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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4.제2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제2절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

 

1. 돈수(頓修)와 점수(漸修)의 유래(由来)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여러 가지 문제의식 가운데 특히 우리 젊은 불자(佛子)들께서 궁금히 생각할 뿐만 아니라 불교학계(佛敎學界)에서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또 다른 나라에서까지도 불교나 동양 철학을 공부한다는 사람들은 으레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는 가장 중요한 관심사인데 그래서 우선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대해서 말씀하고자 합니다. 그건 왜 그런고 하면, 어떻게 닦아야 할 것인가? 또는 깨달음이란 어떤 것인가? 하는 깨달음과 닦음의 문제라는 것은 우리 불자들로서는 일대사(一大事) 인연으로서 우리가 꼭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너무나 문제가 커서 감히 제가 감당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만, 그런 대로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에 관한 문제는 근래에 조계종 종정을 오랫동안 지내시고 선지식으로 추앙받는 성철(性徹) 스님께서 저서인 선문정로(禪門正路)에서 보조(普照) 스님의 돈오점수 설을 비판하므로 써 세상의 관심사로 등장을 한 것 같습니다.

 

보조(普照知訥 1158-1210) 스님은 약 800년 전에 계셨던 분입니다. 한국 불교가 선교일치(禪敎一致)의 회통불교(會通佛敎) 분위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직까지 돈오점수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제기한 분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전문 학자가 아닌 참선 수자(修者)이기 때문에 교학적(敎學的)인 분석에도 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런 복잡 미묘한 논쟁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공부하는 여러분에게 혹시 참고가 될까 하여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하면 돈오점수는 보조 국사가 처음으로 말씀하였고 돈오돈수는 성철 스님께서 말씀하였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그 연원(淵源)부터 밝혀보면, 돈오돈수도 역사적으로 분명히 권위 있는 말씀이고 돈오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보조 스님께서는 비단 한국 불교역사상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대선각자(大先覺者)로 추앙을 받아온 분이며 성철 스님께서도 우리 종단의 상징인 종정 스님으로서 깊은 존경을 받는 분 아닙니까? 그분들의 위상에 다소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염려스러운 마음입니다. 따라서 우선 이렇게 생각할 때에 보조 스님이 그르다 또는 성철 스님이 잘못 해석했다고 함부로 말할 수가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런 문제에 있어서 권위 있는 인용을 하기 위해서 조사어록(祖師語錄)에 의거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2. 습마물(什麽物) 임마래(恁麽來)

습마물 임마래라, 십(什)을 송나라 속음(俗音)으로 하면 습이라 합니다. 습마물은 ‘무엇’이란 뜻이고 임마는 ‘어떻게’, ‘어찌해서’란 뜻으로 습마물 임마래란 곧 ‘무엇이 어떻게 이렇게 왔는가’라는 말입니다.

나는 대체로 무엇인가? 또는 너는 대체로 무엇인가? ‘이 무엇’ 이란 문제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우리 불교 전부를 들어서 얘기하는 말씀이나 같습니다.

조그만 티끌 하나도 잘 보면은 반야지혜(般若智慧)고, 바로 부처님의 청정법신(淸淨法身)인 것이고 잘못 보면 하나의 티끌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티끌에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잘못 보는가, 잘 보는 가에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깨닫는가 깨닫지 못하는 가에 차이가 있을 뿐이지 본래 물(物) 자체에는 조금도 차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나란 대체로 무엇인가? 이것만 해답을 바로 내려버리면 모든 문제의 풀이가 다 된다는 말입니다.

습마물 임마래는 어디에 그 연원이 있는가 하면,

南嶽懷讓 六祖慧能 初相見時, 六祖問 什麽處來 曰嵩山來 祖曰 什麽物 恁麽來

남악회양 육조혜능 초상견시, 육조문 습마처래 왈숭산래 조왈 습마물 임마래

남악 회양(南懷讓 677-744) 선사는 6조 혜능 대사로부터 법을 받은 정통 조사 중 한 분이십니다. 남악 회양이 6조 혜능 스님에게 맨 처음에 뵐 때 6조가 묻기를 “그대는 대체 어디서 왔는고?” 그러니까 남악 회양 선사가 “숭산에서 왔습니다.” 숭산은 그 당시에 노안(老安 또는 慧安 582-709? 五祖 弘忍法嗣)대사가 중생을 제도하였던 곳입니다. 그러니까 6조 혜능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습마물 임마래요?”

 

그때의 말씀이 제가 표제로 낸 습마물 임마래입니다. 무엇이 어떻게 왔는고? ‘이뭣고’ 선(禪)의 화두(話頭)도, 원래는 여기가 연원이 있습니다. ‘그 무엇인가? 내가 무엇인가?’ 에는 나(我) 자체가 천지 우주와 같이 연기법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관계가 있기 때문에 ‘그 무엇인가?’ 에, 그 가운데는 일체 존재가 다 들어갑니다.

 

따라서 ‘이뭣고’ 선(禪)할 때에 이른바 ‘시삼마’(是甚麽의 俗音)할 때는 ‘이뭣고’ 이것이, 바로 내가 무엇인가? 내 본래면목(本來面目)은 무엇인가? 이렇게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오가해서(金剛經五家解序)에 6조 스님의 해석이 있지 않습니까. ‘나한테 한 물건이 있으되 하늘을 바치고 땅을 괴고, 밝기는 해와 달보다 밝고 검기는 칠보다 검고, 이러한 것이 나와 더불어 있지만 미처 거두어 얻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有一物 無頭無尾 無名無字 上柱天下柱地 明如日黑似漆 常在勤用中 收不得者是甚麽)

(유일물 무두무미 무명무자 상주천하주지 명여일흑사칠 상재근용중 수불득자시심마)

 

이와 같이,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해야지, 그냥 상대 유한적인 것 가지고서 이것인가 저것인가 하면은 그때는 화두가 못되고 참선이 못됩니다. 분명히 습마물 임마래가 되어야 화두가 됩니다.

원래, 원문대로 하면 그 대답을 남악 회양 선사가 못했습니다. 그냥 ‘숭산에서 왔습니다. 어느 스님을 섬기다가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는 참다운 본래적인 문답이 안되겠지요. 그런 대답을 감히 6조 혜능 선사 선지식 앞에서 할 수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남악 회양 선사는 8년간이나 6조 혜능 대사를 시봉하면서 부단히 수련을 거친 뒤 자기 본 성품을 깨닫고 나서 혜능 대사께 다시 나아가 “이제는 제가 얻은 바가 있습니다.” 하고 말씀을 드리니까 “그럼 한번 말해보지”

6조 혜능 대사의 말씀 따라서 남악 회양 선사가 대답을 한 말씀이

曰 說似一物即不中 六祖問 還可修證否 讓云 修證不無 染汚即不得 六祖曰 只是不染汚 諸佛之所護念 汝亦如是 吾亦如是

왈 설사일물즉부중 육조문 환가수증부 양운 수증불무 오염즉부득 육조왈 지시불염오 제불지소호념 여역여시 오역여시

-傳燈錄南嶽章-

-전등록 남악장-

 

“설사일물 즉부중(說似一物即不中)이니다” 설사 하나라고 말씀드리더라도 맞지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어떻게 말로는 능히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의 뜻입니다. 진리란 바로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것이고 인과율(因果律)을 넘어선 것인데 어떻게 제한된 인간의 말로서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6조 혜능 스님께서 다시 묻기를 “환가수증부(還可修否)아?” 그러면은 도리어 앞으로 더 닦고(修) 증(證)할 것이 있는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 깨달아 버렸으니까 다시 닦을 것이 없으면 없다고 해야 하겠지요. 이렇게 6조가 물을 때는 벌써 마음으로 인가(印可)를 한 것입니다.

회양 선사가 대답해 드리기를 “수증불무(修證不無)나” 닦고 증하는 것이, 증명하는 것이 없지는 않습니다마는 “염오즉부득(染汚即不得)이니다” 거꾸로 오염이라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오염즉부득이라, 이것이 ‘오염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오염이란 본래 평등무차별(平等無差別)의 자리, 일여(一如) 평등의 진리를 차별심을 두고서 자타(自他), 시비(是非), 고하(高下), 계급(階級)을 논한다는 말입니다. 원래 내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본래 성품에는 차서(次序)가 없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 분상에서 중생견(衆生見)으로 자타, 시비, 계급, 차서가 있는 것이지 무명(無明)을 떠난 자리에서는 그것이 없습니다. 높낮이도 없고 계급적인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분상에서는 마땅히 이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높낮이가 있고 나와 남이 있고 또는 계단을 밟아가는 차서가 있다고 생각하면 옳지가 않습니다. 이 ‘염오부득(染汚不得)’이라는 말을 깊이 명심해 두시길 바랍니다. 조사어록을 보면 이런 대목이 많이 나옵니다.

 

‘염오즉 부득이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니까 6조 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다만 바로 불염오(不染汚) 이것이 제불지소호념(諸佛之所護念)이라’ 모든 부처님이 지키고 억념(憶念)하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즉 진리에 합당하니까 모든 부처님이 이것을 옳다고 긍정하고서 지키신다는 말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뒤에 닦음도 있고 증(證)함도 있지마는 다만 오염을 시키지 않고 곧 고하, 시비, 계급을 논하지 않고서 닦는 것이 제불이 호념하는 바라, 그대도 역시 그렇고 나도 역시 그러하도다’ 전등록(傳燈錄) 남악장(南嶽章)에 있습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깨닫지 못했으면 이런 말씀을 할 수 없습니다. 비록 깨달았다 하더라도 습기(習氣)까지 몽땅 떼어버리는 완벽한 깨달음이 아직은 못됐기 때문에, 닦음은 또다시 있어야 하고 또한 수증(修證)에 깊고 옅은 심천(深淺)이 있기 때문에 마땅히 닦음이 있긴 있지마는, 그것을 높다 낮다 또는 보살 몇 지(地)라든가 하는 것을 관념에 두어서는 참다운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이 못됩니다. 우리는 이런 자리를 분명히 느껴야 합니다.

무염오수행이란 것은 분명히 느끼지 못하면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돈오돈수라든가 돈오점수에 관해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굉장히 미묘한 문제로서 논쟁거리가 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중하고 허심탄회한 마음에서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3. 육조(六祖)의 돈오돈수(頓悟頓修)

 

돈오돈수(頓悟頓修)는 우리가 흔히 상식으로 알듯이 성철 스님이 맨 처음에 말씀한 것이 아니라 이미 육조단경(六祖壇経) 제7 남돈북점장(南頓北漸章)에 나와 있습니다.

단경(壇經) 자체도 문제는 분명히 있습니다. 돈황본(敦煌本)이라든가 혜흔본(惠昕本)이나 종보본(宗寶本)이니 덕이본(德異本)이 다 각기 차이가 있는 것을 보더라도 문제가 있다는 증좌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래도 역시 우리가 선(禪)하면 육조단경을 권위있는 전거(典據)로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단경 제7 남돈북점장에는 주로 하택신회(荷澤神會 685-760)대사가 북종(北宗)을 비판하고 남종(南宗)을 세우는 남종정시비론(南宗定是非論)의 논쟁같은 말씀이 보입니다. 이른바 남쪽인 6조 대사는 문득 깨닫는 법인 돈교(頓敎)라고 찬양하고 북쪽 신수(神秀 ?-706) 대사는 점차로 닦아나가는 점교(漸敎)로서 본질적인 가르침이 미처 못된다고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壇經第七 南頓北漸章, 師曰 無非 無痴 無亂 念念般若觀照 常離法相 自由自在 縱橫盡得 有何可立 自性自悟 頓悟頓修 亦無漸次 所以不立 一切法 諸法寂滅 有何次第

단경제칠 남돈북점장, 사왈 무비 무치 무란 염념반야관조 상리법상 자유자재 종횡진 득 유하가립 자성자오 돈오돈수 역무점차 소이불립 일체법 제법적멸 유하차제

 

 

 

 

단경 제7 남돈북점장에 6조 혜능 스님의 말씀이 무비(無非) 무치(無痴) 무란(無亂)이라, 그릇됨이 없고 어리석음이 없고 어지러움이 없다는 것은 내나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을 말한 것으로, 그릇됨이 없는 것은 바로 계율을 말하고 어리석음이 없으니까 지혜를 말하고 어지러움이 없으니까 선정을 말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을 닦아서 염념반야관조(念念般若觀照)라, 생각생각에 반야의 지혜를 관조한다는 말입니다. 반야의 지혜는 제법공(諸法空) 지혜입니다.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의 지혜입니다.

생각생각에 제법공 지혜를 닦아나가면서 상리법상(常離法相)이라, 항상 모든 법이 실제로 있다는 상을 여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때는 자유자재 종횡진득(自由自在 縱橫盡得)이라, 아무런 막힘이 없이 자유자재하고 종횡으로 모두를 다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로 비추어 보아 모든 법이 있다는 실아(實我), 실법(實法)을 떠나서 즉 아공(我空), 법공(法空)이 되어서 볼 때에는 자유자재하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다 얻는 것이기 때문에, 유하가립(有何可立)이리오, 무엇을 새삼스럽게 세울 것인가?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좋다 궂다 하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겠지만, 평등무차별의 자리에서 볼 때는 무엇을 어떻게 세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일진법계(一眞法界)라, 천지 우주가 바로 부처님 몸인데 어떻게 어디에다가 무엇을 세우겠습니까?

 

자성자오(自性自悟)면 돈오돈수(頓悟頓修)라, 본래 내 성품을 내가 스스로 깨달아 버렸다는 말입니다. 나라고 생각할 때 이 몸뚱이가 참 나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자기 성품을 깨달으면은 돈오돈수라.

여기에 돈오돈수의 말씀이 있습니다. 제가 널리 못 봐서 그 이전에는 잘 모르겠으나 이것이 처음이라 생각합니다. 6조 혜능 스님 말씀으로 분명히 돈오돈수가 있습니다.

 

돈오돈수하니 역무점차(亦無漸次)라, 돈오돈수가 되었으니 역시 점차가 없다. 순서가 없고 높고 낮고 또는 어떠한 계급적인 차별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소이불립 일체법(所以不立 一切法)이라, 어느 한 가지 법도 세울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제법적멸(諸法寂滅)하니 유하차제(有何次第)리오, 제법이 본래 적멸해서 하나의 번뇌도 없거니 어떻게 차제를 세울 것인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4. 보조(普照)의 돈오점수(頓悟漸修)

 

그러면 요새 돈오점수(頓悟漸修)파라고 비판하는 보조 스님은 어떻게 말씀했는가? 보조어록(普照語錄)에 있는 보조 스님의 돈오에 대한 해석입니다.

頓悟

돈오

凡夫迷時 四大爲身 妄想爲心 不知自己靈知是眞佛也 .....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元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即與諸佛 分亳不殊 故云頓悟也.

범부미시 사대위신 망상위심 부지자기영지시진불야 일념회광 견자본성 이차성지 원무번뇌 무루지성 본자구족 즉여제불 분호불수 고운돈오야

 

 

 

‘범부가 미혹(迷惑)할 때는 지, 수, 화, 풍 사대(四大)를 몸으로 하고 망상을 마음으로 한다.’ 우리 중생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대(四大) 원소로 합해진 이것을 자기 몸이라고 하고 자기 망상을 자기 마음이라고 한다는 말입니다.

 

‘차별을 떠나서 신령스럽게 깨달은 자기 마음이 바로 참다운 부처임을 미처 모르다가 밖으로 향하는 대상적인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본성을 볼 때에, 견성한 자리에서 볼 때는 원래 번뇌가 없고, 번뇌에 때 묻지 않은 지성(智性)이 본래 스스로 원만히 갖추어져 있다. 그리고 이 자리는 바로 부처와 더불어서 눈곱만큼도 차이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자리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삼명육통(三明六通)을 다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자리나 삼세제불의 성품공덕이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깨달아서 얻은 그런 자리란 것은 본래에 있어서는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돈오(頓悟)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보조 국사도 단경(壇經)에서 말하는 돈오의 도리를 분명히 밝힌 분이라고 볼 수가 있겠지요. 보조 국사는 6조 대사 훨씬 뒤에 나신 분이기 때문에, 단경도 숙독해서 많이 보셨고 또 단경을 대혜어록(大慧語錄)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전거로 삼았습니다. 그러니 돈오의 뜻 정도를 모를 리가 만무하겠지요.

그렇다면 보조가 주장하는 점수(漸修)는 무엇인가? 돈오를 알았으면 어째서 또 점수를 말했던가? 보조가 점수를 말한 대목입니다.

漸修

점수

頓悟本性 與佛無殊 無始習氣 難卒頓除 故依悟而修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故云漸修也

돈오본성 여불무수 무시습기 난졸돈제 고의오이수 점훈성공 장양성태 구구성성 고운점수야

- 보조(普照) -

 

돈오본성(頓悟本性)이면 여불무수(與佛無殊)나, 문득 자기 본성을 깨달으면 부처와 더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지마는,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無始) 이래로 우리가 익혀 내려온 번뇌의 습기가 있다는 말입니다.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고 천지와 더불어서 둘이 아니라는 그런, 때 묻지 않은 진리를 분명히 느끼고 깨달았지마는 가사, 우리가 풀을 뽑지 못하고서 우듬지만 베어버리면은 그냥 다시 또 뿌리가 나오듯이, 이것이 구생기(俱生起)번뇌 아닙니까,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우고 이런 것은 분별기(分別起)번뇌로서, 분별기번뇌는 물론 단박에 끊어졌다 하더라도 구생기번뇌는, 전생과 더불어 지어온 본능적인 번뇌는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 큰스님들도 역시 법은 분명히 아는데 행위로 볼 때에는 문제가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것은 습기를 미처 못 녹인 때문입니다. 깊은 선정(禪定)을 미처 얻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해탈에 있어서 꼭 지혜해탈(智慧解脫), 선정해탈(禪定解脫)을 분명히 구분하여 생각해야 앞으로 공부하는데 방황하지를 않습니다. 지혜해탈과 선정해탈을 분명히 모르면 암증선이라, 암중모색을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여러 군데서 봤습니다. 일본 선서(禪書)에서 보면, 중흥조라고 할 수 있는 그런 분도 역시 암중모색하는 대목이 있다는 말입니다. 일본 임제종의 중흥조라고 하는 백은(白隱 1685-1786)선사는 선관책진(禪關策進)을 아주 굉장히 위대한 책이라고 찬양하였지만 이 분도 자기가 증오(證悟)한 것에 관해서 ‘대오십팔번(大悟十八番)하니 소오부지수(小悟不知數)라’ 큰 깨달음은 18번이나 있고 작은 깨달음은 수없이 많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이 진짜 깨달음인가? 우리가 회의를 갖겠지요.

 

따라서, 공부하는 우리 출가사문들은 특히 수증(修證)문제, 어떻게 닦고 증(證)할 것인가에 있어서, 문득 부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자리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무시습기(無始習氣)라, 과거 숙세 무시이래로, 무시무명으로부터 오염된 우리 본능을 꼭 생각해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나이가 벌써 황혼입니다마는 그 무시(無始) 번뇌가 얼마나 깊은가를 그야말로 참 뼈저리게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인간의 욕심 뿌리는 얼마나 깊고 진심(嗔心) 뿌리는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 말입니다. 남들이 저 같은 사람을 칭찬을 할 때는 속으로 굉장히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과연 저한테 욕심 뿌리가 다 가셨는가? 또는 진심(嗔心)의 뿌리는

다 뽑혔는가? 이렇게 반성할 때는 분명히 다 못 여읜 줄을 통감하게 됩니다.

욕심 뿌리가 다 나가고 진심(嗔心)뿌리가 다하고 치심(痴心)뿌리가 다했을 때는 그냥 즉시에 바로 무량공덕을 갖추어서 분명히 삼명육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경을 보면 다 그렇습니다.

무시습기가 난졸돈제(難卒頓除)라, 졸지에 문득 제거하기가 쉽지가 않다는 말입니다.

 

어록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견도여파석(見道如破石)이요’ 우리가 진리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돌을 깨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마치 돌을 깰 때는 순간에 파싹 깨지듯이 견도할 때는 문득 활연대오(豁然大悟)해서 훤히 깨달아 버리지만 ‘수도여우사(修道如藕絲)라’ 우리가 연뿌리를 딱 분지르면 연뿌리라는 것이 실이 있어서 그냥 안 분질러집니다. 끈끈하니 실이 나옵니다. 그와 똑같이 수도(修道)할 때는 쉽지가 않습니다. 수도도 돌 깨듯이 되는 것이 아니라 습기를 녹일 때는 오랫동안 두고두고 녹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선방에서 오래 공부 정진한 구참 스님들은 제가 느끼고 있는 그 사무친 것을 분명히 느낄 것입니다. 이놈의 욕심이 뿌리가 얼마나 긴가 말입니다. 공부를 좀 했다 하더라도 기분이 사나울 때는 그냥 또 진심(瞋心)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삐죽이 나오게 됩니다.

 

습기, 이것은 졸지에 바로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의오이수(依悟而修)라,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는다는 말입니다. 깨달은 그 자리에서 분별 시비를 떠나서 닦는 무념수(無念修)입니다. 본래는 석가와 나와 둘이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달마와 나와 다른 것도 아닌 것이고, 석가가 높고 내가 낮은 것도 아닌 것이고, 본래 분상에서는 둘이 없는 자리를 느끼고 닦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로 무염오(無染汚)수행이라 합니다. 무념수와 무염오수행은 같은 뜻입니다.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으면 점훈공성(漸熏功成)이라, 점차로 훈수(熏修)해서 공덕이 성취가 된다는 말입니다.

훈습(熏習)은 번뇌가 우리 잠재의식에 가라앉는 것이고 훈수(熏修)는 우리가 부처님의 지혜로 해서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 구분이 있습니다.

이렇게 훈수하면, 깨달은 그 자리를 안 놓치고서 닦아 나갈 때는 공덕이 성취가 되어서 장양성태(長養聖胎)라, 성자의 태를 오랫동안 길러 나간다는 말입니다. 성인 자리에서는 자타, 시비, 구분이 다 없는 자리라고 우리가 분명히 느껴버리는 그런 성태(聖胎)를 두고두고 오랫동안 닦아 나가는 것입니다. 장양성태는 우리가 공부하는 분상에서 지킬 중요한 성구(聖句)입니다. 사량(思量) 분별로 닦는 것이 아니라 무념수(無念修)로 닦는 수행을 장양성태이라 합니다.

 

이렇게 닦아나갈 때는 구구성성(久久成聖)이라, 두고두고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닦아 나가서 비로소 참다운 구경지(究竟地)인 성인(聖人)의 지위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자(聖者)와 범부의 한계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문득 깨닫는 그 자리부터서 성자라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면 진여불성 자리를 현관(現觀)이라, 바로 현전에 증명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때는 벌써 성자입니다. 그러나 불지(佛地)를 성취한 성자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습기 때문에 두고두고 일구월심으로 닦아야 참다운 구경각(究竟覺)을 성취하기 때문에 고운점수(故云漸修)라, 고로 점차로 닦는다고 한다는 보조국사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도리는 화엄경에서 말씀한 도리하고도 똑같고 또는 달마 때부터서 6조 혜능까지의 말씀하고도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돈오돈수란 말도 단경에 있기 때문에 ‘돈오돈수하고 돈오점수는 근본적인 차이다’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르겠지만 무염오수행(無染汚修行) 도리를 분명히 느낀다면 하등의 논쟁거리가 될 만한 차별은 없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뒤에 또 들겠습니다.

 

5. 돈점(頓漸)

 

頓漸

돈점

師謂衆曰 法本一宗 人有南北 法即一種 見有遲疾 何名頓漸 法無頓漸 人有利鈍 故名頓漸

사위중왈 법본일종 인유남북 법즉일종 견유지질 하명돈점 법무돈점 인유이둔 고명돈점

 

 

- 단경(壇經)-

 

그러면 『단경(壇經)』에는 점수(漸修)라는 말이 없는 것인가? 단경에도 있습니다. 다만 돈오점수라고 표현하지는 않았으나 의미로 봐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단경에서 6조 대사가 대중을 위해서 말씀하시기를 ‘법(法)은 본래 하나의 종지(宗旨)이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 따라서 남북이 있을 뿐이다’ 고 하였습니다. 법은 본래 종지가 하나고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자리 하나지만 다만 사람의 근기와 선근 따라서 잘나고 못나고 어리석고 총명하고의 차이가 있다는 말입니다.

 

‘법은 본래 하나의 성품이지만, 보는 견해에 따라서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니 무엇이 돈(頓)이고 무엇이 점(漸)인가?’ 무엇이 문득 아는 것이고 또는 점차 아는 것인가? ‘원래 법에 있어서는 돈법과 점법이 없으나, 사람의 근기에는 날카로움과 둔함이 있다. 고로, 돈과 점이라는 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을 볼 때는 6조 혜능 스님도 분명히 돈점을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석가모니 말씀이나 6조 혜능 스님 말씀이나 말 표현에 지나치게 걸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대의(大義)를 알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돈점에 대해서 『능엄경』에 있는 말씀입니다.

 

頓漸

돈점

理即頓悟 事非頓除 乘悟倂消 因次第而盡

리즉돈오 사비돈제 승오병소 인차제이진

-능엄경(楞嚴經)-

 

『능엄경(楞嚴經)』은 선수(禪髓)라고도 합니다. 이른바 선법(禪法)의 골수란 뜻이지요. 공부하는 분들이 점차로 닦는다든가 장애를 없앤다든가 하는 것은 능엄경을 참고로 하면 별로 헤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능엄경』 같은 선에 관한, 여러 가지 점차 수증에 관한 중요한 말씀을 무시해 버리면 공부할 때에 방황도 많이 하고 또는 그릇 해석도 할 수가 있습니다.

 

『능엄경』에 있기를 ‘리즉돈오(理即頓悟)라’ 우주의 본체적인 원리는 문득 깨닫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불교를 교리적으로 공부할 때는 리(理)와 사(事)를 구분하여 생각해야 하겠지요. 리사가 무애(無碍)라, 원래 둘이 아니겠지만 중생차원에서 볼 때는 본질적인 리(理)와 또는 현상적인 문제는 사(事)인데 ‘사비돈제(事非頓除)라’ 현상적인 상대 유한적인 그런 문제는 문득 제거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승오병소(乘悟倂消)라’ 깨달음에 편승해서, 마치 바다를 건널 때 배를 타고 가야 건널 수가 있듯이 깨달음에 편승해서 닦아나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차제이진(因次第而盡)이라’ 차제에 따라서 다 끊어진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조사어록이나 또는 선지식들 말씀을 들을 때는 그 말씀을 경직된 마음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어찌 그런고 하면, 조사 스님들 말씀들은 으레 노파심절에서 우리 중생들이 그때그때 어떤 문제에 막혀 있는가? 무슨 문제에 고민하는가에 따라서 간절히 주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점수(漸修)에 치우쳐서 자꾸만 계급을 따지고 고하, 심천을 가리는 사람들한테는 돈오돈수로써 마땅히 분별을 쳐부수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본래가 부처인데 닦을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는 분들한테는 점차로 닦아 나가는 점수를 역설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도리를 느끼고서 법문을 이해해야 합니다.

6. 견성(見性)

다음에는 견성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견성을 『단경(壇經)』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見性

견성

若悟自性 亦不立菩提涅槃 亦不立解脫知見 無一法可得 方能建立萬法 若解此意 亦名佛身 亦名菩提涅槃 亦名解脫知見 見性之人 立亦得 不立亦得 去來自由 無滯無碍 應用隨作 應語隨答 普見化身 不離自性 即得自在神通 遊戱三昧 是名見性

약오자성 역불립보리열반 역불립해탈지견 무일법가득 방능건립만법 약해차의 역명불신 역명보리열반 역명해탈지견 견성지인 립역득 불립역득 거래자유 무체무애 응용수작 응어수답 보견화신 불리자성 즉득자재신통 유희삼매 시명견성

-단경(壇經)-

‘만일 자성(自性)을 깨달으면, 보리(菩提) 열반(涅槃)이란 것도 세울 수가 없고’ 모두가 하나의 평등무차별의 진여불성 세계인데 보리고 열반이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고도 할 필요도 없고 어느 법이라고 특별히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진실로 일체 만법을 세울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해석할 때에는, 바로 그것이 부처의 몸인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한 법(法)도 세울 수가 없고 느낄 수도 없는 자리,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고 또는 무슨 법이고 만법이고 이것이 모두가 다 하나의 진리거니 어느 것도 세울 것이 없는 이것을 우리가 이대로 해석할 때는 이것이 바로 부처의 몸이고, 부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바로 보리고 열반이고 해탈지견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견성한 자리에는 어느 것도 가히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조금도 막힘이 없고 거리낌이 없다. 그래서 하는 짓 모두가 다 걸림이 없이 여법히 행동하고 또한 누가 물으면 조금도 걸림 없이 척척 진리에 맞게 대답하고 또한 두루 화신을 나투어 상대적인 몸을 나타낸다 하더라도 자성을 떠나지 않고, 즉득자재 신통유희 삼매(即得自在 神通遊戱三昧)라’ 모두가 다 조금도 조작(造作)이 없는 이른바 임운등등 등등임운(任運騰騰 騰騰任運)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불교를 공부할 때 조작(造作)이란 말과 임운(任運)이라는 상대적인 말을 기억해 두면 편리합니다. 우리 중생이 애쓰고 하는 것을 조작이라하고, 깨달은 분들이 자기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 걸림이 없는 자리를 임운이라 합니다.

깨달은 분상에서는 그야말로 참, 임운등등 등등임운이라, 당당하지마는 조금도 막힘이 없고 누구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달마한테 꿀릴 필요도 없고 석가한테 꿀릴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증오(證悟)를 했다 하더라도 불성(佛性)만 깨달았을 뿐인 것이지 때 묻어 있는 다생겁래(多生劫來)의 습기까지는 다 못 녹였다는 그런 점은 또 우리가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시명견성(是名見性)이라, 이것이 바로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세울 것도 없고 고하, 시비도 없는 임운등등 등등임운으로 신통유희 삼매라, 이것이 참다운 견성이라는 말입니다. 같은 견성에도 견성한 그 자리, 근기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그러기에 또 문제가 복잡합니다. 생각을 깊이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세존(世尊)께서는 보리수 아래에서 견성하실 때에 모든 것을 다 깨달은 구경각(究竟覺)을 그대로 성취를 한 것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심심미묘(甚深微妙)해서 부처님 깨달음까지도 시비를 거는 분이 있습니다. ‘수하성도(樹下成道)하신 부처님 깨달음도 아직 완전무결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산에 있는 총림방중(叢林房中)에 다시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는 진귀조사(眞歸祖師)한테 법을 물어서 비로소 완전히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학설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참 골치가 아픈 문제입니다.

 

또 이런 학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국승가(韓國僧伽)에서는 상당히 권위있게 흘러오고 있습니다. 지금 전거(典據)로는 사굴산(闍堀山) 개조(開祖)인 범일(梵日 810-889) 대사가 이런 말씀을 했다고 선문보장록(禪門寶藏錄: 1293 高麗天頙著)에 나와 있습니다. 중국이나 또는 인도에는 없는 그런 학설이 한국 승가에서는 상당히 권위 있게 전수가 되었습니다. 특히 이조 말엽에 백파(白坡 1767-1852) 스님 같은 분은 이 학설을 굉장히 권위 있는 학설로 인용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 학설을 우리는 하나의 상징적인 것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중국에나 인도에서도 전거가 없는 것을 한국에서 비로소 발설했다는 것이 나쁜 쪽으로 비판이 안 되고 상징적으로 좋게 해석이 되겠지요.

아무튼, 깨달음도 여러 차이가 있습니다. 갑이란 사람 깨달음 또는 을이란 사람 깨달음이 물론, 평등무차별의 불성 자리는 똑같으나 얼마만치 습기를 많이 녹이고 깨달았던 가의 차이입니다.

깨닫는 문제의 심천(深淺)은 역시, 가장 권위 있는 전거로는 화엄경의 십지론(十地論)으로, 보살 초지부터서 2지 3,4지 10지에 올라가서 구경각 불지(佛地)에서 성불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것이 근기 따라서 보살 초지만 깨닫는 분도 있고 또는 2지를 깨닫는 분도 있고 또 하나 3,4지까지 깨닫는 분도 있고,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견성에 대해서 말씀을 하다 말았습니다만 이제는 견도(見道)라, 이것도 역시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견성, 견도는 어떻게 차이가 있는 것인가? 이런 문제도 조사어록에는 조금 달리 나와있다 하더라도, 뜻을 깊이깊이 본질적으로 해석을 하여야 합니다. 문자란 것이, 착(着)해버리면 큰 병이 되지만 착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술술 다 풀려가는,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임운자득(任運自得)이 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