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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81일 염불사, 포천산 5비구, 무장사 미타전

 

 

염불사(念佛師)

남산 동쪽 기슭 피리촌(避里村)에 절이 있었는데 마을 이름을 따서 피리사(避里寺)라고 하였다. 그 절에 이상한 스님 한 분이 있었는데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았고, 항상 아미타불 염불만 외웠는데 그 소리가 성안까지 미쳐서 1,360방(坊) 17만호(戶)에서 그 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 염불 소리는 언제나 높고 낮음이 없이 옥 같은 소리가 언제나 한결 같았다. 이로써 그를 괴이하게 여기면서도 모두 존경하여 염불스님[念佛師]이라고 불렀다.

죽은 후에는 진의(眞儀)를 흙으로 빚어 민장사(敏藏寺)안에 모셔두고, 그가 본래 살던 피리사를 염불사(念佛寺)라고 고쳤다. 절 옆에는 또 다른 절이 있었는데, 이름을 양피사(讓避寺)라 하였으니, 이는 마을 이름을 따라 지은 것이다.

 

위의 염불스님은 《삼국유사》에 기록이 있어서 후세에 알려진 경우이지만 그 밖의 분으로서 자신의 이름과 행적을 숨겨 드러내지 않으면서 혼자 또는 민중 속에 들어가서 염불수행을 한 덕이 높은 이들이 역시 있었을 것이다. 이런 분들은 일부러 자신의 행적을 감춘 이들이었으므로 후세에 기록이 남아 있을 리가 없다.

 

입으로 전해 온 얘기[口傳]에 의하면, 이조(李朝) 때 한 스님은 평소에 절에서 살지 않고 거지들이 모여 사는 굴이나 몹쓸 병이 든 환자들이 사는 다리 밑에서 그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염불을 하도록 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밥 때가 되어 마을에 걸식을 하러 나올 적에는 누덕누덕 기운 해진 누더기를 입고 등 뒤에는 땅에 끌리도록 크게 ‘나무아미타불’ 여섯 자를 써서 붙이고 밥을 얻으러 다니면 사람들이 그 글자를 보고 ‘나무아미타불’을 한 번이라도 보고 부르게 하여 선근을 심도록 하였다는 것이다.

 

또 뒤를 따라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이면 한 곳에 모아 놓고 노래하고 춤을 추며 한바탕 염불을 하였으며, 그리고는 다시 환자나 거지들이 사는 장소로 돌아가곤 하였다고 한다. 이름을 드러내지 않는 이들이라 후세에 기록은 없지만 이런 덕이 높고 고행했던 염불 스님들이 더러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스님뿐 아니라 승속을 막론하고 이런 보살행을 한 염불 수행자도 있었을 것이나 다만 기록이 없을 뿐이다.

 

 

포천산(包川山) 5비구

 

삽량주(歃良州: 지금의 경남 양산) 동북쪽 20리쯤 되는 곳에 포천산이 있는데, 석굴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마치 사람이 일부러 깎아 놓은 듯하였다. 이곳에 이름을 알 수 없는 비구 다섯 분이 머물면서 아미타불을 염송하여 극락왕생을 발원한 지 거의 10년이 되었는데 갑자기 보살들이 서쪽으로부터 와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러자 다섯 비구가 각기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공중으로 올라가더니, 통도사(通度寺) 문 밖에 이르러 머물렀다. 그때 하늘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그래서 절의 스님들이 나가 보니, 다섯 비구가 ‘인생은 덧없고[無常], 괴롭고[苦], 허무하다[空]’는 이치를 설하고 각자의 유해(遺骸)를 벗어버리고 큰 빛을 발하면서 서쪽을 향해 갔다.

 

그들이 유해를 버린 곳에 절의 스님들이 정자를 세우고 치루(置樓)라 이름 지었는데 지금도 남아있다.

 

-《삼국유사》

 

 

 

무장사(䥐藏寺) 미타전

 

서울에서 동북쪽으로 20리쯤 떨어진 암곡촌(暗谷村) 북쪽에 무장사가 있으니, 신라 제38대 원성대왕의 아버지 명덕대왕으로 추봉된 대아간(大阿干) 효양(孝讓)이 숙부 파진찬(波珍湌)을 기려 세운 것이다. 그곳의 그윽한 골짜기는 마치 산을 깎아 놓은 듯 몹시 가파르고 어둡고 깊어 저절로 텅 비고 순박한 마음이 생겨 마음을 쉬고 도를 즐길 만한 신령스러운 곳이다.

 

절의 왼쪽에 아미타불의 옛 전각이 있다. 소성대왕의 왕비 계화왕후(桂花王后)는 대왕이 먼저 죽자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 하고 매우 슬퍼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상심해 하였다. 이에 왕의 밝고 아름다운 일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로 마음먹었다.

 

이때 서방에 아미타불이라는 큰 성인이 있어 지극한 정성으로 믿으면 잘 구원하여 극락세계로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왕후는 여섯 가지 화려한 옷[六依]을 내놓고 창고에 쌓아 둔 재물을 다 털어서 이름난 장인들을 불러 모아 아미타 불상 한 분을 조성하게 한 다음 다시 여러 신(神)들을 만들어 모셨다.

 

이보다 앞서 이 절에는 노승 한 분이 있었는데, 어느 날 꿈에 홀연히 한 진인(眞人)이 석탑 동남쪽 언덕 위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여 대중을 위해 설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노승은 ‘이곳은 반드시 불법이 머무르게 될 곳이구나.’라는 생각을 마음속에 감추어 두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곳은 바위가 우뚝 솟아 있고 냇물이 거세게 흐르고 있어 장인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좋지 못한 터라고 하였다. 그런데 터를 닦아 고른 땅을 얻자 불당을 세울 만하였고 확실히 신령스런 터와 같았으므로 보는 이들마다 모두 놀라면서 좋은 터라고 칭찬하였다. 지금 미타전은 허물어지고 절만 남아있다.

 

세간에서는 태종 무열왕이 삼국을 통일한 후 병기와 투구를 골짜기 가운데 갈무리하였으므로 무장사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지금 경주시 암곡동에 있으며 삼층석탑만 남아 있다.)

 

-《삼국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