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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6. 제8장 수도(修道)의 위차(位次)

 

제8장 수도(修道)의 위차(位次)

 

것이 수행의 단계, 즉 수도(修道)의 위차(位次)입니다.

금생(今生)번뇌(煩惱) 뿐만이 아니라 과거 무수생의 번뇌, 그래서 여러 가지 수행법이 많이 있습니다. 복잡해서 『능엄경(楞嚴經)』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복잡합니다만 그런 저런 가운데서 가장 쉬운 것을 여기다가 이렇게 유식(唯識) 5위(五位)라 유식이라는 것은 오직 유(唯)자, 알 식(識)자 아닙니까. 이것은 유심(唯心)이나 오직 마음뿐이다. 오직 식뿐이다. 그런 말하고 똑 같은 뜻입니다. 우주는 오직 마음 식(識)뿐입니다.

 

중생은 겉만 보니까 우리 마음은 못보고 물질만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어르신들은 공부를 많이 하셔서 정말로 물질이 있지 않다는 색즉공(色卽空)이라, 물질이 바로 공이라는 것을 자꾸만 생각을 하십시오. 화두(話頭)로 해서 물질이 공이라는 것을…, 물질은 바로 공입니다. 분석한 뒤에 공이 아니라 바로 공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쪼개고 쪼개서 공이 아니라 바로 공인데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실 물질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동(動)해서 이렇게 진동해서 선회해서 모양만 보일 뿐이지 마치 횃불을 돌리면 불 바퀴 둥글게 보이듯이 물질은 그와 똑같이 이렇게 빙빙 도니까 물질로 보이는 것이지 사실 물질이 아닙니다. 색즉공을 분명히 믿으셔야 합니다.

 

 

 

제1절 유식오위(唯識五位)

 

유식(唯識)은 심(心) 본체(本體)의 전변(轉變)을 떠나서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다고 하는 설로서 곧 우리들이 자기의 심외(心外)에 있다고 하는 물심(物心)의 모든 현상(現象)은 우리들의 제8식 그 자체가 주관(主觀:見分)과 객관(客觀:相分)으로 변(變)하여 나타나서, 인식의 대상과 같은 모습을 심내(心內)의 영상(影像)으로써 비쳐 떠올려 실재(實在)인 것처럼 인정하는데 불과하다고 한다. 인식의 대상이 되는 물건자체[本質]는 아뢰야식(阿賴耶識)중에 섭지(攝持)하는 종자(種子)로부터 변(變)하여 생긴 것이기 때문에, 식(識) 이외에는 실재(實在)는 없다고 한다. 이것을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하고, 또 만유(萬有)는 식(識)에서 변(變)했다고 하는 의미로 유식소변(唯識所變)이라고 한다.

‘불교학대사전’

 

 

 

 

1. 자량위(資糧位)

 

 

자량위(資糧位)라. 자량위를 삼현위(三賢位)라고도 합니다. 부처님 법문을 딱 믿고서 그렇게 되고자 애쓴단 말입니다. 정말로‘나’라는 것도 허망하고‘너’라는 것도 허망하고 물질도 허망하고, 허망한 것을 자꾸만 생각하고 책도 읽고, 명상(暝想)도 하고, 염불(念佛)도 애쓰고 해야 합니다.

 

노자(老子)의 말씀과 같이 우리 인생은 결국 머나먼 나그네길입니다. 우리는 지금 성불이라 하는 멀고 먼 고향 길을 가는 것입니다. 미끄러지고 넘어지고 하겠지만 결국 성불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의 고향인 성불로 갈려고 생각하면 준비가 필요합니다. 성불의 준비가 여기 있는 자량위(資糧位)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러 가지 자량을 거기에 따르는 재료를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참선(參禪)도 해보고, 염불(念佛)도 해보고, 경(經)도 읽고, 또 고행(苦行)도 해보고, 단식(斷食)도 해보고, 여기 자량위에서 하여튼 성불을 하고자 하는 여러 가지 이래저래 자기한테 맞는 행법을 찾아 공부합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좋은 점이 범부보다는 좀 앞서지요. 욕심도 그때는 누르려고 해보고, 그때는 삼현위(三賢位)라. 현자(賢者)의 위입니다.

성자(聖者)는 억제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하는 행동이 모두가 법도(法道)에 딱 맞는 것입니다.

현자(賢者)는 법도에 맞도록 애쓰고 지킨단 말입니다. 욕심(慾心)도 누를 수가 있고, 진심(嗔心)도 누를 수가 있습니다.

범부(凡夫)는 못 누르지요. 누르는 정도가 희박해서 조금쯤은 몰라도 아무튼 현자는 악도 눌러서 나쁜 짓을 않고, 성인군자(聖人君子) 같은 성자는 미처 못돼도 우선 죄악도 안 범하고 애쓰고 행하는 것입니다.

 

2. 가행위(加行位)

 

그렇게 해가다 가행위(加行位)라. 이때는 법문도 확실히 알고,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 천지우주는 본래 청정한 눈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의 불성(佛性)이다. 이렇게 확신이 서면 그때는 결단심(決斷心)을 내서,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내가 집에서만 해서는 잘 안되겠구나, 그래서 사흘이나 일주일이나 오로지 공부만을 해야 되겠다. 이렇게 오로지 하는 공부가 가행위입니다.

즉 어려운 말로 하면 가행정진(加行精進)입니다.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삼칠일(三七日)이고 애쓰고 오로지 밀어붙이는 것입니다.

하다 말다 하다 말다 하는 것은 일상생활인 것이고, 그래서는 결국 우리가 본래 부처이지만 불심(佛心)하고 하나가 못됩니다. 이따금씩 불심을 생각하면 어디로 간 곳이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그것을 좀 더 붙들어 잡기 위해서는 오로지 해야 하기 때문에 사흘이고 며칠이고 오직 공부만을 합니다. 보통은 사흘, 일주일 또는 21일 또는 49일 동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저희 출가 수행자는 1년 동안에 두 번 3개월씩 그렇게 하지요. 더하려면 3년도 딱 배겨서 산문 밖을 안 나가고 정진만 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아무리 둔한 사람도 부처님만 자꾸 염하니까 그때는 부처님에 가까워질 수밖에는 없습니다. 이렇게 하는 과정이 즉 말하자면........

이렇게 오로지 공부하다 보면 앞서 언급했습니다만 마음이 시원해 옵니다. 몸도 시원합니다. 마치 무슨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몸이 시원해 온단 말입니다. 이렇게 시원해 오면 사실은 몸이 좀 피곤해도 부처님만 생각하면 피로가 순식간에 싹 가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느낌이 오는데 그래도 더 공부를 하면 다스울 난(煖)자, 난법(煖法), 이런 경계는 그냥 했다 말았다 하면 잘 못 나오는 것입니다. 적어도 오랫동안 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희 같이 출가해서 승복을 입었다 하더라도 정진하는 정도가 모호하다거나 업장(業障) 관계(關係)라든지 또는 환경(環境)이 나쁘면 몇 년 동안 공부한다 하더라도 이런 시원한 경계(境界)를 잘 못 맛본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아무튼 마치 전류에 감전된 것같이 찌르르 하니 전신이 시원해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쉬지 않고 더욱 정진해 가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이마 앞에 가서, 이마 정(頂)자, 정법(頂法)이라, 가행위의 두 번째인 정위(頂位)에 오면 그때는 욕심은 차근차근 줄어옵니다. 그때는 욕계로 해서는 끝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욕심의 마지막 끄트머리가 아니라 욕심을 떠나는 끄트머리 단계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때는 누가 좋은 물건을 사용해도 그렇게 별로 갖고 싶지 않고, 음식도 그때는 먹으나 마나 합니다. 이런 때가옵니다. 하도 몸도 시원하고 마음이 시원하기 때문에 그때는 물질이나 음식이 별로 생각이 없습니다.

이러한 때는 시원해 옴과 동시에 어렴풋이 광명이 비춰 옵니다. 광명이 말입니다. 아주 맑은 달이 이렇게 줄어지고 이렇게 커지곤 합니다. 이런 때가 오면 마치 천지우주의 모든 기운이 자기 몸을 향해서 오는 기분입니다. 그러면 힘도 남이 보면 비약해 보이기도 하고 훨씬 자기 이상의 힘을 쓸 수가 있는 것이지요.

 

이렇게 되어 가다가도 안 쉬고 더 나가면 그때는 인법(忍法)이라. 참을 인(忍)자, 인법까지 되어 놓으면 그때는 별로 큰 후퇴는 없습니다. 정법까지는 애쓰고 하던 참선이나 기도를 놔버리면 그냥 원래대로 후퇴합니다만 인법(忍法)에서는 너무나 많이 하여 보았으므로 그것이 습관성이 되어 별로 후퇴가 없습니다.

 

참을 인(忍)자, 인법 다시 말하면 앞서 보았던 심월(心月), 마음 심(心)자, 달 월(月)자입니다. 그런 광명기운이 더 커지고 줄어들고 해서 그때는 우주에 꽉 들어차 버리는 그런 기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되어가다가 안 쉬고 더 나아가면, 여기서 게으름 부려서 그냥 두어버리면 안되겠습니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그때는 하나의 달, 심월광명(心月光明)이 차근차근 그 빛이 그야말로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띠어 오는 것입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옵니다.

 

금색광명이 트여 온 그런 광명을 탁 보는 단계를 가리켜서 이제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지요. 성자(聖者)는 아직 못되었다 하더라도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높은 법(法)입니다. 인간 세(世)자, 차례 제(第)자, 한 일(一)자, 법 법(法)자, 세제일법(世第一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세상에서는 가장, 우리 마음으로 봐서 가장 높은 단계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맹자(孟子)나 그런 분들은 이런 단계에 올랐겠지요. 그 이는 성자(聖者)가 아니라 현자(賢者)이니까.

이렇게 해서 이 단계를 넘어서 우주가 확 열려서 천지우주가 그야말로 부처님 광명으로 충만 되어 버려야 이른바 참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 거짓말로 견성오도가 아니라, 교만한 사람들은 마음이 좀 열리면 거짓말로 견성오도 했다 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정말로 견성오도 자리가 이제 앞서 말씀드린 천지우주의 광명이 자기한테도 감득이 되고 이른바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천지우주가 광명 속으로 다 들어가 버리는 것입니다. 별이고 무엇이고 모두가 다 그렇게 되어 버려야 그때가 이제 참다운 견성오도가 되겠지요.

이렇게 되는 것이 결국 성자가 가는 길입니다. 우리 인간은 여기에까지 가야 비로소 내 고향에 왔구나. 아! 그때는 안심입명(安心立命)이 되는 것입니다. 그 전에는 항시 마음이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일반 범부중생은 가행위(加行位), 즉 4가행범부위(四加行凡夫位) 여기까지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3. 통달위(通達位)

 

여기서도 안 놓고 공부를 해서 나아가면, 계율(戒律)도 바르고 음식도 함부로 안 먹고 정진해 나아가면 그때는 순간 찰나에 천지우주가 광명으로 환하면서 통달위(通達位)라. 통달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때는 경(經)은 실지로 별로 안 배웠지만 경을 보면 쭉쭉 이렇게 다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단계가 즉 말하자면 견성오도(見性悟道)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와 같이 좀 되었다 하더라도 공부가 그걸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되었지만 아직 우리 번뇌(煩惱)의 습기(習氣) 그 종자(種子)가 남아 있습니다. 습기 말입니다.

 

금생에 지은, 금생에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하고, 잘 못 느낀 것은 이제 다 사라져버렸다 하더라도 과거(過去)전생(前生)에 지은 업(業)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인간은 과거에 낳고 죽고, 낳고 죽고 무수생(無數生)을 되풀이 하면서 그때그때 사람도 죽이고 살생(殺生)도 하고 남을 배신(背信)도 하고 그러한 것들이 우리 잠재의식(潛在意識)에는 다 들어 있습니다.

 

석가모니 같은 분도 과거 전생에는 배신도 하고 살생도 많이 했던 것입니다. 어떠한 누구나가 개도되었다, 소도 되었다, 무수 만생 동안 그러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금생에 나와서 지은 번뇌는 견성오도와 더불어서 다 사라진다 하더라도 과거 전생에 지은 번뇌는 그 종자가 남아 있습니다. 그 놈을 차근차근 빼내야 됩니다. 그 놈을 못 떼어내면, 우리가 원래 갖추고 있는 불성(佛性), 천안통(天眼通)도 할 수 있고, 천지우주를 다 알 수 있고 하늘을 날을 수도 있고, 그러한 재주가 다 들어 있지만 번뇌의 종자가 남아 있으면 그런 재주를 못 부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불성에 갖추고 있는 공덕(功德)을 못 부리는 것입니다.

불경(佛經)을 보면 우리한테 있는 욕심(慾心)의 뿌리만 다 뽑혀도 우리 몸이 하늘로 날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신화(神話)로만 알지 마십시오.

 

우리가 공부해 보면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이것만 본다 하더라도 정말로 견성오도(見性悟道)하여 욕심의 뿌리가 뽑혀지면 육신 그대로 등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원래(元來) 무게가 없습니다. 우리 중생이 봐서 중력(重力)이 있는 것이지, 사실은 인력이니 중력이니 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 중생(衆生)차원(次元)에서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영원적인 순수 생명 에너지 차원에서는 없습니다.

 

4. 수습위(修習位)

 

그렇기 때문에 우리 번뇌의 종자를 뽑아버리면 종자를 뽑아버리는 것이 이른바 수습위(修習位)라.

천지우주(天地宇宙)가 오직 불성(佛性)뿐이구나! 불성뿐이라는 그 자리에 딱 안주(安住)해서, 불성을 확실히 보았으므로 견성오도해서 통달위(通達位)라, 불성을 확실히 본단 말입니다. 이때는 광탄만상(光呑萬象)이라, 우주를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다 삼켜버립니다. 다만 번뇌의 뿌리 때문에 불성에 들어 있는 무한(無限)한 공덕(功德)을 발휘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불성에 입각해서 차근차근 더 닦아 가면 그때는 불성이 보이니까 불성만 보고 있으면 되겠지요.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무엇이나 안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보이니까 아! 그 자리를 보고만 있어도 공부가 나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있으면 있는 만큼 흐린 탁수를 가만 두면 앙금이 가라앉고서 바닥이 보이듯이 견성오도한 다음에는 가만히 있으면 정(定)에만 들어가면 차근차근 숙업(宿業)이 녹아갑니다.

 

녹아서 조금 올라가면 2지(二地), 3지(三地), 4지(四地)… 이렇게 올라가서 십지(十地), 십지에 올라가서 불지(佛地)요. 올라가서 번뇌가 근본적으로 다 해버리면 그야말로 석가모니(釋迦牟尼)같은 성불이 됩니다.

자고로 원효(元曉)스님 같은 분은 견성오도한 뒤에 8지(八地)까지 올라갔다고 하고, 서산(西山)스님 같은 분은 4지(四地)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일본의 공해(空海)스님 같은 분은 3지(三地)에 올라갔다는 그런 말씀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보임수행(保任修行)이라, 지킬 보(保)자, 맡을 임(任)자. 즉 견성오도한 그 자리를 소중히 지켜야 합니다. 불성 봤다고 해서 함부로 행동하면 안 됩니다. 더 앞으로는 못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그 교만심(驕慢心)이라는 것이 굉장히 장애(障碍)인 것입니다. 조금 알면 그걸 좀 풀이해 먹으려고, 또 그 견성오도라고 해 가지고서 확 트여서 환희심이 충만하면 우쭐해 가지고서 그래버리면 결국은 공부는 더 못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부처님에 비하면 아직도 멀었는데 신통묘지(神通妙智)를 다해야 그래야만이 참다운 깨달음인 것인데 말입니다. 아직은 광명은 좀 봤다 하더라도 결국 광명 기운을 못 쓰는 것입니다. 순수 에너지에 갖추고 있는 그런 무한한 힘을 못 쓴단 말입니다.

 

그래서 겸허(謙虛)하니 차근차근 인연(因緣)도 피하고, 자꾸만 사람 만나고 얘기하면 힘이 빠져버리고 이제 시간이 더 없어 못 나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공부 깊이 들어간 스님들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고, 중봉(中峰)스님은 배에가 피하고 산에가 피하곤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심정을 짐작할 수가 있지요.

 

이렇게 해서 그런 깨달은 견성오도한 자리를 뒤에도 잘 지킨단 말입니다. 그 때는 소중하니 계행(戒行)도 더 지키고 말입니다. 소중히 가꿔야지 그 도인(道人)이라고 해서 함부로 먹고 함부로 행동을 해버리면 결국은 깊은 삼매(三昧)에 못 들어가지요. 삼매에 못 들어가면 차근차근 번뇌의 뿌리 깊은 종자를 못 녹입니다.

 

그리고 인제 자비심(慈悲心)이 많은 분들은 우선 중생들을 교화하고 싶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견성한 도인도 자비심이 너무 많으면 더 올라 못 갑니다. 우선 중생한테 가르치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좀 매섭고 지혜가 수승한 사람들은 중생이 내내야 겉으로 보아서 중생이지 바로 보면 부처 아닌가. 내가 더 올라가야 쓰겠구나. 그래서 그때 더 올라가는, 그래서 더 높이 올라간 경계에서는 중생한테 교화하고 싶은 그런 생각을 갖겠지요.

 

5. 구경위(究竟位)

 

이렇게 해서 그때는 구경위(究竟位)라. 아까 제가 말씀 드린 봐와 같이 그때는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에 우리한테 묻어오는 우리 법문(法門)과 더불어서 묻어온 잠재의식(潛在意識)에 있는 번뇌(煩惱)를 다 뿌리 뽑아서 그야말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가 딱 된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정각(正覺) 성불(成佛)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격완성(人格完成)이 이렇게 딱 되는 것입니다.

 

요가(yoga)법을 보나 또는 그야말로 참 바라문 경계를 보나 또는 인제 요한 복음서를 보나 또는 마태 복음서를 보나 또는 공자(孔子)의 논어(論語)를 보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보나 또 어떤 다른 경전을 보나, 우리 중생의 인격을 이와 같이 우주와 하나로 해서 구경지(究竟地)까지 인격완성을 딱 시켜버리는 방법체계(方法體系)를 말한 그런 법문은 없습니다. 즉 수도(修道)의 위차(位次)를 명확히 밝힌 법문은 없습니다.

 

우리는 벌써 이렇게 해서 우리 범부가 즉 말하자면 인격의 가장 최고봉(最高峰)까지 가는 성불에 이르는 수행의 단계를 다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수도(修道)의 위차(位次)를 외워 두어도 미처 금생 내내 여기도 못 간다 하더라도 목표만은 뚜렷이 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목표를 세워 놓으면 그만큼, 마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가 코카사스(Caucase) 바위 위에 혼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을 믿으니까 그 희망이 있듯이 인간이 제아무리 어려운 구렁에 든다 하더라도 결국 불성은 죽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때 묻지 않으므로 불성을 생각하면 자기 위안이 생기고 행복의 미소를 띄울 수가 있겠지요.

 

제2절 구차체정(九次第定)

 

참선(參禪)하는 과정도 여러 가지 학설이 많이 있습니다만 석가모니(釋迦牟尼) 부처님께서 직접 보리수하(菩提樹下)에서 몸소 행하시고 49년 설법하신 후 열반(涅槃)드실 때 또 당신이 몸소 우리한테 보여 주신, 그리고 근본 경전인 아함경(阿含經)에서 몇 10번 역설한 법문이 다시 말하자면 참선하는 그 근본선 이것이 아홉 가지 9차체정(九次第定)으로 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선근(四善根)입니다. 즉 말하자면 가행위는 시원해지고 또 이렇게 심월(心月)이 나오고, 심월이 컸다 작았다 하고, 찬란스러운 심일(心日)이 나오고, 이와 같이 4선근을 거쳐서 다음에 들어가는 삼매가 견성오도인데 선정의 차원으로 하면 그때는 초선정(初禪定) 여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여기에 들어가야 이제 견성오도를 들어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1. 초선정(初禪定)

 

이것은 중복됩니다만 아무튼 초선정(初禪定)이라. 이때는 우리의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져버립니다. 거치러운 분별은 다 끊어지고 이제 세밀한 분별만 남습니다.

 

2. 2선정(二禪定)

 

그렇게 되었다가 2선정(二禪定)이라, 여기에 올라가면 그야말로 세밀한 분별까지 다 끊어집니다. 거치러운 것도 미세한 것도 다 끊어지고 오직 하나의 마음자리만 지킵니다.

우리 중생은 몸도 다르고, 몸 따라서 마음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의견이 다르지만 사실은 이렇게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차근차근 같아집니다.

이때 더욱 올라가면 우리 중생 같은 이런 몸이 아니라 광명신(光明身)입니다. 몸이 광명이기 때문에 그때는 몸뚱이 때문에 피차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도 먹고 싶으면 생각만 하는 걸로 배가 부르니까 많이 먹으려고 음식 때문에 다툴 필요도 없지요. 아무튼 이렇게 올라가면 광명의 몸이기 때문에 하등의 갈등이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광명신(光明身)이지만 광도(光度)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3. 3선정(三禪定)

 

그렇게 돼 가다가 3선정(三禪定)이라, 여기 올라가면 오로지 한 마음만이 있습니다. 그때는 마음도 광명도 하나입니다. 이 밑에는 같은 광명신이지만 몸도 광명이 되어서 광명이 그때는 하나의 광도가 차이가 있단 말입니다. 허나 3선정 지위에 올라가면 차이가 없습니다. 다 순수광명인 동시에 그때는 마음도 같습니다. 다만 같으나 아직은 부처의 지위는 못되어 있습니다.

 

4. 4선정(四禪定)

 

4선정(四禪定)이라. 이때에 가면 마음이 조금도 동요가 없습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동요가 없습니다.

 

5.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이렇게 되어 가다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광명도 하나의 질료가 있는 광명이 아니라 그야말로 참 텅 비어 있는 하나의 순수 광명인 것이고, 즉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입니다.

 

6.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그뿐만 아니라 이제 식(識)이라! 하나의 마음이 우주에 충만해 보이는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인 것입니다. 식이 충만해 있는 것이고,

 

7.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또한 동시에 무소유처(無所有處)입니다. 그때는 이것이고 저것이고 구분도 없고, 구분할 수도 없습니다. 원융무애(圓融無碍)인지라 혼연일체(渾然一體)인지라 구분할 수가 없습니다.

 

8.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여기서 더 나아가야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입니다. 그때는 생각이 있을 것도 없고 또 없을 것도 없단 말입니다. 아주 미세해서 말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느끼는 번뇌 그런 생각은 조금도 없고 아주 맑은 생각만 조금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그렇습니다.

 

9. 멸진정(滅盡定)

 

이렇게 되어가다가 이제 멸진정(滅盡定)이라. 멸할 멸(滅)자, 다할 진(盡)자. 이때는 그야말로 번뇌의 찌꺼기를 다 녹여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 여기까지는 아직 번뇌의 찌꺼기가 조금 남아 있습니다만 올라 갈수록 차근차근 번뇌가 녹아져서 저 위에 가서는 번뇌가 다 녹아서 완전히 그때는 우리 범부라 하는, 즉 말하자면 이생위(離生位)라, 너와 나의 차이 또 사물과 나와의 차이 일체 존재가 모두가 다 이제 하나의 불성으로 해서 그때는 완전히 통일이 딱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야 비로소 여기 있는 참다운 정각(正覺) 성불(成佛)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