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0. 제6장 심성(心性)과 법계(法界)

20. 제6장 심성(心性)과 법계(法界)

 

제1절 심성(心性)

 

심성(心性)은 시종(始終)이 끊어진 자리이며 만세(萬歲)에 뻗쳐서 항상 이제이다. 곧 심성은 한없는 시간(時間)에 사뭇 멸(滅)하지 않고 끝없는 공간(空間)에 꽉차있어서 두루 하지 않음이 없다.

 

1. 유식삼성(唯識三性)

 

우리 인간성을 풀이할 때 『해심밀경(解深密經)』이나 유식론(唯識論), 이른바 법상종(法相宗) 계통에서는 유식삼성(唯識三性)이라는 법문이 있습니다. 유식삼성을 살펴보고 공부를 하면은 우리 인간성과 만유의 실상에 대하여 가장 보편적이고 궁극적인 체계를 확립하게 됩니다.

 

유식삼성(唯識三性)

 

1.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정유리무(情有理無)

2. 의타기성(依他起性)……여환가유(如幻假有)

3. 원성실성(圓成實性)……정무리유(情無理有), 진여(眞如:진공묘유眞空妙有)

※ 상(上)의 삼성(三性)으로써 비공비유(非空非有)한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表現)함.

 

맨 처음에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이것은 우리 중생차원의 마음가짐입니다. 모든 것을 두루 집착해서 바르게 판단하지 못하는 성품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이것이나 저것이나 모두를 삼독심(三毒心)에 가리워진 눈으로 보는 것이라서 바로 못 봅니다. 그래서 만 가지 것을 다 집착하고 헤아려서 바로 못 보는 것이 변계소집성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정유리무(情有理無)라, 범부의 망정(妄情)에만 있고 원래 본바탕 법성(法性) 자리인 리(理)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아직 범부지에서 옳지 않다고 해서 옳지 않은 것도 아니고 범부지에서 옳다고 해서 옳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영원적인 차원, 불성(佛性) 차원에서 본 것이라야 비로소 바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범부가 두루 헤아리고 집착하는 이것은 바른 것이 못됩니다.

 

그 다음에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이것은 인연(因緣) 따라서 이루어진 성질입니다. 자기란 존재는 인연 따라 이루어지고 한 포기 풀도 인연 따라서 이루어졌습니다. 사바세계에 있는 두두물물,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다 인연 따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잠시 허망한 가상(假相)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환가유(如幻假有)라, 허깨비같이, 물 위에 뜬 거품과 같이, 안개같이, 허환상(虛幻相)인 것이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제행이 무상이라, 우리에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이지 실제로는 있지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런 것인가? 인연생(因緣生)이기 때문에 순간 찰나도 같은 모습, 고유한 존재가 없습니다. 다만 중생이 안목이 짧아서 그냥 오늘 젊다가 내일 늙어 버려서 수염이 나면 알겠지만 서서히 바꾸어지니까 모를 뿐인 것이지 정밀하게 관찰한다면 일초(一秒)의 일만 분의 일 동안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자기 얼굴 주름살도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츰 깊이 패어져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산하대지 삼라만상 모두가 다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수유(須臾) 찰나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공간적으로 보더라도 어느 공간에도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상(無常)이요 공(空)이요, 무상이요 공이기 때문에 나(我)라고 할 아무 건덕지가 없습니다.

그 다음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

이것은 본래적인, 중생의 망상분별을 떠나버린 참다운 성품자체를 말합니다. 이른바, 불성(佛性), 법성(法性), 실상(實相) 경계가 원성실성입니다. 원만히 성취된 무한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정무리유(情無理有)라, 범부의 망정(妄情)에는 있지 않고 우주의 참다운 도리(理)에는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진여(眞如), 진공묘유(眞空妙有), 이 자리가 원성실성인데 이것이 우리의 본 성품입니다. 우리가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물건이나 또는 유정이나 어느 존재를 볼 때에 바로 보면은 원성실성이고 잘못 보면은 변계소집성 입니다. 오직 견해에 따른 것이지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한 송이 꽃을 본다하더라도 꽃은 꽃대로 자연 그대로 피어 나온 것인데 우리 중생이 곱다 안 곱다 예쁘다 밉다 하는 것입니다. 본래에서는 그런 것이 없지 않습니까, 따라서 본래대로 본다면 진여불성이 그때그때 인연 따라서 꽃같이 꽃의 가상(假相)을 내고, 진여불성이 인연 따라서 사람같은 가상을 내고, 뜬 구름 같고 또는 안개 같은 모양을 가상으로 내는 것인데 우리가 거기에다 이것저것 나요 너라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성(三性)으로서 비공비유(非空非有)한, 공도 아니고 또는 유도 아닌 중도실상(中道實相)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마음의 본성(本性)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김가나 박가나, 지금 우리 마음은 모두가 다 이런 제6의 의식(意識) 단계에 있는 셈이지요. 그런데, 마음이 곧 부처라, 비록 우리가 정화가 아직 못되어서 이런 불심(佛心)은 미처 못되어 있다 하더라도 불심과 내 마음은 곧 바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둘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파리도, 파리 마음 밖에는 못쓸망정, 그도 역시 본질은 또한 똑같은 부처입니다. 부처와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의 전자(電子)도, 겉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은 전자이지만 본바탕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그도 역시 불심과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따져볼 때는 천지우주가 모두가 다 불심을 바탕으로 합니다. 겉에 뜬 것은 중생이 잘못 봐서 그럽니다. 정유리무(情有理無)라, 중생이 망정(妄情)으로 봐서 나무(木)요 소(牛)요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중생이 가짜로 이름 지어서 무슨 산(山)이요,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바로 보면 다만 불심(佛心)이 이렇게 저렇게 변화한 것에 불과 합니다. 따라서 도인(道人)들은 전부를 다 부처로 본다는 것이 그래서 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성불하는 방법도 여기에서 추출(抽出)이 되어서, 구경지(究竟地)인 우리가 가야 할 고향, 여기를 딱 집어 들고서 이 자리 안 놓치고 항시 생각하면 그때는 빨리 가겠지요.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자기 마음 떠나가서 저만치 불심(佛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본바탕이 바로 불심이기 때문에 불심이란 그 마음 안 놓치고서 곧장 파고 들어가면, 그때는 우리가 불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불심 이것은, 내가 생명인지라, 내 바탕, 천지만유의 바탕은 그야말로 보다 더 큰 생명이 되겠지요. 그런 생명을 하나의 원리로만 구하면 그때는 바싹 말라서 우리가 납득이 잘 안 되는 것이고 무미건조(無味乾燥)합니다. 생명이기 때문에 역시 흠모(欽慕) 추구(追求)하는 우리 감성(感性)으로 구해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 드렸습니다만, 어떤 종교나 고등종교는, 가장 고도한 문화종교는 모두가 다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합니다. 기독교는 '오! 하나님' 또는 천도교는 '한울님' 마호메트는 '알라' 모두가 다 생명으로 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 신앙 대상을 생명으로 구하는 것은 우리 수행법의 가장 중추(中樞)인 것이고, 기타 방법은 하나의 개별적인 특수한 것에 불과합니다. 화두(話頭)를 든다. 무(無)를 든다. 이런 것은 그때그때 어느 사람에 따라서 특수한 것에 불과한 것이고, 줄거리는(주된 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생명 자체를 생명 그대로 수용(受用)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참선의 방법도 많이 있으나, 즉 화두를 들어서 의심하는 것이나, 또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나(묵조), 이러한 것은 하나의 특수한 방법인 것이지 우리의 본바탕 불성을 구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 당시나 (그 뒤)도인들은 모두가 다 생명을 생명으로 수용하는 방법으로 해서 우리를 지도해 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일체만법(一切萬法)을 다 갖추고 있기 때문에 모든 법을 다 수용합니다. 어떤 법이나 본질은 부처이기 때문에 가사, 지성적(知性的)으로 구하나 어떻게 구하나, 들어가서 끄트머리에 가면 그때는 다 부처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용납(容納)할망정 주종관계(主從關係), 주장된 우리 수행법은 역시 뭐라 해도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해서[신행身行)], 생명으로 생각하고[의행(意行)], 부처님을 생명으로 외우고[구행(口行)], 그런 식으로 하면서 다른 방법은 종적(從的)으로 용납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끔 저는 말씀을 합니다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것은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런지 모르지만 부처님을 생각하는 그 순간 우리한테 공덕(功德)을 많이 줍니다.

기독교인들이 '오, 주여!' 하는 그 생각도 역시 굉장히 많이 공덕을 주는 것입니다. 흐트러지고 망정(妄情)밖에 없는 우리 중생이 완벽한 존재를 구하는 그 마음으로 해서 우리 마음은 승화(昇華)가 되어서 우리 본심(本心)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경(佛經)에도 '신위도원공덕모(信爲道元功德母)라' 신앙 이것은 도(道)의 근본인 동시에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입니다. 믿는 마음이 없으면 도(道)는 못 통합니다. 우리 중생은 안 보이니까 우선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실상(實相)이 보입니까? 그러나 부처님이나 성자(聖者)는 거짓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못 믿는 것은 그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운 소치입니다. 우리 마음의 광명이 밝아서 그런 실상(實相)의, 불성(佛性)의 지혜가 우리한테 좀 더 빛나 있다면 빨리 믿게 되는 것입니다. 허나 우리 본래 마음인 불성광명(佛性光明)이 빛나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두워서 잘못 알아먹습니다.

 

3. 불성광명(佛性光明)

 

불성(佛性)은 무엇인가? 불성은 광명뿐입니다. 그러나 불성광명(佛性光明)은 사바세계에서 보는 보통 유한적(有限的)인 그런 광명이 아니라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생명의 광명입니다. 광명을 부정하는 마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어둠입니다. 또한 물질이란 것은 일차 광명을 부정하는 데서 물질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중에 불교를 깊이 연구해 보시면 재미도 있고, 또 그야말로 과학을 보다 더 이끌 수 있는 지혜가 나오겠습니다만 우주가 텅 빈 태초(太初)에 우주가 이루어질 때, 어떻게 해서 원자(原子)가 생기고 물질이 생겼을까? 불교에서는 우주의 모든 것은 중생의 업(業) 따라서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우주가 텅 비어서 허무(虛無)가 되어버리지만 다만 빈 것은 아닙니다. 광명으로 꽉 차 있고 다만 형체만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그냥 이런 몸이 아닌 광명체(光明體)인 중생들이 생각하면, 생각하는 힘 곧, 업력(業力)이 모이고 모여서 원자(原子)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런 중생들은 그때는 형상이 없이 다만 광명을 몸으로 하는 중생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중생도 아직 성불을 못했기 때문에 분별하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분별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냥 즉시에 싫어하는 마음의 에너지, 업력 따라서 바로 전자(電子)가 이루어집니다. 또는 내키는 마음이 있으면 내키는 마음 즉시에 또 거기에서 자기(磁氣)가 이루어집니다. 이런 전자(電子)와 자기(磁氣)가 이렇게 모이고 쌓여서 물질이 되고 우주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근원(根源)은 역시 불심(佛心)입니다. 불심을 우리가 분별 시비한 데서 그때그때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물질은 결국 광명을 일차 부정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이 밝아지면 밝아질수록 물질에 대하여 차근차근 과소평가(過小評價)하게 되고 또, 무시(無視)하게 되는 것입니다.

 

닦아보면 알지마는, 닦아본 분들은 자기 몸을 굉장히 원수로 여깁니다. 여러분도 닦아보십시오. 숨이 막히는 것도 이 얼마나 원수입니까, 일차 한 고비를 넘어서 몸에 부담이 없으면 그때는 모르겠습니다만 부담이 없을 때까지, 그동안까지는 굉장히 몸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몸이 원수로 알아지는 것입니다. 조금 잘 먹으면 배부르고 조금 덜 먹으면 배고프고 어디가 조금 얹히면 우리 색신(色身)을 구성한 원소(元素) 가 부자유하니까 아프고 말입니다.

 

하여튼 우리는 모두가 다, 일체가 다 마음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러한 마음을 생명으로 구하는 즉 쉬운 말로 부처님의 이름을 우리가 찾는 것입니다. 이런 불성(佛性)은 천지우주의 본바닥이고 우주가 다 불성(佛性)이기 때문에 몇 마디 말로는 표현을 다 못합니다. 따라서 부처님이나 도인들이 말씀하신 부처님의 대명사인 이름 따라서 겨우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아미타불' 하면, 우리가 뜻은 별로 모를망정 그 말은 벌써 '우주의 모든 실존(實存)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관세음보살은 아미타불이 활용하는 하나의 기운,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불경(佛經)에서 보면 '관음삼십삼신(觀音三十三身)'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관음(觀音)의 몸이 서른세 가지로 화신(化身)한다는 말입니다. 부처의 몸, 또는 사람 몸, 국토의 몸 또는 귀신 몸 등 이와 같이 관음 화신이 됩니다. 따라서 관음보살은 무엇인고 하면, 부처님의 체(體)가, 부처님이 그때그때 만유(萬有)로 형성하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또한 동시에 만유(萬有)를 다시 부처한테로 이끌어 가는 그것이 관음보살입니다.

 

그런데서, 아미타불(阿彌陀佛)이나 관음보살(觀音菩薩)이나 같은 의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내 근본이요 우주의 근본인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을 우리는 다 알 수가 없는 것이니까 다만 그저, '끝도 갓도 없는 우주에 펼친 광명, 영원적인 진리를 갖춘 생명의 광명이 부처구나' '부처님은 우주 실존의 대명사구나' 이렇게 느끼면서 부처님을 생명으로 구하고,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할 때 사소한 것에 얽매이면 공부가 안됩니다. 참선을 제 아무리 많이 했다 하더라도 마음이 옹졸하면 공부는 못 트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확 열어야 합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느 문제를 의심이나 한다든가, 주문(呪文)만 해서 공부하면 그때는 괜히 사람이 고집만 강해집니다.

먼저 마음을 열어놓고 해야 합니다. 물론 공부하면 열려지겠지만, 잘못 나가면 공부한다고 해봤자 도리어 마음이 더 옹졸해집니다.

따라서 우선 마음 열어서, 비록 내가 미처 못 증(證)했다 해도, 내 마음은 천지우주를 다 감싸있다고, 모두를 다 자기마음에다 딱 집어넣어야 합니다. 어제 말씀마따나, 양자강 물을 한 번에 들이마시는, 그런 기운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처님을 천지우주의 전부로 보는, 천지우주 전부를 내가 다 감싸버리는 그런 기백(氣魄)으로 해서, 공부를 해야만이 차근차근 마음 지평(地平)이 열려 갑니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역시, 그러한 광대무변(廣大無邊)한 광명을 상상하면서 부처님 이름을 외우는 것입니다. 부처님 이름은 그냥 우리 중생 이름과는 다릅니다. 부처님 이름은 불교말로 명호부사의(名號不思議)라,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우리가 우리 몸에 향(香)을 지니면 우리 몸에서는 그냥 향냄새가 풍깁니다. 우리 몸에다 나쁜 냄새를 지니면 또 역시 나쁜 냄새가 풍깁니다.

 

그와 똑같이, 가장 높은 이름이고 일체 공덕이 갖추어 있는 그러한 공덕 이름이 부처님 이름이기 때문에, 부처님 이름을 자꾸만 외워 싸면, 그때는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 우리 몸에서 영원자(永遠者)의 빛이 나간단 말입니다. 관음보살(觀音菩薩)을 하루에 한 삼만 번 해보십시오. 그 사람 얼굴은 이상하게 빛나갑니다. 원래 우리가 부처인지라 또 이름 자체에 영원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놔서, 부르면 부를수록 결국은 우리 몸이나 우리 마음은 향기롭고 빛나갑니다. 광명은 차근차근 증장(增長)되어 갑니다.

 

 

원래 불심(佛心)은 광명뿐인 것인데, 우리 중생심은 일차 어두워졌다 하더라도, 부처님을 불러 싸면 그때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차근차근 광명의 비중이 더 높아져서 우리 마음이 광명 쪽으로, 불성광명으로, 불심(佛心)으로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명만으로 충만(充滿)하면 그때는 성불(成佛)이 되겠지요. 광명만으로 충만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처님을 한시도 안 놓쳐야 합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이름은 지극청정보주명호(至極淸淨寶珠名號)라, 지극스럽고 또는 청정하고 보주(寶珠)라, 보배 같은 그런 광명이 빛나는 이름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아미타불’이나 그런 부처님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 합니다. 이러한 무량한 부처님의 광명을 염두에 두고서 찰나도 잊지 말고서 가는 것이, 이것이 참선입니다.

어려운 말로 하면 일상삼매(一相三昧)라, 천지우주를 부처님의 일상(一相)으로 보는 것이고, 일행삼매(一行三昧)는 일상(一相)으로 보는 그것을 안 끊어지게 시리 사뭇 이어간다는 말입니다.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이것이 참선입니다. 이렇게 해서, 꼭 우리 이번 용맹정진 동안에 부처님 쪽으로 가까이 가셔서 한사코 부처님을 견불성불(見佛成佛)이라, 반드시 이러한 십식(十識)인 불심(佛心)을 바라고서 성불하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4. 광명(光明)

 

광명(光明)과 광명은 청황적백(靑黃赤白)이 아니요 물질(物質)도 아니며 유무(有無)도 아니요 인과법(因果法)도 아니니 모든 불타(佛陀)의 본원(本源)이 일체중생(一切衆生)의 근본(根本)이다.

[범망경(梵網經)]

 

제가 말씀을 진행하는데 있어 광명이란 것을 좀 풀이를 해 드려야 다른 것을 이해하시기가 편리하실 것입니다. '광명'이란 데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광명과 광명’을 이렇게 두 번 되풀이 한 것은 우리가 느끼는 중생의 시각으로 보는 그런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이른바 청정광명이라. 청정광명은 청, 황, 적, 백이 아니요, 푸른색이라든가 또는 누런색이라든가 붉은 색이나 흰색이나 이른바 상대 유한적인 광명이 아니란 뜻입니다. 물질도 아니며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존재도 아닙니다. 또는 인과법도 아니니, 원인이 있고 결과가 있는 상대적인 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모든 불타의 본원이며', 부처님과 일체 중생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오직 부처님이라 하는 우주의 순수생명이고 부처님의 본원이며, 일체중생 즉 사람이나 모든 존재의 근본이란 말입니다. 이것은 대승경인 『범망경』 전문에 나와 있는 법문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광명이라 하면 그냥 세간적인 광명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다운 광명 이것은 세간적인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광명이 아니란 말입니다.

 

대일여래(大日如來)라,

대일여래는 인도말로 비로자나불인데 무슨 뜻인고 하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우주에 두루해 있는 광명의 생명이란 뜻입니다. 그렇게 광명이란 말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 배광 이것은 부처님 광명이 우주를 다 비춘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