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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제 4편 (1)편집여적(編輯餘滴)


 

몇 해 전, 월간 『사회문화리뷰[사회문화원발행]』로부터 큰 스님의 일대기를 요청받고, 나는 감히「영원한 초야(草野)의 수행자」란 제하(題下)의 글을 보낸 후 크게 참회 했던 적이 있다. 어설픈 글로써는 써도 할(喝)이요, 말로는 더더욱 방(棒)을 받을 짓을 한 것이다.

 

오늘 다시 큰스님의 일천구백팔십일 년부터 이천일 년까지의 법문요결(法門要訣)을 어록집으로 엮는 일을 마무리 하는 마당에 큰스님의 일대기 청탁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잘 알지 못하는 일대기보다는 수행 생활의 몇 가지 주변 이야기를 보고 듣고 겪은 실상(實相) 그대로 기록하기로 하였다.

 

그러므로 다음의 내용은 후래인의 귀감을 위해 추호의 작위도 개입시키지 않았음을 명백히 밝혀둔다. 원컨대, 아래 이야기를 통해 큰스님께서 살아오신 행장을 신인(信認)하고 짐작하시기 바란다.

 

금타대화상 탑비제막 날의 환희

큰스님의 은사이신 금타 대화상께서는 이십 세 이전에 장성 백양사(白羊寺)의 만암(曼庵)대종사(大宗師)를 은사로 출가 하셨다. 큰스님께서 찬(撰)하신 벽산당(碧山堂)금타 대화상의 탑비명은 다음과 같다.

 

일체만유의 근본자성이 본래청정(本來淸淨)하여 만덕원구(萬德圓具)하고 법이자연(法爾自然)한 진여불성인데 무명 중생이 자업자득으로 생사유전(生死流轉)하여 침륜고해(沈淪苦海)하나니 우리 인류는 개벽 이래 오랜 방황 끝에 마지막 냉전의 대결을 지양하고 화해평등과 전미해탈(轉迷解脫)의 신기운이 성숙한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도다.

 

이제 당래(當來)할 세계일가(世界一家)의 정불국토 건설의 시절인연에 당하여 고 벽산당 금타대화상께서 출현하시어 원통정법(圓通政法)으로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기치를 선양하게 되었으니 어찌 일체함령(一切含靈)이 수희찬탄(隨喜讚嘆)할 경사가 아니리오. 벽산 대화상께서는 서기 일천팔백구십팔 년(一八九八年) 무술(戊戌) 윤삼월 이십구일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 부친 김병룡씨(金炳龍氏)와 모친 밀양박씨(密陽朴氏)의 장남으로 탄생하셨으니 본향은 김해(金海)요 속명은 영대(寧大)이며 자(字)는 성일(性日)이라 하였다.

 

대화상께서 승가에 출가한 인연은 기미 삼일운동 당시에 고창문수사(文殊寺)에 피신 중 우연히 금강경을 득견(得見)하고 분연히 보리심(菩提心)을 발하여 출가를 결심하고 전남 장성군 백양사 송만암(宋曼庵)대종사(大宗師)를 은계사(恩戒師)로 득도(得道) 하셨다.

 

그 후 석존(釋尊)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이수하고 십팔 년 동안이나 조주(趙州)무자(無字)화두(話頭)를참구정진(參究精進)하였으나 깨치지 못하고 삼십 구세되는 일천구백삼십육 년(一九三六年) 운문암 동안거중 다만 원각경(圓覺經)의 삼정관(三淨觀)의 이오청정윤법(二五淸淨輪法)으로 용맹정진 하시어 정중(定中)에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을 감득(感得)하고 그 해 십일월 이십칠일 인시(寅時)에 견성오도(見性悟道)하셨으니 참으로 혼돈탁세(混沌濁世)에 최승희유(最勝希有)한 천혜(天惠)경사가 아닐 수 없다. 대화상의 법호는 벽산(碧山)이요 법명(法名)은 상눌(尙訥)이었으며 삼매중(三昧中)금색(金色)지면(紙面)에 타일자(陀一字)를 득견(得見)하고 금타(金陀)로 자작하셨다.

 

그 뒤 대화상께서는 전북 부안 내소사 월명암에서의 일 안거를 제하고는 정읍 내장사 벽련암과 백양사 운문암에서 두문불출로 불철주야하여 보임정진(保任精進)하심이 십 수 년이었다. 그 동안 오로지 상구하화(上求下化)에 진췌(盡悴)하시다가 일천구백사십칠년(一九四七年)정해(丁亥) 십일월 십칠일에 구경성취(究竟成就)하시고 익년(翌年) 일월 이십사일 정오경에 향년 오십 일세로 반열반(般涅槃)하셨으니 세연무상(世緣無常)에 유연불자(有緣佛子)들의 애절통석지회(哀切痛惜之懷)가 감읍무량(感泣無量)하도다.

 

대화상께서는 후래 수도인들을 위하여 희유(希有)한 법은(法恩)을 끼치셨는데, 특히 견성성불의 첩경법문(捷徑法門)으로써 반야관조(般若觀照)의 보리방편문(菩提方便門)과 구경해탈(究竟解脫)을 위한 수증(修證)의 위차(位次)로써 대소경론(大小經論)의 수증론(修證論)을 회통(會通)한 해탈십육지(解脫十六地)의 수능엄삼매(首楞嚴三昧)의 묘경(妙境)에서 일진법계(一眞法界)의 성상(性相)을 관조하는 수능엄삼매도와 수능엄삼매도결상편(首楞嚴三昧圖訣上篇)등 기타 찬술(撰述)에서,

 

석존께서 성도시(成道時)와 열반시(涅槃時)에 친수증시(親修證示)하신 근본선정(根本禪定)인 구차제정(九次第定)과 또한 동서 문자의 통일을 염원하시고 중생의 음성을 관찰하여 수기제도(隨機濟度)할 방편으로 창제한 관음문자(觀音文字)와 무명중생(無明衆生)의 전도지견(顚倒知見)으로 분별(分別)한 현대우주론의 오류를 경책(警策)하고 물심일여(物心一如)의 법계현상(法界現象)을 태장계(胎藏界)의 수치로 체계화한 우주의 본질과 형량(形量)및 세계종교회통의 예지에 입각하여 유교 · 도교 · 기독교 · 회교 등 그 교조(敎祖)의 법력경계(法力境界)와 불교내 주요 성자들의 화엄경의 보살십지(菩薩十地)를 기준으로 그 성위(聖位)를 획정(劃定)하는 등 참으로 미증유의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정법체계를 창저(創著)하셨도다.

 

추상(追想)하옵건대 벽산 대화상의 출현하심은 참으로 시기상응(時機相應)한 감로법우(甘露法雨)로써 현대과학과 종교철학의 모든 의난(疑難)을 형이상하(形而上下)의 명확한 체계로 자증도파(自證道破)하셨으니 대화상의 불후(不朽)한 성덕(聖德)은 당래(當來)할 불일재휘(佛日再輝)의 시절에 더욱 찬연히 빛날 것임을 앙찰(仰察)하오며, 이에 정법수행인(正法修行人)의 선불도량(選佛道場)인 차(此) 설령산 성륜사에 유연불자(有緣佛子)들의 정성을 모아 탑비를 세우고 대화상의 거룩한 위덕(威德)을 앙모(仰慕)하며 여법(如法)한 가행정진(加行精進)으로 구경성취(究竟成就)를 서원하도다.

 

 

금타 대화상은 대중들이 탁발 나간 부재중(不在中)에 시봉스님 등 몇 사람만 남아 있을 때 열반에 들게 되었다. 금타 대화상 사리(舍利)에 관해서는, 진신 사리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물 항아리를 묻고 장치를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럴만한 계제가 되지 못하여 유감스럽게도 사리는 수습하지 못하였으며, 백양사 큰 절 스님들 말로 화장터에 사흘 동안이나 베폭 너비의 서기(瑞氣)가 하늘로 뻗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금타 대화상께서 부처님 정법(正法)을 여법(如法)하게 수행하고 여실(如實)하게 증득(證得)하여 부처님 법의 정수를 시기상응(時機相應)하게 기록으로 정리하였다는 사실이며 우리 후학들은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훌륭하신 벽산당(碧山堂)금타 대화상의 탑비 건립이 저간의 여러 사정으로 늦어지던 차에 이천년 시월 십오일 마침내 제막되었다. 무거운 탑신과 귀부가 특수 장비에 의해 옮겨져 설령산록에 우람하게 세워지자 모두 감격했다. 큰스님께서는 연일 작업이 진행되는 현장에 나와서 하루 몇 번이고 관계자들을 칭찬 격려하셨다.

 

마침내 제막의 날, 큰스님은 아침 일찍부터 식장을 둘러보시고 대화상의 위적(偉績)을 찬탄하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곳에 대화상의 탑비를 세우고 싶었다.”고 웃으시면서 “이런 어른은 천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성자입니다.”고 하셨다.

 

드디어 제막으로 탑신이 당당하게 모습을 보이자 큰스님께서는 환희 감루(感淚)를 보이셨다. 스승을 숭앙하시는 큰스님의 하염없는 아름다움을 목도(目睹)한 신도들도 감읍(感泣)을 금할 수 가 없었다.

 

 

큰스님 안 계신 큰스님 환갑날

백장암의 동짓달은 벌써 추웠다. 큰스님 환갑을 쇠려고 서울서 광주서 모여든 신도가 후원 보살님들의 방을 채우고도 마루에 앉았다. 아침부터 큰스님의 모습이 안보이시니 주지스님은 내심 걱정하는 눈치였다. 정오가 다 되어도 안 보이셔서 큰스님이 안돌아 오실 것을 예감한 주지스님은 부처님 전에 사시 마지를 올리기 시작했다. 예불 생신 불공까지 마쳐도 안 오시는 큰스님 환갑잔치는 잔치 아닌 서운함 속에서 각자 순서대로 큰스님과의 인연을 말하면서 시간을 사르었다. 각자 모셔온 큰스님의 모습과 일화를 들으면서 보냈다.

 

“중이 무슨 생일이 있고 환갑이 있겠습니까?”

이튿날, 삼일 만에 절로 들어오신 큰스님은 이 말씀으로 섭섭해 하는 사중을 타이르셨다 그 후 이십 년 후인 금년 팔십 회 생신도 시자만 대동하고 나가셔서 신도와 사중은 큰스님을 모시지 못했다. 무아 무소유를 삶으로 보여주시는 큰스님께서는 금년으로 팔십의 세수이다. 법랍은 일천구백사십칠 년인 이십 사세에 백양사 운문암으로 출가하셨으니 금년으로 오십 오세이시고, 나시기는 일천구백이십사 년에 나셨다.

 

큰스님은 사십여 년을 주로 토굴생활을 하셨다. 세상에 포교로 나오신 것은 일천구백팔십 년 전후 백장암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큰스님의 토굴생활 모습을 몇 가지 공개함으로써 행장을 더듬어 보겠다.

 

사성암(四聖庵)에서의 혹독한 고행

사성암은 구례군 문척면에 위치한 유서 깊은 암자다. 네 분의 성인이 나온다고 전해오는 연유로 사성암이라 한다. 결제정진을 위해 사성암에 오르신 큰스님은 암주(庵主)보살을 방세를 주어 아랫마을로 내려 보내시고 홀로 삼동(三冬) 한 철을 무서운 인내력으로 공부하셨다. 큰스님은 백장암 일주일 용맹정진에 찾아온 우리들에게 어디라고 밝히지 않으시면서도 젊어서 처음하신 공부 이야기를 해주셨다.

 

큰스님은 “안자고 안 눕고 한 끼만 먹고 공부하셨다.”고 하시며 졸고 있는 우리들에게 격려의 말씀을 하셨다. 그날 이후, “안자고 안 눕고 한 끼만 먹고”가 그날 용맹정진에 참여한 우리들의 신화 같은 구호(口號)였다. 얼마나 격렬한 결정신심으로 몸을 던져 공부하셨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저린다. 왜 우리는 흉내도 못 낼까? 이러고도 큰스님의 제자일까? 참회와 부끄러움을 느꼈다. 오늘의 청화 큰스님이 되신 것은 사성암의 “안자고 안 눕고 한 끼만 먹고”에서 보이신 초인적인 정진의 결과가 아닐까 믿는다.

 

여기서, 사성암 이야기로는 내가 사성암을 직접 찾아가 만난 그 암주 보살의 말을 [큰스님의 꾸중을 무릅쓰고라도]뺄 수가 없다. 그 보살이 절 안에 놔 둔 고양이 때문에 밤중에도 가끔 숨어서 올라갈 때면, 그 껌껌한 바위 웅덩이에서 찬 샘물을 큰 양동이에 받아 큰스님께서 아주 천천히 머리에서부터 붓고 계시더란 것이다. 죄스러워 혼비백산으로 내려와서도 멀리서 큰스님의 겨울 냉수 붓는 소리를 들으면서 노파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독하신 어른, 천하에 강하신 어른, 삼십 년을 이 암자를 지키고 살았어도 저렇게 하루도 안 빼고 찬물 부으며 공부하시는 스님은 처음 뵙는구나......”하고 경탄하면서 얼마나 추우실까 생각해서 소리 내 울면서 내려갔다고 한다.

 

이 말을 들으면서 나도 감격해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 사성암도 자동차 길이 뚫려 옛 모습이 간 곳 없을 것이다. 다만 큰스님이 어느 수행 처에나 남기시는 내방객에게 고(告)하는 근고청중(謹告淸衆-삼가 청정 대중에게 알림)의 팻말은 아직도 있더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근고청중의 내용을 소개하면 이렇다.

생사사대(生死事大)[삶과 죽음이 가장 큰 일인데],

무상신속(無常迅速)[덧없는 세월은 빨리 가버리니],

촌음가석(寸陰可惜)[짧은 시간도 한껏 아끼며],

신물방일(慎勿放逸)[방심하고 게으르지 말라].

 

 

청빈(淸貧)을 극(極)한 토굴생활

난 큰스님 토굴 생활은 직접 보지 못했다. 세 사람의 보살들이 도갑사 위 상견성암(上見性庵)으로 친견을 갔던 이야기를 종합하겠다. 큰스님 행방을 모르던 보살들은 문화재를 조사하기 위해 도갑사를 올랐던 관리의 이런 말을 들었다.

 

“나 참 오늘 중[스님]다운 중을 오랜만에 뵈었습니다. 말을 일체 않고 필담으로 교환했는데 은일지사, 성자의 모습으로 검소하게 살고 있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전갈이었다.

 

상견성암을 어렵게 찾은 방문객들은 주인도 안 보이는 상견성암의 부엌을 보았는데 아무 것도 없고 한 쪽 발[받침의 뜻]이 삭은 석유곤로 하나에 석유 불에 그슬린 찌그러진 냄비하나가 있었다. 옆에 놓인 자루에는 잡수시다 놔두신 미숫가루 한 되 반쯤 남았는데 곰팡이가 나 있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공부를 하고 계시는 큰스님의 토굴생활의 소식을 들은 어떤 보살은 마음이 아파 발을 뻗고 울면서 “내가 결제 날 보리와 찹쌀을 섞어서 미숫가루 석 되를 갖다 드렸는데 그게 틀림이 없소”하더라는 것이다. “그것도 안자시고 반이 남다니.......”하면서 소리 죽여 울었다. 한다.

 

그 보살들은 약간의 음식과 옷을 드리니 큰스님께서 필담으로 주소를 적어 놓으라 하시기에 적어 놓고 왔더란다. 그랬더니 그 해가 저물 무렵에 우체부가 큰스님의 친필 휘호가 써진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을 주고 갔으니 이때가 일천구백팔십일 년 어느 날이다.

 

나는 언젠가 “왜 정토삼부경을 번역하셨습니까?”하고 여쭈니 “정토삼부경은 말법시대의 중생이 반드시 불 속을 뚫고라도 뛰어나가 반드시 들어야 할 생명의 경전인데 어떤 저명인사까지도 극락세계의 존재를 만화로 알고 있기에 너무 죄스러워 먼저 냈다”고 답하셨다. 말법시대 중생은 근기가 약해 부처님의 본원력의 가피를 받아서 성불하고 극락왕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법문도 고구 정녕히 함께 주시면서.

 

금강대(金剛臺)의 겨울비

금강대 산정은 삼월 바람에도 얼음을 녹이지 못하는 곳이다. 금강대는 큰스님이 좋은 수행 처라고 찬탄을 하셨던 곳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큰스님께서 주로 생식(生食)을 하셨던 곳이다. 크게 고초를 겪으시고 하마터면 위험을 당할 뻔 한곳이기도 하다. 백장암에서 천천히 걸으면 한 시간 거리인 거의 산정(山頂)이라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 토굴을 지어 큰스님으로서는 비새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굴피나무 껍질로 지붕을 단단히 이은 것인데 그해 겨울비가 세차게 온 탓으로 밤중에 빗물이 흥건히 새어 들어 왔다. 물을 받아 내는 작업도 당할 수 없어 나무토막을 방에다 넣고 그 위에서 물을 뿜어내며 밤을 새웠다. 큰스님은 이때의 일을 회상하시면서 “잘못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나중에는 온 몸이 차져서 견딜 수 없게 되어 마침 신문지 몇 장이 있어서 그것에 불을 붙였다. 양재기에 물을 데워 그걸 마셨더니, 몸에 온기가 돌아 겨우 날 밝기 까지 견뎌 낼 수 있었다”고 하셨다. 평소 난방을 묻는 나에게 “장작 세 개피 씩”을 땠다고 하시고 밥은 장작이 부족하면 생쌀을 담가 두었다가 씹어서 요기를 했다고도 하셨다.

 

수행자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어야 한다고도 하셨다. “이런 목숨 같은 것 수 백 개라도 바칠 각오가 없으면 성취하기 어렵다.”고도 하셨다. 이 말씀은 일반 신도법회에서도 몇 번이고 하셨다. 안이한 생각으로는 대업을 성취하기 어렵다는 말씀이 된다. 빗속 캄캄한 토굴에서 비를 피하면서도 당신의 그 한 생각은 별처럼 빛났으리라 믿는다.

 

순교적 소명감이 앞서지 않고는 엄두도 못 낼 수행을 하시는 스님들에 의해 이 땅에 부처님 해명은 꺼지지 않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불석신명(不惜身命)의 신앙심이 아니고는 어찌 금강대의 토굴 속을 밝힐 수가 있겠는가. 눈으로 보여주시는 장한 행장 때문에 큰스님의 행화의 역정은 한국의 ‘밀라레빠’라는 별칭이 합당한지도 모른다.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내가 큰스님을 처음 뵙던 날 사중 스님들은 무슨 거사가 저리 끈질기게 붙드냐고, 큰스님을 어서 모셔오라고 원주스님을 재촉했다. 미리 질문지를 적어갖고 가서 녹음을 하면서 묻던 시절이다. 너무나도 당돌하고 무지한 소견을 큰스님은 한 번도 싫은 표정 없이 가르쳐주셨다. 나는 하늘을 얻고 땅을 얻은 듯 했다. “살 법이 있구나. 행복의 길이 있구나.” 환희용약(歡喜勇躍) 그것이었다. 너무 깜깜했던 초심인 나는 큰스님에게 “저 산골에서 무슨 재미로 사셨습니까?” 이런 불경스러운 질문을 드렸다.

 

역시 웃으시던 스님은 한참을 두고 한심한 나를 조용히 건너다보시며 “거사님, 내가 세수하러 계곡으로 내려가면 새들이 내 머리에도 앉고 어깨에도 앉고 내 세수를 지켜보며 지저귑니다. 내가 옮겨가면 그쪽으로 따라와서 내 등에도 앉아 지저귀니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하늘에서는 자연의 음악이 그토록 맑게 울립니다. 천고자연명(天鼓自然鳴)이란 말씀 아시지요? 하늘음악은 지상의 음악과는 비교가 안 됩니다. 천고는 정말로 맑게 울립니다.”

 

나는 무릎을 다시 꿇고, “큰스님 건강하셔야 합니다. 제가 무명의 칠통(漆桶)을 깰 때까지 열반에 드시지 마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지금도 칠통속을 헤매는 무명 중생인 나는 그 당시 일만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진다.

 

 

제자 옷을 빨아주시는 큰스님

“여기에 자네 옷 벗어 놓으시게.” 이 말씀의 연유는 다음과 같다.

태안사는 하안거 해제일이 사~오일 남으면 큰스님을 모시고 신도들이 삼박사일로 용맹정진을 해왔다. 보제루 마루에서 하루 정진이 끝나면 커다란 모기장을 치고 잤다. 큰스님은 신도들과 한 시간도 거르시지 않고 정진에 힘을 불어 넣으시기 위해 중앙에 앉으셨다. 나는 정진 대중의 심부름과 진행을 맡다 보면 좁은 모기장 안은 누울 곳이 없었다.

 

어느 날 큰스님이 토굴에서 부르신다 하기에 올라가 뵈니 “자네 윗옷 벗어 놓고 이걸 입게”하시면서 곱게 다린 모시 적삼을 내놓으셨다. 엉겁결에 거부도 못하고 입고야 말았다. 나는 깜짝 놀라 옷의 안을 보니 신도가 시주하시면서 새긴 큰스님의 법호가 새겨진 큰스님 옷이었다.

 

당신의 옷을 주시고 대신 입히는 것이다. 아무렇게나 좁은 자리에서 꼬부라져 잔 관계로 엉망으로 구겨진 내 윗옷을 벗어 놓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 오전 정진을 준비하고 설법해 줄 강사 교수님을 찾아보아야 하는 바쁜 임무 때문이다.

 

하루 내내 구겨진 옷을 입고 활동하는 나를 보시다 못해 옷을 갈아입히신 것이다. 끝나는 날 아침에 또 부르셔서 토굴로 뵈었더니, 내 옷을 손수 빨아서 풀을 먹여서 다려 놓은 옷을 내미시며 “지금 입은 옷은 자네가 입소” 하셨다. 손수 다려 놓으신 옷을 주시고 내가 입은 큰스님 옷은 그냥 입고 가라는 말씀이셨다.

 

황송한 마음으로 대답을 못하고 선 나에게 양말 한 켤레를 내 놓으시며 웃으셨다. 웃음이래야 그냥 소리 없는 미소일 뿐, 절을 삼배 올리고 토굴을 나서는 나는 한 마디 감사의 말도 못했다. 눈물이 쏟아지려 하기 때문이다 제자의 옷을 손수 빨아 입히시는 큰스님의 가르침에 너무 감격해서다.

 

그 무렵 큰스님은 군불 하나까지 손수 때시는 두타행(頭陀行) 그대로, 스스로 만년 행자(行者)의 일상을 보내셨다. 큰스님을 모시던, 지금은 오십을 바라보는 그때의 사미승인 시자스님이 만일 자신의 옷과 함께 큰스님의 옷에 풀만 먹여도 “아무게 수좌, 내 옷 풀 누가 먹였는가?” 물으시고 “다시 물에 담그시게”하시는 스님이라고 내게 귀띔을 했다.

 

제자 옷은 빨아 다려주시고 스님 옷은 손수 빠시는 만년 행자의 생활을 하신, 그래서 나는 큰스님을 영원한 초야(草野)의 수행자로 생각하고 있다. 이 기록 또한 큰스님은 나무라실 것으로 믿으나, 여여한 그 자리를 한 발자국도 안 떠나시는 큰스님을 우리도 따라가자는 마음으로 남긴다.

 

 

“버스 엔진 소리가 미묘한 음악이더라”

장소는 안 밝히시니 어딘지는 모르겠으나 밤샘으로 지쳐있는 우리들을 쉬게 하시며 차담을 주시던 백장암 용맹정진 날 밤에 큰스님은 잠 못 자면 큰일 날줄로 아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시기 위해 이런 말씀을 들려주셨다.

 

“내가 젊어서 안자고 안 눕고 한 끼만 먹고 한철 백일 지났습니다. 여러분이 보셔도 제가 몸이 가냘프지요. 그러나 한계를 넘으면 전혀 몸에 부담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몸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팔십이신 지금도 하신다.] 우리에게는 무한의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수행자의 신심입니다.”

 

큰스님은 이어서 “해제를 하자 걸망을 메고 아래 큰절로 내려가서 노장스님들에게 인사를 올렸더니 노장스님들이 ‘아니 수좌! 자네는 뭔 목소리가 그리도 크신가’ 하신단 말입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참으로 공부를 하면 부처님의 자비로운 힘이 수행자를 돕는 것입니다. 본래 우리가 부처니까 말입니다. 그래서 걸망을 메고 구례에서 버스를 탔습니다. 이때 버스의 시끄런 엔진 소리가 소음이 아니라 미묘한 음악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감격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서 일어나는 분별심 때문에 마음의 번뇌 때문에 소음이 생기고 소음으로 들리지 소음이 본래 잊지 않습니다.”라는 큰스님의 말씀으로 우리는 휴식을 마쳤다.

 

그러나 이 법문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오래도록 이어지고 있다.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본래 생사가 없거니 소음이나 번뇌인들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는 하면서도 증명을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굴레를 어찌할 것인가?

 

 

“삼년간을 오직 부처님 생각으로 팍 절어버리시게”

일천구백구십이 년 말경에 큰스님은 미국 카멜[Camel]의 삼보사로 미주포교에 나가시게 되고 이어서 팜스프링[Palmspring]으로 삼년 결사 정신에 드셨다. 미국으로 떠나시기 며칠 전에 큰스님을 찾아뵙고 여쭸다. “큰스님 안 계실 동안 저희는 어떻게 공부할까요?” 큰스님 말씀은 간단했다. 그리고 단호하셨다. “삼년 동안 오직 부처님 생각으로 팍 절어 버리시게”였다.

 

삼년을 부처님 생각으로 팍 절어 버리라는 말씀은 무엇이겠는가? 참선하고 참선해서 또 염불하고 염불해서 마음과 생리가 바뀌어 부처님 생각으로 절어 들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었다.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 하라는 말씀이다.

 

이런 천금의 법문을 주셨건만 삼년 후 일시 귀국하신 큰스님을 뵙고 “큰스님 공부를 못해서 뵈올 면목이 없습니다.”고 무릎을 꿇었더니,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것이네”하셨다. 공부 못한 재가자 입장을 아시는 스님은 이 말씀 말고 별 말씀을 않으셔 우리는 황망하고 갈급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과연 부처님으로 찌들어서 환골탈태하였는가? 부끄러울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마는 혼자만이 간직해야 할 법문을 여러분이 함께 공유함으로써 각자의 공부에 큰 자극제와 자량(資糧)이 되게 하고자 하여 이 말씀을 드린다.

 

 

머리 깎겠다는 이교도를 말리는 큰스님

태안사의 여름 안거는 서늘했으나 정중당(淨衆堂)은 청량(淸凉)한 대숲 소리에도 불구하고 약간 더위를 느꼈다. 그 가운데는 종교가 다른 수행자 한 분이 같이 앉아 있었다. 그 수행자는 “부처님을 우상으로 보는 종단에 속한 분께서 어떻게 부처님께 절을 하십니까?”라는 물음에 “하느님은 안 계신 곳이 없으신데[無所不在] 저 부처님 속에는 안 계시겠습니까?”하고 대답하였다. 결국 그 수행자는 개종(改宗)을 결심하고 마침내 큰스님 토굴을 찾았다.

 

큰스님께서는 그 수행자의 말을 다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행에 있어서는 머리를 깎거나 개종하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당신이 머리를 깎으면 당신을 믿고 따르던 신도에게 큰 실망을 줄지도 모릅니다. 부처님이 무엇인가, 하느님이 무엇인가를 허심탄회하게 생각하면 결국 같은 것입니다. 천지우주 이대로가 하느님이고 부처님이라고 생각하시면 진리는 하나입니다.” 큰스님은 이어서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체존재가 부처님이고 하느님이다고 생각하시고 아미타불 명호나 하느님 명호를 부르십시오.”하시면서 삭발, 개종을 만류하셨다.

 

큰스님은 통불교(通佛敎)를 넘어서 통종교(通宗敎)의 이상경을 거닐고 계셨다.

 

 

미국 카멜 삼보사(三寶寺)에 온 이교도의 천도재

한국에서는 아직 겨울인 이월 하순이었다. 삼보사 경내(境內)에 하얀 모빌카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점심때가 되면 그 하얀 차 속에서 헙수룩한 복장에 주발을 하나 들고 어느 수행자인 듯한 중년의 미국인이 나오곤 했다. 점심 한 끼만 얻어먹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아주 짧은 영어로 그가 도교(道敎) 수행자임을 알았다.

 

그는 큰스님을 뵙기 위해 왔는데 만날 수 가 없다고 했다. 성급한 나는 그러면 불교로 개종하지 않겠느냐 했더니, 무례한 말을 말라며 큰스님 법문의 복사를 부탁했다.

 

일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그 도교도가 오면서 주방 식구들이 머리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추방하기로 하고 영어를 잘하는 입승스님이 가서 타이르니 신의 계시로 여기에 위대한 스님이 있다 해서 왔으니 한번만 뵙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큰스님 앞에 꿇어앉은 도교도는 머리를 만져달라며 감격하는 것이다. 큰스님은 부처님의 가피를 입으려고 왔는데 추방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고 그날 오전·오후 두 번에 걸쳐 영가 천도를 해주셨다. 백배 감사하며 이제 병이 나아서 머리가 상쾌하다면서 그 다음날 떠나갔다.

 

큰스님은 진리일원(眞理一元)의 신념이 투철하신 분이다. 표면에 걸친 무슨 종교를 떠나신 분이다. 천지우주가 하나이거니 어찌 진리가 둘일 수 있으며 종교가 다를 수 있겠느냐는 말씀이다.

 

 

종소리를 들려 달라는 삼보사 이웃들의 친화(親和)

미국 삼보사 옆으로는 카멜강이 얕게 흐르고 열대림이 아직도 무성하다. 그런데 개인 소유 땅이라고 팻말이 걸려 있어서 허락 없이는 못 들어감은 물론 통행도 못한다. 그런데 하루는 미국인 노파가 찾아와 어정거리던 나에게 여기가 한국 절이냐고 묻기에 그렇다고 했더니 큰스님[Great Master]을 찾기에 안으로 인도해 주었다. 교포인 아가씨와 함께 큰스님을 뵙고는 눈물을 철철 흘리는 것이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기뻐서 운다고 했다. 마음은 하나여서 다 통하기 때문인지 큰스님 앞에서는 외국인도 철없으리만치 운다. 그런 미국인을 여러 명 목격했다.

 

그렇게 알려지자 종소리를 실내에서 조용조용 치던 삼보사에 이웃 사람이 크게 쳐도 좋다고 승낙하고 또 어떤 이웃은 자신의 사유지를 자유롭게 통행하라고 했다. 우리 일행이 카멜강변을 산책하러 그의 집 앞을 지나가면 손을 흔들면서 짖어대는 개를 안으로 부르고 있었다. 맑은 어른의 덕은 이런 것이구나 느꼈다. 이유 없이 큰스님 앞에 서면 흘리는 눈물, 사유지의 개방도 모두 외국인의 감화 덕분이었다. 국경을 초월하는 진리의 원융한 그 자리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호리의 차이도 없는 것이 우주의 도리인 것을 이방인들의 모습에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불교인은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인은 불교인입니다.”

변산반도의 부안 실상사의 폐허 속에 천년의 부처님 향훈이 넘치고 있다. 누가 봐도 불교의 창연한 옛터임을 알 수 있는 부안 실상사 복원 불사 기공식 자리에서 큰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진실한 불교인은 진실한 기독교인이며 진실한 기독교인은 진실한 불교인입니다.” 너무나 간절하고 간요(簡要)한 법문을 하셨다. 왜 이런 말씀을 서슴없이 하셨을 것인가? 큰스님은 평소에도 남의 종교를 비판하려면 예컨대, 기독교를 알려면, 사대복음서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시고 스스로도 신약성서를 일 년에 한 번씩은 읽는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렇게 덧붙이는 말씀을 잊지 않으신다.

“편견 없이 허심탄회하게 읽는다면 어느 종교나 그 핵심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의 종교의 성전을 읽지도 않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또 서로가 모두 하나로 긴밀화하는 시대에 살면서 남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신다. 그 많은 세계 인구가 믿는 종교들이 어찌 진리가 아니면 믿겠는가? 하시는 스님의 말씀으로 미루어 큰스님의 종교관은 통종교론적임을 짐작할 수 있다. 타 종교를 이교도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대상으로 보시는 것이다. 실상사 골짜기에 퍼진 법문의 참 된 의미는 종교의 갈등을 허물고 진리일원(眞理一元)의, 세계일화(世界一花)의 꽃을 심는 말씀이었다. 남의 종교를 배척하다 보면 중동이나 미국과의 관계처럼 벌어질 수밖에 없는 점을 생각할 때 이날 큰스님 법문은 넓은 허공 같은 우리의 본성을 찾으라는 법문 중에서도 단연 압권의 사자후였기에 여적에 남긴다.

그래서 부처님은 개시불법(皆是佛法)이고 비법(非法)도 불법(佛法)이라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부처 아닌 것이 없으니 불법 아닌 것이 무엇이겠는가.

“부처님이 그리워서 병이 날 정도여야 하네”

나는 마음이 너무 강강(剛剛)하고 결정신심(決定信心)이 부족하여 큰스님께 답답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마음속에 목마르게 갈앙하여 연애하듯 사모하라’고 법화경에 말씀하셨는데, 이 연모심[慈悲心]과 흠모심(欽慕心)이 약합니다. 얼마만큼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까?”하고 여쭈었다. 큰스님은 한 마디로 “부처님이 그리워서 병이 날 정도로 그리워해야 하네” 이렇게 대답하셨다. 덧붙여 “부처님한테 미쳤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가 되셔야 하네.”

 

얼마나 절실하고 간절한 말씀인가.

감상적인 사치스러운 감성으로 부처님을 닮을 수가 없다는 말씀이었다. 부처님은 우주의 생명인 동시에 바로 생명이고 만유의 근원이다 그런 소중한 부처님을 내 생명과 육체를 내던지는 신심이 아니고는 어찌 그리운 한 마음 자리에 이를 것인가 싶었다. 큰스님은 가끔 법문 말씀에도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삼매발득(三昧發得)을 하는 것이라 하였다. 새끼 낳고 굶어서 죽게 된 호랑이에게 호리의 아낌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는 자비심과 신심이 절륜한 살타왕자가 아니고서는 몇 십겁을 앞당겨 성불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말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다만 부끄러운 근기일 뿐이다.

 

그렇다고 모두 자기 몸을 바쳐야 또는 바쳤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투철한 구도자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큰스님은 부처님을 인격적으로 추구할 갈앙심으로 참선·염불하지 않으면 초월을 할 수 없어서 성불이 어렵다 하신다. 다만 어떤 이치나 막연한 진리로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강조이시다.

 

 

“우리로 하여금 무상(無常)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좋은 음악이다.”

요사이 젊은 세대의 음악을 전통적인 관념에서도 과연 음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광란에 가까운 그 춤사위 아닌 춤사위와 몸짓을 보면서 큰스님께 “어떤 것이 좋은 음악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젊은이의 정서가 저토록 된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싶어서였다. 큰스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상을 느끼게 하는 것이 좋은 음악“이라고 말씀하셨다.

 

즐거우면 좋을 수도 있다. 힘을 북돋워 주는 음악도 좋을 것이다. 모든 인간의 동작이 알고 보면 성불로 가는 길목이라고 본다면 집착과 혼란의 어리석음을 여의게 하는 가장 좋은 소리는 우리에게 무상을 느끼게 하는 음악일 것이다. 무상한 마음은 욕심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일어나지 않는 고요한 자리를 만든다. 음악과 종교는 지극한 관계가 있는 줄 안다. 좋은 음악은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상을 느껴야 영원한 진리를, 부처님을, 하느님을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큰스님은 무상한 마음은 도심(道心)을 일으키고 맑은 인격을 갖게 하기에 무상을 느끼는 음악을 좋은 음악이라 하신 듯하다.

무상한 마음은 어느 것에도 집착이 없는 마음이기도 하다. 내가 이것을 기록하는 이유는, 법문 말씀 중에서 지금의 음악을 걱정하시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을 본래면목, 불성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음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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