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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남호 송성수님의 100일 염불수행

3일 참선과 염불(3)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선사의 사료간(四料簡: 네 게송)을 살펴보자. 영명선사는 법안종(法眼宗)의 제3조(祖)이며 정토종(淨土宗)에서도 제 6조로 섬기는 분이다. 법명은 연수이며 영명사(永明寺)에 머무르셨으므로 세상에서 영명선사라 부른 것이다. 그 분을 아미타불의 후신이라 하기도 하고 자씨(慈氏)가 화생하였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28세에 출가하였고 천태덕소(德昭)국사에게서 선지를 깨달은 뒤에 평생 염불을 하며 정토왕생을 원했다.


스님은 15년 동안 영명사에서 1,700인을 득도 시켰고 계를 준 이가 만여 인이며 40만 본의 미타탑을 찍어 보시하였고 모두에게 염불을 권하여 정토종을 널리 퍼뜨렸다. 그때의 모인 대중이 항상 수천 명이었는데 하루 염불을 십만 번씩 부르게 하였다. 고려 스님이 그의 문하에 가서 인가를 받은 이가 원공(圓空) 국사 외에 36인이나 되었다. 72세 때의 2월 26일 새벽에 일어나 분향하고 서쪽을 향하여 가부좌하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스님이 자력과 타력의 관계를 밝히고 참선과 염불의 난이도(難易度)를 비교한 것 중에 가장 뚜렷하고 가장 알기 쉽게 말씀한 설법에 사료간이 있다. 그 사료간에 비추어 보면 “참선과 교리에 밝지 못한 보통 사람들은 꼭 염불해야 당연하지만은 참선과 교리에 통달한 사람들도 역시 더욱 열심히 염불해야 한다. 제 아무리 통달하였더라도 아직 증득하지 못했으면 결국 염불을 해야 생사윤회에서 해탈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사료간(四料簡)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면

마치 이마에 뿔 달린 호랑이 같아서

현세에는 여러 사람들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될 것이로다.

有禪有淨土 猶如戴角虎 現世爲人師 將來作佛祖


여기서 ‘참선수행도 있고 염불공덕이 같이 있다’고 함은 공부가 이미 확철대오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본 경지에 이른 뒤에 더욱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서방정토에 왕생하길 바라는 수행을 일컫고 있다.

이런 이는 확철대오 하여 용맹스런 힘이 호랑이와 같은데 다시 염불로 생사해탈을 장악하게 되면 호랑이에 뿔까지 달린 격이므로 그 용맹과 위력은 견줄 데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승에선 뭇 사람의 스승이 되고 장래에는 부처나 조사가 된다’ 고 한 것이다.


두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은 없어도 염불공덕이 있다면

만 사람이 닦으면 사람 모두 왕생하리니

다만 아미타부처님을 뵈옵게 되면,

아직 깨닫지 못할 까 근심하리오.

無禪有淨土 萬修萬人去 但得見彌陀 何愁不開悟


이 게송의 의미는 아직 확철대오 하지 못하여 자기의 힘으로는 생사해탈의 가망이 거의 없음을 깨닫고 아미타불께서 어서 오셔서 맞이해 주시도록 발원하면서 정토법문을 수행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은 이가 왕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지만 십악(十惡)을 저지른 악역중생도 임종 때 간절한 마음으로 참회하면서 아미타불 명호를 염송하면 설령 열 번이나 아니 단 한 번만 부르고 숨이 끊어지더라도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 왕생할 수 있으므로 ‘만 사람이 닦으면 만 사람 모두가 정토에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생하기만 하면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미묘한 법문을 들어 단번에 불퇴전의 지위를 증득하며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을지라도 성인의 경지에 오르게 되는 것이므로 ‘다만 아미타불만 뵙게 되면 어찌 깨치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느냐?’고 한 것이다.


세 번째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만 있고 염불공덕이 없다면

열사람 중에 아홉은 미끄러지나니

중음의 경계가 눈앞에 나타나면,

얼떨결에 그를 그만 따라가고 만다.

有禪無淨土 十人九蹉路 陰境若現前 瞥爾隨他去


이 게송은 비록 참선으로 확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사람일지라도 견혹(見惑)과 사혹(思惑)을 말끔히 끊어버리기가 쉽지 않아서 여전히 생사윤회를 피하기 어려우므로 ‘열 사람 중 아홉은 미끄러지나니’라고 하며, 중음의 경계란 중음신(中陰神)의 경계인데 임종 때에 금생 및 과거 전생의 모든 선악의 업력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장면을 뜻한다. 이때에는 눈 깜빡할 사이에 그 중 가장 맹렬한 선악의 업력에 이끌리는 것이므로 ‘얼떨결에 그를 그만 따라가고 만다.’고 한 것이다.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다.


참선수행도 없고 염불공덕마저 없으면

지옥의 쇠 침대와 구리 기둥을 껴안고서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할 사람 하나도 없으리.

無禪無淨土 鐵狀倂銅柱 萬劫與千生 沒箇人依怙


이 게송은 수행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명심견성의 참선 공부도 안하고 염불로 극락왕생의 발원도 없이 죄악을 짓는 일만 골몰하므로 그 업보를 피하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질까 염려하는 경고인 셈이다. 이런 자는 죄악의 과보를 피할 길 없고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는데 불에 달군 쇠 침대 위에서 이글거리는 구리기둥을 껴안는 고통을 받고 만겁천생이 지난다 해도 구해줄 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만겁이 지나고 천생을 거치도록 믿고 의지 할 이 하나도 없으리’ 라고 한 것이다.


말법시대에 태어난 우리들은 근기가 하열하고 업장이 막중하여 이끌어 줄 선지식조차 드문데 이 정토왕생의 염불마저 하지 않는다면 해탈할 길이 없게 될 것이다. 이를 가엾이 여기어 영명선사는 이 사료간으로 일깨운 것이다. 이는 정말로 나루터를 잃은 길손에게 더없이 보배로운 뗏목이요, 험난한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이다. 깊이 궁리하고 음미하면서 이 생애에 틀림없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 이 혼탁한 사바세계에서 더 이상 여러 생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