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필독!경전,법문자료/3. 수행자료

왜 나무아미타불인가(불광출판사)

 

왜 나무아미타불인가?

우익 대사(藕益大師)의 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

 

 

 

왜나무아미타불인가.hwp

 

편집자 머리말

 

정토불교(淨土佛敎)는 현재 아시아에서 수행하고 있는 불교의 모든 형태 중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고 있는 종파라고 할 수 있다. 이 정토종의 중심에『아미타경(阿彌陀經)』이 있다. 아미타경은 대승불교의 세계에서 매일 저녁 수많은 사찰과 가정에서 독송하는 매우 아름답고 시적인 경전이다. 『화엄경』, 『범망경』과 아울러 부처님께서 대중의 질문을 받지 않고 특별히 자발적으로 설하신 몇 가지 안 되는 기본 경전에 속하는 아주 중요한 경전이기도 하다.

서양에서 아미타경을 번역한 책이 몇 종류 있다〔가장 잘 알려진 것이 19세기의 유명한 학자인 막스 뮐러(Max Müller)의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경에 대한 신뢰할 만한(所依) 주해서는 영어로 출판되지 않은 것 같다. 다행이 J.C.클리어리(Cleary) 박사가 번역한 아미타경 요해를 만났다. 이 책은 정토종의 9대 조사로 인정받는 우익(藕益)대사(1599-1655)의 아미타경에 대한 매우 주요한 중국어 주해서이다. 반 힌 연구회(The Van Hien Study Group)에서 이 책을 이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특혜라고 할 수 있다.

고통받는 현실 속에서 위로와 평안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정토불교는 아주 쉬운 길을 일러준다. 간절하게 아미타불을 부르면 안락하고 청정하고 이상적인 극락세계에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정토문헌 들은 나중에 아미타불이 된 법장(法藏)보살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극락세계는 법장 보살이 사람들을 돕겠다고 발원하여 이루어진 청정하고, 이상적인 국토이고, 법장 보살의 발원처럼 간절히 부르면 누구나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

 

그는 과거 무한한 시간을 통하여 중생들이 받는 고통을 깊이 슬퍼하여 모든 중생들 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극락세계를 세우려고 결심했다. …과거 81번째 부처님 앞에서 법장왕은 극락에 관한 48원을 세웠다. 그는 이 원들을 이루기 전에는 깨달음을 얻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수많은 시간이 지난 후 법장은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고 그의 18번째 원이 이루어졌다. 그는 서방 극락세계의 왕이 되었고, 신심 깊은 사람들이 그곳에 환생해 점차 각성의 단계를 높여 가며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된다.

 

(Joji Okazaki, Pure Land Buddhist Painting, pp.14~15)

 

정토인 극락은 궁극적으로 마음이 만든 것이다. 하지만 미혹과 집착에 얽매여 끊임없이 자기와 남, 내 것과 남의 것을 구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또한 실재이다-마치 꿈같이 사라지는 이 세계가 실재인 것처럼.

다음 두 선승의 문답을 보자.

 

제자: 스님, 정토가 실재합니까?

스승: 이 세계가 실재하느냐?

제자: 물론 실재합니다. 스님

스승: 만약 이 세계가 실재한다면, 정토는 더욱 더 그러하다.

 

모든 중생들이 빛과 생명의 자비로운 부처님의 숭고한 서원들을 다시 발견하길 기원한다. 그들이 자신의 보리심-부처님들의 심인(心印)들을 다시 발견하기를 기원한다!●●

 

D.풍(Phung)/민 탄(Minh Thanh)/P.D.리(Leigh)

라이 브룩(Rye Brook): 베삭(Vesak), 96년 5월

 

 

 

 

―――――――

ㅣ서구의 세속적인 견지에서, 초자연적 존재가 심리학적 투영에서 비롯되었다는 각성이 악마, 귀신, 천사와 성인들의 신화를 깨트리고 그들의 능력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바르도 토돌〔Bardo Thodol, 티베트 사자(死者)의 서(書)〕에서는 신들을 ‘투영’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단순한 투영’이라고는 말하지 않는다. 신들은 존재한다. 신들은 경건하게 다루어져야 하며 단지 지적인 통찰로서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D.G. Dawe in The Perennial Dictionary fo World Religions, p.93)

 

●●ㅣ보리심: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깨닫겠다는 결심. 심인(心印): 가르침의 핵심 또는 정수

정토불교의 요약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기원전 480년에 열반하신 후 불교는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 동아시아와 일부 동남아시아 지역, 즉 중국, 한국, 베트남, 일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전한 것을 대승불교라고 한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대승불교 안에서도 사람들의 근기와 처한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종파가 발생하였다. 선불교, 정토불교 그리고 밀교를 대승불교의 주된 종파로 손꼽는다. 그 중에서도 비록 가르침과 수행법이 서양에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가장 광범위하게, 가장 많은 사람들이 정토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그 대중적 어필 덕분에, 정토불교가 빠른 시일 안에 동아시아에서 불교 신 자들이 귀의하는 대상으로서 가장 지배적인 형태가 되었다.

 

-M. Eliade, ed., Encyclopedia of Religions, Vol. 12

 

 

 

정토불교란 무엇인가?

정토불교는 동아시아에서 발전한 대승불교의 종파로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 아미타불의 명호에 대한 명상과 음송(吟誦), 그리고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정토’ 또는 ‘서방 극락세계’로의 왕생을 강조한다.

-Keith Crim, general editor,

Perennial Dictionary of World Religions. p.586

 

가장 보편적인 정토 수행법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명호를 부르고 생각하는 염불 수행은 절대적인 믿음과 정토에 왕생하려는 진실한 서원이 있어야 한다.

또한 정토불교에는 위와 같은 대중적인 수행 방식과 더불어, 무한한 빛과 무한한 수명의 아미타불이 한없이 밝고 영원히 지속되는 우리의 불성(佛性)과 같다는 매우 차원 높은 이치가 있다(自性彌陀 唯心淨土).

 

 

 

정토불교의 주요한 특징

 

 

1. 정토불교의 가르침은 자비, 즉 모든 중생을 그의 정토로 기쁘게 인도하려는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서원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2. 목표(성불과정에 있어 디딤돌로서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한다)와 수행 방법이 쉽다(어디에서나, 어느 때나, 특별한 의식이나 복장이나 지도 없이 수행이 가능한 방법이다).

3. 마음의 모든 병들을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다. 다른 수행 방법이나 관법(灌法)은 단지 특별한 병만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예를 들면, 송장을 관하는 것은 육욕을 끊기 위함이고, 호흡을 세는 것은 어지러운 마음을 제어하기 위함이다).

4. 매우 민주적인 수행법으로서 신도들을 모든 종교적 권위에서 해방시킨다. 말하자면 비밀한 형이상학, 스승, 다른 명상의 권위자들에게 의지하지 않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13세기 이후 여러 세기에 걸쳐 정토불교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우세한 전통으로 자리 잡았으며, 불교의 민주화와 재가불교의 융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일본 정토종의 조사인 법연(法然, 1133~~1212)은 정토불교의 진수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남자나 여자나, 착하거나 악하거나, 신분이 높거나 낮거나, 아무런 차별이 없 다. 아미타불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그 이름을 부르면 누구나 정토에 왕생한다.

-Elizabeth ten Grotenhuis in Joji Okazaki,

Pure Land Buddhist Painting, p. 14

반 힌 연구회(Van Hien Study Group)

영역자 머리말

 

 

이 책은 17세기 중국 정토종의 특출한 조사로 손꼽히는 우익(藕益) 대사의 아미타경(阿彌陀經)에 대한 주해서를 번역한 것이다. 우익 대사의 아미타경요해는 정토불교(淨土佛敎)의 소의경전의 하나인 아미타경에 대한 가장 탁월한 주해서로 평가 받고 있다. 먼저 불교의 전반적인 모습, 정토불교의 특징, 우익 대사의 생애와 그가 수행했던 시대의 불교사적인 의의 등을 간단히 소개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불교, 정묘한 방편

불교는 2,500여 년 동안 다양한 형식으로 발전했다. 그 중에서 정토종이 가장 지배적인 종파로 자리 잡았다. 정토불교의 독특한 가르침과 방법은 매우 대중적이다. 정토 수행법은 모든 사람들이 영적인 능력을 집중적으로 고양할 수 있도록 특수하게 고안되어 있다. 각자의 업연(業緣)에 개의치 않고 남녀노소 모두 직장이나 가정 등 생활속에서, 어떠한 상황이든, 아무리 바빠도 정토불교를 수행할 수 있다. 그래서 정토불교는 지역을 가리지 않고 언제나 굉장한 인기를 얻었다. 지난 천 년 동안 동아시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수행된 것도 그 때문이다.

 

 

―――――――

“정토종은 현재 중국과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봉자를 가지고 있는 불교의 종파이다.” (The Shambhala Dictionary of Buddhism and Zen, p.174)

Jean Eracle(Geneva 민속지학 막물관 관리자)에 의하면 정토종은 전 세계적으로 1억 이상의 신자들을 가지고 있다.(Trois Soutras et un Traité sur la Terre Pure. p.7)

 

 

불교 교육의 기본 원리는 정교하고도 미묘한 방편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불교의 메시지는 반드시 개개인 각각의 요구와 근기에 적합하도록 표현되어 있다. 불교인의 관점에 의하면, 긴 역사를 통하여 불교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것은 지극히 타당한 일이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정묘한 방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어떠한 특수한 형태의 불교가 다른 형태의 불교보다 더 좋고 더 나쁘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사람들의 요구가 시대적으로 변해감에 따라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깨달은 스승들은 불교 안에서 여러 형태의 가르침을 펴왔다. 물론 지혜와 자비로써 동일한 목적,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다만 어떤 특정한 불교의 형태가 지닌 효율성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언급해야 한다. 즉 어느 종파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자비롭게 행동하고, 절제하고, 남에게 관대하고,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헌신하고, 더욱 집중하여 궁극적인 깨달음의 지혜를 개발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느냐라는 것이다.

선가(禪家)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내려오고 있다.

 

“그릇된 말이라도 해탈로 이끌면 참되고, 참된 말이라도 집착의 대상이 되면 그릇된다.”

 

 

―――――――

ㅣ모든 종(宗)이나 방법은 각각 특정한 대중을 목표로 한 방편이므로 어떤 시기에 특정한 사람이나 단체에 대하여 완벽하여 흠잡을 데 없다.

D.T.Suzuki의 다음 구절을 보자.

“불교 심리학은 서로 모순으로 보이는 불교의 다양한 유형의 경험들을 설명하기 위한 정교하고 포괄적인 이론을 갖고 있다. 실제로 중국불교의 역사는 다양한 종파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일련의 시도이다.…다양한 방법의 분류와 융화가 제시되었고, …결론은 이렇다. 불교는 인간이 다양한 업에 따라 성격, 기질과 환경에서 많은 차이가 나므로 진리에 들어가는 매우 많은 문들을 제공한다. 이것은 부처님께서 같은 물이라도 암소가 먹으면 영양분이 많은 우유가 되고, 코브라가 먹으면 치명적인 독이 되므로 병에 따라 약을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어 분명하게 가르쳐주셨다. 이것이 (교묘한) 방편의 교리이다.….” (The Estern Buddhist, Vol. 4, No. 2, p. 121)

 

 

정토불교의 신봉자들은 항상 정토수행법이 가장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켜 준다고 강조한다. 특히 대중들이 믿고 수행하기에 매우 효과적이므로 정토불교가 가장 귀중하다고 주장한다.

현실을 직시할 때, 우리들은 대부분 불교 경전에 설해져 있는 오랜 겁에 걸친 점진적인 수행이나 선사들의 영웅적인 노력이나, 밀교에서 요구하는 장기간의 헌신적 수행을 통해서 해탈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정토수행법은 분명히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고안된 매우 쉽고도 편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

|작고한 Buddhist Lodge and Buddhist Sodiety(London)의 창립자가 불교수행의 진정한 목표에 관하여 이야기한 다음 구절을 보자.

“서양에서, 마음을 개발하는 데에 필요한 어떤 지침에 관한 요구가-저자들의 동기가 무엇이든 극단적으로 위험한 책들이 갑자기 대량으로 나타나면서- 절박해졌다. 이 책들의 어디에도 마음의 개발을 위한 단 하나의 진정한 동기인 모든 인류의 이익을 위한 명상자의 깨달음(즉, 보리심의 개발)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은 사업의 능률이 향상하고 신분의 상승에 이익을 보는 더 높은 단계에 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공부하고 명상하는 것을 아주 당연하다고 믿게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여(British) Buddhist Society는 집중과 명상(Concentration and Meditation)을 편집하고 출판하여 끊임없이 바른 동기를 강조하고 아울러 두통에서 발광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인간의 마음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위험을 십분 조심하도록 경고하였다. (Christmas Humphreys, The Buddhist Way of Life, p.100)

 

 

 

정토의 가르침, 염불

 

정토불교는 무한한 빛과 무한한 수명의 부처님인 아미타불에 대한 신앙에 중점을 둔다.

아미타불은 일심으로 자기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토왕생을 약속하였다. 아미타불이 상주하는 정토, 곧 극락세계에는 이 세상의 어떠한 악도 존재하지 않는다. 일단 정토에 왕생하면 우리는 깨달음의 길을 가로막는 속된 세상의 번뇌와 애착으로부터 해방되고, 아미타불과 모둔 성중(聖衆)의 가르침을 받아 영적 성장을 지속해 나갈 수 있다.

정토불교의 신봉자들은 극락정토 왕생을 발원함으로써 아미타불의 약속에 대한 그들의 깊은 신앙심을 나타낸다. 그들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고, 그분의 덕성을 생각하고, 그분의 모습을 관(觀)하면서 수행한다.

정토수행에서는 마음을 아미타불에 집중한다. 이 세상의 고난은 우리가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기 위하여 굳게 나아가는 길에서 맞게 되는 일시적인 불편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사회적 역할이나 개인적 노력에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부침(浮沈)에 좌우되지 않는다.

즉 우리의 참 모습이 정토의 주민이고 아미타불의 친구임을 믿는다. 일상적인 일을 하고 사회적 책무를 다하면서도, 우리의 참된 과업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고, 참된 책무는 ‘염불’하면서 마음을 맑히는 것이다. 이를 믿고 실천 수행하는 이를 정토수행자라 한다.

믿음(信), 발원(願), 그리고 수행(行)은 정토불교에서 서로 함께하며 서로 이끌어준다. 우익 대사는 그의 아미타경요해(阿彌陀經要解)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믿음이 없이는 발원하기에 부족하다. 발원이 없이는 수행으로

이끌기에 부족하다.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묘한 수행 없이는

소원하는 것을 이루어 믿음의 결실을 보기에 부족하다.”

 

정토불교의 특징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며 그분에게 귀의하는 소위 ‘염불(念佛)’에 있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주의를 아미타불에 집중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 즉 염불을 성취할 수 있다.

염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처’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또한 ‘부처’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여러 수준의 개념들을 분명히 함으로써 정토불교가 불교의 전 영역에서 어떻게 어울리는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가장 보편적인 수준에서, ‘부처’는 존재의 모든 개별적 형태에 스며든 절대적 실재에 대한 이름이다. 그래서 ‘법신불(法身佛)’이라고 하기도 한다.

‘부처’는 바다이다. 우리, 다른 생명체, 자연현상, 행성, 별과 은하계를 포함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부처의 바다 위에 출렁거리는 파도이다. ‘부처’는 우리 자신의 실체이자 본질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매순간 단순한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명백한 체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부처’는 또한 절대적 실재를 일상생활에서 생생히 경험하고, 그 본연의 속성인 자비, 지혜, 능력과 청정을 끌어내 쓰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들 즉 ‘부처’들이다. 대승경전에서 항상 ‘시방세계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부처들’에 관하여 설한다.

경전이 의도하는 ㄴ바는 우리에게 지구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살고 있는 전 우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무수한 존재들이 이 유일한 절대적 실재를 경험했고, 경험하고 또 경험할 것이고, 그리하여 깨달음을 전하는 능력을 갖게 됨을 알리려는 데 있다.

우익 대사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근본적으로 모든 부처님들은 법신으로서 가르침을 펴신다. 그들은

중생들이 진리와의 인연을 견고히 하여 깨달음의 씨앗을 강화할 수

있도록 이끈다.… 그들은 가르침의 방편을 드높여 광대한 중생들에게

편다. 그들은 중생들이 사는 고통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자비로써

중생들이 고요한 빛(寂光)과 어울리도록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부처님은 여러 다양한 화신(化身)들을 가졌었고 또 갖게 될 것이다. 불경에서는 무수한 부처님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그들의 세계와 시대에 관하여 설한다. 그 중 잘 알려진 부처님들이 석가모니불(인도에서 태어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부처님으로서 지구상에서 한 시기에 깨달음의 가르침을 폈다), 또는 미륵불(앞으로 지구상에 지혜와 정의를 새롭게 베풀 미래불), 그리고 비로자나불(시방 세계를 다 비추는 우주적 부처) 들이다. 아미타불은 이 가운데 한 분으로 이 세상 사람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절대적 실체로서 ‘부처’는 ‘부처의 진리(法)의 몸’ 또는 ‘실재의 몸’을 의미하는 ‘법신불(法身佛)’로 불린다. 법신불은 “모든 깨달은 사람들의 참되고 청정한 실재로서, 특징을 초월하고, 고요하고, 모든 이론을 초월하고, 참되고 청정한 덕성을 무한히 구족하고, 모든 곳에 평등한 만물의 참된 성품〔眞性〕’이다.

깨달은 존재의 특수한 모습으로서의 ‘부처’는 ‘모습이 있는 부처의 몸’ 또는 ‘나타나는 몸’을 의미하는 ‘화신불(化身佛)’로 불린다. 부처님은 가르침을 펴기 위해서 화신불로서 몸을 나타냄으로써 보통 중생들이 알아볼 수 있는 특수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화엄경에 의하면 “모든 화신불은 교묘한 방편에서 생긴다.” 고 하였다. 겉으로 지각되는 모습들은 다를지 모르나 그 배후에 있는 부처의 실재는 하나라는 것이다.

‘부처’라는 단어는 또한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깨달음에 대한 본래의 잠재력을 말하기도 한다. 대승불교는 우리 모두에게 ‘불성(佛性)’이 있으며, 모든 불교 종파의 위대한 사명은 이것을 밝혀내어 불성을 깨닫고, 우리 일상생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이글어주는 것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부처님을 기억하는 염불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인 청정한 지혜와 무욕(無慾)한 자비의 능력인 참된 본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염불(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함으로써 우리의 참된 자신을 바로 되찾게 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형태의 대승불교는 염불을 목표로 한다. 정토불교의 독특한 점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염불의 가장 효과적이고 가장 널리 실행할 수 있는 방법임을 가르치는 데 있다. 정토불교는 보통사람들이 깨달음의 본질을 만날 수 있는 단순하고 보편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되었다.

우익 대사는 염불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아미타경요해』에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있다.

 

“아미타불의 명호는 중생에게 본래 있는 깨달은 진성(眞性)이고,

그 명호를 부르면 이 깨달음이 드러난다….”

 

 

――――――――

ㅣ화엄경은 모든 것이 서로 융통함을 가르친다-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것을 포함하고, 또 그 반대도 성립한다. 현대적 예의 하나로서 한 개의 컴퓨터 칩에 수많은 책들을 내장할 수 있다. 이 가르침은 보살이 궁극적으로 성불하는 수행의 마지막 단계들을 기술하는 경의 26품에 명확히 설명되었다. 그 품은 모든 단계에서, 보살의 행동이 “결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을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이 법운지(法雲地)라고 부르는 보살의 제 10단계 요약이다.…보시(布施), 애어(愛語), 이행(利行), 동사(同事)등 어떠한 행동을 해도, 결코 염불(念佛,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 염법(念法), 염승(念僧)에서 떠나지 않는다.…(Thomas Cleary, tr., The Flower Ornament Scripturel [Avatamsaka Sutra], Vol. Ⅱ,p.111)

 

 

본래 있는 깨달은 진성과 합치하면, 그 순간 부처가 된다. 매 순간 본래 있는 깨달은 진성과 합치하여 매 순간 부처가 된다.

 

아미타경의 전망

 

 

간결하나 매우 화려한 경전인 아미타경은 정토불교의 신앙과 수행에 관한 기본적인 원칙을 제공한다. 아미타경 역시 경전의 통상적인 형식에 라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과 하늘나라 사람(天人)들을 포함하는 모든 대중에게 설법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부처님께서는 아미타불과 정토의 존재를 선언하면서 가르침을 시작하신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십만 억 불국토를 지나면 ‘극락’이라고 하는

세계가 있다. 그 국토에 아미타불이 계시어 지금도 법을 설하신다.”

“그 나라를 왜 극락이라고 하는가? 그 나라 중생들은 아무 괴로움이

없고 즐거운 일만 있으므로 극락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계속하여 중생제도를 위한 아미타불과 정토의 의의에 대해 설명하신다.

 

 

“그대 생각에 그 부처님을 왜 아미타라고 부르는가?”

“그 부처님의 광명은 한량이 없어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도 걸림이

없기 때문에 아미타라고 부른다.”

“또 그 부처님의 수명과 그리고 그 나라 백성의 수명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지겁(阿僧劫: 인도 말로 헤아릴 수 없는 오랜 기간. 역자주)

이므로 아미타라고 부른다.”

“아미타불이 성불하신 지 벌써 십겁이 지났다. 또 그 부처님에게는

무수히 많은 성문 제자들이 있는데 모두가 아라한 들이고 그 수는

산수로써 능히 헤아릴 수 없다. 여러 보살 대중의 수도 또한 그렇다.”

“극락세계에 태어나는 중생들은 다 아비발치(阿碑跋致: 인도말로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는 존재들. 역자주)이며 그 중의 일생보처

(一生補處: 일생을 지나면 부처가 되는 보살로서 최고위인 등각(等覺).역주)

도 그 수가 심히 많아 산수로써 알 수 없어 다만 한량없고 가가 없는

아승지(阿僧衹: 인도 말로 헤아릴 수 없이 큰 수. 역자주)로 말 할

뿐이다.”

“이 말(극락국토에 관한)을 들은 중생들은 마땅히 서원을 세워

그 나라에 태어나기를 원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 가면 이 모든

가장 착한 사람들과 한데 모여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은 또한 다음과 같은 정토의 불가사의한 공덕장엄에 대해 설한다. 보석으로 만들어진 나무와 연못 그리고 누각, 여러 색깔의 빛을 뿜는 아름다운 연꽃, 항상 들리는 천상의 음악,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부신 꽃들, 황금이 깔린 땅, 부처님의 가르침을 노래하는 새, 정토의 모든 것이 그 나라 사람들에게 불교의 진리를 잊지 않게 한다. 실로 이상적인 나라이다!

무엇보다도, 극락세계의 모든 사람들은 죄보의 몸으로 이 세상에서 태어난 우리가 받는 어떠한 고통도 받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아픔, 굶주림, 병 그리고 늙어 죽는 괴로움이 없다.

극락세계의 사람들은 또한 아미타불과 수많은 성중을 직접 만나는 혜택을 입는다. 그들의 수명은 무한하고 깨달은 존재가 될 때까지 정토에 끝없이 오래도록 살 수 있다.

우익 대사는 이어서 정토의 여러 불가사의한 장엄에 대해 분명하게 말해준다.

 

 

“정토에 왕생하는 중생들이 사는 집들과 환경의 모든 장엄은 아미타불

본유의 위대한 서원과 수행의 진실한 공덕에 의하여 만들어 졌다.

이것이 그분의 정토의 모든 것을 장엄하고,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세계의

보통사람들과 성인들을 포용하여 정토에 왕생토록 할 수 있는 까닭이다.”

 

 

또한 우익 대사는 무한히 펼쳐 있는 세계들이 서로 융통하는 것, 깨달은 사람들의 기본 인식이라 할 수 있는 화엄불교의 관점에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를 고찰한다.

우익 대사는 아미타불의 정토에 사는 사람들이 정례적으로 다른 세계뜰에 다녀오는 구절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 점을 강조한다.

먼저, 경의 구절을 보자.

 

“그 나라의 중생들은 항상 새벽에 각각 바구니에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들을 담아 다른 곳의 십만 억 부처님들께 공양을 올리고

식사 때에 본국으로 돌아와 식사를 마치고 산책한다.”

 

 

우익 대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 구절은 정토에서의 모든 소리, 감각대상, 순간, 그리고 모든

발걸음과 손가락 하나의 움직임도 시방 모든 세계의 삼보와 장애

없이 융통함을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속세의 번뇌와 업장이 너무

커서 실제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극락세계와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그곳과 분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극락세계에 태어나면 우리의 공덕이

매우 커져서 ‘사바’로 불리는 이 속세와 실제로는 분리되지 않은 채

분리되어 진다.”

 

 

의미심장하게도, 아미타경은 아미타불과 서방 정토에 국한하지 않고, 더 나아가 시방의 모든 부처와 그들의 국토에 관하여 차례로 설한다. 우익 대사는 이것을 당연한 것처럼 설명한다.

 

 

“(어느 방향이건)공간은 무한하고, 그쪽에 한량없이 많은 세계들이

있다. 무한히 많은 세계들이 있으므로 또한 그 곳에 사는 수없이 많은

부처님들이 있다.…이러한 까닭에 경에서 ‘무한히 많은 다른 부처님들’을

설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개별적 부처가 본질적으로 하나의 절대적 실재, 즉 법신불의 화신임을 이해하는 것이 요점이다. 우익 대사가 상기시키듯이 부처는단수이자 복수이다.

 

“부처는 무수한 공덕을 가지므로 가르침의 상황에 따라서 무수한

명호들을 갖는다. 어떤 때는 원인이 되는 조건에 의하여, 때로는

성취한 결과에 의하여, 때로는 본유의 성품에 의하여, 때로는 겉에

드러나는 특징에 의하여, 때로는 수행이나 서원 또는 그 외의 것들에

의하여… 각 이름은 불성의 특별한 덕성을 나타낸다. 만일 우리가

깨달은 존재들의 모든 덕성을 다 말하고자 한다면 시간이 다하도록

말해도 결코 끝낼 수 없다.”

 

 

이 몇몇 부처님들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경전은 우리로 하여금 그 명호와 의미와 연관된 덕성에 집중하여 수행의 길에서 그 명호가 우리에게 힘을 보태도록 한다. 부처님들의 명호들을 부름으로써 경전이 보여주는 정토의 행렬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효과가 증대한다.

우주에 무수한 부처들이 있는데, 우리는 왜 아미타불에만 집중하는가?

우익 대사는 이 질문에 명료한 답을 준다.

 

 

“(아미타불의 정토 대신에)왜 전 우주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가?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즉 초심자가 보리심을 내기 쉽고, 아미타불의

근본 서원이 가장 강력하고 또 아미타불이 우리 세계의 중생과 특별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경의 끝머리에 이르러,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방법을 권한 후,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모든 다른 부처님들을 찬양하고, 자신이 이 혼탁한 세계의 어려운 상황에서 아미타불 염불법을 가르친 것에 대한 그들의 찬탄을 받아들이셨다.

 

 

“내가 지금 여러 부처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듯이 저 부처님

들도 또한 나의 불가사의한 공덕을 칭찬하시며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매우 어렵고 희유한 일을 하셨다. 시대가 흐리고

(劫濁), 견해가 흐리고(見濁), 번뇌가 흐리고(煩惱濁), 중생이 흐리고

(衆生濁), 생명이 흐린(命濁) 사바세계의 오탁악세(五濁惡世)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깨달아 여러 중생들을 위해 이 모든 세상에서

믿기 어려운 법을 설하셨다.”

 

 

 

 

부처님의 명호 부르기

 

 

아미타경에서 석가모니불은 염불(아미타불 명호 부르기)에 의한 정토법의 기본 수행 요소들을 제시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착한 남자와 여자들이 아미타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루,

이틀, 혹은 사흘, 나을, 닷새, 엿새, 혹은 이레 동안, 한결같이 아미타불

이름을 불러 한 마음이 되어 흩어 지지 아니하면, 그들이 임종할 때,

아미타불께서 여러 성인들과 함께 그들 앞에 나타나신다. 그래서 그들은

목숨을 마칠 때 마음이 뒤바뀌지 않고 곧 아미타불의 극락세계에 왕생한다.

나는 이러한 이익을 보았기 때문에 이 말을 한다. 중생들이 이 말을 들으면

마땅이 그 국토에 태어나도록 발원해야 한다.”

 

 

정토에 달통한 사람들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여러 가지 형식을 인가하고 권장하였다. 홀로 또는 집단으로, 말없이(마음속의 소리와 귀로), 혹은 큰 소리로, 조용히 혹은 힘차게, 앉거나 서있거나, 걷거나 또는 누워있을 때, 일상의 일을 하기 전이나 할 때나, 또는 그 후에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 정토와 선을 통합한 방법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자가 누구인가?’ 라는 의문에 초점을 맞추며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익 대사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산란하지 않고 통일된 마음(즉, 일심)으로 부처님의

명호에 집중하는 것이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많은 불교 수행 방법의 하나이다. 이 방법이 좋은 것은 비교적 안전하고 수행하기 쉬워서 보통사람이나 성인이나 모두 가능한 수행방법이기 때문이다. 비록 전적으로 집중할 수 없다 해도 그래도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매우 유익하다. 우익 대사는 설명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산란하지 않고 일심으로 부르면 그 명호로 불성의

덕성들을 불러내게 된다. 불성의 덕성들이 불가사의하므로 부처님

명호 또한 불가사의하다. 부처님 명호의 공덕이 불가사의하므로

산란한 마음으로 부른다 할지라도 깨달음의 씨앗이 되어 물러나지

않고 깨달음의 길에 나아가게 된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여러 정토수행법 중의 하나이다. 그 수행법들은 아미타불을 관(觀)하는 것, 아미타불의 덕성을 깊이 생각하는 것, 공양하는 것, 절하는 것, 참회하는 것, 불법승 삼보를 생각하는 것, 계율과 관용을 생각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러나 우익대사는 말한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모든 방편 중 첫째의 방편이고,

모든 원만한 진리 중 가장 원만한 진리이고, 모든 완벽한 가르침

중 가장 완벽한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에 특별한 실제적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 수행법 중 어느 하나라도 완성한다면(그리고 그 공덕을

정토왕생에 회향한다면), 정토에 왕생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 모든 근기의 사람들을 가장 광범위하게 끌어모을 수 있고,

그리고 수행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다.”

 

 

정토수행에서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의 능력에 통하는 것이다. 우리의 허약한 능력으로는 저 언덕에 이를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자신의 능력에 이를 수 있는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어, 모든 부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우익 대사는 정토수행자들을 위한 아미타불의 능력과 매우 중요한 역할에 대해 설명한다.

 

 

“아미타불은 정토의 안내자이다. 48서원의 힘으로, 아미타불은

명호를 부르는 염불수행을 발원한 중생들을 받아들이고,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결코 그곳에서 물러나지 않도록 한다.

가장 중요한 점은 아미타불에 관한 모든 것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즉

공덕과 지혜, 신통력과 수행력, 화신(化身)과 환경, 가르침을 펴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서원으로서, 아미타불은 중생이 선근(善根)을 증대하는 바탕을

만들고, 위대한 덕행으로 중생이 공덕을 증대하는 상황을 만든다.

아미타불은 우리에게 믿음과 서원을 내어 자신의 명호를 부르게 하여,

매 순간 이러한 공덕들을 성취도록 한다….”

“아미타불의 모든 장엄은 중생의 마음속에 모든 장엄의 개발을

증대하도록 자극하는 실체로서 작용한다.”

 

 

시간과 공간의 아득히 먼 곳에서, 아미타불은 그의 명호를 무한으로 향하는 문으로 제공하고, 그 문을 지나 부처님들의 무한한 생명을 공유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아미타경은 여섯 방향의 부처님들을 열거할 때, 이 점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설하셨다.

 

 

“왜 이경을 모든 부처님들이 보호하고 염려하시는 경이라 하는가?”

“만약 선남자 선여인들이 이 경을 듣고 받아 지니거나, 여러 부처님들의

이름을 들으면 이 선남자 선여인들은 모두 다 모든 부처님들이 보호하고

염려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모두 내 말과 여러 부처님의 말씀을 잘 믿어야 한다.”

 

 

우익 대사의 생애와 염불 수행

 

아미타경요해는 17세기 전반부에 중국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저서이다. 중국의 모든 특출한 스님들과 마찬가지로 그도 많은 이름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법명은 지욱(智旭:1599~1655)이고, 자는 우익(藕益)이요, 호는 팔부도인(八不道人)이다. 편의상 일단 그의 이름 중의 하나인 우익 대사로 부르기로 하자.

우익 대사는 사회적․정치적 위기로 격동하던 명나라 말기, 지식인들의 깊은 이념적 분열과 자기 회의에 빠졌던 시기에 태어났다. 그는 명나라의 쇠퇴와 몰락의 과정에서 성장했다. 장기간에 걸친 내란 후 중국이 마침내 야만인으로 여겼던 만주족에 의하여 정복되는 것을 보고 살았다.

그 무렵의 중국은 몇 세대에 걸쳐 불안하지만 활기찬 경제적 변화를 경험했다. 교역과 이동이 더 활발해지고, 생활의 더 많은 영역이 현금 경제로 휩쓸려갔다. 황실 정권은 점차 사회의 요구로부터 심지어는 상류층의 야망과 이익에서도 멀어져 가고 있었다. 심각한 파벌 투쟁이 엘리트 정치 계층을 분열시켰고, 전 체제의 적법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 되었다. 새로운 이념, 새로운 형태의 예술과 문학, 사회적 비판과 풍자가 혼란 속에서 표면으로 뛰쳐나왔다.

종교에 있어서도 “세 가지 가르침이 하나로 통합된다”는 조류가 추진력을 얻고 있었다. 점차 더 많은 중국인들이 도교, 유교, 그리고 불교의 이념과 수행들을 통합하여 서로를 보완해야 한다고 느꼈다. 대중적인 종교 지도자들이혼합 형태의 새로운 종교를 설교하였고, 불교․유교․도교 등 고전들의 요지를 더욱 광범위한 대중에게 전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유교 사상의 가장 유력한 학파는 그 당시 선불교의 이념에 물들어 있었다. 그들은 평범한 사람들,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인간이 가진 덕성이 성인(聖人)과 동등하다는 것, 그들의 잠재력을 새롭게 강조하였다.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들의 상당수가 선(禪)의 언어를 이해하고, 불교도인 친구들과 어울렸고, 불교와 유사한 고요한 명상과 행동하는 지혜를 닦아나갔다.

한편 많은 불교도들이 종교적 수행을 증진하기 위하여 도교의 기(氣)수련에 의지하였다. 불교도들은 기의 통로를 뚫기 위하여 정교한 내관(內觀)과 운동을 하였다. 밀교와 도교의 영향들이 선과 교종(敎宗)의 주류 속으로 혼합되어 오늘날까지 중국불교의 양식을 이루고 있다.

그 당시의 중국 문헌들은 모든 형태의 종교에 대한 강한 회의론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모든 종류의 권위자들에 대한 불신이 만연하였음을 보여준다. 불교의 스님들과 도교를 닦는 도인들은 종종 정신적인 깨달음보다 세속적인 후원과 지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 어릿광대나 사기꾼들로 묘사되었다. 또한 유학자들은 공모하는 출세주의자, 무자비한 냉소주의자, 파산한 이상주의자, 무기력한 몽상가들의 잡다한 패거리로 보였다. 권력을 쥔 사람들은 정의나 공적인 의무감도 전혀 없고, 조금도 제지받지 않는 타락하고 복수심 많은 폭군들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은 그 밖의 다른 데서는 구원을 받을 곳이 없었다. 그래서 좋다는 확신도 없고 열의도 없이 맹목적으로 불교나 도교를 수행하는 것으로 보였다.

우익 대사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수십 년 전부터 중국 불교 내에서 여러 종교부흥운동이 일어났었다. 그 동안 불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수세기에 걸쳐 발전된 형식과 교육 방법 등 중국불교의 전 유산, 전 영역을 복원하여 새롭게 거듭나려는 시도가 합의되어 추진되었다.

불교경전을 더 쉽게 구할 수 있도록 활발하게 출판되었고, 선 공안〔話頭〕들을 많이 수집, 인쇄하여 유통시켰다. 당시에는 부유하고 강력한 후원자들이 많았다. 14세기 명나라가 세워질 때 전쟁 중에 파괴된 불교 사원들이 16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다.

중국 역사상 마지막으로 교육을 받은 승가(僧家)의 지도자들이 국가에서 막강한 정신적 지도자들이 되었으며, 그들은 불교적 견해를 그 당시 엘리트들의 대화에 도입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시도는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우익 대사 이전 세대의 가장 유명한 선사였던 자백진가(紫柏眞可)는 폭압적인 정부 정책에 반대하다 목숨을 잃었다. 다른 종파의 불교 지도자였던 감산덕청(憨山德淸)또한 그가 집필한 저서의 인쇄와 사원 복원 사업의 후원자가 황실의 정치적 음모로 내몰리자 승려직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우익 대사의 일생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시대적인 불안을 반영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우익 대사의 삶은 수많은 개인적 위기와 자신의 수행을 재평가하려는 노력으로 점철된 강렬한 영적 투쟁의 생애였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지칠 줄 모르고 깨달음의 열쇠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진정한 스승과 진실한 도반을 찾기 어려운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익 대사는 불교의 여러 방법론과 이론의 흐름을 연구해 나갔던 것이다.

그는 10대에 다른 부유한 가정의 소년들처럼 유교 공부에 몰두하였다. 그 사회에서 가장 권위 있는 신분인 정부 관료가 되는 시험을 준비하기 위해서 유교 공부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훗날 불태워 버렸지만, 그는 심지어 정통적인 유교 통치 학파의 논리로ㅆ 불교를 비난하는 평론을 쓸 정도로 철저한 유교 신봉자였다.

20새 때 논어를 공부하다 안목이 열림을 느꼈다. 그때 공자의 마음을 이해했다고 느꼈다. 그해에 그의 아버지가 죽었다.

우익 대사는 불교를 초도덕적이요, 부도덕하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주희(朱熹, 1130~1200)의 정통적 유교철학의 정적(靜的)인 규범을 뛰어넘었다. 그는 선불교의 여러 측면을 통합한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의 더욱 역동적(力動的)인 유교의 흐름을 깊이 연구하였다.

20대 초반에 우익은 선 수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24세에 집을 떠나 승려가 되었고, 『수능엄경(首楞嚴經)』의 가르침을 따라 명상하였다. 수행을 통해 눈부신 결과를 얻었다. 모든 경전과 선화(禪話)의 의미가 분명해진 것처럼 느꼈다. 그러나 궁극적인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이전이나 이후의 많은 지성인들처럼 그도 정토수행법은 수준 이하의, 오직 보통사람들에게만 적합한 수행법이라고 생각했었다.

28세 때에 어머니가 지병으로 돌아가신 후, 그는 중병에 걸렸다. 병고에 시달리면서 생사의 위험에 처했을 때 전에 깨달은 바가 전혀 도움이 안 됨을 알게 되었고, 크게 실망하였다. 이때부터 우익은 선수행을 하면서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수행을 병행하였다.

이러한 병행 수행은 중국불교에서 이미 아주 오래된 수행 경향이기도 했다. 염불수행이 기능적인 면에서는 선의 명상과 같으나 선보다는 훨씬 쉬운 수행법인지라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삼매를 이루는 데 더욱 효과적인 길임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조의 영향을 받아 우익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2년 동안 은거하면서 선과 정토를 병행하여 수행하였다.

그는 31세에 선종의 유명한 스승을 한 분 만났는데, 그를 보면서 그 무렵의 선수행이 얼마나 타락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부터 선 수행을 완전히 외면했다. 그는 언제나 선사들의 진정한 깨달음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선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닦이 어려운 방법이고, 그 당시의 선은 대체로 지적인 유희에 불과하다고 판단하였다.

그 후로 더욱 더 정토수행에 정진하였다. 동시에 율장(律藏)을 연구하였으며, 불교 경전과 철학적 논저들을 광범위하게 탐독하였다. 그는 6세기에 중국에서 발달한 대승불교의 체계적이고도 종합적인 천태종의 철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마침내 정토불교와 불교의 경(經 )과 논(論) 사이에 어떠한 어긋남도 없음을 분명히 확신할 수 있었다. 그의 아미타경요해는 유식철학(唯識哲學)적 존재론에 확고한 기반을 두고 있으며, 종종 천태종의 범주를 넘나든다.

그는 30대에 수행자를 더 높은 실재에 연결하는 특별한 flemea의 연속인 만트라의 암송에 매혹되었다. 특히 지옥중생을 제도하는 지장보살의 만트라 주송에 열중하였다. 몽골족이 중국을 지배하고 티베트 불교를 후원하였을 때, 만트라를 외우는 밀교수행이 중국불교에 흡수되었다. 대중들은 만트라를 수행자들을 보호하고 심지어 그들에게 초능력을 부여하는 마법의 주문으로 여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더욱 공부함에 따라 밀교에서 제멋대로 하는 만트라 주송이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주송을 억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제로 밀교는 만트라 수행이 과오를 증대하고 지각을 왜곡시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전제 조건으로 매우 엄격한 규율을 요구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만트라 가르치는 것을 중단하였다. 보편적으로 안전한 단 하나의 주문인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수행에만 매진하였다.

30대 후반부터 그는 더욱 더 대중을 위한 교화에 전념하였다. 대중을 위하여 더욱 광범위하게 설법하였다. 아울러 책을 집필하고 경과 논을 해설하였다. 이때 명나라는 멸망하는 와중에 있었다. 농민 반군이 북쪽에서 정부군을 패주시키고, 만주의 병사들이 북동으로부터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는 당분간 이러한 정치적 동란으로부터 안전한 양자강의 삼각주 지대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 정토법을 선호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형태의 불교도 존중하였다. 완전히 비종파적인 관점을 유지한 것이다.

“중생들의 근기와 상황이 전부 다르므로 다른 형태의 갖가지 불교의 가르침들이 고안되었다. 어떤 것은 열려 있고, 어떤 것은 닫혀 있으며 모든 종류의 전문요엉를 사용한다. 가르침은 모든 중생들이 각기 들을 준비가 되어있는 것에 맞춰 효과적으로 표현된다.”고 역설하였다.

39세에 그는 크게 깨달았다. 그리고 불교, 도교, 유교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단지 이 세가지 가르침들이 모두 각기 다른 필요에 따른 방편이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46세에 또 중병에 걸린 그는 자신의 수행을 다시 생각하고, 정토수행에 전념하였다. 생애의 마지막 15년간 그는 엄청난 학식, 놀라운 열정과 정신력으로 75권의 방대한 저서를 저술했다. 중요한 불교의 경전과 논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교 고전, 심지어는 주역까지 해설하였다. 아미타경요해는 그가 49세 때 9일 동안 저술한 것이다.

우익 대사는 1656년에 죽었다. 세속 나이 57세 때였다. 제자들에게 화장을 한 뒤 자신의 뼈를 모아 갈아서 밀가루와 섞어 과자로 구워 산에 뿌리라고 유언하였다. 새와 짐승들이 이것을 먹고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하기 위해서라고 전해지고 있다. 제자들은 스승의 원을 따를 만한 자신감이 없었다. 대신에 그의 뼈를 영봉사(靈峰寺) 대웅전 옆 탑에 모셨다.

 

 

우익 대사의 아미타경요해

 

 

우익 대사는 아미타경을 지적인 단련이 아니라 정토수행자들에게 실질적 도움이 되도록 해설하였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내 바람은 이 책의 한 줄 한 자가 정토수행자의 자량(資糧)이 되고,

이 책에 쓰인 것을 읽거나 듣는 자가 곧 깨달음의 길에서 물러남이

없는 지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책에서 우익 대사는 정토의 가르침을 불교의 ‘유심론(唯心論)’ 철학으로 설명한다. 오직 하나의 실재만 존재한다. 즉 법신불(法身佛), 불심(佛心), 그리고 일심(一心)이다. 모든 것들은 일심의 바다 위에 나타나는 파도, 잔물결이요, 순간의 물방울들이다. 모든 세계, 모든 부처, 모든 중생, 모든 시간, 모든 장소의 모든 존재들의 경험들이 이러하다.

일심론적 세계관이 우리의 개별성을 말살하지 않은 채 절대적 실재와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불심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우리 또한 불성을 갖고 있으며,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의 개별적인 작은 마음들에 불심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모든 무지와 미혹 그리고 죄업이 하는 짓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진성, 불성, 그리고 우리와 일심과의 본질적인 통합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것이다. 우리의 작고 시시한 마음으로 일심을 평가하거나 접근하는 것은 마치 찻잔 ㅇ하나로 바닷물을 퍼내려는 것과 같다.

여기에 바로 우리를 제도하려는 부처님과 보살들의 자비로운 방편들이 등장한다. 불교의 모든 진정한 가르침들은 우리가 일심을 깨닫도록 상황에 맞게 고안된 통로들이다. 진정한 불교의 가르침들은 형식과 적용에서 차이가 나나 결국 의도하는 바는 하나이다.

아미타경요해에서 우익 대사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의 경이롭고 심지어 불가사의하기도 한 힘은 우리가 본래 일심과 연결되어 있음에서 비롯한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있는 무한한 및과 무한한 생명의

마음과 분리된 아미타불의 명호가 없고, 아미타불의 명호를

떠나서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있는 무한한 빛과 무한한

생명의 마음과 통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이 점을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이렇듯 일심과의 연계성(連繫性)이 정토의 이념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제기하는 전형적인 반론을 해결하는 열쇠이다.

 

 

문 _ 만약 아미타불의 정토가 여기로부터 10만억 불토 떨어져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즉시 태어날 수가 있겠는가?”

답 _ 기본적으로 마음의 진성(眞性) 밖에 아무 것도 없으므로

10만억 불토가 바로 지금 이 순간 우리 앞에 있는 마음의 진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본래 자신의 마음에 있는 부처님의 힘에

한다면, 극락정토에 즉시 왕생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 게 있겠

는가?”

 

 

우익 대사는 끊임없이 실제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그 목적을 모든 곳에 존재하나 사람들이 보통 접근할 수 없는 일심과 통하게 하기 이함이다. 무엇이 효과적인가에 의해 수단이 정해진다.

 

 

“내적 진리의 수준에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은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가 우리 마음에 본래 있는 모습의 하나로서, 우리

마음의 산물임을 믿는 것이다. 그것이 의도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

본래 있는, 또한 마음의 산물인 위대한 부처님의 명호를 마음을

집중하는 초점으로 이용하여 단 한 순간도 잊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우익 대사는 바로 일심이 모든 것에 스며들어 있으므로 보통사람들도 정토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는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번거롭게 관상(觀想)이나 또는 참선에 의지함이 없이 매 순간 부처님과 합치하여 즉시 남음도 부족함도 없이 완전한 광명을 보게 된다. 최상근기의 중생이라도 이 수준을 초월할 수 없고, 또한 최하근기의 중생도 여기에 이를 수 있다. 물론 아미타불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방법이나(근기가 다른) 사람들이 태어나는 정토의 수준은 같지 않다” 라고 말한다.

다른 때에, 우익 대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심이 드러나 서로 융통하는 세계의 얼개에서 아미타불의 정토가 나타나는 곳을 지적한다.

 

 

“왜 속세에서 목숨이 다할 때까지 염불한 뒤에 보물로 이루어진

정토의 연못에 태어나기를 기다려야 하는가?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믿음과 서원을 내어 바로 지금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태어날 정토의 연꽃 봉오리가 피고 금대(金臺)를

나타낼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이 속세의 주민이 아니다.”

 

 

이 책을 통하여 우익 대사가 시급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실제로 아미타불에 대한 믿음을 갖고, 정토에 태어나려고 발원하고, 그리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정토수행 외에 우리를 이 탁한 세계로부터 구출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불타는 집에서 공허한 말장난에

빠져 있는 것이다.”

 

 

 

 

정토수행자들이 갖는 영구적인 의문 중의 하나는 수행자의 마음 상태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의 효험에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 하는 것이다. 우익 대사는 믿음과 서원을 갖고 완전히 집중하여 외우는 것이 최적의 수행임을 강조한다. 또한 비록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 이름을 불러도 그것이 미래에 깨달음을 이룰 씨앗을 심는 것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이 책에서 경고와 격려를 섞어 말한다. 다음 3개의 예를 보자.

 

“산란한 마음으로 염불하면 정토에 왕생함을 보장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산만하고 흐트러진 마음으로 한 선행은 시작도 없이

오랜 기간 쌓아 온 죄업의 적수가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악업을 없애는) 유일한 길은 마음이 통일되어 산란하지 않을

때까지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염불이다. 그러면 마치 힘센 전사가

포위망을 뚫고 나오는 것과 같아 세 군대〔三軍: 견사혹(見思惑)),

진사혹(塵沙惑),무명혹(無明惑) 등 삼혹(三惑). 역자주〕도 그를

더 이상 가둘 수 없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것은 깨달음을 얻는

씨아이 된다. 그것은 마치 부술 수 없는 금강석과 같다.“

 

 

“비록 산란한 마음으로 부처님 명호를 불러도, 그 공덕과 선근은

헤아릴 수 없다. 하물며 혼란하지 않은 통일된 마음으로 부르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는가!”

 

 

항상 그러하듯이 ‘대답’은 그것이 적용되는 관점과 진리의 수준에 달려있다.

한 수준에서- 말하자면 관습적 실재, 즉 중생이자 불교 수행자인 우리 생활의 수준에서- 우리는 경에서 약속했듯이, 부처님들의 보호와 염려를 받으려면 우리 마음이 통일되어 혼란하지 않을 때까지 부처님 이름을 불러야 한다.

다른 수준에서, 즉 절대적 실재와 일심의 수준에서 우익 대사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부처님들의 자비가 불가사의하고, 그 명호들의 공덕도 불가사의하다.

따라서 부처님 명호를 듣기만 해도, 주의를 기울이거나 아니거나,

믿거나 말거나, 그것은 항상 진리와 인연을 맺는 씨앗이 된다.

뿐만 아니라,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할 때 친구와 적을 가리지 않고

꾸준히 모두를 제도하신다. 부처님 명호를 듣기만 하면, 틀림없이

보호해 주신다. 어찌 이것을 의심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자신의 종교적 탐구의 우여곡절을 되돌아보고, 다가올 죽음을 바라보면서, 우익 대사는 죽음의 순간을 한 개인이 그의 정신적 과업에서 성취한 것을 평가하는 중요한 시험으로 본 것 같다. 그는 미혹의 습관과 애착의 힘이 아직 남아 있으면, 미래에 태어나 더 많은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마지막 시간을 위해, 우익 대사는 독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경의 메시지를 믿으라고 간곡히 타이른다.

 

 

“해탈을 위한 유일한 길은 믿음과 서원을 발하고, 부처님 명호를

불러 바깥에 충만한 부처님의 힘에 의지하여 우리 자신의 부처를

돕는 것이다. 아미타불의 자비로운 서원은 결코 공허한 약속이 아니다.

믿음과 서원을 발하고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면, 죽을 때 아미타불과

성중이 나타나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평정한 마음으로 정토에 자유롭게 왕생할 것이다.”

 

 

 

―――――――

ㅣ정토불교의 힘과 보편성은 대단하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정토불교의 주된 수행이 밀교나 선불교 같은 다른 교파에서도 발견될 정도이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정토 수행의 직접적인 목적은 아미타불의 정토에 왕생하는 것이다. 밀교에서는 금생에 악업과 번뇌를 없애고 복과 지혜를 늘리기 위하여 부처님의 명호를 부른다. 선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공안의 목적이 미혹한 생각을 끊고 자성진심(自性眞心)을 깨닫는 데 있다. 물론 이 세종파의 궁극적 목적은 동일하여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는 데 있다.

 

 

 

 

 

 

왜나무아미타불인가.hwp
0.1MB

'필독!경전,법문자료 > 3. 수행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자황스님의 염불선 (2)  (0) 2014.04.23
자황스님의 염불선   (0) 2014.04.23
현장스님의 염불선.7  (0) 2014.01.19
현장스님의 염불선.6  (0) 2014.01.14
현장스님의 염불선.5  (0) 2014.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