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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수행자료/ 왕생집

108. ●왕용서국학(王龍舒國學)

108. ●왕용서국학(王龍舒國學)

송(宋)나라 국학(國學) 왕일휴(王日休)는 용서(龍舒) 사람이다 성품(性品)이 단정(端正)하고 간결(簡潔)하여 경사(經史)에 박식(博識)하였으나 하루 아침에 그것들을 내버리고는 이것들은 모두 업습(業習)일 뿐 구경(究竟)의 법(法)은 아니다나는 이제 서방정토극락세계(西方淨土極樂世界)로 돌아가려 한다 하였다 이로부터 염불(念佛)로써 정진(精進)하여 나이 60세(歲)에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飮食)을 먹었으며 하루에 천배(千拜)의 절을 하고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용서정토문(龍舒淨土文)을 지어 세상(世上)에 권(勸)하기도 하였다 죽기 3일전(日前)에 두루 친척(親戚)이나 아는 이들에게 고별(告別)하며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것이라는 말을 하였다 그때가 되어 독서(讀書)를 마치고 평소(平素)와 다름없이 예념(禮念)하더니 문득 큰소리로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부르면서 부처님이 오셔서 나를 맞이하신다하고는 나무처럼 반듯이 서서 죽었다 이웃사람의 꿈에 푸른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용서(龍舒) 왕일휴(王日休)공(公)을 이끌고 서(西)쪽 을 향(向)하여 가는 꿈을 꾸었다 이로부터 집집마다 그를 숭앙(崇仰)하게 되었다


찬(贊)

용서(龍舒)는 서방(西方)을 권발(勸發)하기에 가장 간절(懇切)하였던 사람이라고 표현(表現)하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 심지어 임종시(臨終時)에 수승(殊勝)하고 기이(奇異)한 상서(祥瑞)는 천고(千古)에 빛나는 것이었다.

아 ! 어찌 정토(淨土)의 성현(聖賢)이 세간(世間)에 내려와 중생(衆生)을 교화(敎化)했던 분이 아니겠는가.


109. ●강공망 사간(江公望 司諫)

송(宋) 강공망(江公望)은 조대(釣臺)사람이다 관직(官職)이 간의(諫議)에 이르렀으나 거친 음식(飮食)을 먹으며 청정(淸淨)히 수행(修行)하였다 보리문(菩提門)과 염불방편문<念佛方便文>을 지어 세상(世上)을 깨우쳤다 어려서 죽은 아들이 있었는데 꿈에 나타나 아버지께서는 도(道)를 닦아 이미 공업(功業)이 성취(成就)되었습니다 명부(冥府)에 금자(金字)의 편액(楄額)이 걸려있는데 엄주부(嚴州府) 강공방(江公望)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하였다


간관(諫官)의 책임(責任)을 맡은 지위(地位)에 있었으나 마음은 불도(佛道)를 사모(思慕)하여 몸소 수행(修行)하여 마음에 애욕(愛慾)을 없이하였다 동정(動靜)에 불법(佛法)을 어기지 않았고 어묵(語黙)에 종풍(宗風)과 계합(契合)하여 명리(名利)는 이미 염부(閻浮)를 벗어났고 몸과 마음은 정토(淨土)로 돌아갔다 선화(宣和) 말에는 광덕군(廣德軍)이 되었다가 어느 날 병(病) 없이 서(西)쪽을 향(向)하여 단정(端正)히 앉아 죽었다


찬(贊) 

어떤 이는 편액(楄額)에 이름이 적혀있었다는 사실(事實)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아 ! 영명(永明)은 명부(冥府)에 상(像)을 그려 놓았던 일이 있었고 탑(塔)을 돌던 스님이 이것을 확인(確認)하였다 어찌 유독(唯獨) 강공망(江公望)에 대해서만 의심(疑心)하랴


110. ●갈번대부(葛繁大夫)

송(宋) 갈번(葛繁)은 징강(澄江) 사람이다 젊어서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조산(朝散)에 이르렀다 공서(公暑)나사가(私家)에 반드시 정실(淨室)을 짓고 불상(佛像)을 모셨다 일찍이 방에 들어가 예송(禮誦)하고 있노라니 사리(舍利)가 허공(虛空)에서 떨어 진적도 있었고 평소 정업(淨業)을 널리 세상(世上) 사람들에게 권(勸)하여 많은 감화(感化)를 받기도하였다 어떤 스님이 정중(定中)에서 정토(淨土)를 여행(旅行)하다 갈번(葛緊)이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나중에 병(病)없이 서(西)쪽을 향(向)해 단정(端正)히 앉아죽었다


찬(贊) 

사대부(士大夫)로서 부처님을 믿었던 자(者)는 그런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세상(世上)의 조롱(嘲弄)을 피(避)해 밖으로는 형색(形色)을 갖춰가면서 공서(公署)에 부처님을 모시는 일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갈번(葛繁) 군(君)은 그 독실(篤實)한 신앙(信仰)을 회피(回避)하지 않은 분이다 앉아서 숨을 거두고 왕생(往生)했던 사실(事實)은 참으로 우연(偶然)한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