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공법사는 「영명연수선사의 사료간에서, 有禪無淨土의 ‘有’자(字)에 주의해야 한다. ‘有禪’ 은 대철대오를 말하며, ‘有淨土’는 일념 속에서 깊은 마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부처님 명호를 단단히 잡고 있는 것을 말한다. 원택(圓澤)선사는 선(禪)을 닦아 대철대오하여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전히 윤회에 들어갔다.」 라고 하였다.
* 원택선사 : 중국 당나라 때의 선승. 윤회를 피하려고 갖은 애를 썼으나 결국 윤회 속에 빠졌음.
* 중국 근대의 고승인 허운선사(虛雲, 1840~1959)는 중국의 불교도들이 음력 11월 17일을 아미타불의 탄신일로 삼고 있는데, 그 이유가 그 날이 바로 아미타불의 후신(後身)인 영명영수선사께서 탄생하신 날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 중국 근대의 고승인 허운선사는 「근세에 정토를 닦는 사람들은 사료간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고, 마음을 비우고 능엄경의 원통게(圓通偈)를 연구하는 사람이 극히 적을 뿐더러, 사료간에 대해서도 그 뜻을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문수보살을 저버리는 것 일뿐 아니라, 영명 선사마저 잘못된 견해에 끌어넣는 결과가 됩니다. 결국 방편과 실상의 법문에 대해 두루 통하여 이해하지 못하고, 선과 정토의 법을 물과 불, 얼음과 숯의 관계처럼 보게 됩니다.… 영명연수선사는 평생토로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선종(禪宗)을 안 좋게 말한 적은 없었습니다.… 사료간이 한 번 나오자, 선종과 정토종 간에 갑자기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정토종 사람들은 말하기를, “선만 닦고 정토를 닦지 않으면 열 사람 중에 아홉이 길을 잘못 든다.” 고 합니다.
선종만 닦으면 생사를 끝내지 못하지만, 정토만 닦아도 “만인이 닦아서 만인이 간다.”, 그리고 참선도 하고 염불도 하면 “호랑이 머리에 뿔이 난 것 같다.”, “선도 닦지 않고 정토도 닦지 않는 사람은 세간의 악인이다.” 합니다. 정토종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선종을 비평하는데, 아직도 뭐가 뭔지 잘 모르면서 참선의 폐단을 계속 이야기합니다. 말세의 수행인들이 하는 참선은 확실히 길을 잘못 드는 경우가 있어서, 영명 선사의 사료간에서 지적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선(禪)은 최상의 일승법(一乘法)인데, 비유하자면 순수한 우유와 같습니다.
그런데 우유를 파는 사람이 매일 물을 조금씩 타게 되면 나중에는 우유의 성분은 전혀 없어지듯이, 부처님 법을 배우는 사람도 순수한 우유에 물이 스며들게 하고 말았습니다. 영명 선사께서 이것을 보시고 물이 스며든 선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선만 닦고 정토를 닦지 않으면 열 사람 중에 아홉이 길을 잘못 든다.” 고 한 것이지, 순수한 우유 같은 선을 두고 ‘길을 잘못 든다.’ 고 한 것이 아닙니다.
영명선사가 지자암(智者岩)에 올라가서 선과 정토의 둘을 놓고 제비를 뽑을 때, 그윽한 마음으로 정성껏 기도하고 정토의 제비를 일곱 번이나 뽑았습니다. 만약 선이 좋지 않는 것이었다면 그는 결코 제비뽑기를 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정토가 그가 내심 좋아하는 것이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일곱 번까지 제비를 뽑지도 않고 결정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영명 선사는 선종 출신으로, 법안종(法眼宗)의 제3대 조사인데, 어떻게 자기의 종(宗)을 억누르면서 선(禪)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평생 어느 한 사람에게도 염불을 하지 말라고 권한 적이 없지만, 다만 다른 사람이 남에게 참선을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은 불만이었습니다. 항상 능엄경에서 “(말법이 되면) 삿된 스승의 설법이 항하사같이 많을 것이다.” 고 지적한 것을 생각하면서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사료간의 취지를 약간 보태어 설명하자면, 모든 수행인은 다시 사료간의 말에 치우치고 막혀서 참선과 염불의 두 법에 대해 망령되게 높고 낮음으로 나누어서 영명 선사의 뜻을 저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 달마(達磨)대사는 〈혈맥론(血脈論)〉에서 자성(自性)을 볼 것을 말하면서 「부처란 자기 마음으로 지은 것이거늘, 어찌 이 마음을 여의고 밖으로 찾으리오. 앞 부처님과 뒷 부처님이 다만 마음 하나만을 말씀하셨으니, 마음이 곧 부처요 부처가 곧 이 마음이라, 마음 밖에 부처가 없고 부처밖에는 마음이 없느니라.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다고 말하면, 부처는 어디에 있는가. 마음 밖에 부처가 없거늘, 어찌 부처라는 소견을 일으키리오. 서로서로 속여서 미혹하여 근본 마음을 밝게 알지 못하고 무정물(無情物 : 불상을 말함)에 얽매여서 자유롭지 못하도다. 만일 믿지 못한다면 스스로 속이는지라 이익이 없느니라.
부처는 허물이 없건만 중생이 뒤집혀[顚倒]서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 줄 깨달아 알지도 못하느니라.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인줄 안다면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지어다. 부처가 부처를 제도하지 못하나니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찾으면 부처를 알지 못하리라. 다만 곧 밖의 부처인 것이니, 모두가 자기의 마음이 곧 부처임을 모르는 것이니라. 역시 부처를 가지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念)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가지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또한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느니라.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곧 자성을 보면 곧 이 부처인 것이요, 자성을 보지 못하고 염불을 하고 경을 가지고 읽고 계를 지니고 계를 지켜도 역시 아무런 이익이 없느니라. 염불은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의 과보를 받으나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 만일 자기를 분명히 할지 못했거든 반드시 선지식에게 참문해서 생사의 근본을 깨칠지니라.
만일 자성을 보지 못했다면 밝은 선지식이라 할 수 없나니 만약 이와 같지 못하고 비록 십이부경을 외운다 하여도 역시 생사를 벗어나지 못하여 삼계를 윤회하며 고통을 받아 벗어날 기한이 없느니라. 옛적에 선성(善性)이란 비구가 십이부경을 다 외웠으나 여전히 윤회를 면치 못한 것은 오직 자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니라.… 만일 자성(自性)을 보면 곧 부처요, 자성을 보지 못하면 곧 중생이니라.」 라고 하였다.
* 연지대사는 〈죽창수필〉에서 「더딘 것으로 말하자면, 염불하는 사람은 누겁(累劫)에 걸쳐 윤회하다가 처음으로 연화에 태어난 것이요, 참선인은 다생(多生)에 부지런히 애를 썼으나 능히 견성(見性)하지 못한 경우다. 빠른 것으로 말하면, 참선인은 그 자리에서 단박에 깨달음을 증득하여 아승기겁을 지나지 않고 법신(法身)을 얻는 경우요, 염불하는 사람은 현생(現生)에 철두철미하여 임종에 상상품(上上品)으로 태어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 하면서, 「사람의 근기는 날카롭거나 둔한 것이 있고, 체력에도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당사자에 관한 문제로서, 피차에 서로 더디고 바른 것이 있을 수 있다.」 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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