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주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라
그리스 시절이나 로마 때나 또는 동양의 고대라든가 바라문교나
모두 일체만유(一切萬有), 즉 모든 것에 다 신이 들어 있고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시대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모두 하나의 생명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보리방편문은 우주의 모든 역사를 하나의 체계로 확실하게 묶은 것입니다. 따라서 계속 읽어보고 생각해볼수록 하나의 아미타 부처님으로 통일돼 갑니다.
우리 마음이 산란한 것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 시비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즉, 우주의 도리가 하나의 진리로 통일이 안 될 때는 마음이 산란한 것입니다. 중생은 미처 못 보지만 공자나 석가나 예수 같은 성자는 분명히 하나로 통일시켜서 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마음을 모아 계속 집중하면 부처님이라는 하나의 것으로 통일되어 갑니다.
따라서 우주라는 것은 하나님뿐인 것이고, 부처님뿐인 것입니다.
우리 중생은 그걸 못 보지만 성자는 항상 하나님하고 같이 살고 있으므로 예수도 “내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라고 합니다. 바이블을 보면 그렇게 항상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일반 중생들도 비록 자기가 판단할 때라도 ‘부처님 차원에서는 어떻게 보일 것인가?’라는 생각을 가지고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파스칼(Blaise Pascal,1623~1662) 같은 철학자는 우리 불교 철학과 굉장히 비슷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파스칼의 철학서를 보면 마치 불경(佛經)을 보는 기분입니다. 파스칼의 말 가운데 “영원의 상(像) 위에서 현실을 관찰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유한한 인간의 차원이 아니라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보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마음은 순간순간 영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현실을 관찰하면 결국 너와 나의 구분이 없어집니다. 우리가 땅에 붙어서 주변을 보면 시야가 좁습니다. 그래도 산중턱에 올라가면 시야가 더 넓어지고 산봉우리까지 올라가면 사방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이 영원의 차원, 부처님의 차원, 하나님의 차원에서는 모두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 만물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처럼 공해가 심할 때는 내가 편하자고 아무데나 휴지를 버릴 수 없는 것이고, 환경을 오염시킬 수가 없습니다. 모두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산도 살아 있고, 물도 살아 있고, 나무도 살아 있고 다 살아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겉만 봅니다. 나무가 있으면 목신(木神)이 있고, 산이 있으면 산신(山神)이 있고, 물이 있으면 용왕(龍王)이 있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나무나 산이나 물이나 겉만 보니까 내면의 생명은 보지 못합니다.
풍수지리학을 공부하는 분들은 산이나 물을 보면서도 그 속에 용이 꿈틀대며 살아 있다고 봅니다. 그리스 시절이나 로마 때나 또는 동양의 고대라든가 바라문교(婆羅門敎, Brahmanism)나 모두 일체만유(一切萬有), 즉 모든 것에 다 신이 들어 있고 모두가 다 하나의 생명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시대나 지역에 따라 조금씩 표현만 다를 뿐이지 사실은 모두 하나의 생명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마음을 열고 보면 공자나 예수나 노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 같은 분들은 다 같은 내용을 말했습니다.
과거에는 서로 문호를 세우고 벽을 높이 세우고 서로 싸웠지만 지금 세상은 그렇게 하면 나도 괴롭고 우리 민족도 괴롭고 서로의 아집에 갇혀 마음도 항상 괴롭습니다.
타성일편(打成一片)이라는 말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주를 하나의 도리로 통일시켜버린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론도 있고 저런 논리도 있지만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로 통일시키면 마음이 대단히 편한 것입니다. 화두에는 ‘무(無)’자가 있고 ‘이뭣고’가 있고 다양하게 많이 있지만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기 위한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어버리면 우리 마음이 텅 비어서 시원스레 가벼워집니다. 하나의 체계로 묶은 다음에 진정 하나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것입니다.
보리방편문을 잘 외우셔야 합니다. 한 번 외면 한 번 왼 만큼 ‘내 마음이 부처구나! 내 마음 속에는 이와 같이 무량의 공덕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조그맣고 답답한 ‘나’라는 것에 옹색하게 폐쇄된 마음이 해방됩니다.
결국 불교는 자성(自性) 해탈(解脫)입니다. 해탈은 자기 마음을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물질에 얽매이고 자기에게 얽매이고 특정 관념에 얽매이고, 그러한 것을 다 파헤치고서 시원하게 풀어버리는 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진리 속에 참다운 해방이 있습니다. 물질의 해방은 참다운 해방이 아닙니다. 돈이 많아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해방은 참다운 해방이 못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도리어 물질에 얽매이는 것입니다. 다 털어버려야 합니다. 물질도 관념도 마음도 결국 다 털어 버려야만 참다운 행복과 해탈이 있습니다.
타성일편이라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천지우주는 오직 마음뿐이다, 부처뿐이다, 하나의 진리로 다 되어 있다, 이런 생각을 끊이지 않게 해야 합니다.
이런 것은 모두 부처님의 말씀이고, 무수한 도인들이 다 증명하신 말씀입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불교는 진실불허(眞實不許)입니다. 거짓이 있을 리가 없고, 또 무수한 성자들이 증명했던 일입니다. 확신을 갖고 믿으면 그로 인해 우리의 마음이 그만큼 승화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부처님뿐이다.’, ‘내 본생명은 한도 끝도 없다.’, ‘내 본생명은 모든 기능을 갖춘다.’ 이렇게 한 번 정말로 믿으면 그 마음이 우리를 정화시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이론으로는 알았다 하더라도 이론으로만 알면 실감이 잘 나지 않습니다. 실존적으로 우주의 생명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출가 수행자가 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이렇게 확신을 갖고 믿으면서 그냥 부처가 되어버리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생들은 금생에 나와서 잘못 듣고 잘못 배우고 잘못 생각한 것들이 잠재의식에 꽉 차 있습니다. ‘모든 것은 물질뿐이고, 또 그것들을 물리적으로 풀이할 수 있고, 현상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 말씀으로는 모두가 하나의 진리라고 하지만, 이제까지 자기가 배운 지식과 고정관념이 깨달음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성자의 말이나 글을 많이 듣고 읽는다 하더라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 보니 확실하게 못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꾸만 읽어보면 기존의 지식과 고정관념들이 하나씩 깨집니다. 그렇게 차근차근 다 깨부수어 완전히 법문 내용하고 하나가 되어버리면 그때는 깨닫습니다. 진실하게 공부해가다 보면 확 트여서 인후개통(咽喉開通) 획감로미(獲甘露味)입니다. 목구멍이 시원하게 확 트여서 지극히 달고 상쾌한 맛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물론 도통하기까지는 아직 길이 멀지만 우선 자기 몸이나 마음이 확 트여서 막힘도 얽힘도 없게 됩니다.
처음에 공부를 하면 답답하고 꽉꽉 막히는 것이 느껴집니다만 공부가 진전될수록 머리카락부터서 발끝까지 툭 트여 옵니다. 그런 관념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런 관념만 가지고도 가슴이 시원하고 머리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한 것입니다. 그때는 머리가 무거워지는 일도 없고 밤새도록 눈을 뜨고 있어도 눈이 피로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생명이란 그렇게 쓰면 쓸수록 더욱 무시무시한 힘을 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 쓰면 차근차근 무디어져서 물질에 딱 얽매여 버립니다. 물질에 얽매이면 얽매일수록 이 몸뚱이는 무거워집니다. 천근만근 무거워지니 애지중지 아끼고 치장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닦아서 마음이 맑아지면 몸도 차근차근 가벼워 옵니다. 나중에는 이 몸뚱이가 어디에 있는지 없는지 분간조차 할 수 없습니다. 마치 공중에 둥둥 뜬 기분이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번뇌의 뿌리가 뽑히면 몸이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에나 혹은 위대한 도인들은 비행자재(飛行自在)라고 마음대로 날아다닌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단순히 신화로만 들을 것이 아닙니다. 별것도 아닌 원자력 가지고도 별별 재주와 위력을 다 부리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자력보다도 더 고성능의 것이 무한성능의 것이 불성인데 고작 날아다니는 것을 못할 리가 없습니다. 무한 성능인 불성과 하나가 되었을 때는 못할 것이 없는 것이고 이것이 부처님의 지혜입니다.
다만 갑작스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금생에 나와서 잘못 배우고 잘못 듣고 잘못 생각한 것들로 꽉 막혀 있기 때문에 하나하나 가닥을 풀어야 합니다. 나의 지식과 고정관념을 하나하나 깨부수는 단계, 이것이 곧 수행의 단계인 것이고, 수도(修道)의 위차(位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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