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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청화 큰스님 법문집/11. 실상 염불선

30. 제10장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제10장 현상(現象)과 본체(本體)

 

1. 물질(物質)과 에너지(Energy)

 

오늘은 과학 얘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과학에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피상적인 상식밖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현대가 과학 만능시대이고 또한 현대 과학에서 부처님 말씀을 증명하는 학설이 나와 있고 그 내용이 우리가 수행정진 하는 데도 조도(助道)가 될까 하여 간략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통념으로는 절대 물질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산소나 수소나 그런 각 원소가 변치 않고 고유하게 그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상식적인 생각입니다. 특히 고전 물리학, 뉴우턴(Newton, Isaac 1643~1727)이나 또는 데카르트(Descartes, Rene 1596~1650)의 고전 물리학은 절대 물질,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런 정도의 과학 같으면 우리 마음공부에는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은 절대 시간, 절대 공간, 절대 물질이 없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행무상(諸行無常) 또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른바 제법공(諸法空)의 반야(般若)도리를 현대과학은 증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곧 양자역학(量子力學)이나 또는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 1879~1955)의 상대성 원리(相對性原理) 등은 모든 것이 상대적으로 있는 것이지 절대적으로 고유하게 있지 않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현대인으로서 제법공(諸法空)의 도리라든가 제법(諸法) 무상(無常)을 못 느끼는 것은 현대 과학도 모르는 소치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대 물리학, 현대 역학 이런 것을 대강이라도 윤곽을 살펴본다면 우리한테 가장 지겨운 번뇌인 제법(諸法)이 있다는 분별심, 우리한테 가장 무서운 병인 내가 있고 일체 만물이 우리가 지각하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유병(有病)을 최파(擺破)하는데 조도(助道)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물리학적인 지식을 윤곽적인 것 밖에는 잘 모르면서도 감히 중요한 것을 간추려 말씀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과학을 말하니까 괜히 필요 없이 이것저것을 번쇄하게 얘기한다는 생각을 가질 분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특히 현대 물리학은 앞으로 두고두고 우리 수행인에게도 지극히 긴요한 상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런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아마 마지막이 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세기 종교 개혁자인 마르틴 루터(Luther,Martin 1483~1546)는 설법단(설교단)에 올라가면 한참 동안 눈을 감고 있다가 이윽고 말을 꺼냈다고 합니다. 마르틴 루터 정도가 되면 우리가 말하는 법신불을 미처 깨닫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업장이 가벼워서 어렴풋이는 진여불성의 도리를 음미하고 느꼈을 것입니다. 다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못 만나서 마음이 확철대오로 온전히 트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요한복음서에도 '나는 진리요 길이요 빛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틀림없이 루터는 설교하기에 앞서 눈을 감고서 진리에 대해서 조금도 빗나가지 않아야겠다는 서원을 하였을 것입니다.

 

제가 과학을 말씀드리는 것은 여담이나 같은 것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중노릇을 바르게 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일반 세속 사람들이나 또는 재가불자들은 우리출가사문들이 중노릇을 잘못한다고 지적도 많이 하고 규탄도 합니다. 우리 출가사문이 이렇게 모여서 공부하는 자리가 흔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또는 더러 있다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반성을 촉구하는 자리는 별로 없기 때문에 소중한 시간이라서 그때그때 마음 일어나는 대로 말씀을 드립니다만 과연 그와 같이 지적 당한대로 우리가 지금 중노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반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사, 우리가 도반을 사귀는 문제도 굉장히 중요한 문제 아닙니까? 삼종(三種) 선지식(善知識)이라, 선지식도 세 부류가 있는데 법으로 인도하는 교수(敎授)선지식, 또는 같이 절차탁마하는 동행(同行)선지식, 그리고 공부하는데 여러 가지 자료라든가 물질적으로 도와주며 외호하는 외호(外護)선지식입니다. 우리는 도반을 삼을 때 잘 생각해야 합니다. 스승이야 큰스님이 많이 계시니까 그때그때 법을 물으면 되는 것이고 또는 어차피 우리는 누군가가 베풀어 주어도 살고 주지 않아도 아쉬운 대로 지낼 수 있으니까 외호문제는 별 문제가 아니겠지요.

 

신라 때 무상(無相 680~756) 대사는 왕자로서 중국에 들어가 선지식을 만나 수행법을 간택하고 티벳트(Tibet)와 접경지로서 굉장히 교통 사납고 살기 어려운 험난한 지방인 사천성(四川省) 산중에서 공부하였는데 식량이 떨어지면 황토 흙을 주워 먹을 정도로 고행을 했습니다. 쌀이나 보리에만 불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 황토 흙도 불성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바른 마음, 사무친 마음으로 공부한다면 황토를 먹더라도 배탈도 안 나는 것입니다. 또는 의복도 남루한 채로 어떻게 검소한 생활이었던지 산에 왔던 포수들이 짐승인줄 알고 활을 겨누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두타행(頭陀行)을 한 스님으로서 마조(馬視道一 709~788) 대사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올 정도로 위대한 분이어서 지금 무상대사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는 아주 큰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가 벗을 사귈 때, 벗을 잘 골라야 합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욕심이 많고 또는 다른 벗과 친하면 시기심도 품는 벗도 있습니다. 성실하고 겸손하여 올바른 정견(正見)을 가지고 모든 것을 소중히 하고 검소하게 지내며 또한 인연이 다하여 헤어진다 해도 미련도 원망도 없이 순결한 마음을 갖는 도반이 아니면 조도(助道)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길을 갈 때에도 자기와 같은 정도가 되거나 나아야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은 결국은 짐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짐이 될 벗을 사귈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모르는 인생 아닙니까? 지금은 대형 사고도 많은 세상이어서 어느 때에 갈지 모르는 무상한 인생에, 우리가 제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또는 충고를 정당히 하더라도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없는, 법에 어긋나는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법(如法)하지 못한 일에는 함께하지 말고 엄연히 끊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젯밤에도 게송에서 보았습니다마는 우리는 무상복전(無上福田)인 가사를 입고 있는 몸입니다. 위없는 무상복전이 된다는 것은 모든 상을 여의고서 모든 중생에게 아낌없이 바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마음만 갖는다면 누구에게나 지탄받을 만한 까닭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 몸뚱이는 공부하는데 소중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원수집이요 바로 원적(怨敵)입니다. 따라서 반드시 자기 공부를 바른 길로, 부처님 경계로 이끄는데 조도가 되는 유익한 벗, 동행선지식을 사귀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그런 벗이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벗 가운데도 삼거(三擧)에 해당하는 사람은 함께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계율상 삼거는 사바라이죄(四波羅夷罪)를 파계한 벗에 대해서 '그대가 지금 잘못됐다. 참회해야 한다'고 해도 인정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또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합리화시켜서 충고를 안 듣던가 충고를 수용하더라도 나중에 조금도 참회하는 빛이 없이 또다시 저지르는 사람입니다. 또는 음욕은 도에 방해가 안 된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말을 하는 도반들은 삼거라고 해서 드러내어 지적하고 상대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생이나 투도나 또는 사음이나 또는 미처 못 증(證)하고 증했다고 아만심을 내는 경우에 잘못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다거나, 인정을 하고도 참회하여 고치지 않는다거나 또는 그런 짓을 해도 무방하다고 하면 상대를 말고서 아예 사귀지 말아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는 벗 사귈 때에 참으로 주의해야 합니다.

 

팔만사천 번뇌가 있지만 그 근본은 탐 ․ 진 ․ 치 ․ 만 ․ 의(貪․嗔․痴․慢․疑)입니다. 탐 ․ 진 ․ 치 삼독심과 아울러 만심과 의심입니다. 만심은 자기 정도 이상으로 뽐내는 교만심입니다. 만심이 있으면 부처님 법문도 안 들어갑니다. 일지반해 반가통(一知半解半可通)이라, 통하지 못하고서도, 조금 아름아름 하고 근본을 확실히 모르고서 조금 알아 놓으면 자꾸만 자기 지견(知見)만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심이 있는 사람들은 부처님 법이나 또는 성자의 법을 인증을 잘 안 합니다. 만심이 있어 자기가 생각한 것이 더 옳다고 해서 성자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탐 ․ 진 ․ 치 ․ 만 ․ 의, 근본 번뇌입니다. 마땅히 근본 번뇌만은 준엄한 반야의 칼로 베어야 합니다.

 

1) 물리학(物理學)의 발전(發展)

 

과학에 있어서 지위 있는 학설을 인용하여 소개하겠습니다.

 

물질(物質)과 에너지(energy)

 

물질(物質)과 에너지는 대립(對立)되는 것이라는 고전물리학적(古典物理學的)인 생각(뉴우턴Newton, Isaac)은 아인슈타인(Einstein, Albert)의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으로써 물질(物質)과 에너지는 하나의 장(場)의 양면(兩面)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입자(粒子)나 파동(波動)이 고전물리학(古典物理學)에서는 아주 다른 대립(對立)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사실(事實)은 전자(電子)가 그 측정수단(測定手段) 여하(如何)에 따라 파동(波動)이나 입자(粒子)로 나타남을 알게 되었다.

 

고전 물리학은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절대 물질,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물질과 에너지(energy)가 대립된다고 생각하는 뉴우턴적인 고전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써 물질과 에너지는 하나의 장(場 field)의 양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또는 입자(粒子)나 파동(波動)이 고전 물리학에서는 아주 다른 대립된 것으로 생각되어 왔는데 사실은 전자(電子)같은 소립자(素粒子)는 그 측정수단 여하에 따라서 파동이나 입자로 나타남을 알게 된 것입니다.

 

전자(電子) 등의 소립자는 고유한 존재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장(場) 에너지가 진동하는 양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물질의 근본요소가 되어 있는 산소나 수소나 탄소나 질소나 또는 라듐(radium)이나 그런 것을 물질의 원소(元素)라 하는데, 물질의 각 원소도 고유하게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면 어떠한 것인가?

 

대체로 물리학을 배워서 알겠지만 배울 때뿐이지 우리가 현실적으로 부딪치는 것이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물질이 그대로 실제로 있어 보이니까 다 잊어버리기 쉽습니다. 가사, 수소는 물이나 지구 덩어리나 우리 몸뚱이나 어디에나 안 들어 있는 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한 수소도 고유한 수소가 있는 것이 아니라 양성자(陽性子)를 중심핵(中心核)으로 해서 전자 하나가 도는 것입니다. 원자핵을 중심으로 전자 두 개가 돌면 헬륨(helium)이고 전자가 여섯 개가 돌면 탄소입니다.

 

그런 때는 전자만 수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원자핵(양성자)도 전자수와 똑같이 더해집니다. 또 대부분 다 중성자도 같은 수가 핵 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전기를 갖는 양성자와 중성을 갖는 중성자가 항시 같은 수로 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서, 산소, 수소, 질소, 탄소 등의 차이가 생기는 것입니다. 플루토늄(plutonium)은 전자가 242개가, 라듐(radium)은 226개의 전자가 원자핵의 주위를 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파괴하기가 쉽겠지요.

 

따라서 그와 같이 고유한 산소고 수소고 그런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양성자나 중성자나 또는 전자나 그런 것이 어떻게 모여 있는가, 그 모여 있는 결합 여하에 따라 산소나 수소 등 원소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성자나 또는 중성자나 또는 전자는 무엇인가? 그런데 소립자를 측정하려해도 정확히 측정을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가사, 운동량(運動量)을 측정하려면 위치(位置)를 잴 수 없고 위치를 정확히 재려고 할 때는 운동을 하는 진동량(振動量)을 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데서 이른바 불확정성(不確定性) 원리라, 확정한다는 것은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물질이란 궁극적으로 끄트머리에 가면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근본 장(場)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입자(粒子)요, 더 이상 분할할 수 없는 가장 미세한 소립자(素粒子)는 무엇인가? 이것이 파동(波動)인가? 입자(粒子)인가? 모두가 저 궁극에 가면 결국은 다 빛인데 그 빛이 입자(알갱이)인가? 또는 파동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그것은, 정밀을 자랑하는 현대 물리학도 모르는 것입니다. 모든 물질이나 빛이 입자임과 동시에 파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른바 현대 물리학의 불확정성 원리입니다. 확실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은 궁극에는 전기도 없고 또는 질량(質量)도 없고 따라서 공간성이 없는, 결국 물질은 비물질(非物質)인 에너지만 남게 됩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아인슈타인이 광속불변성(光速不變性)을 공리(公理)로 하여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을 발전(發展)시켰으며 이 상대성이론(相對性理論)과 양자물리학(量子物理學)을 두 기둥으로 하여 발전(發展)한 것이다.

그 다음에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이 광속불변성(光速不變性)을 공리(公理)로 하였는데 즉, 일초(一秒) 동안에 30만km 광속도는 변할 수가 없다는 광속불변성을 공리(公理)로 하여 상대성이론을 발전시켰으며 이 상대성이론과 양자물리학을 두 기둥으로 하여 발전된 것이 현대 물리학입니다.

 

따라서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차이는 무엇인고 하면, 고전 물리학은 뉴우턴이나 또는 맥스웰(Maxwell 1831~1879)등에 의해 창도되었는데 이것은 절대 시간도, 절대 공간도 있고 절대 물질도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물리학의 두 학설을 기둥으로 하여 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절대 시간도 없고 절대 공간도 없고 절대 물질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물질이란 결국 비물질인 에너지의 운동양상에 불과한 것이며 따라서 고유한 물질이 없거니, 공간성도 시간성도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자(量予)물리학의 양자(量子)는 물질량의 최소 단위라는 뜻이고 양자(陽子) 곧 양성자(陽性子)는 양(+) 전기를 가진 소립자로 중성자와 함께 원자핵의 구성 요소입니다. 따라서 양자물리학은 모든 물질을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가장 미세한 알갱이,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알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그 자리, 그런 것을 문제로 해서 이루어진 물리학이 양자물리학입니다.

 

이와 같이 현대 물리학의 중요한 계기인 '모든 존재는 상대다' 하는 상대성 원리는 따지고 보면 불교의 연기법(緣起法)의 부분적인 해석입니다. 인연 따라서 이것이 있으니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연기법의 사상과 상대성의 이론과는 서로 상응되는 도리입니다. 이러한 상대성 이론과 양자물리학을 기둥으로 이루어진 현대 물리학이 어떤 것이라는 개념을 알아두는 것은 굉장히 필요합니다. 이것은 절대 시간도 없고 절대 공간도 없고 절대 물질도 없다는 것이니 바로 제법(諸法)이 공(空)하다는 도리와 같습니다.

 

따라서 내 수명(壽命)이 50세다 또는 몇 세다 하는 것은 상식적 분야인 것이지 현대 물리학적으로 본다면 이 몸뚱이도 고유한 물질이 아닌 허무한 현상이니, 인간 수명이 몇 년이라는 이른바 불법(佛法)의 수자상(壽者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다 하는 삼세심불가득(三世心不可得)의 부처님 말씀들을 다행히도 현대 물리학이 점차로 밝혀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불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장차 어떻게 태어나든 다른 종교를 믿든 간에 종당(從當)에는 어느 누구나 불자가 안 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현대 물리학이라든가 현대 철학인 실존철학이라든가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지혜는 날로 불교와 가까워 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술이나 문학이나 어떤 분야에서나 모두가 다 근본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생명의 실상을 밝히는 부처님 사상으로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참다운 것이 못됩니다. 그것은 진 ․ 선 ․ 미(眞善美)의 근본성품이 바로 진여불성(眞如佛性)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성을 초월한 영원한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과 수행(修行)이 없이 참다운 창조적인 걸작이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2) 물질의 형성(形成)과 기본 구조(構造)

 

물질(物質)의 형성(形成)은 전하(電荷)의 결합작용(結合作用)에 불과(不過)하며 전하(電荷)는 접착제(接着劑)와 같은 작용(作用)을 한다. 음전하(陰電荷)와 양전하(陽電荷)는 서로 결합(結合)하며 같은 전하(電荷)는 서로 반발 분리(分離)한다.

 

그 다음에 물질의 형성은 전하(電荷) 곧 음(-)전하와 양(+)전하의 결합 작용에 불과하며 따라서 원자핵은 양(+)전하인 것이고 그 밖에를 도는 전자는 음(-)전하입니다. 따라서 음(-),양(+)이 어떻게 결합되었는가에 따라서 산소, 수소 등 물질의 원소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전하는 마치 접착제와 같은 작용을 합니다. 음전하와 양전하는 서로서로 이끌고 결합하며 같은 전하인 음(-)끼리 또는 양(+)끼리는 서로 반발하고 분리합니다.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이 물질(物質)의 기본구조(基本構造)를 탐구한 결과(結果) 허망하게도 물질(物質)이란 본래(本來)부터 존재(存在)하지 않으며 다만 장(場:전자기장(電磁氣場))만이 실재(實在)한다는 결론(結論)에 도달하였다. 장(場)만이 근본적(根本的)인 물리적(物理的) 실체(實體)이며 소립자(素粒子)는 장(場)의 국부적(局部的)인 응결체(凝結體)에 불과(不過)하다. 장(場)은 공간(空間) 어느 곳에나 존재(存在)하는 연속체(連續體)이다. 광속(光速)이 초속(秒速) 30만km이니 지극히 작은 입자(粒子)라도 그 안에는 엄청난 큰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라늄 원자핵(原子核)을 중성자(中性子)로 쏘아 분열(分裂)시키면 폭발하는 것이 원자탄(原子彈)이며 수소원자핵(水素原子核)의 융합(融合)에서 나오는 위력(偉力)이 수소(水素)폭탄이다.

그 다음에 현대물리학이 물질의 기본 구조를 탐구한 결과 허망하게도 물질이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전자기(電磁氣)가 충만한 장(場)만이 실재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주에 있는 가장 미세한 알갱이가 어디서 나왔는고 하면 전자기를 띠고 있는 하나의 근본 바탕 즉, 장(場)인 근본 바탕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근본 바탕에서 인연 따라서 이렇게 뛰고 저렇게 뛰는 것이 즉 말하자면 전자고 양자고 한다는 말입니다. 전문적인 얘기는 될수록 피하겠습니다만 이런 정도는 꼭 알아두어야 합니다.

 

우주란 것은 전자기장(電磁氣場), 곧 전기(-)와 자기(+)를 띤 무엇인가가 우주에 충만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무한의 에너지를 갖춘 빛이 우주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기분 나쁘다 좋다 하는 사소한 마음만 품어도 우리 몸을 구성한 전자나 양자의 구조가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분 나쁠 때 음식을 먹으면 소화가 잘 안되고 기분 좋을 때에 먹으면 소화가 잘 되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 하나하나가 우리 몸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역으로 우리 몸을 함부로 행동해 버리면 그만치 마음도 오염되는 것입니다. 근본 성품은 오염이 안 되지만 무명(無明)에 따른 행위로 어둡고 흐린 업(業)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런 전자기장(場)만이 근본적인 물리적 실체이며, 진정한 만유(萬有)의 실상은 진여불성(眞如佛性)이지만 우선 물리학적으로는 전자기장이 물리적 실체라고 알 뿐입니다. 공간성을 초월한 형이상(形而上)적인 물(物) 자체를 밝히지 못하는데 물리학의 한계가 있습니다. 가장 작은 알갱이인 소립자는 장(場)의 국부적인 응결, 장이 엉켜서 모인 것에 불과하고 장(場)은 공간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연속체라는 것입니다.

 

불성(佛性)이 삼천대천세계에 없는 데가 없이, 삼천대천세계가 바로 불성으로 되었듯이 장도 역시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데 사실은 장(場)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류권(對流圈)은 물론이고 성층권(成層圈)에 올라가도 장은 있고 온도권(溫度圈), 전리권(電離圈), 자기권(磁氣圈)에 올라가도 장은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곳이나 장은 꽉 차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전자기장이 모든 물질과 공간에 충만해 있다는 이런 이론만 가지고도 '부처님의 진여불성이 천지 우주에 충만해 있다. 또는 비로자나불이 광명변조(光明遍照)라, 우주에 진여불성의 광명이 두루 해 있다' 이런 법문들을 현대 과학에서도 하나하나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 안하면 결국은 과학도에게 점차로 뒤지고 맙니다. 저는 아인슈타인과 어느 저명한 신학자와 대담하는 기록을 보았는데 아인슈타인의 말이 신학자의 말보다 종교 철학적으로 한결 더 깊게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조명하니까 그렇게 생각이 되었겠지요.

 

광속(光速)은 빛의 속도인데 초속 30만km. 일초 동안에 30만km 속도니까 얼마나 엄청난 에너지입니까? 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빛의 알갱이 하나 속에 갖추어져 있는 것이 이른바 일초 동안 30만km가는 힘이라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티끌 가운데 시방세계 모든 힘이 다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어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주에는 그런 힘이 꽉 차 있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입자라도 그 안에는 엄청난 큰 에너지가 농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라늄(uranium 電子 238개) 원자핵을 중성자로 쏘아 분열시키면 폭발하는 것이 바로 원자탄이며, 그렇게 무서운 원자력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하면 원자력도 역시 내나 불성(佛性)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 수소(hydrogen)원자핵의 융합에서 나오는 위력이 수소폭탄입니다. 따라서 진여불성이 소중한 것을 잘 모르니까, 그런 것을 만들어서 사람도 살생하고 무서운 무기가 되지 않습니까? 마땅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지상명령은 '오직 진여불성을 깨닫는 길 뿐이다' 이렇게만 알아도 얼마나 큰 공덕이겠습니까?

에너지는 곧 입자(粒子)이며 또한 장(場)이며, 장(場)이 곧 공(空)이다. 공(空)은 입자(粒子)가 생성소멸(生成 消滅)의 율동(律動)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능력(能力)인 생명(生命)의 장(場)이다. 그러므로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색(色)은 곧 공(空)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생명(生命)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이다.

또한, 에너지는 곧 입자이며, 또한 장(場)이며, 장은 곧 공(空)이라는 것입니다. 물질로서의 질량(質量)이 없다면 바로 공 아닙니까? 질량이 있다고 해야 공간성이 있고 또 시간성이 있는 물질인데 시간성, 공간성이 없다면 결국은 공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공(眞空)은 입자가 이루어지고 또는 소멸되는 율동을 끊임없이 계속하고 있는, 살아있는 능력인 생명의 장(場)인 것입니다. 공은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무량한 에너지가 충만해 있는 공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 (+) 에너지가 부처님의 생명관(生命觀)으로 풀이하면 자비와 지혜입니다. 또 그것이 바로 지(止)요 관(觀)이요, 정(定)이요 혜(慧)인 것입니다. 우주에는 이와 같이 근원적으로 음, 양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비와 지혜를 구한다면 우리 마음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저절로 진여법성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대 물리학은 색은 곧 공이며, 진공묘유(眞空妙有)라는 생명에 한 걸음 더 다가선 셈입니다.

 

3) 우주시대(宇宙時代)의 종교(宗敎)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盲人)이다 ' 아인슈타인의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를 믿더라도 합리적인 도리에 입각하여 믿어야 하지, 불합리한대도 분별없이 전통적인 권위나 인습적인 법집(法執)을 답습한다면 참다운 종교가 못됩니다. 맹신(盲信)에 불과합니다. 아집(我執), 법집을 여의는 것이 참다운 과학이요 진정한 종교입니다. 이런 과학정신이 기본이 되어서 현대 물리학이 나온 것 아닙니까?

 

따라서, 종교 없는 과학이란 것은 무엇인고 하면 근본 생명 없는, 뿌리 없는 과학에 불과합니다. 과학의 근원에 있는 참되고 영원하고 모든 능력과 공덕을 다 갖추고 있는 생명의 실상, 이것이 인생과 우주의 근본이라고 믿고 과학을 해야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하고 산소나 수소나 이런 입자(粒子)가 근본이요, 물질이 근본이다고 생각하는 유물적인 사고방식으로 과학을 한다면 결국 절름발이요 참다운 과학이 못되는 것입니다.

 

또 아인슈타인은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종교는 불교다. 또한 현대 과학이 결(缺)하고 있는 것을 메워 주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불교다'고 말하였습니다. 역시 아인슈타인은 불교를 진정으로 아는 분입니다.

아무튼 위대한 천재들은 불교를 믿는다는 말을 직접으로 표현하지는 않으나 불교 진리에 가까운 말들을 합니다. 가끔 인용한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Socrates 410~399 B.C.)나 또는 플라톤(Platon 427~347 B.C.)이나 또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B.C.)나 말입니다. 칸트(Kant 1724~1804)나 니이체(Nietsche)나 쇼펜하우어(Schopenhauer)나 또는 그리스 철인들 모두가 다 우리 불교의 조명으로 본다면 모두 훌륭한 철인(哲人)입니다.

 

따라서 그런 불교의 지혜로 기독교도 이슬람도 통찰한다면 다 화해롭게 수용이 되는 것입니다. 다만 그네들이 아직 미흡한 점을 일깨워 훤히 트인 해탈의 자리를 우리가 앞으로 가르쳐야겠지요. 앞으로 몇 백 년 뒤가 될는지는 몰라도 본래가 진여불성이기 때문에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에 흡수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물질은 최초에는 방사선(放射線) 형태 즉 광량자(光量子) 곧 광자(光子)’라고 합니다. 물질은 어느 물질이나 궁극적으로 광량자라고 생각할 때 모두가 다 빛이라는 말은 틀림이 없는 진실입니다. 따라서 ‘몸뚱이나 돌멩이나 똥이나 다 부처다’라는 말은 똥이나 그 무엇이나 본질적으로는 빛이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실상인 아미타불은 무량광불(無量光佛)이요, 법신불(法身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은 대일여래(大日如來)이자 광명변조(光明遍照)입니다.

 

또한 신과학사상(新科學思想)에서는 물질은 곧 의식(意識)이므로 물질을 바로 생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네 민속에서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산에 가면 바위나 큰 나무에다도 합장배례하고 당산(堂山)을 받들고 하는 것도 역시 우리가 그것으로 집착해 버리니까 나쁜 것이지 일체 만유를 생명으로 받드는 자세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산신(山神)숭배다 용왕(龍王)숭배다 하는 등은 무속(巫俗)이요, 미신(迷信)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산을 구성한 진여불성이 산신이요 물로 표현된 진여불성이 용왕이라고 진여(眞如)의 도리에 따라 이해한다면 허물이 될 것이 없습니다.

 

물질은 곧, 의식이요 생명이므로 지구(地球)도 태양(太陽)도 다 같은 생명이며 태양은 관음보살(觀音菩薩) 화신(化身)이요 또, 대세지(大勢至)보살과 문수(文殊)보살은 지혜의 화신입니다. 또 지구는 이대로 바로 지장(地藏)보살입니다.

 

우리는 이제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가르침을 조그마한 자기 생각으로 좁혀서는 안 됩니다. 원융무애한 생명을 구분 짓고 가로막는 망념(妄念)을 털어버려야 합니다. 삼천대천(三千大千)세계가 바로 부처님이거니 5척(五尺) 남짓한 이 몸뚱이에 들어있는 의식만 생명이 아니라 산하대지 두두물물이 한결같이 다 생명입니다. 우리 마음이 못 열리어서 나로 보이고 너로 보이고 남으로 보이고, 그 무엇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신심(信心)은 마음을 활짝 열고 천지와 나와 둘이 아니고 너와 나가 둘이 아니고 부처와 나와 둘이 아니라는 반야 지혜를 믿는 것입니다.

철학(哲學)을 경(經)으로 하고 과학(科學)을 위(緯)로 하여 새로운 우주시대(宇宙時代)의 종교(宗敎)가 되어야 한다.

 

철학을 경(經)으로 하고 과학을 위(緯)로 하여, 경과 위는 날과 씨 아닙니까. 이와 같이 철학과 과학이 보완하고 조화하여 새로운 우주 시대의 종교가 반드시 되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광자(光子:광량자(光量子 light quantum photon))는 아인슈타인 주장으로 전자기장(電磁氣場)을 양자화(量子化)해서 얻어지는 질량(質量) 제로(0)의 입자(粒子)이며 스핀(spin 선회旋回)1을 갖는다.

 

광자(光子)는 광량자(光量子)를 말하는 것인데 아인슈타인이 맨 처음에 주장을 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주는 근본 바탕이 물리적으로 본다면 전자기장(電子氣場)을 양자화(最子化)해서,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자리에서 얻어지는 질량은 제로zero(0)의 입자요. 또 이것은 한 바퀴 도는 진동을 합니다. 벌써 광량자 자리에 가서는 질량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물질인가 물질이 아닌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본질적으로는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한번 동(動)하면은, 한번 분별심 내면은, 거기에 상응하여 바로 소립자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중생의 공업력(共業力)으로 우주가 구성이 된다는 말입니다. 무(無)에서 유(有)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좋다, 궂다, 사랑한다, 미워한다 하는 마음들이 동력(動力)이 되어 우주의 장(場) 에너지를 충동하면 소립자가 이루어지고 인간의 염력(念力)은 또한 소립자들의 구조를 바꾸기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양 자체가 바로 색즉공(色卽空)입니다. 본래 물질이 아닌 것이 빙빙 돌고 결합하여 모양같이 보인다고 근본적으로 물질이 아닌 것이 물질로 되겠습니까? 제로(0)를 몇 번 보태고 곱한다 하더라도 결국은 제로는 제로인 것입니다. 그림자를 천만 번 포갠다 하더라도 그림자는 그림자 아닙니까? 불성(佛性)이 다이아몬드가 된다 하더라도 불성은 불성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쉽게 말하는 '부처가 보면 다 부처고, 개가 보면 개고, 사람이 보면 중생이라'는 말들이 다 이치에 합당한 말들입니다.

 

근대(近代)의 기계론적(機械論的) 우주관(宇宙觀)은 데카르트, 뉴우턴 등의 이른바 근대적사고(近代的思考)는 신(神)이 태초(太初)에 우주(宇宙)의 물질(物質) 입자(粒子)를 창조(創造)하여 불변(不變)의 법칙(法則)으로 운동(運動)하고 있으며 절대 시간(時間), 절대 공간(空間), 절대 물질(物質) 등이 존재(存在)한다고 함.

 

현대물리학(現代物理學)은 20세기(世紀)에 나타난 양자역학(量子力學)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相對性原理)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등을 골격으로 하여 이루어졌다고 함.

 

근대의 데카르트나 뉴우턴 등의 기계론적 우주관, 다시 말하자면 하나의 공식적인 우주관 이른바 근대적 사고(思考)는 신(神)이(자기네들이 잘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신이라고 했겠지요.) 태초에 우주의 물질 입자를 창조하여 불변의 법칙으로 운동하고 있으며 절대 시간, 절대 공간, 절대 물질 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 근대적 사고방식, 기계론적 우주관입니다.

 

이런 우주관은 한낱 상식에 불과하니까 우리는 이런 오류는 떠나야 합니다. 물론 이것도 역시 중세기보다는 더 앞서 있어서 그 당시로는 참신한 과학이 되었겠지요.

현대 물리학은 20세기에 나타난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와 또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등을 골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지금까지 대강 말씀드린 대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