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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79일 계집종 욱면

 

 

《삼국유사》에 의하면 계집종 욱면[郁面女婢]에 대하여 <향전(鄕傳)>과 <승전(僧傳)>의 기록이 있는데 그 내용이 서로 대동소이하다고 한다. 여기서는 <승전>의 기록을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신라 애장왕 때(815)의 일이다. 옛날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를 위해 향도(香徒)들을 모았는데, 일천여 명이나 되었으므로 두 패로 나누었다. 한 패는 후원을 위하여 노력을 다하도록 하였고, 또 한 패는 정성을 다하여 염불에 힘쓰도록 하였다. 그래서 후원을 위하여 노력하는 무리는 ‘노력(努力)’이라 이름 붙이고, 염불하는 무리는 ‘정수(精修)’라고 이름 붙였다.

 

노력의 무리 중에서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어느 때 경전을 싣고 간 일이 있었으므로 불경의 힘에 의하여 죄가 소멸되어 아간이라는 벼슬을 하던 귀진의 집에 여종으로 태어났는데, 그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욱면이 어느 날 일이 있어 하가산에 갔을 때 꿈에 감응한 바 있어 드디어 보리심을 일으켰다.

 

귀진의 집은 혜숙 법사가 창건한 미타사로부터 멀지않았으므로 귀진이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하였고, 계집종인 욱면도 따라가서 염불을 하였다. 주인은 욱면이 일을 등한시 하는 것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을 하루 저녁에 찧게 했는데, 그녀는 초저녁에 다 찧어 놓고 절에 와서 염불하며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뜰의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손바닥을 꿰어 노끈으로 말뚝에 묶고는 합장하여 좌우로 흔들며 스스로 경책하였다. 이렇게 하기를 9년 동안 계속하였다. 을미년(815) 정월 21일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

염불하던 대중들은 그 소리를 듣고 욱면에게 권하여 법당에 들어가서 정진하게 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하늘의 음악 소리가 서쪽에서 들려오더니, 욱면이 법당의 대들보를 뚫고 허공으로 올라가 날아서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고,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보리사를 지었다. 그리고 그 전당에 방을 써 붙였는데, 욱면등천지전(郁面登天之殿)이라 하였다.

 

천정에 뚫린 구멍이 한 아름이나 되었으나 아무리 큰 풍우나 세찬 눈이 내려도 법당 안은 젖지 않았다. 그 뒤 일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금탑 하나를 만들어 그 구멍에 맞춰서 난간위에 모시고 그 특이한 사건을 기록하였으니, 지금도 방과 탑이 남아있다.

 

욱면이 승천한 뒤에 아간 귀진도 또한 그 집에 신이한 사람이 의탁했다고 하여 그 집을 희사하여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밭과 종을 바쳤다. 오랜 뒤에 절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았는데, 회경(懷鏡)대사가 승선, 유석, 이원장 등과 함께 발원하여 절을 중건하였다.

 

그 후 절이 번창하여 동남 지방에서는 이름 있는 절이 되었다.

후세 사람들은 이 회경대사를 아간 귀진의 후신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