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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2. 제7장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관(敎觀)

제7장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관(敎觀)

 

제1절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상(敎相)과 관심(觀心)

 

중국불교(中國佛敎)의 교관(敎觀:敎相과 觀心)

교상(敎相)…교리판석(敎理判釋)을 말하며 석존일대시교(釋尊一代時敎)를 자기종의(自己宗義)에서 분별판단(分別判斷)함.

관심(觀心)…자종(自宗)에서 세운 진리(眞理)를 관념(觀念)하는 법(法)을 말함.

법상종(法相宗)은 삼시교(三時敎)를 교상(敎相)으로 하고 유식관(唯識觀)을 관심(觀心)으로 함.

천태종(天台宗)은 오시팔교(五時八敎)를 교상(敎相)으로 하고 일심삼관(一心三觀)을 관심(觀心)으로 함.

화엄종(華嚴宗)은 오교십종(五敎十宗)을 교상(敎相)으로 하고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을 관심(觀心)으로 함.

진언종(眞言宗)은 현밀이교십주심(顯密二敎十住心)을 교상(敎相)으로 아자불생관(阿字不生觀)을 관심(觀心)으로 함.

중국불교의 교관(敎觀)을 살펴 보겠습니다.

교관(敎觀)은 교상(敎相)과 관심(觀心)이라는 말입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했습니다마는 교상은 그 당시에 불교 교리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비판하는 것입니다. 중국은 처음에는 번역(飜譯)불교라 하여 구법승(求法僧)들이 인도에 가서 부분적으로 경전을 가지고 와서 번역을 하였습니다. 법현(法顯 369?-45l?) 삼장이나 현장(玄奘 622-664) 삼장이나 또는 의정(義淨 635-713) 삼장이나 또는 우리 한국 스님인 혜초(慧超 704-787) 대사나 그분들에 의해서 경전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주로 우리한테는 구법승들에 대한 행각이 깊은 감동을 주게 됩니다. 구법승들이 한 번씩 갔다 오려면 18년 20년 걸립니다. 이른바 청춘이 다 지나가 버립니다. 갈 때도 서역국으로 통과하여 수만리 길인데 혼자 가겠습니까마는 처음에는 몇 십 명이 발심을 하여 출발했다가도, 가는데 3년 오는데 3년, 보통은 3년 세월 이상이 걸리는 가운데 몽고의 고비사막(Gobi 沙漠)을 지나야 하고 티베트 파미르고원(Pamirs 高原:蔥嶺)을 넘어야 하는 고생이 극심하여 그야말로 십중구퇴(十中九退)라, 열 사람 가면 아홉 사람쯤 후퇴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죽기도 합니다. 현장 법사가 갈 때도 이른바 서유기(西遊記)같은 것을 보면 사막지방에 가다가 쓰러져 죽어서 버려진 구법승들의 해골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다 돌아온 것이 아니라 현장이나 또는 법현이나 또는 의정이나 혜초나 또는 혜일(慧日 680-748)이나 그런 분들은 모두가 다 구사일생으로 돌아온 분들입니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건 너무나 모험적인 구도행각이었습니다.

종교란 마땅히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목숨을 걸어야 무엇인가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다는 것은 현상적인 상을 여읜다는 것입니다. 상을 여읜다고 할 때는 자기 몸뚱이가 안중에 없어야 한다는 말이나 같습니다.

구법승들이 그렇게 난행, 고행, 고생고생하고 가까스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생명을 건 길인지라 돌아온 사람은 정작 몇 사람 밖에는 안 됩니다.

우리는 행복스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들 가운데도 과거 전생에 구법승도 있을 것입니다마는 우리가 금생에 이렇게 편한 때에 와서 한 번에 다 불경을 볼 수가 있고 여러 스승들 덕택으로 발췌해서 요점만 추릴 수가 있는 것이고 아무튼, 역사적으로 고찰을 꼭 해야 합니다.

우리 강원교육도 그런 점에 역점을 둬야 하는 것입니다. 철학을 공부해도 철학사(哲學史)를 공부하지 않고서는 바른 철학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불교도 인도 불교사(佛敎史), 중국 불교사, 또는 동남아 불교사, 일본 불교사, 한국 불교사를 우리가 꼭 읽어야 합니다. 어렵다고 해서 보지 않으면 그만치 자기가 아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고 집착하게 됩니다.

공부도 하다보면 가사, 염불을 애쓰고 한 사람들은 염불에 대해서 재미를 보는 것이고 또 거기 따른 공덕을 얻는 것입니다. 화두를 많이 참구한 사람들은 화두에서 또 무엇인가 얻습니다. 어떤 공부나 다 그렇습니다. ‘오! 주여!’ 하고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또 그것으로 해서 무엇인가 얻습니다. 외도나 정도나 어떤 것이나 하다보면 결국은 재미가 붙습니다. 그러면 미련한 사람들은 꼭 그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있어서 역사적인 고찰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상(敎相)의 구체적인 말은 교리판석(敎理判釋)입니다. 교리를 그 당시에 이루어진 불법으로 판단 해석하는 것입니다. 석존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자기 종의(宗義)에서, 자기들 종지(宗旨)에 따라서 분별 판단하는 것입니다.

관심(觀心)은 무슨 종파를 세우면, 우리 종파는 무슨 법으로 공부한다고 하는, 공부하는 방법이 있어야 하겠지요. 곧 자기 종파에서 세운 진리를 관념(觀念)하는 법을 말합니다.

일본 일련종(日蓮宗) 계통은 '나무묘호우렌게교(南無妙法蓮華經)하는 것만이 제일이고 다른 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참 딱한 일 아닙니까? 그런 것도 모두가 역사적 고찰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일련(日蓮 1222~1282) 대사 같은 위대한 사람이 나왔을 때는 그 사람대로 특수한 방편을 세웠겠지마는 일대시교(一代時敎)를 비판할 때는 반드시 공변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인가 저는 일련대사 책을 한번 보았습니다마는 사종격언(四種格言)이라고 해서 선천마(禪天魔)요, 참선하는 것은 하늘 마구니요, 염불은 무간지옥 가는 길이라고 합니다. 극락 간다고 애쓰는 것이 정토종이고 참선하는 것이 삼계를 초월하는 것인데 그와 같이 반대로 말합니다. 또 율종(律宗)은 국적(國賊) 곧 나라의 원수요, 또 일본의 순수밀교인 진언종(眞言宗)은 망언(妄言)이라 합니다. 이것이 일련종의 사대격언이라 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다 옳은 말씀인데 이렇게 꼭 자기 것만 내세우는 것입니다. 한 종파를 내세운 사람들은 대부분 다 독선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면 법상종(法相宗)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법상종은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주로 합니다. 법상종은 삼시교(三時敎) 곧 유교(有敎) 그 다음에 공교(空敎) 그 다음에 중도교(中道敎)를 교상으로 하고 또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라, 물질은 티끌 하나도 본래가 없고 모두가 식(識)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유식이나 유심(唯心)이나 똑같은 뜻입니다. 내나야 식은 바로 마음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주 전체가 오직 마음뿐이다 '이렇게 관하는 유식관(唯識觀)을 관심법(觀心法)으로 합니다.

천태종(天台宗)은 오시팔교(五時八敎)라, 일대시교를 다섯 시교(時敎)로 나누고 공부하는 여러 가지 행위에 따라서 팔교(八敎)로 구분합니다. 우리 마음자리에서 바로 공(空)과 가(假)와 중도(中道)를 관하는 일심삼관(一心三觀)을 수행법으로 합니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조금도 집착하거나 잡을 수가 없는 무장무애하고 텅텅 비어 있지마는 인연에 따르면 현상적인 상(相)이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상이 본래 바로 공이지마는 가상(假相)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을 가(假)라고 하는 것이고, 그러나 공과 가가 둘이 아니므로 결국 중(中)이라 합니다.

화엄종(華嚴宗)은 오교십종(五敎十宗)을 교상으로 하고 일진법계관(一眞法界觀) 곧 우주만유 모두가 간격도 없이 일여평등(一如平等)한 진여법성이라고 관조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관법이 있으나 대체로 이렇게 관하는 법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그리고 진언종(眞言宗)은 순수밀교입니다. 일본에 들어간 순수밀교로 해서 진언종이 여러 모로 훌륭한 체계를 세웠습니다. 일본의 구우까이(空海 774~835)라는 스님이 일본 진언종을 세웠습니다. 진언종은 현교, 밀교, 2교와 십주심(十住心)을 교상으로 하고 아자(阿字) 곧 아미타불의 아자입니다. 아자불생관(阿字不生觀)을 관심법으로 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자칫 혼란을 느끼실 수도 있으니까 이런 것을 세밀히 말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윤곽만을 알면 되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 이 정도는 알아두는 것이 나중에 경을 보고 또는 불교사를 보더라도 한결 명료하게 납득이 될 것입니다.

 

 

 

제2절 법상종(法相宗)의 삼시교(三時敎)

 

삼시교(三時敎)

1. 제일시교(第一時敎)…외도(外道) ․ 범부(凡夫)의 실아(實我)의 집착(執着)을 파(破)하기 위(爲)하여 사대오온(四大五蘊) 등(等)의 실유(實有)를 설(說)하고 인아(人我)의 공무(空無)를 밝힘. [사아함경(四阿含經)이나 경론(經論)]

 

2. 제이시교(第二時敎)…소승실법(小乘實法)의 집착(執着)을 파(破)하기 위(爲)하여 일체제법(一切諸法)이 본공(本空)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설(說)하여 아(我) ․ 법(法) 구공(俱空)을 밝힘.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

 

3. 제삼시교(第三時敎)…유집(有執)과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破)하기 위(爲)하여 심외(心外)의 법(法)은 유(有)가 아니며 심내(心內)의 법(法)은 공(空)이 아님을 설(說)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밝힘. [해심밀경(解深密經)․화엄경(華嚴經)․법화경(法華經) 등等]

 

그래서 앞에 든 법상종의 삼시교(三時敎)를 조금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일시교(第一時敎)는 외도 ․ 범부의 참말로 내가 있다는 실아(實我)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지 ․ 수 ․ 화 ․ 풍 사대(四大)와 오온(五蘊) 곧 지수화풍 4대인 색(色)과 심법(心法)인 수(受)와 상(想)과 행(行)과 식(識)의 사온(四蘊)을 합해서 5온(蘊)인데, 이런 4대 5온 등이 참말로 있다는 실유(實有)를 설하고 사람 몸은 지 ․ 수 ․ 화 ․ 풍으로 되었기 때문에 허망하고, 우리 마음도 결국은 수와 상과 행과 식과 4온이 인연 따라서 잠시간 합한 것이기 때문에 인아(人我)는 원래 비어 있는 아공(我空)이지마는 지 ․ 수 ․ 화 ․ 풍 이런 것은 실지로 있고 또는 수 ․ 상 ․ 행 ․ 식도 실지로 있다는, 말하자면 그런 법은 있다(法有)고 하는 것입니다.

제이시교(第二時敎)는 내 몸뚱이나 내 관념이나 있다는 이른바 실아(實我)는 반야에서 볼 때는 내 몸뚱이나 내 관념도 본래가 없는 공(空)인 것이고, 그 뿐만 아니라 지 ․ 수 ․ 화 ․ 풍의 물질이라든가 또는 어떠한 주의나 이상이라든가 그런 모든 법이 원래 있지가 않으므로 실아, 실법의 집착을 파하기 위하여 일체제법이 본래 공한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아법구공(我法俱空)이라, 아(我)나 또는 법(法)이나, 아집이나 또는 법집이나, 모두가 다 함께 공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제1시교는 4아함경이나 또는 기타 소승적인 경론 가운데 들어있는 것이고 제2시교의 뜻은 주로 제부(諸部)의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에 들어 있습니다.

제삼시교(第三時敎)는 있는 것에 대한 집착인 유집(有執)과 또는 다 비었다는 것에 대한 집착인 공집(空執)을 아울러 파하기 위하여 마음 밖에 있는 법은 있지가 않고, 유(有)가 아니며 심내(心內)의 법은 공(空)이 아님을 설하여 비공비유(非空非有)인,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밝힌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상으로 볼 때는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이라, 나무나 풀이나 또는 국토나 모두가 다 본래 성불해 있다는 것이요, 법화경에서 말한 일색일향이 무비중도(一色一香無非中道)라, 조그마한 하나의 색이나 또는 한낱 냄새나 또는 맛이나 모두가 다 중도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삼시교에서 말하는 공집(空執)과 유집(有執)을 다 여읜 중도실상에서 말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런 도리는 해심밀경(解深密經)또는 화엄경(華嚴經), 법화경(法華經) 등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사량(思量)하고 비판하는 작업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 수행인의 분별시비는 시(是)나 비(非)나 간에 어떠한 것도 다 진여불성 자리에서 조명해야 하는 것입니다. 곧 진여불성의 조명을 받은 시비인 것이라야 합니다. 말하자면, 내가 있는 경우도 '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다만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한낱 가상이다' 또는 우리가 사업도 하고 무슨 일을 하더라도, '나나 너나 모두가 다 부처의 화신인 것이고 또는 정치하는 것도 파는 물건도 받는 돈도 역시 진여불성의 화현(化現)인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불자의 자세입니다. 순간 찰나도 본체를 안 여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헤아릴 때는 그것이 우리 공부와 직결이 됩니다.

 

 

제3절 천태교관(天台敎觀)

 

1. 오시교(五時敎)

 

제일화엄시(第一華嚴時)…불성도후(佛成道後) 21일간(日間) 화엄경(華嚴經)을 설(說).

제이녹야시(第二鹿苑時)…12년간(年間) 녹야원(鹿野苑) 등(等)에서 아함경(阿含經)을 설(說).

제삼방등시(第三方等時)…8년간(年間) 유마(維摩) ․ 승만(勝鬘) 등(等)의 제대승경(諸大乘經)을 설(說).

제사반야시(第四般若時)…22년간(年間) 제부(諸部)의 반야경(般若經)을 설(說).

제5법화열반시(第五法華涅槃時)…8년간(年間)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하고 일일일야(一日一夜)에 열반경(涅槃經)을 설(說)함.

 

번쇄한 감이 있으나 적어도 법상종, 천태종에서 말하는 것은 알아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천태철학은 불교를 총괄해서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교학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은 필수적으로 천태학을 해야 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께서 학승이 될 필요는 없는 것이고 세밀한 법상을 다 알 필요는 없으나 한 번씩 살펴보는 것은 상당히 참고가 됩니다. 공부할 때 막히는 것이 있을 때는 '이것은 어떤 것이구나' 하고 빨리 납득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태교학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천태종의 오시팔교(五時八敎)라, 천태종은 부처님의 일대시교를 다섯 시기로 구분했습니다. 그래서 제일시(第一時)에 화엄시(華嚴時)라,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뒤 삼칠일(三七日) 동안에 화엄경을 설했다는 말입니다. 삼칠일 곧 21일 동안에 어떻게 80권 또는 60권이나 되는 방대한 화엄경을 설했을 것인가? 의심을 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우리가 깊이 음미해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화엄경을 보통 알아듣는 우리 사람들에게만 설하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특히 젊은 세대들은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있다〔有〕는 것에 대해서만 주로 배우는 처지라 눈에 안 보이는 세계는 보통 부인하고 불신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법문은 형이하학(形而下學)적인 있는 세계와 형이상학(形而上學)적인 안 보이는 세계도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 법문은 그런 견지에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삼칠일 동안 화엄경을 설하신 것은 눈앞에 있는 사람들한테 설하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람들은 말이라는 언어의 도구를 써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만 저 천상사람들처럼 몸뚱이가 없는 존재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한낱 점쟁이라도 다른 사람 속을 좀 아는 것입니다. 그네들이 아는 것은 내나야 욕계의 범주 안에서만 좀 알 정도이나 그런 것을 보더라도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만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으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일승법문(一乘法門)인 화엄경을 천중(天衆)들이나 또는 시방삼세(十方三世)의 보살들을 위해서 설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도 안 나온 때인데 화엄경 같은 고도의 철학을 당시의 사람들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당시부터서 화엄경이 문자화되고 유포화된 것은 아니고 그 뒤에 용수(龍樹) 보살이 비로소 화엄경의 대요를 풀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엄경에 대하여 여러 가지 설화가 있습니다만 생략하겠습니다.

제이시(第二時)는 녹원시(鹿苑時)인데, 녹야원을 중심으로 중생들이 알 수 있는 정도의 범위 내에서 아공(我空)을 주로 하고 법공을 미처 말하지 않는 유교(有敎)의 가르침입니다. 녹야원 등에서 12년간 아함경을 주로 말씀을 했습니다.

제삼시(第三時)는 방등시(方等時)라 합니다. 8년간은 유마경 또는 승만경 등의 제 대승경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사시(第四時) 반야시(般若時)는 특히 공(空)사상에 역점을 두고 22년 동안이나 반야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째서 다른 때보다 더 많은 세월을 반야부를 설했는가? 그것은 중생은 다 보이는 대로 있다고만 보는 것인데, 있다는 유집(有執)을 타파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입니다. 달마(達磨)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어록을 볼 때도 주로 공사상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관(空觀)을 많이 하는 것인데 어느 분들은 공관을 하면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공관을 할 때는 절대로 무기공에 안 떨어집니다. 이론적으로 '다 공이다, 모든 것이 다 비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집착해서 그런 것이지 '진정으로 내 관념이나 내 몸뚱이나 대상이나 객관 주관이 다 비어 있다 ' 이렇게 공부해 들어갈 때는 무기공에 안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진여불성(眞如佛性) 자리는 본래 공(空)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여불성이 다만 허무하게 다 비어 있는 공 같으면 들어갈수록 공이 되어버리겠지요. 그러나 다만 공이 아닌 바로 실상(實相)이요, 바로 진공묘유(眞空妙有)이기 때문입니다. 진공 따로 있고 묘유 따로 있지 않습니다. 진공 즉 바로 묘유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관을 하더라도 계행을 청정히 하고 일체 만법이 다 바로 공(空)함을 닦아갈 때는 절대로 무기공에는 안 떨어지는 것입니다.

제오시(第五時) 법화열반시(法華涅槃時)에는 8년간 법화경을 설하고 하루 낮 하루 밤에, 열반경을 설하셨습니다. 부처님 설법을 49년 설이나 또는 45년 설을 말하나 49년 설이 더 정확하다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천태도 49년 설로 말했습니다. 그래서 대수로 50년 설법으로 말하는 것입니다. 녹야원 12년 방등 8년 반야시 22년 법화 열반시 8년, 50년 설법, 이른바 49년 설법이 됩니다.

그래서 천태교에서는 아함십이방등팔(阿含十二方等八) 이십이년반야설 (二十二年般若說) 법화열반공팔년 (法華涅槃共八年) 화엄최초삼칠일(華嚴最初三七日)이라고 50년 설을 게송화하여 외우기도 합니다.

2. 화법사교(化法四敎)

 

화법사교(化法四敎)…소설(所說)의 교의(敎義)

1) 삼장교(三藏敎)…경(經) ․ 율(律) ․ 론(論) 삼장(三藏)의 부류(部類)가 판연(判然)하고 인연생멸(因緣生滅)의 사제(四諦)를 설(說)하여 주(主)로 성문(聲聞) ․ 연각(緣覺) 이승(二乘)을 교화(敎化)함.

2) 통교(通敎)…즉공무생(卽空無生)의 진제(眞諦)를 설(說)하여 삼승(三乘)을 통(通)하여 동학(同學)시킴,

3) 별교(別敎)…이승인(二乘人)에 공동(共同)하지 않고 보살(菩薩)에 대(對)하여 대승무량(大乘無量)의 법(法)을 설(說)함.

4) 원교(圓敎)…최상이근(最上利根)의 보살(菩薩)에 대(對)하여 사리원융(事理圓融)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說)함.

 

천태종에서 오시교(五時敎)의 교설을 깊고 옅은 순서로 체계 있게 구분한 것을 화법사교(化法四敎)라 합니다. 이는 소설(所說)의 교의(敎義)로서 곧 설하는바 교의 뜻을 말합니다. 화법사교는 삼장교(三藏敎), 통교(通敎), 별교(別敎), 원교(圓敎)로 구분한 것입니다.

삼장교(三藏敎)의 삼장이란 경(經)과 계율인 율(律)과 론(論)장을 말합니다. 부처님 말씀은 경이요, 출가사문이나 불자가 지키는 행위 규범은 율이고, 부처님의 경율을 정통조사가 중생의 편의에 따라 새로 논한 것이 론입니다. 경율론 삼장의 부류(部類)가 판연(判然)하고 또는 인연 따라서 이루어지고 인연 따라서 멸해지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의 사제(四諦)를 설하여 주로 성문, 연각 이승(二乘)을 교화한 것이 삼장교입니다. 제일 녹원시로 아함경을 설하는 때에 해당되겠습니다.

통교(通敎)는 즉공무생(卽空無生)의 진제(眞諦)를 말씀합니다. 즉공이란, 있다는 것이 모두가 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현상 그대로 공이란 말입니다. 공사상에 대해서 석공(析空)과 즉공(卽空)은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공은 원소 등으로 분석하고 난 뒤의 공이 아니라 컵이면 컵, 사람이면 사람 바로공인, 즉공인 것입니다. 반야경의 공은 모두가 다 즉공입니다. 어째서 즉 공인 것인가? 인연 따라서 잠시간 이루어진 것은 실체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잠시간 그림자 같이 모양을 낸 것이지 실다운 모양이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몸은 지수화풍 사대(四大)가 합해서 되었다는데 지수화풍은 각각 무엇인가? 불경에 '지불가득(地不可得)이요 수화풍도 불가득(水火風亦不可得)'이라, 지(地)도 얻을 수가 없고 또는 물도, 불도, 풍도 얻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왜 얻을 수가 없는 것인가? 지나 수나 화나 풍이나 모두가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의 화현(化現)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공간성이 없고 물질이 아닌 진여불성이 그때그때의 연(緣) 따라서 지(地)가 되고 화(火)가 되고 수(水)가 되고 풍(風)이 되었습니다.

우리 중생은 그림자만 보는 것이니까 다만 그림자같이 있다고 하는 것이지, 투철한 안목으로 진여불성을 깨달은 차원에서 통찰한다면 있는 그대로 공(空)인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인연 따라서 생겨난 것은 순간찰나도 그대로 머물지 않습니다. 일초의 몇 억분지일도 머물지 않고 동요해서 마지않는 것들이 내 몸도 구성하고 다이아몬드도 구성한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도 내나야 탄소의 결합체 아닙니까? 탄소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탄소는 무엇인가? 탄소는 원자핵(原子核)을 중심으로 해서 6개의 전자(電子)가 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또 전자는 무엇이고 원자핵은 무엇인가? 그런 것은 하나의 파동(波動)에 불과합니다. 공간성이 없는 파동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공간성이 없는 것이 이렇게 모아지고 진동을 해서 어떠한 상(相)을 낸다 하더라도 그건 상일뿐이지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공을 몇 번 곱하거나 나누거나 보탠다 하더라도 내나야 공입니다. 제로(零)는 제로입니다. 따라서 어떻게 모양을 내든지 간에 바로 즉공(卽空)인데, 잘 모르는 사람들은 꼭 이렇게 분석한 뒤에서야 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즉공무생(卽空無生)이라, 바로 공이기 때문에 본래 낳지 않았습니다. 본래 불생불멸(不生不滅)입니다. '내가 태어났다, 나를 낳아서 우리 부모님이 좋아했다' 물론 부모가 좋아도 했겠지요. 그러나 본래에서 볼 때는 낳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이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생불멸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어느 한 가지만 투철히 알아버려도 마음이 시원해져 버립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에만 막혀도 마음이 항시 거리끼고 그림자가 생기는 것입니다.

 

‘본래무일물하니 하처야진애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리요’ 6조 혜능 대사 게송 아닙니까, 본래 아무것도 없거니 어느 곳에 티끌이 있을 것인가? 물질이나 관념이나 있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100% 못 믿으니까 닦음이 있는 것이지 공상(空相)에 투철해 버리면, 여실히 공상을 알 때는 닦음이 없습니다. 따라서 전생에 선근이 많은 사람들은 ‘즉 공이다’는 말 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공(空)자리가 그렇게 어렵기도 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22년 동안이나 고구정녕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한 어떠한 공부나 반야공(般若空)이 전제되어야 참다운 선(禪)이고 참다운 염불(念佛)이고 참다운 주문(呪文)인 것입니다. 반야공이 전제가 못되면 모두가 다 방편 설입니다. 이러한 진제(眞諦)를 설하여 삼승(三乘)을 통하여 동학(同學)시키는 가르침이기에 통교(通敎)라고 합니다.

별교(別敎)는 이승인(二乘人)에 공동하지 않고 보살에 대하여 대승무량의 법문을 설하신 것입니다. 대승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특수한 대승인에 대해서 주로 법문을 설한 가르침이란 말입니다. 화엄경도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원교(圓敎) 사상도 많으나, 주로 특수한 대승들에 대해서 설한 대문도 있습니다.

원교(圓敎)는 최상리근(最上利根) 곧 위없는 근기의 보살에 대하여 현상적인 사(事)나 또는 근원적인 리(理)나 원래 둘이 아닌, 사리(事理) 원융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설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일대사(一大事) 인연(因緣)은 중도실상의 원융무애한 도리에 있습니다. 다른 것은 여기에 이르기 위한 방편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