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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44일 도작대사

 

도작(道綽: 562~645)은 담란의 정토사상을 계승한 사람으로서, 담란이 입적한 후 21년째 되는 북제(北齊)의 하청 원년에 병주의 문수(汶水)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출가하여 《열반경》을 연구하고 24번이나 강의 했으며, 후에는 창주의 혜찬(慧瓚: 532~603)을 스승으로 삼아 《반야경》을 배웠다고 한다. 우연히 담란이 살았던 분주 현중사(玄中寺)에 참배하러 갔다가 담란의 덕을 기리는 비문을 보고 깊이 감명을 받아 수나라 대업5년(609)48세 때 열반종을 버리고 정토문에 귀의하였다.

 

그때부터 아미타불의 명호를 하루에 7만 번씩 외우고, 《관무량수경》을 200회나 강의했다. 진양(晋陽) · 태원(太原) · 문수(汶水) 세 고을의 승속을 교화하고, 7세 이상의 사람에게는 반드시 아미타불 염불을 하게 하였다. 칭명(稱名)할 때마다 콩 한 알씩 놓게 했는데, 정진을 잘한 사람은 콩의 양이 80, 90석 중간 정도 사람은 30, 50석은 되었다고 하며, 그는 입으로 부르는 염불[口稱念佛]을 주로 하였다.

 

당나라 정관 19년(645)4월24일에 현중사에서 상서로운 구름이 맞이하는 가운데 나이 84세에 입적하였다. 정토종(淨土宗=蓮宗)의 제4조(祖)로 불린다.

저서로는 《안락집》2권이 있다. 당시 삼론종의 가상 길장(嘉祥吉藏)은 일체개공(一切皆空)의 교리를 설하여 ‘아미타불은 중생의 모습을 취한 화신(化身)이지 진실한 불신의 보신(報身)이 아니며, 극락도 부처님이 임시로 나타내 보인 화토(化土)이지 진실한 불국토인 보토(報土)가 아니다.’ 하여 정토교를 비난하였다.

 

또한 섭론종에서는 ‘별시의(別時意)를 제창하여 극락왕생은 곧바로 얻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에 그 성과를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여 서방세계를 과소평가했으므로 정토신앙은 거의 절멸할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에 도작은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바로잡고 정토종을 확립하기 위해 《안락집》을 찬술한 것이다.

 

《관무량수경》을 주석했다는 도작의 이《안락집》은 담란의 《왕생론주》에 큰 영향을 받아 왕생안락의 방법을 설하였다. 대승의 공관(空觀)에 입각해서 그 논지를 전개한 담란의 입장을 계승하고 있기는 하지만, 담란이 《무량수경》을 주로 한 것에 반해, 도작은 《관무량수경》을 중시하여 염불을 말법시대에 꼭 맞는 수행방법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말법 중생이 왕생하는 길은 《관무량수경》 하품하생(下品下生)의 교설에 있다고 믿었다.

 

도작은 일찍이 용수가 수행의 어렵고 쉬움에 따라 난행도(難行道)와 이행도(易行道)로 나누고, 담란이 수행의 목표에 의해 난행도와 이행도의 구별을 지운 것에 반해, 도작은 자기의 힘으로 깨달음을 여는 것을 성도문(聖道門)이라 하고, 아미타불의 본원에 의해 정토에 왕생해서 정토의 공덕으로 보살도의 수행을 닦아 부처가 되는 것을 정토문(淨土門)이라 하면서 현대는 종교적으로 정토문밖에 선택할 수 없는 겁약한 사람들의 시대라고 하였다.

 

아미타불과 정토에 대해서 도작은 삼론종에서 아미타불과 정토를 화신불이요 화토라고 주장한 것에 대하여 《안락집》에서는 독자적으로 아미타불을 보신불(報身佛), 극락정토를 보토(報土)라 해석하고, 극락은 정토 가운데 초문(初門)이고 사바세계는 예토(穢土) 가운데 종처(終處)이기 때문에 극락세계와 사바세계는 서로 경계를 접하고 있어서 왕생하기에 매우 편리하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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