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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43일 담란대사

 

담란(曇鸞 : 467~542)대사는 북위(北魏)시대의 인문사람으로 어려서 고향 근처인 오대산에서 출가하여 널리 내외의 서적을 연구하였다. 우연히 《대집경》을 읽고 그 주석서를 쓰다가 병에 걸려 완성하지 못하고 중단하였다. 이후 완쾌되기는 했으나 저술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하는 법을 배우고 싶어졌다.

 

그래서 당시 선술(仙術)의 대가인 도홍경(陶弘景)을 찾아서 양나라의 금릉으로 가 장생불사하는 선술을 배웠으며, 선경(仙經) 10권을 받았다. 명산에 들어가 그 법대로 수행하려고 돌아오다가 낙양을 지날 때 천축 삼장인 보리유지(普提流支)를 만나 물었다.

“불경 가운데도 이 선경보다 훌륭한 장생불사의 법이 있습니까?”

그러자 보리유지는 그에게 불경 한 권을 주면서 “만약 이 경으로 수행한다면 생사를 해탈하여 한량없는 수명을 얻을 수 있다.” 고 하였다. 담란은 자신의 잘못을 확연히 깨닫고 곧바로 선경을 불태워 버리고 정토의 법문을 깊이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때 보리유지가 준 불경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속고승전》에서는 《관무량수경》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세친의 《정토론》이었다고 한다.)

 

북위의 황제는 담란에게 깊이 귀의하여 신란(神鸞)이라 부르며 숭배했으며, 칙명으로 병주의 대암사(大巖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만년에는 분주의 현중사(玄中寺)에서 살았다. 또한 개산의 북쪽으로 가 여러 사람들과 함께 염불수행을 했으며, 동위(東魏)의 흥화4년(542)에 평주의 요산사(遙山寺)에서 6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담란은 헤아릴 수없이 신비하였다고 한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조(南朝)의 양무제(梁武帝)를 만난 뒤 북쪽으로 돌아가자 양무제는 수시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려 절하며, “담란 법사는 육신보살이다.”라고 했다 한다. 당시 중국에서는 용수의 《중론》, 《십이문론》, 《대지도론》과 용수의 제자인 가나제바가 지은 《백론》등 네 개의 논을 연구하는 학파를 사론종(四論宗)이라 했는데, 담란은 이 사론종 출신의 사람으로서 후세에 사론종의 조(祖)로 추앙받았다.

 

저서에는 《왕생론주》(정토론주라고도 한다)2권, 《찬아미타불게》1권, 《약론안락정토의》1권이 있고, 스스로 현감대사(玄鑒大士)라 불렀다. 주된 저술은 《왕생론주》인데, 세친의 《정토론》(원명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 ‘왕생론’이라고도 함)을 주석한 것으로서 후대의 정토사상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것으로 실질적인 중국 정토교의 초조(初祖)의 역할을 했으므로 후세에 그를 중국 정토종의 제1조(祖)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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