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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28. 제9장 금강심론(金剛心論) 설법

제9장 금강심론(金剛心論) 설법

 

우리가 공부하는 인행공덕(因行功德) 곧 성불(成佛)을 위한 수행하는 공덕이 원만하게 되어야 결과도 원만히 되겠지요. 보통 우리가 의욕만 있어서 실제로 인행공덕을 닦지 않으면서 결과만 얻으려고 생각합니다. 마땅히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인행공덕은 여법(如法)히 수순(隨順)해서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동적으로 공덕의 과보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운문(雲門) 선사가 말씀한 삼종병(三種病) 가운데 미도조작(未到造作)이라, 우리가 아직 이루지 않은 분상에서 애쓰고 높은 경계로 올라가려고 성급한 마음으로 구하기만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더욱 초조하고 공부도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인행공덕만 착실히 닦아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점차로 마음이 열려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의젓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범부지의 인행공덕을 충분히 닦아야 하겠습니다.

 

1. 인원과만(因圓滿)

 

인원과만(因圓果滿)

 

여사(如斯)히 간단(間斷)없이 전심전력(專心全力)하야 관이염지(觀而念之)하면 습인(習忍:수습안인(修習安忍))이 생(生)하면서 상사각(相似覺)을 성취(成就)하는 동시에 명득정(明得定)과 명증정(明增定)의 성인위(性忍位)인 성지(性地)를 거쳐 인순정(印順定)에서 비로소 도종인(道種忍)이 생(生)하고 순일무잡(純一無雜)의 일심지(一心支)인 무간정(無間定)에 입(入)하매 심(心)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여(如)할지라. 오직 가행공덕(加行功德)으로써 가관적(假觀的) 일상삼매(一相三昧)에서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實相三昧)에, 염수적(念修的) 일행삼매(一行三昧)에서 증도적(證道的) 보현삼매(普賢三昧)에 여차(如此)히 관념(觀念)에서 실증(實證)에로 사유수득(思惟修得)하나니 어시호(於是乎) 신증심오(身證心悟)로써 정각(正覺) 초보(初步)의 신인(信忍)을 성취(成就)하고 순인(順忍)으로써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주(住)하야 수자(修者)의 원력(願力)에 따라 수분각(隨分覺)으로써 무생인(無生忍)을 거쳐 적멸인(寂滅忍)인 구경각(究竟覺)에 달(達)하는 것이 본각경지(本覺境地)인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첩경(據徑)이니 근책중(勤策衆)은 여시관(如是觀)으로써 여시과(如是果)를 증(證)할진져.

- 금강심론(金剛心論) -

 

이와 같이, 일승법문(一乘法門)을 일상삼매나 또는 일행삼매 즉 진여삼매, 진여법성을 떠나지 않는 공부를 간단없이, 끊어지거나 쉬는 사이도 없이 전심전력하여 관이염지(觀而念之)하면, 관찰하고 생각하면 이란 말입니다.

 

관념(觀念)이라는 것이 우리 공부인에 있어서는 깊은 뜻입니다. 관(觀)은 지혜(慧)고(念)은 정(定)에 해당합니다. 바꾸어서 말하면은 관(觀)은 일상삼매(一相三昧)고 염(念)은 일행삼매(一行三昧)입니다. 관은 상대적인 관이 아니라 바로 진리를 관조(觀照) 관찰(觀察)하는 것이니까 바로 정수(正受)고 정심행처(正心行處)입니다. 진여(眞如)를 관(觀)하는 것이 참다운 관이 됩니다. 따라서 그와 같이 관하니까 바로 지혜(智慧)가 되지요. 염하는 것은 간격이 없이 염념, 생각 생각에 상속적(相續的)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반야 지혜의 경계, 진여법성 경계를 조금도 빈틈이 없이 바로 생각해 나간다고 하면 습인(習忍) 곧 수습안인(修習安忍)이 생깁니다. 곧 닦아 익혀서 편안히 머문다는 말입니다.

참선공부에 있어서 이 습인이 생기게 되면 한 시간 두 시간 앉아 정진하는 정도는 어렵지 않고 습인이 안 되면 부스럭거리며 굉장히 괴로움을 느낍니다. 따라서 관이념지(觀而念之)해서 화두나 또는 기타 염불이나 어떤 진리를 지혜와 선정과 쌍수해서 닦아 나간다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수습안인(修習安忍)인 습인(習忍)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한 상사각(相似覺)을 성취합니다. 상사각은 참다운 정각(正覺), 견성이 아니고 어렴풋이 닮은 깨달음이란 말입니다. 자의식이 과잉하고 또는 아만이 있는 사람들은 자칫하면 상사각 정도 가지고서 공부를 다 마쳤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분별지혜 곧 간혜지(乾慧智)로는 별로 막힘이 없는 경계인 것입니다.

 

동시에 명득정(明得定)과 4선근에서 말씀했습니다만 마음이 껌껌하다가 확 열려오는 것입니다. 몸이 짜르르해서 전류에 감전된 모양으로 몸이 개운해지고 또는 머리도 시원하고 가슴도 쾌적하고 아주 가뿐한 상태입니다.

명득정과 또는 공부 정도가 더욱더 깊어져서 명증정(明增定)의 성인위(性忍位)인 성지(性地)에 이르면 한결 마음이 안정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순정(印順定)에서, 인순정은 보다 마음이 맑아 옴을 확실히 확인하는 경계입니다. 전에는 공부에 대한 신념이 모호했지만 공부가 익어지면 자기 몸에 대해서도 별로 애착도 생기지가 않고 무아(無我) 무소유(無所有)가 완전히는 못 된다 하더라도 어렴풋이나마 인증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비로소 도종인(道種忍)이 생기고, '정말로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쳐야겠구나, 다른 것은 안해야겠구나' 하는 마음 그런, 서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른바 도의 종자가 마음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순일무잡(純一無雜)한 일심지(一心支)인, 다른 헛것이 섞이지가 않고 순수한 마음 곧, 다른 생각이 없이 오로지 순수한 마음 하나뿐인 무간정(無間定)에 들어가니, 이것은 번뇌 때문에 마음이 괴롭지 않고 즉 번뇌가 사이에 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순일무잡의 순수한 일심지가 되니 어떻게 번뇌가 그 사이에 낄 수가 있겠습니까.

 

마음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지라. 맑은 거울에 때가 없이 모든 것이 바로 다 비춰오고 파동치지 않는 고요한 물위에 모든 형상들이 비춰오듯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공부할 때에 자기 마음을 점검해 보면 짐작되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이 명경지수 같은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계도 공부가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가행공덕(加行功德)으로써, 더욱더 정진해 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무간정에 들고 또는 마음이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같이 되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망동하면 그만 뚝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입선(入禪) 중에 무간정을 체험했다 하더라도 방선(放禪)한 뒤에 잔소리나 하고 함부로 해버리면 간 곳이 없게 됩니다. 따라서 안상(安祥)과 보임(保任)이라, 그 명경지수 같은 마음을 하마 흩어질세라, 소중히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부질없는 말도 않고 밥 먹을 때나 걸어갈 때나 항시 마음을 불성경계(佛性境界)에다 딱 머문, 그 자리를 조금도 여의지 않고서 공부해야 더 나아가지는 것입니다. 무간정까지 갔다가도 견성까지 가려면 앞서 말씀드린바 한껏 가행공덕을 거듭해야 하는 것입니다.

가관(假觀)적 일상삼매란, 아직은 참다운 무루(無漏) 정관(正觀)에는 못 드는 것입니다. 가사 '무량무변한 진여불성 광명이 충만해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더라도 실제로 보이는 것이 아니요, 부처님께서 말씀했으니까 '있거니' 하고서 믿고 나가는 것이지 실제로 본 것이 아니니까 가관(假觀)인 것입니다.

 

가관적 일상삼매에서 항시 '그렇거니' 하고서 상을 아니 내는 일상삼매가 오랫동안 익혀지면 실지로 진여불성이 있는 줄 확신이 되어 견성적(見性的) 실상삼매(實相三昧)에, 익어져서 점차로 나가다가 번뇌가 끊어지면 본래 부처인지라 응당 필연적으로 견성이 되어야 이른바 실상삼매(實相三昧)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염수적(念修的) 곧 염념상속해서 끊어지지 않게 공부해 나가는 일행삼매(一行三昧)에서 증도적(證道的), 도를 증하는 보현삼매(普賢三昧)에 들게 됩니다.

이와 같이 관념(觀念)에서 실증(實證)에로 사유수득(,思惟修得)하나니, 맨 처음에는 관념입니다. 우리는 관념을 처음부터서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견성할 수는 없는 문제 아닙니까. 처음에는 부처님 말씀, 조사 스님들 말씀에 의지해서 우선은 관념으로 착실히 공부하다 보면 안주(安住)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부처다'고 하다보면 결국은 본래 부처인지라 부처가 되어간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닦아서 얻는 것입니다.

 

어시호(於是乎), 이에 있어서 신증심오(身證心悟)로써, 몸으로 증하고 마음으로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몸으로 증해야 하기 때문에 꼭 철저한 계행이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철저한 계행이 앞서야 합니다.

정각초보(正覺初步)의 신인(信忍)을 성취하고 순인(順忍)으로써 금강유정(金剛喩定)에 주(住)하여, 정말 정각초보인 진여불성을 초견성을 해야 참다운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불성을 못 보았을 때는 항시 의심이 남는 것입니다. 확실히 믿음이 생긴다면 부처님 말씀에 온전히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증명을 해버렸으니 어떻게 안 따라 가겠습니까. 순인으로써 금강유정이라, 곧 견성오도를 하는 것입니다.

 

견성오도에 주(住)하여 수자(修者)의 원력에 따라 수분각(隨分覺)으로써, 보살십지로 한다면 초지에 견성하고 그로부터 점차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것도 역시 자기 원 따라서 용맹정진을 안 쉬고 한다면 비약적으로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게으름 부린다면 차근차근 더디 올라가고 또 더구나 중생제도 핑계하고 사회사업이나 한다고 할 때는 더 못 가고 멈추고 말겠지요.

무생인(無生忍)을 거쳐 적멸인(寂滅忍)인 구경각에 달하는 것이 본각경지(本覺境地)인 열반안(涅槃岸)에 도(到)하는 첩경이니 근책중(勤策衆)은, 부지런히 닦아나가는 수행자는 이와같이 진여실상의 관법 곧 실상관(實相觀)으로써 부처님의 불과를 증득(證得)해야 합니다.

 

2. 오지여래 (五智如來)

 

우리가 '불성(佛性)이 어떻다, 불성은 무한공덕을 갖추고 있다. 우리 자성은 심심미묘하다' 이렇게 말을 보통은 합니다마는 정말로 체계적으로 어떤 공덕이 있는가? 그런 것은 잘 모르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그러나 밀교(密敎) 등 경전에 소상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순수밀교에 있는 법문으로 법성공덕(法性功德) 진여불성공덕(眞如佛性功德)을 체계적으로 다섯 공덕으로 구분한 것이 5지여래(五智如來) 법문입니다.

 

지수화풍의 4대(四大)와 거기에 공(空)을 더하여 5대(五大)라고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인 상징으로서 표현할 때는 지수화풍공 5대라고 하는 것이고, 물질이 그대로 물질인 것이 아니라 바로 불성이요, 성품으로서는 바로 생명이니까 5지여래(五智如來)라고 말합니다. 또 5지여래에 따른 각기 지혜가 있어서 5지(五智)라고 합니다. 그러나 5지(智)나 5대(大)가 각기 뿔뿔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일미평등(一味平等)의 불성(佛性)인데 그 별덕(別德)을 5지 ․ 5대 ․ 5여래(如來)라 하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물리적 상징으로 본다면 땅기운 같은 이른바 물질적인 질료가 되는 것은 지(地)요, 수분은 수(水)요 또 불기운 온도는 화(火)요 동력은 풍(風)이요 지수화풍 4대가 의지할 공간은 공(空)입니다. 이와 같이 질적으로 보아서는 그렇지만 그것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에 오지여래(五智如來)라 하고 각기 여래마다 특징적인 지혜인 5지(五智)가 있는 것입니다.

 

오지여래(五智如來)

 

비로자나(毘盧遮那)를 광명변조(光明遍照) 노사나(盧舍那)를 정만(淨滿) 그리고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능인적묵각(能仁寂黙覺)이라 역(譯)하니 능인(能仁)의 양심(良心)을 가지고 적정(寂靜)에 처(處)하야 신구의(身口意)를 삼함(三緘)한 후 정만(淨滿)의 성해(性海)를 견증(見證)하고 구경각(究竟覺)을 성취(成就)함일새 자신(自身)이 곧 대일(大日)이라 심(心)이 허공(虛空)과 등(等)하야 기(其) 체성(體性)이 무장무애(無障無碍)함으로 제1지명(第一智名)을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라 운(云)하고 기(其) 무애광명(無碍光明)이 여일변조(如日遍照)함으로 불호(佛號)를 대일여래(大日如來) 곧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이라 위(謂)하는 바 기계일(器界日)은 일소세계(一小世界)를 조명(照明)하되 유장유애(有障有碍)하나 심계일(心界日)은 대천사계(大千沙界)를 변조(遍照)하되 무장무애(無障無碍)함으로 대일(大日)이라 칭(稱)하며,

 

심(心)이 허공(虛空)과 등(等)하되 단공(但空)이 않이오 풍성적(風性的) 일기(一氣)가 등량평만(等量平滿)함으로 제2지명(第二智名)을 평등성지(平等性智)라 운(云)하고 불호(佛號)를 불공여래(不空如來)라 위(謂)하며,

일기평만(一氣平滿)한 등허공(等虛空)의 심계(心界)에 화성적(火性的) 지광혜염(智光慧焰)이 등량형만(等量炯滿)하야 명암(明暗)이 무(無)하되 능(能)히 기멸(起滅)을 시(示)하는 사계(沙界)의 차별상(差別相)을 통(通)하야 진여(眞如)의 수연불변성(隨緣不變性)을 관찰(觀察)할새 제3지명(第三智名)을 묘관찰지(妙觀察智)라 운(云)하고 불호(佛號)를 미타여래(彌陀如來)라 위(謂)하며,

 

무변무량(無邊無量)의 등허공적(等虛空的) 심계(心界)에 초일월(超日月)의 금색광명(金色光明)을 대(帶)한 수성적(水性的) 식수(識水)가 정만(淨滿)함으로 제4지명(第四智名)을 대원경지(大圓鏡智)라 운(云)하고 불호(佛號)를 아촉여래(阿閦如來)라 위(謂)하며,

 

피(彼) 정광(淨光)의 지성적(地性的) 금색(金色)에 주(主)로 4보색(四寶色)을 대(帶)하였으니 적체(寂體)엔 풍성적(風性的) 흑금색(黑金色)과 화성적(火性的) 적금색(赤金色)과 수성적(水性的) 백금색(白金色)과 지성적(地性的) 황금색(黃金色)이 순일혼화(純一混和)하야 자마금색(紫磨金色)의 일도광명(一道光明)이 상주부동(常住不動)하되 기(其) 조용(照用)엔 사보색광명(四寶色光明)이 각기성능(各其性能)의 무량공덕(無量功德)을 발휘(發揮)하야 교철병환(交徹炳煥)할새 정오당양(正午當陽)의 마니보주(摩尼寶珠)가 휘황찬란(輝煌燦爛)하야 무수보광(無數寶光)이 무변혁요(無邊爀曜)함과 여(如)함으로 제5지명(第五智名)을 성소작지(成所作智)라 운(云)하고 불호(佛號)를 보생여래(寶生如來)라 위(謂)하나니,

 

제1지(第一智)는 법신(法身)의 총지(總智)요 기타(其他)는 별지(別智)라 제2(第二) 제3(第三) 제4(第四)의 삼지(三智)는 보신(報身)의 능지(能智)요 제5지(第五智)는 화신(化身)의 소지(所智)인 바 별칭(別稱)하야 오지여래(五智如來)라 운(云)하고 총칭(總稱)하야 아미타불(阿彌陀佛)이라 위(謂)하니 제불중(諸佛中) 수반(首班)이오 미타(彌陀)의 묘관찰지인(妙觀察智印) △인(印)이 일체여래지인(一切如來智印)의 원형(原型)이니,

 

아자(阿宇)는 무(無)의 의(義)로서 화신(化身), 미자(彌字)는 만(滿)의 의(義)로서 보신(報身), 타자(陀字)는 법(法)의 의(義)로서 법신(法身)을 의미(意味)하야 본구삼신(本具三身)인 아미타불(阿彌陀佛)에 총해(總該)할새 법계체성(法界體性)인 일법신(一法身)에 평등성(平等性)으로 묘관찰(妙觀察)하는 대원경적(大圓鏡的) 능지보신(能智報身)과 성소작(成所作)의 소지화신(所智化身)을 겸(兼)하고 사지(四智)에 만덕(萬德)을 구(俱)하니라.

-금강심론(金剛心論)-

 

비로자나불의 비로자나(毘盧遮那 Vairocana)는 인도말 범음(梵音)을 딴 것인데 뜻으로는 광명변조(光明邊照)라, 부처님의 청정미묘한 정광(淨光) 적광(寂光)이 우주 삼천대천세계에 끝도 가도 없이 충만해 있다는 뜻입니다. 광명이 두루 비춘다는 말입니다.

 

비로자나불은 이른바 법신불입니다. 보신인 노사나불의 노사나(盧舍那)는 정만(淨滿) 즉 법성, 불성이 충만해 있다는 말입니다. 법신이 그냥 그대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법신의 체에 불성이 충만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석가모니는 능인적묵각(能仁寂黙覺)이라는 뜻인데 모든 무주상(無住相)의 지혜와 자비를 신 ․ 구 ․ 의 삼업(三業)으로 원만히 갖춤과 동시에 우리 마음의 산란을 여의고 깨달은 각(覺), 곧 깨달은 부처라는 말입니다.

환언하면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를 갖춘 능인(能仁)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하여,

 

마땅히 수행자가 공부할 때는 자기 혼자만의 성취를 위하는 식의 마음 갖고는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내 몸뚱이를 언제나 모든 중생한테 바쳐야겠다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있어야 공부가 성취되는 것입니다. 본래 공부 자체가 자타를 떠난 우주적인, 우주와 둘이 아닌 자리의 공부이기 때문에 차별심을 가지고 공부하면 공부가 안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무주상의 자비와 지혜라 할 수 있는 능인의 양심을 가지고 고요한 곳에 처해서 신 ․ 구 ․ 의를 삼함(三緘)이라, 봉한다, 닫아버린다는 뜻이지요. 몸으로 허튼 행동 않고 입으로 허튼소리 않고 또는 뜻으로 부질없는 생각을 않을 뿐만 아니라 가급적이면 일체 활동을 삼가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행주좌와(行住坐臥)에 그렁저렁 공부하는 식으로 나가려면 모르겠지만 '꼭 내가 불성을 증명한다, 한사코 견성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대사일번 대활현전(大死一番 大活現前)이라, 한번 크게 죽어야 크게 산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에서도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진정으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신 ․ 구 ․ 의 삼함이라, 몸으로 활동을 될수록 적게 합니다. 구참 수행자들은 산책이나 활동을 않더라도 공부 자체로 해서 몸을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간다면 본래 부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정만(淨滿)의 성해(性海) 즉 불성 자리를 깨닫고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경각을 성취함일새 자신이 곧 대일(大日)이라, 비로자나불이란 말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아서 마음의 체성(體性)이 무장무애하므로 비로자나불에 상응되는 지혜가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입니다. 법계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또는 법계체성에 계합된 지혜라는 말입니다.

또 법계체성지의 거리낌 없는 광명이 마치 해와 같이 두루 비추므로 부처 이름을 대일여래(大日如來) 곧 비로자나불이라 말하는바 태양계의 태양은 태양계 한 세계를 비추고 밝게 하되 유장유애(有障有碍)라, 거리낌이 있고 장애가 있습니다. 그래서 깜깜한 암실이나 물질을 뚫고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 달〔心月〕은 삼천대천세계를 다 두루 비추되 무장무애라,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쇳덩이 속에나 바위 속에나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돌이나 쇠나 다 본래 공(空)하여 불성으로 되었기 때문에 무장무애입니다. 무장무애하므로 이른바 보통 태양이 아니라 대일(大日)이라 칭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허공과 같되 다만 공이 아니요, 풍성적(風性的)인 기운이 등량평만(等量平滿)하므로 평등성지(平等性智)라 하고 부처의 이름을 불공여래(不空如來)라고 말합니다. 5지여래 가운데 두 번째가 되겠지요.

일기(一氣) 곧 우주 에너지, 에너지나 정기(精氣)라고 하면 우리가 알기가 쉽지 않겠습니까. 우주의 정기가 평등하고 가득찬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화성적(火性的) 지혜의 불꽃 곧 그런 지혜 광명은 조금도 흠이 없이 원만하게 빛나고 충만해서 본래 꺼짐이 없으되 능히 일어났다 멸했다 하는 것을 보이는 사바세계의 차별상을 통하여 진여의 수연불변성(隨緣不變性) 곧 인연에 따르되 변치 않는 성품인데, 진여불성이 인연에 따른다 하더라도 진여는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진여가 나무가 되면 나무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가상(假相)이 그렇게 보일 뿐인 것이지 진여의 성품은 변치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진여의 수연불변성을 관찰함을 신묘하게 관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라 말하고 불호(佛號)를 미타여래(彌陀如來)라 합니다.

무변무량의 허공 같은 마음세계에 일월을 초월한 금색광명, 곧 순수한 불성광명(佛性光明)을 말한 것입니다. 태양광선이나 그런 가시적(可視的)인 눈부신 광명은 물리적인 광명이지만 순수한 불성광명은 그런 물리적인 광명이 아닌 것입니다. 금색광명을 띄고 있는 수성적(水性的)인 성품의 물, (佛性)에너지가 청정하게 충만하므로 모든 것을 원만하게 비추는 지혜를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말합니다. 마치 큰 거울이 형상을 비추듯이 우주를 비추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불호는 아촉여래(阿閦如來)라 합니다.

 

청정한 광명인 지성적(地性的) 금색에, 금색도 역시 사바세계에 있는 물질적 금색이 아닌 청정광명 금색에 주로 사보색(四寶色)을 띄었으니 적체(寂體)인 법신의 몸에는 풍성적(風性的) 흑금색(黑金色)과 화성적 적금색과 수성적 백금색과 지성적 황금색이 순일 혼화(混和)하여, 뿔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원융하니 혼화하여 그 색이 자마금색(紫磨金色)이라, 자마금색은 순수세계의 광명입니다. 도인들이 견성할 때도 자마금색의 원광(圓光)을 증득(證得)하고 열반에 들 때도 자마금색의 광명 구름이 떠오르는 가운데 열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마금색의 순수 광명이 상주부동하게 항시 머물러 있습니다. 법성경계 불성경계는 영원히 불생불멸한 자마금색의 광명이 항시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그런 광명이 인연 따라서 산이 되고 또는 지구가 되고 또는 태양이 되더라도 역시 그런 광명은 변치가 않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눈에 태양으로 보이고 무엇으로 보이고 할 뿐인 것입니다. 상주부동하되 곧 항상 변함없이 머물러 있으나 비추는 용(用)에는 그런 사보색 광명이 각기 성능의 무량공덕이 있습니다.

 

가사, 흑금색은 흑금색의 공덕이 있고 또는 황금색은 황금색의 무량공덕을 발휘하여 그런 공덕이나 빛이 서로 피차 어우러져서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한없이 찬란한 보배인 마니보주는 밤에도 빛나는 것이지마는 더구나 대낮에 정오에 태양이 빛나고 있을 때는 얼마나 휘황찬란히 빛나겠습니까. 마니보주가 휘황찬란하여 헤아릴 수 없는 보배광명이 한량없이 빛남과 같음으로 성소작지(成所作智)라 말하고 부처이름을 보생여래(寶生如來)라 말합니다.

 

제1 지혜인 법계체성지는 법신 비로자나불의 총지(總智)요, 기타는 별지(別智)입니다. 제2, 제3, 제4의 삼지(三智)는 보신의 능지(能智)요. 제5지는 화신의 소지(所智)인 바 별칭하여 5지여래라 하고 총칭하여 아미타불이라고 말하니 제불중(諸佛中) 수반(首班)이요 미타의 묘관찰지인 삼각형(△)이 일체 여래지인(如來智印)의 원형입니다.

 

아미타의 아(阿)자는 무(無)의 뜻으로서 화신, 미(彌)자는 원만하다는 의미로 해서 보신, 타(陀)자는 법의 뜻으로서 법신을 의미하여 본래 삼신(三身)을 다 갖추어 있는 아미타불에 모두 다 해당할새, 법계체성지인 한 법신에 평등성으로 묘관찰하는 대원경적 능지(能智)보신과, 또는 성소작의 소지(所智)화신을 겸하고 4지에 만덕을 갖추어 있는 5지여래가 바로 우리의 자성공덕(自性功德)입니다. 그리고 법신 보신 화신의 삼신일불(三身一佛)인 아미타불이 바로 우리의 참 자아(眞我)요 본래면목입니다.

3. 열반사덕(涅槃四德)

 

불교와 같은 가장 위없는 종교가 아니더라도 어떠한 분야에서나 고결한 비젼(Vision)이나 이상(理想)이 없으면 우리 행동이 감격스럽게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이른바 목적의식, 이상에 대한 가치관을 확실히 해두어야 하는 근본문제에 있어서 불성공덕이 어떠한 것인가? 불성공덕에 대한 인식이나 믿고 해석하는 신해(信解)가 애매모호하면 생명을 내걸고 공부도 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출가한 의의에 대해서도 항시 회의를 품습니다. 성불이란 것은 얼마만치 중요한 것이고 어떠한 가치와 공덕이 있는 것인가? 이런 것에 대한 정립이 꼭 선행적으로 우리 수행자한테는 필요합니다. 거기에 대응한 법문이 이미 밝힌바 오지여래(五智如來)와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열반사덕(涅槃四德)

 

열반(涅槃)…멸도(滅度)․불생(不生)․안락(安樂)․극락(極樂)․해탈(解脫)

 

1. 상덕(常德)… 상항불변(常恒不變)하여 생멸(生滅)이 없고, 수연화용(隨緣化用)이 부절(不絶)함.

2. 낙덕(樂德)… 무위안락(無爲安樂)함. 일체공덕(一切功德)을 갖춤.

3. 아덕(我德)… 신통묘용(神通妙用)이 대자재(大自在)함.(팔대자재아 八大自在我)

4. 정덕(淨德)… 일체구염(一切垢染)을 해탈(解脫)하여 청정(淸淨)함.

 

열반(涅槃 nirvāṇa)이란 멸도(滅度) 곧 번뇌가 다 완전히 다 멸해버렸다는 뜻입니다. 불생(不生)이라, 불생불멸한 불생은 바로 영생(永生)과 같은 뜻입니다. 낳지 않고 죽지 않으니까 응당 영생이 되겠지요. 또는 안락(安樂)이라, 아무런 번뇌가 없으니 안락스러울 것이고 또 같은 안락도 변동과 소멸이 없고 사무친 위없는 안락이기 때문에 바로 극락(極樂)입니다. 또 어떤 구속이나 얽매임이 없이 자유자재하기 때문에 해탈(解脫)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의 공덕은 물론 무량공덕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 경전마다 부처님 공덕은 불가설(不可說) 불가설이라, 어떻게 말씀을 다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항하사 모래수와 같다는 비유로도 부처님 공덕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무량공덕을 4가지 속성으로 구분한 것이 열반사덕(涅槃四德)입니다.

다시 환언하면 처음에 상덕(常德)이라, 상덕은 상항불변(常恒不變)해서 우리들이 얻는 지혜나 자비나 무량공덕이 변동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변동이 없어서 생멸이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아무리 변동이 없다 하더라도 행복감을 주지 않아서는 또 별 가치가 없을 것입니다. 행복도 무한의 행복이 되어야 현상적인 오욕(五欲)경계에서 맛보는 시원찮은 행복에 관념이나 몸을 내던지지 않겠지요. 우리가 출가한 것도 세속적인 행복보다도 비교할 수 없는 생사해탈의 무한한 행복이 있기 때문에 출가를 했던 것입니다. 낙덕(樂德)이란, 무위안락(無爲安樂)이라, 조금도 조작이 없는, 상대적인 행복이 아닌 절대적인 행복이란 말입니다.

 

다음 아덕(我德)이라, 아덕을 잘못 생각하여 단순히 피상적으로 해석을 하는 분도 더러 있습니다. 아덕은 무한의 가능성 무제한의 지혜공덕 자리입니다. 이른바 중생들의 속된 아(俗我), 조그만한 소아(小我) 또는 망령된 망아(妾我) 이런 것이 중생들이 나라하고 고집하는 아(我)가 되지 않겠습니까마는 아덕은 그런 아가 아니라, 본래면목을 훤히 밝힌 깨달은 자리의 대아(大我)의 덕이란 말입니다. 이것도 나나 너나 하는 상만 떠났을 뿐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일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는 무한의 능력을 의미합니다. 신통묘용(神通妙用)을 대자재(大自在)라 하는데 대자재를 갖춘 공덕이 아덕(我德) 입니다.

열반 아덕을 팔덕(八德)이라, 여덟 가지로 덕을 말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무량신통을 다 갖추어 있는 자리를 여덟 갈래로 풀이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천안통, 천이통 등 모든 신통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자기 몸을 바늘구멍만한 데에도 자재롭게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고 또는 삼천대천세계로 자기 몸을 한없이 키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원래 크고 작고 상대를 떠나버린 세계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런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잘못 생각한 사람들은 신통은 외도(外道)나 하는 것이라고 폄하(販下)를 합니다. 물론 누진통(漏盡通)을 빼놓고 다른 것은 외도도 합니다. 그러나 외도가 한다 하더라도 외도도 철저한 계행을 지켜야 5신통을 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렁저렁 하면서 천안통 천이통 그런 신통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외도 공부하는 법칙을 보면 굉장히 까다롭습니다. 하물며 그 보다도 훨씬 더 넘어선 누진통까지 하려면 그야말로 보다 한결 철저해야 되겠지요.

 

마땅히 아덕(我德) 자리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두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한테 갖추어 있는 자성공덕, 본래면목 공덕이 무한함을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가 아프다는 것은 과거 숙세인연도 있고 금생에 섭생을 잘못해서 아픈 것도 있겠습니다만 협소한 자아(自我) 관념 때문에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이 옹졸하면 그마만치 우리 세포 활동도 거기에 따르는 것입니다. 기분 좋을 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되고 기분 안 좋을 때 억지로 먹으면 소화가 안 되듯이 마음이 아덕(我德), 본래면목 쪽으로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우리 생리도 따라서 좋은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 네가 없고 내 것도 없고 천지 우주 모두가 다 만 공덕을 갖춘 진여불성 뿐이라고 확신을 해버리면 웬만큼 속이 답답한 우울증이나 조울증이나 그런 것은 싹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 말씀이나 위대한 선지식 말씀은 한마디 들으면 그냥 마음이 시원스럽게 툭 트이는 것입니다. 우리 자성공덕 자체가 조금도 막힘이 없는 것인데 그 자리에 무슨 생사가 있겠습니까?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병도 따지고 보면은 일체가 유심조(唯心造) 아니겠습니까. 금생이 되었든 과거가 되었든 마음 잘못 썼기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병을 빨리 나으려고 생각할 때는 마음 자세가 본래의 자리, 병도 없고 생사도 없고, 남을 미워할 것도 없고 좋아할 것도 없는 자리에다 마음을 둔다면 웬만한 병은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바 귀신같은 것은 절대로 못 짚이는 것입니다.

다음에 정덕(淨德)이라, 맑은 덕이라는 말입니다. 일체 구염(垢染)을 해탈하여 청정함이라, 구염은 바로 번뇌입니다. 따라서 일체 번뇌가 없는 자리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영생불멸해서 모든 공덕이 조금도 변치 않고서 그대로 갖추어 있는 상덕(常德)이 있고, 위없는 최고의 행복을 완전히 갖추어 있는 낙덕(樂德)이 있고, 또는 모두를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신통묘용을 갖추어 있는 아덕(我德)이 있고, 또는 일체 번뇌를 다 떠나 오염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정덕(淨德)이 열반사덕(涅槃四德) 즉 우리 자성의 무량공덕입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이 자리를 확신하고 닦아야 용기도 나고 생사대사를 위하여 이 몸뚱이 몇 천 개 바친다 하더라도 아깝지 않다는 대 결단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5지여래도 내나 열반4덕을 다른 각도로 풀이한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닙니다. 5지여래와 열반4덕을 함께 정리하여 봅니다.

 

오지여래(五智如來) ․ 오지(五智) - 열반사덕(涅槃四德). 오대(五大) 

 

1. 대일여래(大日如來) ․ 법계체성지(法界體性智) ․․ 총덕(總德)․․ 공(空)․ 

2. 불공여래(不空如來) ․ 평등성지(平等性智) ․․ 락덕(樂德)․․ 풍(風)․ ⌓

3. 미타여래(彌陀如來) ․ 묘관찰지(․妙觀察智) ․․ 상덕(常德)․․ 화(火)․ △

4. 아촉여래(阿閦如來) ․ 대원경지(大圓鏡智) ․․ 아덕(我德)․․ 수(水)․ ○

5. 보생여래(寶生如來) ․ 성소작지(成所作智) ․․ 정덕(淨德)․․ 지(地)․ 口

 

우리 자성(自性)에 갖추어 있는 총덕(總德)은 대일여래(大日如來), 비로자나불 입니다. 자성의 자비 지혜 광명이 삼천대천세계를 비추되 조금도 장애 없이 무장무애합니다. 곧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자성 광명이기에 부처님은 바로 법계를 몸으로 하는 인격적인 생명 자체이기 때문에 대일여래 부처님이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이나 아미타불한테 참배한다하더라도 결국 참 자기한테 귀의하는 것입니다.

다음 불공여래(不空如來)입니다. 대일여래가 끝도 가도 없이 우주를 두루 비춘다고 했지만 그러면 그 가운데가 아무것도 없이 텅 비었을 것인가? 비지 않고 무량공덕이 충만합니다. 불공여래는 평등성지요 락덕(樂德)입니다. 열반4덕의 낙덕은 지나치지 않고서 원만하게 조화를 이룬 락덕입니다만 선정을 닦을 때 기쁨이 넘쳐서, 기쁨이 도리어 지나치면 마장(摩障)이 되는 것입니다만 여기 락덕은 청정무구한 순수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불공여래는 더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불공성취여래(不空成就如來)라고도 합니다.

 

그 다음에는 미타여래(彌陀如來)라, 아미타불을 삼신일불(三身一佛)이라고 생각할 때는 5덕을 다 갖춘 총덕(總德)을 의미합니다만 여기 있는 미타여래는 묘관찰지 즉 일미평등한 진여불성 공덕이 무량의 세계를 나투는데, 은하계가 되고 태양계가 되고 또는 삼라만상 두두물물이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조금도 진여불성과 차별이 없는 것입니다. 중생은 하나의 현상적인 무엇이 되어버리면 그것에 집착해서 그것이 실지로 있다는 실제성으로 느낍니다마는 부처님의 무량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든지 진여불성이 그대로 조금도 변질이 없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한 바와 같이 영(零)이 곧 제로가 몇 천 개 곱하나 보태나 내나 영은 영 아닙니까. 또는 그림자를 몇 천 개 중복시키고 곱하나 보태나 나누나 결국은 그림자는 그림자라는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진여불성은 산이 되고 내(川)가 되고 나가 되고 네가 되고 무엇이 된다 하더라도 진여불성 자리는 조금도 변동이나 변질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지혜가 미타여래의 묘관찰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른바 동체대비(同體大悲)라, 강도를 보나 누구를 보나 그 죄를 미워하는 것이지 사람 자체를 미워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주부동(常住不動)한 상덕(常德)이고 또 지수화풍 사대(四大)로 생각할 때는 화(火)요, 화는 지혜를 상징합니다.

다음에 아촉여래(阿閦如來)의 지혜 공덕은 대원경지(大圓鏡智)입니다. 일체존재의 모두를 다 원융무애하게 조금도 차별이 없이 비추어보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묘관찰지혜는 현상계가 되어도 조금도 변동이 없는 불변진여 경계를 비추어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대원경지는 성상체용(性相體用)을 다 융통무애하게 한 번에 비추어 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나누어서 이것저것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공덕을 우리 중생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구분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 원래는 모두가 하나의 대일여래 공덕인 것입니다. 그래서 대일여래 공덕은 총덕(總德)인 것이고 나머지 불공여래, 미타여래, 아촉여래 또는 보생여래의 공덕은 별덕(別德)입니다.

 

그 다음 보생여래(寶生如來)의 지혜공덕은 성소작지라, 사바세계에서 문학이나 예술이나 과학이나 이런 재주를 부리는 문화현상, 문명현상 등 모든 작위(作爲) 행위가 성소작지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자기가 아주 훌륭한 시를 지었다고 합시다. '내가 재주가 있고 학문을 많이 공부하고 또 예술성이 풍부하니까 이와 같이 지었다' 하는 것을 불교의 견해로는 사부견(士夫見)이라 하는 망견(妾見)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내가 공부를 많이 해서 내 능력으로 훌륭한 집을 지었고 내 능력이 많아서 에디슨같이 많은 발명을 많이 했다거나, 딴은 에디슨도 만일 우월심을 품고 스스로 자랑했다면 사부견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어서 치적을 많이 남겼다고 한다면 이것도 사부견입니다. 내나 잘되고 못되고 이런 것이 따지고 보면 진여불성의 인연 따라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라는 것이 원래 없고 너라는 것이 없는 것인데 어떻게 내가 무슨 재주가 있어 가지고 내가 특별히 무엇을 만들고 하겠습니까? 우리 중생들은 본래면목자리를 잘 모르므로 자기가 무슨 책을 내고 글씨를 잘 쓰고 하면 꼭 자기 솜씨가 좋고 기능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을 사부견이라 합니다.

 

여기 말씀하는 성소작지는 정덕(淨德)이라, 조금도 오염됨이 없는 일체 무작위(無作爲) 공덕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지수화풍으로 말하면 지(地)에 해당합니다.

지수화풍 4대와 공(空)을 물리적인 것이라고 해석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성품이 형상화 될 수 있는 요소로 본다면 지요 수요 화요 또는 풍이요 공이라는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이루어지는 것이 성겁(成劫)인데 성겁은 어디서 나올 것인가? 하면 이것은 공겁(空劫)에서 나옵니다.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하지만 공겁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볼 수 있는 현상적인 즉 물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진여불성의 성품은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조금도 더하지 않고 덜하지 않고 꽉 차 있는 것입니다. 모양(相)만 없는 것이지 본질적인 성품은 온전히 갖추어 있는 것입니다. 그 성품은 무엇인가? 하면은 여기 있는 지요 수요 화요 풍이요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수화풍 4대도 능조사대(能造四大) 즉, 물질이 아닌 성품적인 4대는 능조사대라 하는 것이고 가사, 산소나 수소와 같이 원소 화된 4대는 소조사대(所造四大)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능조사대는 공겁이 되어서 우주가 텅텅 비어지고 또는 괴겁이 되어서 전부가 파괴된다 하더라도 조금도 부증불감이라, 감되지도 않고 더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깊이 느껴 삿된 견해를 갖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소조사대는 파괴가 되고 소멸되고 바꾸어지고 텅텅 비어지고 하는 것입니다.

 

공(空)은 지수화풍이 존재해야 할 이른바 장(場), 순수한 공간성을 말합니다. 또 우리가 보는 공간은 산소, 질소, 수소 등 물질로 차 있지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허공세계는 그런 것이 없는 순수 공간성을 의미합니다.

부처의 공덕, 우리 자성공덕을 열반사덕, 오지여래로 되어있는 법문 체계는 누가 개인이 만든 것이 아니라 부처님 당시부터 내려온 것인데, 근래에는 이런 훌륭한 가르침을 별로 찾아내어 역설을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스스로 깨달으면 이것저것 아는 것이므로 안내하는 정도로만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지수화풍공 오대(五大)를 하나의 도식으로 만든 것이 이 오지여래 오지총관도(五智總觀圖)입니다. 밀교에서 잡부밀교(雜部密敎)가 아닌 순수밀교(純粹密敎)는 부처님의 정당한 가르침입니다. 『대일경(大日經)』 또는 『금강정경(金剛頂經)』을 의지한 가르침입니다. 우리 중생들이 눈으로 볼 수도 없고 또는 분별 시비하는 마음으로 느낄 수도 없는 자리를 말씀하신 것이 주로 밀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