리 내어 염불삼매에 드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이는 우리 주변에 떠도는 생명들과 산하대지도 기뻐하기 때문이라 했다.

 

스님의 강연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염불과 염불선의 차이점이었다. 염불선은 입으로만 외는 구두염불이 아니라 불지견(佛知見)을 가지고 우주와 동일 생명체임을 믿으면서 염불삼매에 드는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내 자신을 감성 풍부한 성품으로 본 일이 없었으나 참선법 중에서 할 수 있다면 염불선의 길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새삼스레 내 자신의 성품경향을 발견한 것 같았다.

 

스님은, 우리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궁극적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편협이나 독선이 털끝만치도 없는 불법의 공명정대함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설법이 끝난 후, 우리 일행은 스님을 직접 친견하게 되었다. 수형은 나를 자신의 교수로 소개하였다. 스님의 말씀은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었고 겸손하고 명쾌해 독특한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화제는 불교의 공관(空觀)에 대해서였다. 스님은 눈으로 보이는 현상계 내지 수상행식 전부가 공(空)아닌 것이 없기 때문에 만유실유불성(萬有悉有佛性)이라며, 현대물리학에서 양자·원자·분자·소립자로 들어가면 궁극적으로는 남는 건 에너지 파동뿐 물질상태가 아닌 것에 비유, 공을 설명했다.

 

내가 엉뚱하게 수상행식이라는 정신작용을 무(無)로 부정해 버리고, 어떻게 공(空)의 세계와 현상세계[色卽是空 空卽是色]를 연결할 수 있는지를 묻고 동양에서 영(靈)인지 혼(魂)인지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전자에 대해 스님은 실유불성론(悉有佛性論)이라 하였고 후자에 대해서는 혼이니 영이니 정신 따위니 하는 것들은 모두 식(識)에 속한다 하였다.

 

다음날, 아침 공양 후 다시 큰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수형이 말하길 큰스님이 기다리다가 마침 문 앞을 지나가는 나를 청해 들였다며 깔깔대며 웃었다. 스님은 그때 선객들과 함께 삼년결사로 참선 중이었으나 아침에는 만나고 싶어 하는 대중들을 위해 특별히 얼굴을 내미셨다. 우리로서는 여간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현재 태안사에 내려가면 볼 수 있는 연못은 당시에는 공사 중이었는데 탑돌이를 겸해 할 수 있도록 연못 복판에 탑[고려 초 창건주 경자선사비탑(慶慈禪師碑塔)]을 세우고 원형으로 짓는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 당시 은근히 연못 밑을 얼마나 진흙으로 잘 다져야 물이 새지 않을 것인지, 경주 안압지를 가보면 기막히게 축지법(畜地法)이 잘 돼 있지만 요즘 사람들은 시멘트를 너무 과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잠시 들기도 했다.

 

스님에 따르면 본래 태안사는 대웅전 다섯 칸의 절이었으나 그나마도 육이오전란으로 다 타버리고 스님이 이십년 전에 와서 몸소 등짐지게를 지며 재건에 힘썼으나 세 칸 밖에는 형편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했다. 신라 말기에는 구산문중의 하나였던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주객전도로 구례 화엄사의 말사가 되었다.

 

이십년 전 화엄사에 있을 때 당시 주지가 말사 중 어디든 선택하라고 해서 태안사의 절터가 아늑하여 선택하였다고 했다. 절에 대한 애착도 크고 왕년의 영화를 매우 아쉬워했으나 “이제 나는 마지막 수행 길을 가야지. 집짓는 역사에 붙잡힐 수 있느냐”고 말했다. 내가 그 뜻을 받아서 “그럼요, 대웅전은 작아도 아담하고 그 밑에 보제루가 있어서 오늘 아침 예불 때 보니 신도들이 거기에서 예불을 해도 참 좋더군요" 하자 스님이 ”암요“하며 기뻐하셨다.

 

이외에 부도(浮屠)에 대한 이야기도 했는데 성인이 되지 않은 스님의 부도는 단을 만들 수 없으며 성인 지위의 스님이라야 유단부도(有段浮屠)를 할 수 있다며 전자에 대해서는 신자들이 꼭 예경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하였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일생을 중생 제도하신 분들인데 설사 통달위에 오르지 못했어도 우리네야 예경해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스님은 다만 빙그레 웃으셨다. 내 생각으론 스님들에 대한 공경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우리네 신도들의 몫이라고 여겨진다.

 

낮 열두시에 설법이 시작됐다. 서울 등지에서 대중이 운집해서 마치 왕년의 통도사 극락암의 경봉스님의 생존을 방불케 했다. 장소는 보제루였는데 큰스님에 대한 대중의 존경심은 화기가 있으면서도 엄숙한 회중의 위의 속에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분위기는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내가 서양을 잘 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것은 동양의 분위기였다. 스승이나 존경하는 어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였다.

 

설법의 내용은 연기법(緣起法), 유식삼성(唯識三性), 공유이집(空有二執)등 불교교리의 가장 핵심적인 생활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스님은 연기법과 지족공덕(知足功德)을 연결시켜 결론을 다음과 같이 이끌어냈다.

“인간은 업에 매여 출생하고 인연이 다하면 흔적도 없는 것 내 몸, 내 소유가 무상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일체만물은 공취이며 공의 바탕은 비어있습니다. 불생불멸 불구부정한 불성뿐이지요. 인연 따라서 생멸하는 것이니 소유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현대의 그칠 줄 모르는 물질지상주의의 인생관을 스님은 비판하시는 듯하였다.

“만일 모든 고뇌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마땅히 지족(知足)을 관(觀)하여야 한다. 지족법은 곧 그것이 복락안온(福樂安穩)의 길이니 지족하는 사람은 지상에 누웠어도 안락하고 지족하지 않는 이는 천당에 산다 해도 불만이다.”[『유교경』중에서]

 

 

이상으로 큰스님의 다 알려진 일대기보다는 큰스님의 수행생활의 주변 이야기를 몇 가지 소개했다. 큰스님께는 석고대죄할 일이다.

지금도 조선당(祖禪堂)뜰을 조용히 거니시는 큰스님의 옆모습이 보인다. 하늘이 높은 날, 바람도 조는 산곡에 정적의 외로움, 혼자 머무르시던 바위틈에서 만주사화, 하늘의 꽃비는 몇 번이나 스님의 법안(法顔)을 스쳐갔을까. 삼가 합장구배(合掌九拜)올린다.

 

끝으로 고(故)강옥구 시인의 「청화스님에게서 수행법 배우고 귀가하는 길」을 소개하며 편집여적을 마친다.

 

바로 앞에서

곁에서

잠시 후는 뒤따라오며

높이서

밝게 비추어 주는

음력 섣달 보름

달님이시여

 

간절한 원

하나

있습니다.

 

나를 잃어버리는

그 길로

데려가 주소서!

 

설령산(雪靈山) 성륜사(聖輪寺) 부설당(浮雪堂) 일우(一隅)에서

자훈(慈薰) 박병섭(朴炳燮)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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