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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3. 3. 화의사교(化儀四敎)

3. 화의사교(化儀四敎)

 

화의사교(化儀四敎)…설법의식(說法儀式)

1) 돈교(頓敎)…돈기(頓機)에 대(對)하여 별교(別敎) ․ 원교(圓敎)의 법(法)을 설(說)함. 화엄시(華嚴時)와 여(如)함.

2) 점교(漸敎)…점기(漸機)에 대(對)하여 점차(漸次)로 사교(四敎)를 설(說)함.

3) 비밀교(秘密敎)…일종(一種)의 기(機)에 대(對)하여 비밀(秘密)히 법(法)을 설(說)하여 회중(會中)에서 서로 알지 못하게 함.

4) 부정교(不定敎)…일회중(一會中), 일법(一法)을 론(論)하여 문자(聞者)로 하여금 달리 해석케 하여 이익을 얻기도, 얻지 못하기도 함.

※ 화법사교(化法四敎)는 약미(藥味)와 같고 화의사교(化儀四敎)는 약방문(蘂方文)과 같음. 별교(別敎) ․ 원교(圓敎)의 차이(差異)는 다만 격력(隔歷)과 원융(圓融)의 차이(差異)뿐임.

 

화의사교(化儀四敎)란, 앞에서 말씀드린 사교(四敎)가 어떻게 설해져 있는 것인가, 즉 설법 의식을 말한 것입니다.

돈교(頓敎)란 문득 깨닫는 가르침이란 뜻입니다. 문득 깨달을 수 있는 근기에 대하여 별교, 원교의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화엄경같이 말씀입니다.

 

점교(漸敎)는 점차로 순서를 밟아서 들어가는 가르침입니다. 점차로 순서를 밟아서 가는 근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근기들은 점교가 되어야 알 수가 있겠지요. 유(有)에 너무나 집착한 사람에게 단박에 ‘다 비었다’하면 허무해서 공부를 잘 못할 것입니다. ‘자기는 허망한 것이지마는 법은 본래 있는 것이다’ 하면서 점차로 이끄는 식이겠지요. 점기(漸機)에 대하여 점차로 사교(四敎)를 설하는 것입니다.

다음 비밀교(談密敎)란, 일종의 특수한 비밀스런 법을 납득할 만한 근기에 대하여 비밀히 법을 설하여 회중(會中)에서 서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설사 알지 못하더라도 비밀스런 법을 특수한 비밀스러운 기질들에게 설해서 알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음 부정교(不定敎)는 돈교도 아니고 또는 점교도 아니고 비밀교도 아닌 기질에 대해서 즉 일회중(一會中) 일법(一法)을 설하여 듣는 자로 하여금 달리 해석케 하여 이익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돈교나 점교나 비밀교가 아닌 근기들한테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하는 법문이 부정교인 것입니다.

 

앞에 든 삼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 등 화법사교(化法四敎)는 마치 우리가 아파서 먹는 약의 맛, 약의 성분에 비교할 수가 있는 것이고, 뒤에 든 돈교 ․ 점교 또는 비밀교 부정교인 화의사교(化儀四敎)는 약방문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교, 원교의 본뜻은 거의 같은 뜻인데 다만 격력(隔歷)과 원융(圓融)의 차이 뿐입니다. 가사 삼신불(三身佛)이라 하면 별교적인 해석은 법신(法身) 따로 있고 보신(報身)따로 있고 화신(化身) 따로 있다고 한계 있게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막혀서 보는 것입니다. 즉 천태교의 관법에서 일심삼관(一心三觀)은, 한 마음에서 공관(空觀) 가관(假觀) 또는 중도관(中道觀)을 보는 것인데, 이것도 공관 따로 있고 가관 따로 있고 중도관 따로 있다고 보는 식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격력(隔歷)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격력해서, 막혀서 따로 따로 보는 것이 별교의 가르침인 것이고, 원교는 원융이라, 법 ․ 보 ․ 화 삼신이 원래 셋이 아니고 삼신일불(三身一佛)이다. 또 공(空) ․ 가(假) ․ 중(中)도 원래 셋이 아니요, 공(空)인 동시에 가(假)요, 가인 동시에 중(中)이다. 라고 보는 것이 원융무애한 법이므로 부처님의 본래적인 가르침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장교는 경 ․ 율 ․ 론 삼장인 장교(藏敎)요, 통교(通敎)는 소승이나 대승이나 다 통한다고 해서 통교입니다. 반야를 떠나면 불교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에 소승도 반야가 들어 있어야 하고 대승은 다시 말할 것도 없기 때문에 대소승을 통해서 있는 가르침이 통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별교 ․ 원교의 차이는 거의 같은 도리인데 별교는 아직 원융무애한 도리를 잘 모르는 입장에서 따로 설정하고 간격을 두는 격력이요. 원교는 원융무애라, 모든 것이 조금도 간격 없는 일미평등한 이른바 법신 자체, 일체 만유 선악시비를 다 초월해서 진여 자체를 말하기 때문에 원교라 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법아님이 없거니 아무렇게나 행동해도 된다고 하는 것은 법의 참 공덕을 미처 몰라서 그러는 것이고, 또 법을 증명한 삽삼조사(卅三祖師)가 파계무참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법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진 만큼 마음도 유연스럽고 자비심도 더하고 또는 우주의 도리에 대한 계율이나 질서도 더 잘 지키는 것입니다. 천태에서 화법4교와 화의4교를 합하여 8교(八敎)라고 합니다.

 

4. 사종사제 (四種四諦)

 

사종사제(四種四諦)[열반경(涅槃經)성행품소설(聖行品所說)에 의(依)하여 천태(天台)가 안립(安立)함]

1) 생멸사제(生滅四諦)…고(苦) ․ 집(集) ․ 도(道)의 삼제(三諦)는 인연(因緣)에 의(依)하여 실(實)로 생멸(生滅)이 있고, 멸제(滅諦)는 생법(生法)에 대(對)하여 실(實)다운 멸법(滅法)이라는 실생실멸(實生實滅) 위에 세운 사제(四諦)로서 근본불교(根本佛敎) 즉(卽) 삼장교(三藏敎)의 소설(所說)임.

 

2) 무생사제(無生四諦)…고(苦) ․ 집(集) ․ 도(道)의 삼제(三諦)는 여환즉공(如幻卽空)하여 실(實)다운 생(生)이 없고 멸(滅)함이 없다. 멸제(滅諦)는 본래(本來) 자공(自空)하여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이와 같이 고집도(苦集道)의 인과당체(因果當體) 즉공(卽空)임을 깨닫고 생멸(生滅)을 불견(不見) 하므로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함. 통교소설(通敎所說).

 

3) 무량사제(無量四諦)…고제(苦諦)에 있어서 계(界)의 내외(內外)를 통(通)하여 무량(無量)의 상(相)이 있고 또한 도제(道諦)에도 무진(無盡)한 차별(差別)이 있는데 이는 대보살(大菩薩)이 수학(修學)하는 바이다. 별교(別敎)의 사제(四諦).

 

4) 무작사제(無作四諦)…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므로 집(集)을 단(斷)하고 도(道)를 수(修)하는 조작(造作)이 없고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므로 고(苦)를 멸(滅)하고 멸(滅)을 증(證)하는 조작(造作)이 불요(不要)하다. 이와 같이 단증(斷證)의 조작(造作)을 여읜 사제(四諦)이므로 이를 무작사제(無作四諦)라 함. 원교(圓敎)의 사제(四諦).

 

우리는 고 ․ 집 ․ 멸 ․ 도 사제(四諦)라 하면 보통 근본불교에 있는 가장 쉬운 법문이라는 생각을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장교 ․ 통교 ․ 별교 ․ 원교를 각 가르침의 심천 따라서 차이 있게 해석하듯이 4제도 정도에 맞추어 네 가지로 구분해서 천태지의(天台智顗 538-597) 선사가 열반경 성행품에 있는 것을 참고로 안립(安立)한 것입니다. 안립이란 불교의 독특한 술어인데 규정이나 결정이나 시설의 뜻이 됩니다.

 

저는 누구에게나 말씀합니다마는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또는 육바라밀(六波羅蜜)은 어느 때나 우리 행동의 지침이 되고 불교의 기본인지라 정확히 알고 기억해야 합니다. 십이인연법도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새롭고 우리 행동을 그때그때 법성으로 인도하는 가르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첫째 생멸사제(生滅四諦)란 고제 ․ 집제 ․ 도제의 삼제(三諦)는 인연에 의하여 진실로 생멸이 있고 또 멸제는 생법(生法)에 대하여 실다운 멸법(滅法)이라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4제 곧, 정말로 우리가 낳기도 하고 죽기도 하고 일체법이 생기기도 하고 멸하기도 한다는 4제로서 근본불교 즉 삼장교의 가르침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초기 불교에서 짐작이 되는 바와 같이 무식하고 진리에 대해 어두운 사람들에게 말할 때, 살아있는 그 사람에게 ‘그대가 본래 공이다. 그대가 본래 없다’ 거나 또 지극히 좋아하는 물질세계에 대해서 ‘그런 것도 모두가 다 허망하다’고 할 때는 진리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초기에는 정말로 멸하는 것도 있고 정말로 생하는 것도 있다는 실생실멸(實生實滅)의 차원에서 말씀한 법문인 것입니다.

 

지금도 사제법문이라 하면 보통은 생멸사제 수준에서 알고 있습니다. ‘번뇌의 집(集)이 있어서 탐심, 진심을 내고 삼독심(三毒心)으로 업(業)을 지으니까 과보로 고(苦)를 받는다. 따라서 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마땅히 팔정도, 도(道)를 닦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해서 해탈의 멸(滅)을 얻는다’ 보통은 이런 수준이 아닙니까? 이것이 생멸사제의 차원에서 말씀한 가르침입니다.

 

그 다음 무생사제(無生四諦)란 고 ․ 집 ․ 도의 삼제(三諦)는 여환즉공(如幻卽空)하여, 원래 허깨비 같아 실다운 것이 아니라 바로 공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고(苦)도 공이요, 집(集)도 공이요, 또는 도(道)도 공인 것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무명(無明)이란 것도 무무명(無無明)이라 하듯이, 현상적인 차원에서 무명인 것이지 실상적인 차원에서 볼 때는 무명이 본래 없는 것입니다. 무명의 실상이 바로 법신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분명히 고생을 받고 있지만 중생 차원에서 고생인 것이지, 고생도 바로 볼 때는 고가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야공 사상에서 모두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고가 있고 집이 있다고 하면 응당 집제(集諦)가 있으니까 고제(苦諦)가 있게 되겠지요. 그러나 집제 역시 반야공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가 있을 턱이 없고, 고도 없고 집도 없으니 닦아서 나가는 도(道)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고집도의 삼제(三諦)는 허깨비같이 공하여 실다운 생이 없고 멸이 없다’ 또는 해탈의 인(因)은 도(道)고 해탈의 과(果)가 멸(滅)인데, ‘멸제는 본래 스스로 공해버려서, 본래자공(本來自空)하여 불생불멸이다’ 이와 같이 고 ․ 집 ․ 도의 인과당체(因果當體)가 즉공(卽空)임을 곧 고의 인은 집이고 멸의 인은 도라는 이런 것이 당체가 바로 공임을 깨닫고, 생하고 멸하는 것을 보지 않으므로 무생사제(無生四諦)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반야 사상 즉 통교(通敎)의 말씀입니다.

다음에는 무량사제(無量四諦)입니다. 우리 중생의 과보가 삼계육도(三界六道)에서 받는 고제에 있어서 삼계의 내외(內外)를 통해서 무량의 상(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반야의 공으로 볼 때에는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 되겠습니다마는 그러나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가제(假諦)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가제가 없으면 허무가 되어 버리겠지요. 삼계 내에도 많이 있고 삼계 외에도 무량의 가상(假相)이 있는 것입니다.

 

또한 도제(道諦)에도 무진(無盡)한 차별이 있습니다. 팔정도(八正道)만 있는 것이 아니라 호흡법도 있고 육바라밀도 있고 하여 해탈의 길로 가는 도제도 무진한 차별이 있는데, 이는 대보살이 수학하는 것입니다. 소승들은 복잡한 것을 보통은 싫어해서 얼마만치 가다가 마음이 개운하면 더 못가는 것이 소승입니다마는, 대승들은 성불할 때까지 쉼 없이 가는 기질이기 때문에 무량법문을 다 수용하는 것입니다. 무량사제는 별교(別敎)의 사제입니다.

다음 무작사제(無作四諦)란 임운등등(任運騰騰)하는 곧, 조작이 없는 4제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우리 분상(分相)에서 얻기는 어려우나 이것이 본래적인 모습입니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이므로 번뇌라고 하더라도 중생이 괴로운 단계에서 번뇌인 것이지 깨달아 버리면 번뇌가 곧 보리고, 또는 설사 깨닫지 안 했다 하더라도, 내가 지금 괴롭다는 그 괴로움 또는 아프다는 그런 아픔도 근본 바탕에서 볼 때는 괴로움이 아니고 아픔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상만 보는 것이니까 번뇌가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마는 본체에서 볼 때는 없는 것입니다.

 

번뇌 즉 보리이므로 무명과 무명으로 이루어진 탐심, 진심, 치심과 여기에서 우러나는 여러 가지 업인 집(集)을 끊고 팔정도 같은 수행법을 닦는 조작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번뇌가 있고 보리가 따로 있다면 닦는 것도 있는 것이지마는 번뇌의 본바탕이 바로 보리라고 생각할 때는 천지우주가 오직 보리뿐이요, 오직 참 진리뿐입니다. 천지우주가 진리뿐일 때는 새삼스럽게 우리가 집이라고 할 것도 없고, 또 집을 끊고서 도를 닦는다는 조작(造作)스러운,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이므로, 생하고 멸하고 고를 받는 우리 중생계 이대로 바로 극락세계인 것입니다. 이런 것은 범부지에서는 넘겨다 볼 것이 못됩니다. 닦아서 증명해야 하는 것인데 증명도 않고서 그렇다고 하면 그냥 함부로 그렁저렁 해져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사에 있는 것이고, 견성한 뒤에 비로소 생사 즉 열반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지혜와 믿음만은 분명히 ‘생사 이대로 열반이구나’ 이렇게 믿고 나가야 합니다. 다만 업장에 가려서 증명만 못할 뿐 사실이기 때문에, 증명하기 위해서 마땅히 믿음과 혜(慧)는 이와 같이 막힘이 없는 원융한 혜를 내야 합니다.

따라서, 무작사제(無作四諦)의 혜를 가지고 공부를 해야 바로 선(禪)이 되고 참다운 염불이 되는 것입니다.

생사 즉 열반이므로 고를 멸하고 멸을 증(證)하는 조작이 필요치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끊고 증하는 조작을 여읜 4제이므로 이를 무작사제라 하는 것입니다.

 

높다 낮다 또는 내가 지금 어떻다 하는 분별시비를 내는 것은 아직 조작을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설사 무진 애를 쓰며 공부해나간다 하더라도 마음에는 걸림이 없이해야 무념수(無念修)라, 무심히 닦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본래시불(本來是佛)이라, 본래 부처고, 본래 부처니까 무루지성 (無漏智性) 본자구족(本自具足)이라, 조금도 허물이 없는 지성이 원래 갖추어 있는 그 자리를 믿고서 무념으로 철저히 계행 지키고 나가면 저절로, 본래 불성인지라, 계합이 되겠지요. 이는 원교(圓敎)의 4제입니다.

 

 

5. 칠각지 (七覺支)

 

칠각지(七覺支)(칠각분七覺分 ․ 칠보리분법七菩提分法)

성도(聖道)가 불생(不生)함은 정혜부조(定慧不調)하기 때문에 정혜(定慧)를 균등(均等)시키는 법(法)이다.

견도위(見道位)에서 견혹(見惑)을 단(斷)하고 수도위(修道位)에 있어서 사혹(思惑)을 단(斷)함은 이 칠각지(七覺支)의 힘에 (依)한다.

1) 택법각지(擇法覺支)…반야지혜(般若智慧)로써 법(法)의 진위(眞僞 )를 간택(簡擇)함.

2) 정진각지(精進覺支)…용맹심(勇猛心)으로써 사행(邪行)을 떠나고 진법(眞法)을 근행(勤行)함.

3) 희각지(喜覺支)…심(心)에 선법(善法)을 득(得)하여 환희(歡喜)를 생(生)함.

4) 경안각지(輕安覺支)…제각분(除覺分)이라고도 하며 신심(身心)의 추중(麤重)을 끊고 신심(身心)을 경리안화(輕利安和)케 함.

 

5) 염각지(念覺支)…항상 정혜(定慧)를 명기불망(明記不忘)하고 이를 균등(均等)케 함.

6) 정각지(定覺支)…심(心)을 일경(一境)에 주(住)하여 산란(散亂)치 않게 함.

7) 행사각지(行捨覺支)…모든 망념(妄念)을 버리고 일체법(一切法)을 사리(捨離)하여 심(心)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추억(追憶)하지 않음.

 

※ 이 칠법(七法)에 있어서 행자(行者)의 심(心)이 부동(浮動)할 때는 경안(輕安) ․ 행사(行捨) ․ 정(定)의 삼각지(三覺支)를 용(用)하여 다스리고, 심(心)이 침몰(沈沒)할 때는 택법(擇法) ․ 정진(精進) ․ 희(喜)의 삼각지(三覺支)를 용(用)하여 심(心)을 일으키며 염각지(念覺支)는 항시 정혜(定慧)를 염(念)하여 끊임이 없어야 한다.

-지관(止觀)-

우리 불자는 복잡하다 하더라도 적어도 37보리분법(菩提分法) 정도는 알아야 합니다. 근본불교의 수행법이 주로 37보리분법 가운데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팔정도(八正道)를 무시 못 하고 사념주(四念住)를 무시 못하듯 이런 법은 다 필요하니까 제정이 된 것이므로 번쇄하지마는 알아두면 공부 정진할 때 크게 참고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37보리분법 안에 있는 칠각지(七覺支) 법문도 굉장히 소중한 법문인데, 공부하는 분들이 팔정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팔정도 다음에 칠각지법문이 나와 있는데도 별로 관심을 안 둡니다. 마땅히 소홀히 할 수 없는 귀중한 법문이요, 특히 참선 공부할 때, 이른바 정혜쌍수(定慧雙修)할 때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칠각지를 칠각분(七覺分) 또는 칠보리분법(七菩提分法)이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인 성도(聖道)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定慧不調)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혜균등(定慧均等)을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정(定)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이고 혜(慧)가 앞에 있는 것도 아닌 것인데 분별 좋아하는 사람들은 선후를 가리려고 애쓰기도 합니다마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원래 법성 가운데는 정과 혜가 원만무결하게 원융무애로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성 가운데 정과 혜가 원만히 갖추어 있기 때문에, 정만 닦으려고 애쓰거나 혜만 닦으려고 할 때는 정혜부조라, 조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심리도 지(知)적인 요소, 정(情)적인 요소, 또는 의지(意)적인 요소가 있기 때문에 너무 지성으로 치우치면 정이 소외를 받으니까 어쩐지 불안스럽고, 의지가 부족하면 결연하고 강직한 행동을 못 취하게 되듯이 마땅히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지금 심리적으로는 지와 정과 의라 하지마는 불교적인 사상으로 볼 때는 정과 혜 가운데 다 들어갑니다. 지관(止觀)이라 하면 지는 정에 해당하고 관은 혜에 해당하며, 앞서 말씀드린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도 역시 일상삼매는 혜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에 해당합니다. 모두를 이와 같이 정과 혜에 대비시킬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공부가 빠르게 되려면 꼭 정혜균등이라, 정혜쌍수가 되어야 합니다. 보조국사 어록을 한 말로 말한다면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포괄할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소중합니다. 우리가 마음이 잘 열리지 않는 것은 정혜부조하기 때문입니다. 정과 혜를 조화시키는 법, 정혜를 균등 시키는 법이 칠각지법입니다. 따라서 주의해서 보시고 그때그때 공부할 때 참고로 하셔야 합니다.

정혜 조화법을 마치 공중에 날아가는 새에 날개가 둘이 있어야 잘 날아갈 수가 있고, 또 굴러가는 달구지에 바퀴가 둘이 있어야 바로 갈 수가 있는 것과 같다는 비유 말씀도 있습니다.

도를 깨닫는 자리인 견도위(見道位)에서 도리에 막힌 번뇌인 견혹(見惑)을 다 끊어버리고 수도위(修道位)에서 습기(習氣)가 되어 있는 번뇌인 사혹(思惑)을 끊는 것은 칠각지의 힘에 의합니다. 이것이 견도에도 필요하지만 특히 수도할 때 곧 보임(保任) 수행할 때 미세번뇌, 습기번뇌를 녹일 때 칠각지의 힘이 절대로 필요한 것입니다.

 

첫째는 택법각지(擇法覺支)라, 택법이란 법을 간택(簡擇)한다는 말입니다. 불교 술어로는 선택이란 말은 안 쓰고 간택이라 합니다. 반야 지혜로써 법의 진위(眞僞)를 간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은 이것이 옳은가 그른가 하는 판정을 잘 못합니다. 그러나 반야도리, 제법공(諸法空)도리에 비추어 봐서 맞는가 안 맞는가 택하는 것입니다.

 

공부해 갈 때도 부질없이 상대 유한적인 문제로 의심하면 그것은 참다운 반야 지혜가 못되겠지요. 반야 지혜에 비추어서 항시 제일의제(第一義諦), 본체를 여의지 않는 행법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법을 가리는 것입니다.

또는 어떤 법이 자기한테 맞는가 간택하는 것입니다. 가사,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너무나 지성적인 것에 치우친 법으로 갈 때는, 본래가 부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힘을 많이 낭비합니다. 또 지성적인 사람들이 감성적인 방법으로 할 때도 거의 그와 비슷한 것을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튼 자기 성질, 원래 품성을 잘 헤아려서 택법을 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은 정진각지(精進覺支)라, 용맹심으로써 삿된 행을 떠나고 진법(眞法)을 근행(勤行)하는 것입니다. 부지런히 닦는다는 말입니다. 내 평생 이 일로 목숨을 바치겠다고 확신이 서지 않으면 정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자기 품성이라든가 또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아서 가장 선행적(先行的)으로 택법을 한 다음에는 용맹정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희각지(喜覺支)라, 마음에 좋은 법을 득(得)하여 환희를 생(生)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택법을 바르게 하고 용맹정진을 할 때는 부작용이 별로 없고 필연적으로 기쁨이 오는 것입니다. 이른바 법희선열(法喜禪悅)이라는 기쁨이 옵니다. 우리가 택법을 잘 못하고 또는 계율이나 선정이나 다 여법한 정진을 안 할 때는 진척이 안 됩니다. 법의 진도가 없으면 거기에 따라 오는 환희심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당히 할 때는 필연적으로 희각지라, 마음에 선법을 득하여 환희심을 내는 것입니다.

다음은 경안각지(輕安覺支)라, 경안은 앞에서 여러 차례 말씀했습니다마는 제각분(除覺分)이라고도 합니다. 추중번뇌(麤重煩惱)라, 이른바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없애므로 해서 몸도 마음도 가벼워지고 편안스럽게 하는 곧 경리안화(輕利安和)케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염각지(念覺支)라, 항상 정(定)과 혜(慧)를 명기(明記)하여 불망(不忘)하고 마음에다 명심해서 잊지 않고 균등케 하는 것입니다. 가사, 우리가 가만히 바보같이 그냥 묵조(黙照)하고 앉아 있다 하면 정(定)을 주로 하고 혜를 무시한 것이 되고 또 진여불성자리, 진여불성은 우리가 더위잡을 수 없는 광대무변한 자리 아닙니까마는, 그 자리만 생각하며 정을 무시하고 갔다 왔다 망동한다든가 오로지 지속적으로 하지 않고서 그때그때 혜만 발동을 시켜서 법성자리만 관조할 때도 역시 공부가 더딘 것입니다. 마땅히 지혜로 해서 상이 없고 자타 시비선악이 다 끊어진, 청정무비하고 무량공덕을 갖춘 진여불성자리를 훤히 생각해야 합니다.

 

훤히 트인 그 자리에다 마음을 두는 것은 혜라 할 수 있고 그 자리를 안 떠나고 염념상속 하는 것은 정인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정혜균등이 되어서 선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정혜균등이 안되면 선정에는 못 들어갑니다. 법성에다 우리 마음을 안주시키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黙動靜)에, 앉으나 서나 남하고 얘기할 때라도 마음의 저변에는 영원적인, 생멸이 없는 그 자리를 여의지 않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정각지(定覺支)란 마음을 한 경계에 머물게 해서 산란치 않게 하는 것입니다. 역시 정혜균등이 되려고 노력하다 보면 차근차근 공부가 익어지면서 마음이 착 가라앉고 산란심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야 정이 되겠지요.

 

다음 행사각지(行捨覺支)란 모든 망념을 여의고 일체법을 사리(捨離)하여 마음을 평심탄회(平心坦懷)케 하고 다시 추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공부할 때 과거에 미워했던 생각이 한번 일어나면 더욱더 미워질 수가 있습니다. 남을 좋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사(行捨)도 중요한 공부입니다. 무엇이 좀 안되면 그것 생각하느라고 공부가 안되고 또 잘되면 잘됐다고 그러는 것이므로 잘되나 못되나 다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가 죽으나 누가 죽으나, 과거에 창피스런 일을 당했거나, 법성(法性)에서 볼 때는 그런 것이 사실은 별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공부할 때는 다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7법에 있어서 수행자의 마음이 부동(浮動)할 때, 즉 마음이 들뜰 때는 경안(輕安)과, 다 버리는 행사(行捨)와 또 마음을 오로지 한군데만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를 써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이 들뜰 때와 너무나 침울해서 혼침이 올 때 가장 공부의 장애가 되는 것입니다. 혼침(惽沈)과 도거(掉擧)는 마음이 가라앉거나 들떠서 곤란스러운 것으로서 공부할 때 두 가지의 큰 마장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들뜰 때는 몸이나 마음이나 번뇌가 다 허망한 것이니까 훨훨히 마치 사자분신(獅子奮迅)같이, 사자가 갈기를 떨치고 위용을 부리듯이 다 떨쳐버리는 경안(輕安)이나, 추억하지 않고 다 버리는 행사(行拾)나 또는 마음을 집중하는 정(定)의 3각지로 해서 들뜬 마음을 다스리고, 그 반대로 마음이 침울할 때는 택법(擇法)으로써 보다 더 알맞은 수행법을 철저히 간택하고 정진(精進)도 용맹심으로 더욱 분발하여 정진을 지속해 나가면 법회선열의 경계를 얻게 되는데 이러한 3각지로써 침울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염각지(念覺支)로 항시 정 ․ 혜(定․慧)를 염하여 끊임없어야 합니다. 한량없이 밝은 불성자리를 떠나지 않는 이른바 일상삼매(一相三昧)의 지혜와 그 법성 자리를 비추어 보는 일상삼매를 지속적으로 닦아나가는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정(定)을 균등하게 닦으면서 마음을 다스려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튼 공부해 나가면서 이 택법, 정진, 희 또는 경안, 염, 정, 행사 등을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조절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7각지법은 지관법(止觀法)의 구체적 방법입니다. 지관의 지(止)는 이른바 정(定)에 해당하고 관(觀)은 혜(慧)에 해당합니다. 지관이나 정혜나 또는 일상삼매, 일행삼매나 다 같은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