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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2. 진리의 길

진리의 길.12(2)

 

 

 

* 신의 문제에 있어서 일신론이 있고 범신론이 있습니다. 일신론은 우주를 창조하고 우주를 섭리하는 것이 오직 하나의 신이라는 것이고, 범신론은 우주 자체가, 모든 자연 자체가 신이 아님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깊이 따지고 보면, 일신교나 범신교가 결국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한가지만 법집法執해서 그런 구별을 세우지, 집착을 떠나면 같은 것입니다.

 

* 신앙의 깊이가 부족하면, 우주는 오직 하나의 신이 창조하고 섭리한다, 또는 하느님과 인간은 다른 것이다고 생각하지만, 더 깊이 사유하면 결국 같은 뿌리입니다. 즉 범신론이 안될 수가 없습니다.

 

* 천지 우주가 바로 신뿐입니다. 바로 신이란 말은, 천지 우주가 바로 마음뿐이란 말과 똑같습니다. 신학자 가운데서도 중세기의 에크하르트같은 위대한 신학자는, 대체로 기독교를 믿지만 사상은 범신론입니다. 힌두교나 불교와 가깝습니다.

 

*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만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모두가 다 마음이 진여불성을, 이른바 대총상법문을 갖추었기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어느 누구나 다 공변된 진리가 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다만 자기를 탐구하는 척도가 짧아서 어느 부분밖에 몰라서 그렇지, 근본적인 염원은 다 진리로 가고자, 진리가 되고자 합니다.

 

* 우리 중생들은 좋든 싫든 간에, 앞으로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의 진리로 귀의할 것입니다. 현대 물리학이 부처님 사상을 하나 둘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교인들도 자기들 종교심이 보다 깊어지고, 또는 종교 일반의 성향이 깊어질수록 부처님 사상에 가까워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서 정말로 행복한 자부심을 느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선 두 가지 문제입니다. 다른 문제는 결국 이 두 가지 문제에 다 포괄이 됩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 명심을 하셔야 할 줄로 생각합니다.

 

* 한 가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모든 존재가 오직 하나의 진리라는 일원론적 진리관을 깊이 느껴야 합니다. 우주가 한 생명이기에 진리도 하나요, 내 마음도 하나를 향해 가야 합니다. 모든 현대의 과학ㆍ철학ㆍ종교도 하나의 진리로 귀일되어 가고 있습니다. 일체 존재는 근원적으로 본래 하나기 때문에, 우리 마음도 하나 쪽으로 가고 싶은 간절한 추구심이 있습니다.

 

* 인간 존재는 종당에는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왜 부처가 되고 마느냐 하면, 본래가, 당체가 부처기 때문입니다.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우리 본성이 바로 부처기 때문에, 부처가 되어야 하는 필연성이 있습니다. 다만 빠르고 늦는 차이뿐, 일체중생개당작불一切衆生皆當作佛이라, 응당 당연히 부처가 됩니다.

 

* 우리가 잘못 살아서 윤회가 계속될 때는 부처되는 데 몇천만 생이 걸릴지 모릅니다. 윤회 사상은 우리가 느낀 대로, 우리가 생각한 대로, 우리가 행동한 대로 다 받는다는 것입니다. 어느 것도 안 받는 것이 없습니다. 어떤 것이나 금생에 받지 않으면 내생에, 내생에 받지 않으면 그 다음 전생轉生에, 어느 때나 받습니다.

 

* 자기가 지은 업은 절대 소멸이 안됩니다. 가사 백천만겁을 지나도 소작업所作業은, 지은 업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다시 인연을 만나면 환자수還自受, 보답을 자기가 지은 대로 되받습니다. 남을 미워하면 미워한 대로 꼭 보답을 자기가 받습니다. 남한테 해코지하면 한 대로 꼭 보답을 받습니다. 본래로 남과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생이 자기 생명의 근원을 보지 못하니까, 내가 있고 남이 있다고 보는 것이지, 근원을 본다면 나와 남이 본래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 똑같은 물 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물결이라든가 거품같은 그런 존재가 우리들 각각의 개인적 존재입니다. 그러나 거품이나 물결의 바탕은 내내야 하나의 바닷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중생은 물 자체를 못보고 거품이나 물결만 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하면, 성품性品은 보지 못하고 상相만 봅니다.

 

* 현상적인 상만 봐서는, 우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우리 주체는 분명히 성품인데, 주체적인 생명의 근본을 못 보고서 겉의 상만 본다면, 맘이 편할 수가 있겠습니까?rmfotj 자기 소외라는 것도 자기 생명의 바탕을 못 보는 데에 있습니다.

 

* 부처님 팔만사천 법문이 모두 섭상귀체攝相歸體라, 상에서 성품으로 갑니다. 곧 체로 갑니다. 염불하는 것이나 화두를 드는 것이나 모두가 다 상을 떠나서 근본 성품으로 가는 공부입니다. 우리 중생이 금생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요새 명상도 별별 명상이 다 있습니다. 명상센터 등에 가서 보면 무분별로 성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한테 귀환하는 명상같이 차원이 높고 궁극적인 명상은 없습니다. 자기 존재의 근본이 부처님인데, 부처님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은 명상이 어디 있겠습니까?

 

* 어떻게 해야 부처를 빨리 증명할 것인가? 내 마음이 바로 핵심자리고 중심이니까, 내 마음을 바로 그대로 느끼고 구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어려운 말로 삼신사지三身四智가 다 들어 있습니다. 육조단경에 보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 자성 가운데 청정법신淸淨法身이 있고, 원만보신이 있고, 천백억화신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런 말씀을 세 번씩이나 되풀이 했어요. 신앙이라는 것은 우리 자성, 우리 인간성, 우리 마음 가운데에 다 들어 있습니다. 행복도 진리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걸 보다 더 간추려서 말씀을 드리면, 상락아정常樂我淨입니다.

 

* 상락아정이 무엇인가? 영원히 죽지 않고 존재하는 우리 생명은 영생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우리 생명은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 금생에 인연이 다해서 저쪽으로 옮기는 것이지, 생명은 절대로 죽고 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사는 것이고, 일체 행복 역시 본래적으로 나한테 갖춰져 있습니다. 누구한테 행복을 빌려올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 가운데 있습니다.

 

* 내 마음이 얼마만큼 위대한 것인가? 자기를 아무리 칭찬한다 하더라도, 본래 지닌 자기 마음을 다 칭찬할 수가 없어요. 우리 마음이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님 공덕은 부처님같이 그렇게 대대로 성취한 부처님의 지혜로 본다면, 수백억년을 헤아려도 다 헤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부처님 바로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석가모니는 훨씬 위대하고 우리는 저 밑에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래 부처란 그 말은 조금도 과장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사실대로 말씀한 것입니다.

 

* 부처님한테 있는 부처와 우리한테 있는 부처가 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확실히 말씀드리면, 천지 우주가 사실은 부처님뿐입니다. 어리석게도 중생이 자꾸만 쓸데없는 분별 때문에 그렇게 보지를 못할 뿐입니다. 부처님 당시는 아라한도阿羅漢道를 깨달으면 삼명육통三明六通을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저같은 사람도 나이는 무던히 먹었지마는, 신통을 못합니다. 왜 못하는 것인가? 공부를 게을리해서 못합니다. 정말로 부처님께서 말씀해주신 대로 오로지 했다면, 꼭 신통을 해야 됩니다.

 

* 우주란 것은 신비에 가득 찬 것입니다. 우리 불자님들한테 가장 중요한 것은 우주 자체, 진여불성뿐입니다. 진여불성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어느 것이나 바로 보면 불성인 것인데, 우리 중생은 겉만 봅니다. 상만 보고 성품은 못 봅니다. 그 허물은 우리 스스로에게 있습니다.

 

* 여러분들이 설사 하나의 화두를 놓고 본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의 본체성에다 마음을 두고서 화두를 참구해야 합니다. 그래야지, 덮어놓고 의심한다고 해서 공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가 부처 아님이 없다. 만덕을 갖춘 부처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 자리를 참구하기 위해서 화두를 들어야 합니다.

 

* 염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하늘에 또는 어디에 계시는 부처님을 갈앙渴仰하여 가호加護를 입어야 하겠다는 것은, 사실 참다운 불법이 못됩니다. 참다운 불교라는 것은 아까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 생명과 나와의 간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인 것입니다. 천지가 부처뿐인데 무슨 틈이 있겠습니까?

 

* 석가모니 부처님이 가신 지 이천 오백년 이상이 되지만, 부처님은 생생히 우주에 바로 살아 계십니다. 바로 우주생명입니다. 예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것도 절대로 구분이 없습니다. 하나의 진리, 하나의 생명입니다. 꼭 하나의 도리를 명심해야 됩니다.

 

* 상카라라 하는, 인도 힌두교에서 팔세기 때에 살다 가신 분이 있습니다. 우리 불교는 그 때에 밀교화되어서, 지엽적인 이파리나 생각하다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힌두교에서 상카라 선인仙人이 나와서, 불교의 진리를 힌두교의 교리로 삼아 불교를 내쳤습니다. 때문에 결국은 인도에서 불교가 자취를 감추기도 했습니다.

 

* 역사적으로 보면, 신앙을 바로 가지면 쇠미가 안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고려말 우리 한국 불교가 얼마나 부패했습니까? 그 부패한 죄로 이조 오백년 동안 결국 핍박을 받았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모든 공덕, 즉 자비나 지혜 모두를 다 갖추고 있으며, 또 우리 생명 자체 역시 바로 그러한 공덕을 갖추고 있습니다.

 

* 여러분께서는 내 존재가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위대하구나, 이렇게 생각한다면 정말로 용기가 나고 보람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를 비하하면서, 스스로를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 영명연수永明延壽선사는 십세기 때 분입니다. 아주 위대한 분입니다. 이 분께서 하신 말씀 중에, 참수분사斬首焚死라, 인연이 잘못되어서 내 목을 당장 베어간다 하더라도, 내가 손해 볼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 목을 당장 베어 간다 하더라도 손해 볼 것이 없다, 그리고 반대로 그야말로 불로장생하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훌륭한 불로장생의 약을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나에게 이익 될 것이 없다고 말씀했습니다. 이해가 되십니까? 부처님 가르침에 의하면, 정말로 그러는 것입니다.

 

* 어떻게 죽든 지간에 자기 스스로는 잘 몰라서 나는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하더라도, 우리 과거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받는 것이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우연은 조금도 없습니다. 다 지어서 받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가정생활에나 사회생활에서 다 남한테 책임을 전가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부터 백까지 모두가 다 자기가 지어서 받습니다. 그와 똑같이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 우리의 행동, 우리의 사고, 우리가 하는 말 한 마디, 그것이 다 업이 되어서 내생에 또 받습니다. 지금 하는 모든 행동이 우리 미래를 규정 합니다. 따라서 설사 내 목을 pqdjrks다 하더라도, 나를 불에 태워서 죽인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른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 전생에 우리가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 우리는 죽은 뒤에 어디로 갈 것인가 몰라서 그러는 것인데, 사실은 죽자마자 일초의 시차도 없이 또 바로 몸을 받습니다. 우리가 바른 일만 하고 죽을 때는, 금생에 누구한테 핍박당해서 비참한 비명 횡사를 한다고 하더라도, 죽은 다음에는 훨씬 좋은 데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자기 목을 베이고 또는 자기를 불태워 죽인다 하더라도, 손해날 것도 없는 것이고, 응당 받을 것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야 업장이 소멸될 것 아니겠습니까?

 

* 아무리 좋은 행복이 현상적으로 온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역시 우리가 과거 전생에 지어서 그만큼 받을 것을 받는 것입니다. 또 자기 몸뚱이가 지나치게 호사를 하면 또 그것이 업이 되어서, 내생 가서는 우리 생이 전락轉落할 수 있습니다.

* 염불을 하든지 주문을 외든지 화두를 참구하든지 간에, 꼭 그 본래의 자리, 우리 생명의 근본 자리를 안 떠나야 우리 생명이 손해를 안 봅니다.

 

* 금생에 사는 보람은, 금생에 우리 생명의 본 고향인 부처님에게로 얼마 만큼 갔는가, 거기에 우리가 금생에 태어난 보람이 있습니다.

 

* 현상적인 상에만 젖어서 산다면, 업만 짓는 것이지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근원적인 우리 마음의 본체, 이른바 진여불성인 대총상법문에다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 어느 누구에게나 윤회는 하나의 생명 행동지침입니다. 따라서 윤회를 분명히 믿고, 우리 행동 하나 하나에 책임을 느끼셔야 합니다. 누구든지 윤회에 대해서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윤회에 대해서는 부처님께서 여실하게 증명을 하셨고, 현대 정밀 과학인 물리학도 다 증명하고 있습니다. 최면술이라든가 심령 과학도 우리에게 윤회를 증명해 보다 잘 납득시켜 주고 있습니다.

 

* 생명의 본바탕은 분할이 안되는, 둘이 아닌 하나의 생명입니다. 유마거사 말대로 하면, 불이법문不二法門입니다. 둘이 아니라는 법문은 일반철학으로는 동일률同一律이라, 다 하나의 도리로 귀일된다는 것입니다.

 

* 위대한 철학자는, 예컨대 칸트나 니체는, 모두 하나의 진리쪽으로 자기들의 철학체계를 세웠습니다. 저 사람과 나 역시 절대로 둘이 아닙니다. 겉으로 봐서는 둘이나, 성품으로 보면 하나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동일률을 안다면, 자기를 위해서 어떻게 남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 가정생활에서 직장 생활에서나, 어디에 있든지 꼭 모든 생명은 하나의 뿌리라는 것을 잊지 않으셔야 합니다. 만물이 다 하나의 뿌리이므로, 만물은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입니다. 하나의 생명, 하나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지극하고도 위대한 일입니다. 이런 위대한 일을 절대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2001년 6월, 서울 동산반야회 초청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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